출처: https://www.fmkorea.com/7077303611
원하는 사회적 존중을 유지하려면 의무가 부과된다. 잉글랜드 왕 리처드는 병사들의 위험을 공유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프랑스 측 역사가인 브르타뉴의 기욤(William the Breton)처럼 적대적이었던 목격자도 리처드를 그런 시각으로 바라보았다. 포위된 수비대를 구출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쓴 잉글랜드 왕의 결정을 묘사하는 13줄의 라틴어 구절에서 기욤은 그가 이익(utilitas)보다 명예(honor)를 선호한다고 세 번 언급하고 그를 ‘고귀한 자’라고 두 번, ‘사자’라고 두 번 불렀다. 그러나 이것은 패배한 아크레 수비대의 일반 병사들이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다. 호버든의 로저(Roger of Howden)와 캔터베리의 저베이스(Gervase of Canterbury)와 같은 기독교 측 역사가들도 리처드의 자비의 범위에 대해 심각한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기사도는 신분에 따른 인간애의 한 형태였다. 이러한 가치관에 따라 신분이 낮은 죄수는 학살하고 신분이 높은 죄수는 살려주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리처드는 한두 가지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 규범에 따라 살았다. 예를 들어 노팅엄 포위 공격에서 그는 서전트들은 교수형에 처했지만 기사는 처형하지 않았다. 아크레를 점령한 후 그는 고위 무슬림들을 살려주었다. 의심할 여지없이 여기에는 용병적인 계산의 요소가 있었지만, 그것은 그가 곧 잘 지낼 다른 고위 무슬림들이 이해하고 높이 평가하는 일련의 우선 순위였다. 진지한 기독교인들에게는 의심스러울 정도로 잘 지내는 것처럼 보였다.
비평가들은 리처드를 돈에 탐욕스럽다고 묘사했지만, 아무도 그가 돈을 쌓아두었다고 비난하지 않았다. 트루아 퐁텐느의 오브리(Aubri des Trois Fontaines)는 다음과 같이 썼다. ‘무술에 힘썼던 만큼 선물도 아낌없이 베풀었다고 한다.’(As he was strenuous in arms so he is said to have been lavish in gifts) 리처드 피츠나이겔(Richard FitzNigel)이 <국고의 대화(Dialogue of the Exchequer)> 서문에서 말했듯이, 왕의 영광은 보물을 쌓아두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써야 하는 대로 쓰는 데 있다. 리처드는 아낌없이 소비하고 기부했다.
호버든의 로저에 따르면, 1191년 2월에 그는 많은 사람들이 그 달에 그가 기부한 것만큼 1년 동안 기부한 전임자가 한 명도 없었다고 말할 정도로 아낌없이 선물을 나눠주었다고 한다. 13세기 중엽 기독교 동방에 대해 글을 쓴 한 작가는 리처드의 위대함과 재능으로 인해 십자군 전쟁 당시 300명의 맘루크가 그의 군대에 들어갔으며 그가 이 땅을 떠날 때 120명을 해외로 데리고 갔다고 기록할 정도로 명성이 높았다고 전한다. 그의 조카 헨리 3세는 웨스트민스터 궁전의 접견실 문 위에 다음과 같은 문구를 그렸다. ‘가진 것을 베풀지 않는 자는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할 것이다.’ 어떤 왕도 리처드보다 더 많이 적용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1189년 스코틀랜드의 윌리엄 왕에게 베푼 그의 관대함은 1193-4년에 큰 수확으로 돌아왔다. 동시대 독일의 시인 발터 폰 데어 보겔바이데(Walther von der Vogelweide)의 의견에 따르면, 리처드의 신민들이 기꺼이 왕의 몸값을 올려서 내서 그를 풀어주고 가장 필요한 순간에 가장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리처드의 관대함 덕분이었다고 한다.
리처드가 특히 자비로운 것으로 인식된 부분은 존을 대하는 부분이었다. <윌리엄 마셜의 역사(History of William the Marshal)>의 한 장면에서 우리는 존이 형의 용서를 간절히 구하고 있지만 왕의 면전으로 들어가는 것에 대해 긴장하는 모습을 본다. 그는 다음과 같은 말로 안심시킨다. ‘왕은 정직하고 자비로우시며 당신보다 더 친절하게 대해 주실 것입니다’라는 말이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가장 중요한 것은 적대적인 목격자의 말이다. 브르타뉴의 기욤에 따르면, 리처드는 존의 불쾌한 행동을 싫어했지만(기욤은 에브뢰에 대한 위험한 기습 공격과 그로 인한 학살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는 그의 형제였기 때문에 형제로서의 사랑을 그에게서 보류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리처드의 관대함은 그의 형제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자신을 실망시켰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에 대한 관대한 대우로까지 이어지지는 않았다. 코제샬의 랄프(Ralph of Coggeshall)는 왕의 분노에 찬 표정을 기억하고 있었다. 1196년, 나중에 마그나 카르타에 의해 설립된 25인 위원회의 일원이 될 만큼 중요한 인물이 된 로스의 로베르는 중요한 프랑스 포로의 신병을 맡게 되었다. 로베르가 맡긴 서전트의 묵인 하에 포로가 탈출하자 리처드는 로베르를 투옥하고 1,200마르크라는 거액의 벌금을 부과했다. 주군을 배신했다는 판결을 받은 서전트는 교수형에 처해졌다. 1195-6회계연도에는 링컨셔의 영주이자 이 지역의 가장 저명한 지주 중 한 명인 카임의 사이먼이 선박과 상인들이 세인트 보톨프 박람회를 떠나도록 허용했다는 이유로 최소 1,000마르크의 벌금을 부과 받았는데, 리처드는 이를 프랑스의 필리프 왕과의 전쟁의 일환으로 내린 금수 조치의 심각한 위반으로 간주했다.
[참고 문헌]
John Gillingham, 『Richard I』, Yale University Press, 1999.
https://www.google.co.kr/books/edition/_/L8AJCAAAQBAJ?hl=ko&sa=X&ved=2ahUKEwjw6rPAy7SDAxWNQ94KHZFVDGgQre8FegQIFBAG
무모한 기사도 아니고 자신의 왕국을 등한시한 왕도 아닌 리처드 1세(재위 : 1189-1199)는 실제로는 능숙하고 사무적인 통치자였다. 사자심왕 리처드 1세의 통치에 대한 고전적인 설명을 완전히 재작성한 이 책에서 수세기에 걸쳐 왕의 명성이 변동하는 이유를 면밀히 조사하고 통치의 중요성에 대한 설득력 있는 새로운 해석을 제공한다.
첫댓글 내정은 모친한테 맡기고 영국 밖에서 전쟁만 열심히 한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구나 통치에도 능력이 있었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