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https://www.fmkorea.com/7085800319
1906년 윈스턴 코와 소속팀 아틀레틱 클루브 바라카스.
때는 1906년이었다. 아르헨티나에서 축구는 아직 아마추어 시대였으며 남미에 도착한 영국인들이 거의 모든 팀의 스쿼드를 구성하고 있었다. 바라카스 아틀레틱에는 호세 라포리아라는 훌륭한 1선발 골키퍼가 있었다. 하지만 이 골키퍼는 당시 아르헨티나 최고의 구단들 중 하나였던 알룸나이로 이적했다.
외팔 골키퍼 윈스턴 코의 이야기
그러나 공교롭게도, 라포리아는 팀의 주전 골키퍼였을 뿐만 아니라 팀 내 유일한 골키퍼이기도 했다. 문제는 그의 이적 후 며칠 만에 바라카스 아틀레틱이 새로운 경기를 앞두고 있었기 때문에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아 대체 선수를 찾는 데 문제가 발생했다. 이때 팀의 라이트백이었던 윈스턴 코가 자원했다. 하지만 이 아일랜드인은 선천적으로 상대의 슈팅을 막아내는 데 매우 어려움을 겪는 특이한 점이 있었다. 팔이 하나 없는 것이었다. "원한다면 내가 도움의 손길을 건네줄게, 하지만 양 쪽 다는 못주는 거 알지?"라고 그는 팀 동료들에게 농담을 섞으며 재치있게 말했다.
놀랍게도, 바라카스 아틀레틱은 다음 경기에서 정말 이 외팔 골키퍼와 함께 경기장에 나섰다. 코의 팀은 에스투디안테스 데 부에노스아이레스에 2-1이라는 근소한 점수 차로 패했지만, 이 소식을 보도한 몇몇 신문들은 골키퍼 윈스턴 코의 뛰어난 활약을 집중 조명했다. 경기장을 찾은 관중들은 그의 선방에 박수를 보냈고, 이 이야기는 점차 입소문으로 퍼졌다.
윈스턴 코는 두 경기 더 골문을 지켰다. 하지만 두 번 모두 패배를 경험했고, 이번에는 훨씬 더 무거운 패배(각각 11-0과 5-0)를 당했다. 그러나 언론은 그를 비난하기는커녕 그가 아니었다면 점수 차가 훨씬 더 굴욕적이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렇게 외팔 골키퍼 코의 모험은 막을 내렸다. 그의 극복 능력과 결단력에 대한 이야기는 시간을 뛰어넘어 오늘날까지도 우리가 기억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아일랜드 출신인 그는 본래 포지션인 라이트백으로 돌아왔지만, 신체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골문을 지켰던 그의 활약은 당당히 기억되고 있다. 노력한 자에게 기회가 온다는 말이 있듯이 말이다.
«필요하다면 내 손을 건네줄게, 하지만 한 쪽은 못 주는 거 알지? »
알룸나이 아틀레틱 클루브
우리는 처음에 언급한 팀인 알룸나이 아틀레틱 클루브를 언급하지 않고는 이 이야기를 끝낼 수 없다.
이 부에노스아이레스 팀은 의심할 여지 없이 아마추어 시대 아르헨티나 최고의 팀이었다. 실제로, 그들은 창설부터 1911년에 해체될 때까지 10번의 우승을 차지했다. 공식적으로는 1898년에 창설되었지만, 1893년부터 스포츠 활동을 시작했었다. 이 구단은 부에노스아이레스 영어 고등학교 학생들에 의해 창설되었다. (따라서 구단 이름도 Alumni {동창생} 그렇게 지어진 것이다).
알룸나이의 사례 말고 독특한 이야기가 하나 또 있다. 코린치안 FC라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또 다른 아마추어 구단이기도 한 영국 팀이 있었다. 이들의 유니폼은 흰색이었는데, 무려 레알 마드리드가 자신들의 색깔을 선정하는 데 있어 여기서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https://futbolretro.es/winston-coe-el-portero-manc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