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백50만명을 넘어선 신용불량자. 그리고 이들로부터 빚을 받아내려는 채권 추심원. 쫓고 쫓기는 숨바꼭질은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되고 있다. 카드의 ‘위험성’을 간과한 안이한 접근이 생활의 또 다른 족쇄가 되고 있는 현장을 기자가 직접 체험했다.
지난 16일 서울 마포구 도화동 ○○신용카드사의 신촌 채권팀. 이곳에는 73명의 채권추심원이 한 명당 평균 100여명의 연체자들과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초보 추심원’인 기자에게 배정된 연체자는 모두 8명. 첫 고객은 4백22만원의 빚을 져 지난 9월 대환대출로 전환했다가 이를 다시 연체한 정모씨(45·자영업). 먼저 정씨의 집으로 전화를 거니 “고객사정으로 통화할 수 없다”는 메시지가 들려왔다. 정씨의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신호는 갔지만 끊기기를 반복. 옆에 있던 추심원은 “여기(채권팀) 전화번호가 ‘716’으로 시작하는데 연체자들이 발신자 번호 표시에 ‘716’이 뜨면 아예 안받는다”고 귀띔해줬다. 빚독촉 전화인줄 알고 일부러 피한다는 얘기다. 6번째 전화를 걸었을 때 마침내 목소리가 들렸다. 반가운 마음에 “여보세요. 여기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고함소리가 들렸다. “지금 꼬장(억지) 부리는 거야? 다 이유가 있으니까 전화를 끊는거 아냐. 응.” 그리고는 다시 끊겼다.
2명은 아예 통화가 되지 않았다. “3개월 이상 장기연체로 넘어갈수록 속칭 ‘잠수’를 탑니다. 집 전화나 휴대폰을 아예 꺼놓거나 바꿔 버리죠. 심지어 이사가면서 집 주소는 전에 살던 집에 그대로 놔두기도 해요. 이런 사람들은 사실상 돈을 받아낼 방법이 없어요.”(채권팀 유상철 과장)
2명은 말붙일 새도 없이 “지금 초상집에 와서 통화할 수 없다” “나중에 전화하라”며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운좋게 통화가 된 4명은 한결같이 “어떻게든 갚으려고 한다. 하지만 지금 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고 말했다. 남편의 사업실패로 본인까지 신용불량자가 된 이모씨(28·주부)는 “신랑이 장사하는데 수금이 잘 안돼서 그러니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통사정했다. 연체자가 된 구구절절한 사연을 20분가량 털어놓은 서모씨(49·자영업)는 “지금 밥먹고 살 형편도 안된다. 전화비를 못내 집전화도 끊겼다. 5~6개월만 봐주면 어떻게든 해보겠다”고 말했다.
신용불량자 구제책이 발표될 때마다 도덕적해이(모럴해저드)에 대한 우려가 많지만, 서모씨처럼 절망적인 상황에서 희망의 끈을 놓지 않도록 도움이 필요한 경우도 적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후에는 연락이 되지 않는 연체자를 직접 찾아나섰다. 이른바 ‘카드깡’을 해 2천1백만원을 빚진 송모씨(49·여)는 서울 용산구의 한 동네에 살고 있었다. 비탈길을 오르는데 동행한 추심원은 불쑥 “이 동네는 연체밭”이라고 내뱉었다. 서너집 건너 한집꼴로 연체자들이 살고 있다는 뜻이다. 송씨의 집은 다닥다닥 붙은 다가구 주택의 지하 단칸방으로 문은 굳게 잠겨있었다. 2층에 사는 세입자에게 송씨의 거주 여부를 물으니 “한달 전쯤에 봤는데…”라는 대답뿐. 추심원은 “다행이다. 이곳에 사는 걸 확인했으니 그나마 희망이 있다”고 말했다.
다른 연체자 정모씨(35)의 집을 찾기 위해 정밀지도를 들고 40분 동안 주위를 맴돌았지만 결국 찾는 데 실패했다. 마침내 정씨가 가끔씩 들른다는 인근의 상가 사무실을 찾아갔다. 역시 헛걸음. 상가주인은 “수금나갔다”고 말했다.
“카드사 직원이 자주 찾아오기 때문에 주위 사람들이 때로는 신용불량자를 감싸주기도 한다”고 동행한 추심원은 말했다. 채권 회수는 밤에도 이어졌다. 현행법상 오전 8시부터 밤 9시까지 채권추심이 가능하다. 그나마 낮보다는 연체자를 만날 확률이 높기 때문에 방문은 밤에 많이 이뤄진다. 7백1만원을 연체한 임모씨(24·공익요원)는 이달까지 결제하지 않으면 신용불량자로 등록된다. 추심원 김경미씨(40·여)는 “지난번에도 직접 찾아와 메모까지 남겼는데 연락이 오지 않았다”면서 “내 아들과 비슷한 또래여서 어떻게든 도와주려고 하는데…”라며 안타까워했다. 8년째 추심원으로 일한다는 김씨는 “요즘처럼 회수가 힘든 때가 없다”고 했다. 골목길을 따라 한참 올라간 뒤에야 임씨의 집을 찾았다. 대학을 중퇴하고 채권추심원으로 일하고 있는 조성철씨(24)는 “그나마 예전에 한번 와봤던 곳이어서 찾을 수 있지 그렇지 않으면 밤에는 거의 찾을 수 없다”고 말했다. 초인종을 눌렀지만 임씨는 집에 없었다.
동갑의 나이에 한 쪽은 신용불량자로, 한 쪽은 채권추심원으로 조우(遭遇)할 뻔 한 순간은 ‘다행히’ 불발. 연락이 올지 안올지 모를 메모를 남기고 기자는 발길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