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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독서
<민수기의 말씀 6,22-27>
22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23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일러라.
‘너희는 이렇게 말하면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축복하여라.
24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 주시리라.
25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26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
27 그들이 이렇게 이스라엘 자손들 위로 나의 이름을 부르면, 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겠다.”
▥ 제2독서
<야고보서의 말씀 4,13-15>
사랑하는 여러분,
13 자 이제, “오늘이나 내일 어느 어느 고을에 가서 일 년 동안 그곳에서 지내며 장사를 하여 돈을 벌겠다.” 하고 말하는 여러분!
14 그렇지만 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생명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
15 도리어 여러분은 “주님께서 원하시면 우리가 살아서 이런저런 일을 할 것이다.” 하고 말해야 합니다.
✠ 복음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 12,35-40>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35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36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
37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38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
39 이것을 명심하여라.
도둑이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40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주님의 축복을 빕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복을 내리시고, 은혜를 베푸시고, 평화를 주실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주인의 귀환을 깨어 기다리는 종들이 복을 받는다는 말씀(루카 12,35-38)과 사람의 아들이 갑자기 오실 것임을 명심하라는 말씀(루카 12,39-40)으로 되어 있습니다.
사실 루카복음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당신의 교회를 위하여 남겨주신 최후의 행위는 ‘축복’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승천 장면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손을 드시어 그들에게 강복하셨다.
이렇게 강복하시며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셨다.”
(루카 24,50-51)
그렇습니다.
우리는 ‘축복받은 존재’입니다.
하느님의 생명과 자비를 입은 존재요,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을 입은 존재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당신 생명을 주시고, 당신 존재를 건네주셨습니다.
그러기에 비록 지금 어떤 처지에 있더라도 그 속에서 축복을 느끼는 이는 진정 복된 이입니다.
‘복’이란 그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께서 함께 계심’을 깨닫는 것입니다.
곧 지금도 우리와 ‘동행하시는 주님’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처럼 축복은 궁극적으로 하느님 존재 자체를 깨우쳐줍니다.
따라서 축복받은 사람이란 그 어떤 상황에서도 하느님의 존재와 자비에 깨어있는 사람입니다.
결국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에 깨어있는 만큼 꼭 그만큼 축복받은 사람이 됩니다.
성경에서 ‘축복’은 하느님의 놀라우신 자비를 말합니다.
축복을 뜻하는 히브리어 단어(바르크,브라크하)는 ‘어떤 것을 선사함’이요, ‘주어진 선물’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살아있는 생명체만이 축복을 받을 수 있고, 무생물은 하느님께 봉사하기 위해 축성될 뿐입니다.
‘축복’이란 말씀과 그 말씀의 신비를 통해 표현되고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곧 축복은 말씀입니다.
‘좋은 말’(εύλογία, benedictio), 곧 좋게 되기를 빌어주는 말이요, 좋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하는 말이요, ‘위하여’ 건네주는 말입니다.
'설'인 오늘 우리는 서로에게 축복을 빌어 줍니다.
사실 축복을 빌어주면 빌어주는 이에게 축복이 먼저 옵니다.
왜냐하면 축복을 비는 행위는 이미 ‘축복을 비는 축복’을 입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주 간단하게 이렇게 ‘축복기도’를 해 줄 수 있습니다.
"주님, 그를 축복해주십시오.
당신의 축복이 실현되도록 그가 응답하게 하소서!
저도 그를 축복합니다."
참 묘한 것은 상대를 축복해주는 순간, 바로 그 순간, 변화의 영이신 성령께서는 이미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분께서 우리 안에 ‘위하는 마음’(호의, 선의)을 북돋으십니다.
이처럼 이 소박한 기도는 우리에게 당신의 권능에 응답할 수 있는 장을 열어 줍니다.
그리하여 우리 안에 자비가 흘러들게 하고, 그분 존재를 건네받게 합니다.
다시 한 번 축복을 빕니다.
무엇보다도 ‘하느님을 받아 누리는’ 축복의 한해 되길 빕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그대를 통하여 세상의 모든 이가 복을 받을 것입니다.”
(창세 12,3)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설을 맞이하여 축복을 빕니다.
용솟음치는 ‘축복’이 먼 하늘로부터 무수한 시간을 달려와
설이라는 고귀한 선물이 되었습니다.
오늘 베푸신 ‘축복’이 날마다 온몸에 사랑의 지문을 새겨 주고 가슴 속을 따뜻하게 지펴 줄 것입니다.
꺼지지도 식지도 않는 변함없는 보살핌으로 감싸며,
멈추지도 지치지도 않는 줄기찬 사랑을 퍼부어 줄 것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정직한 삶의 반려자가 되어 주고,
하는 일마다 전폭적인 사랑과 신뢰로 지지하고 성원해 줄 것입니다.
혹 어려움이 있더라도, 힘들 때가 있더라도,
늘 다정한 벗이 되어 주고 사랑을 강화시켜 주며
올 한해를 사는 힘과 용기의 샘이 되어주실 것입니다.
저희는 지금 말할 수 없이 소중한 선물인 '축복'을 건네주신 아버지께 감사드리며
이 축복을 받은 이들이 한 해 내내 참된 행복 안에 머무르고
또한 이웃에게 사랑과 행복을 나누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사랑이신 아버지께서는 기꺼이 저희의 소원을 들어 주실 것입니다.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의 묵상글
설날입니다.
여러분은 올해 어떤 계획과 꿈을 가지고 있습니까?
어떤 축복을 바라십니까?
그 계획과 꿈이 성취되기를 저도 기원합니다.
다만, "하느님께서 원하신다면..."(야고 4,15)이라고 덧붙이고 싶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청하는 축복이 왜 필요한지 생각해 봐야 하겠습니다.
무턱대고 복을 내려달라고 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가령, "올해는 제가 로또에 당첨되게 해 주십시오." 하고 빈다면, 하느님께서는 "그래 당첨되면 그 돈으로 뭘 하려고?" 하고 물으실 겁니다.
어떻게 답하시겠습니까?
하느님께서 "그래 복 받을끼여..." 하고 흐뭇해 하실 답을 하셔야겠지요?
로또 당첨되면요. 집도 사고 자동차도 사고 남들 다 가는 해외여행도 한번 원 없이 가보려구요... (엄마 버전)
우리 아빠 사업이 힘든데 좀 보태주고 엄마 예쁜 옷이라도 한벌 사드리고 싶어요. 할머니 보약도 한재 사드리구요...(딸 버전)
나 때문에 고생하는 아내 좀 편하게 살도록 만들어 주고 싶구요. 우리 아이들 남부럽지 않게 다 해주고 싶어요... (아빠 버전)
우리 아들 며느리 빚지고 살지 않게 도와주고 싶고 손주들 대학갈 때까지 모든 학비 다 대어주고 싶어요... (할머니 버전)
저는 사실 로또 당첨의 복을 구하지도 않지만, 행여 된다면 과연 그 돈을 어떻게 사용하는 것이 최선일지 생각해 보지 않았어요.
평소에 내가 어떤 맘으로 살고 있느냐에 달려 있지 않을까요?
저는 아마도 기도하며 주님만 섬기고 살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작고 소박한 집을 마련하여 봉헌하고 싶어요.
내가 하느님 보시기에 합당한 축복을 청한다면 그분은 대견해 하시면서 들어주시리라 믿어요.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시듯, 하느님은 혼인잔치에 갔다가 늦게 돌아오는 주인을 밥도 먹지 않고 기다리고 집안 청소까지 깨끗하게 해놓은 대견한 종에게 직접 상을 차려주시고 시중을 들어주시는 주인처럼 그렇게 나를 축복하실 겁니다.(루카 12,37)
사실 대부분의 종들은 주인이 없으니 내 세상이라 생각하고 제멋대로 먹고마시다가 곯아 떨어져 자고 있겠지요.
그분이 직접 내 밥상을 차려주시고 내 시중을 들어주시다니요!
이렇게 황공할 때가 어디 있을까요!
우리는 보통 이렇게 생각하지요.
“저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루카 12,35) 있습니다.
오시는 주님이 문을 두드리기도 전에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12,36) 말입니다.
"주님, 제가 바로 등불입니다.
제가 이처럼 활활 타오르며 빛과 열기를 내고 있으니, 멀리서 절 보시거든 길 헤매지 마시고 돌아서 오지 마시고 지체하지 마시고 제게 곧장 오소서."
그런데 놀랍게도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니다.
내가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다.
내가 곧 등불이다.
네가 멀리서 날 보거든 헤매지 않고 돌아서 오지 않고 지체하지 않고 오길 기다리고 있다.
네가 문에 도착하기도 전에 문을 활짝 열고 맞이하려 노심초사 기다리고 있다.”
놀랍지 않습니까?
주님께서는 우리가 당신께 다가가기도 전에, 또 축복을 청하기도 전에, 먼저 우리를 향해 달려오시고 우리에게 축복을 주시고자 하십니다.
그러니 우리 마음만 주님께로 향한다면 우리가 바라는 것보다 휠씬 더 큰 축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저는 올해 이렇게 축복을 청하고 싶습니다.
하느님,
올해는 제가 다른 사람들에게 더 기쁨과 희망을 주는 사람이 되도록 축복해 주십시오.
하느님,
올해는 제가 더 건강하여 다른 사람들의 손과 발이 될 수 있도록 축복해 주십시오.
하느님,
올해는 저에게 재물의 복도 좀 내려주십시오.
그리하여 주위에 어려운 이웃들에게 작은 힘이라도 되고 싶습니다.
하느님,
올해는 제가 하느님 말씀을 더 깊이 깨달을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하느님,
올해는 저에게 치유의 은사를 좀 내려주시어 영육간에 아파하는 영혼들에게 힘이 되도록 축복하소서.
벗님 여러분은 어떤 축복을 청하고 싶습니까?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 보시기에 합당하도록 다른 영혼들을 위한 축복을 청하십시오.
그분께서는 너무도 대견해 하시면서 여러분의 청을 기꺼이 들어주실 뿐만 아니라, 여러분을 위해서도 손수 더 큰 선물을 내려 주실 것이라 확신합니다.
아무렴 그렇고말고요.
그래서 아론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축복하였듯이, 저도 오늘 마음을 다해 여러분의 머리 위에 손을 펼치고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을 축복하시고 지켜 주시기를 비나이다.
주님께서 여러분을 비추시어 은혜 베푸시길 비나이다.
주님께서 여러분을 강복하시고 평화 주시기를 비나이다.“
(민수 6,24-26)
샬롬. 샬롬. 샬롬. 샬롬.
아멘.
그대로 이루어지소서.
그대로 이루어지소서.
벗님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 작은형제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축복받고 축복하는 올해>
임인년 새해가 밝았고 새날이 왔습니다.
물리적으로는 이렇게 새해와 새날이 왔지만 나이를 먹어가면서 새해와 새날이 오고 명절이 되어도 무덤덤합니다.
그것은 저뿐이 아니라 나이 드신 분들 대부분이 그럴 텐데, 많이 살아본 결과 새해에도 새로울 것이 없다는 것을 알고 그래서 새해에 대한 기대가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것은 코헬렛서가 얘기하듯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이 없으니 지금 있는 것은 전에 있었던 것이요 장차 있을 것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양력으로 작년 12월 31일과 신년 1월 1일을 맞이하며 저 개인적으로는 정말 무덤덤하게 한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했는데, 이번 설을 맞이해서도 이렇게 새해와 새날을 맞이해도 되는지 성찰해봤습니다.
우리는 새해와 새날을 어떻게 맞이해야 할까요?
우선 물리적으로 새로운 한해가 오고 새날이 밝은 것이 아니어야 할 것입니다.
새해와 새날은 시간이 흐르고 흘러 온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새해와 새날을 주신 것이라는 뜻입니다.
새해와 새날의 주인은 시간이 아니고 하느님이지요.
이렇게 새해와 새날을 하느님께서 주셨으면 우리는 새해를 어떻게 맞이하고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무덤덤하게 맞이해야겠습니까?
그래도 되겠습니까?
이 새해를 새로 태어난 손자처럼 맞이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새해가 주어진 것이 너무도 고맙고 놀라운 선물로 말입니다.
한번 최악의 경우를 가정해봅시다.
하루를 사는 것이 너무 고통스럽고 그래서 새날이 되어도 눈을 뜨지 않았으면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시한부 선고를 받고 너무도 통증이 심합니다.
그래도 더 살고 싶고 더 살아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너무도 행복하고 새날은 너무도 고맙고 감격스럽습니다.
그러므로 거듭 얘기하지만 새해와 새날은 달력이 바뀌는 새해와 새날이 아니고, 더 살고 싶은 새해 곧 생명의 새해가 선물로 주어진 새해요, 더 하고 싶은 일 곧 사랑의 새날이 선물로 주어진 새날이어야 하겠습니다.
게다가 하느님께서는 내게만 새해와 새날을 주시지 않고, 내가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는 사람에게도 새해와 새날을 주시고, 그래서 이 명절을 같이 지낼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이 명절에 같이 지낼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을 한번 상상해보십시오.
그런 명절은 기쁨이 아니라 오히려 슬픔일 것입니다.
그러니 사랑할 수 있는 새해가 주어진 것을 감사하는 것만큼이나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을 같이 주신 하느님께 감사해야겠습니다.
그것은 지금 미워하는 사람까지 포함하는 얘기입니다.
지금 미워하는 사람도 없는 것보다 있는 것이 좋지요.
지금 미워하는 사람이 올해 내가 사랑할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명절에 같이 지낼 수 있는 사랑하는 사람을 주심에 감사하는 우리는 이제 그렇지 못하고, 그럴 수 없는 분들을 생각하며 기도해야겠습니다.
이 명절에 너무 아픈 분들, 북에 가족을 두고 온 분들, 독거 노인이나 생이별을 하신 분들에게 주님께서 친히 복 주시기를 기도하면서 축복을 해야 할 것입니다.
만일 이분들을 기억하지 않고 기도하지 않는다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셨던 사랑을 올해 빼앗아 가실 겁니다.
아니, 하느님께서 빼앗으시기 전에 우리가 스스로 버린 것이니 사랑이 없는 한해가 될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모두 올해는 축복받는 올해, 축복하는 올해가 되고, 사랑받는 올해, 사랑하는 올해가 되시길 바라며 기도하는 오늘입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복을 빌어주는 사람>
구정 명절을 맞이하여 하느님의 복을 풍성히 받으시길 기원합니다.
설은 본디 신일(愼日)이라고 하여 ‘근신하고 조심하는 날’이라고 하였습니다.
한 해를 보내고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는 데에 근신하고 조심하는 마음이 우선적으로 요구되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루카 12,40)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날 전통적으로 조상님께 차례를 올리고 웃어른께 세배를 드리며 조상의 묘를 찾아 성묘합니다.
부모는 사랑하는 자녀에게 설빔을 해주고 할아버지 할머니께서는 큰절을 받고 세뱃돈을 주며 가정의 화목과 평화, 부와 안녕을 기원하였고 한 해를 살아갈 덕담을 해 주셨습니다.
덕담은 상대방이 잘 되기를 바라는 축원의 말입니다.
그리고 명절을 기다려온 것은 서로의 만남을 통해 친족애, 가족애를 돈독히 하고 새롭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코로나19로 인해 절제된 만남으로 서로를 배려하는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마음의 간절함만은 놓치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믿는 우리 만남의 중심에 사랑의 예수님을 모셔야 하겠습니다.
기회를 만들어 할수만 있다면, 덕담도 성경말씀으로 하면 살아있는 말씀의 능력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저는 설 명절에 하느님의 복을 풍성히 받으시길 기원하며 ‘통통,통통’ 복을 받으시라고 한 적이 있습니다.
1. 의사소통, 2. 운수대통, 3. 만사형통. 4. 쓰레기통입니다.
첫째는 의사소통입니다.
서로 의사소통을 잘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마음과 마음이 통해야 합니다.
부모, 형제 가족은 물론 이웃과도 통해야 합니다.
잘 통하면 아프지 않습니다.
그러나 통하지 않으면 아픕니다.
무엇보다 하느님과의 소통을 잘하시길 빕니다.
하느님과 잘 통하면 이웃과는 물론 모든 것이, 잘 통하게 됩니다.
기도는 잘 통하는 방법입니다.
둘째는 운수대통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열어주신 길에 장애가 없기를 기도합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통해서 이루고자 하는 뜻이 있습니다.
그 뜻이 풍성히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하느님의 연장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셋째는 만사형통입니다.
하느님께서 열어주신 길을 가는 데 있어서 하는 일마다 잘 되기를 소망합니다.
성경은 ‘하느님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되새기는 사람, 하는 일마다 잘 되리라’(시편 1,2-3)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가르침을 가슴에 새김으로써 하는 일마다 잘 되는 기쁨을 차지하시면 좋겠습니다.
가슴에 새기고 행동으로 옮길 때 열매를 얻게 됩니다.
넷째는 쓰레기통입니다.
아무 불평 없이, 아무 불만 없이 좋은 것이나 그렇지 않은 것이나 모든 것을 담고 품는 쓰레기통 같은 사람이 되시길 기원합니다.
마음이 넓어야 모든 것을 품을 수 있습니다.
속이 좁으면 감싸 안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마음을 간직하면 가능합니다.
여기에 '전화한통'을 덧붙입니다.
자주 인사하고, 먼저 안부 전하는 '전화 한 통'입니다.
‘주전자’입니다.
주저하지 말고 전화하여 자주 만나자!
코로나로 얼굴을 마주하지는 못하지만 자주 전화하여 사랑을 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전에는 세뱃돈과 설빔을 받는 기쁨이 있었는데 지금은 서로의 만남에 의미를 두고 고향을 찾게 됩니다.
‘명절 증후군’이라는 병이 생기기도 했지만, 고유명절은 그래도 가족의 유대관계를 확인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요즘은 고향을 찾기보다 여행이나 캠핑을 즐기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저는 어린 시절에 명절이 되면 도심으로 나가 있던 삼촌과 누나를 기다렸습니다.
명절에는 손에 선물꾸러미를 들고 오셨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용돈을 얻고 기뻐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선물이나 돈의 액수가 줄어들면 마음속으로는 서운하게 생각하였습니다.
그저 공짜로 받는 주제에 주는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감사하지 못했습니다.
처음에 크게 받으면 다음에 받을 때는 더 많이 받을 것이라는 기대가 생기게 되고 기대를 충족하지 못하면 받았으나 감사할 수 없으니 줄 때도 잘 줘야 하고 받을 때도 잘 받아야 하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축복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공짜로 언제든지 주십니다.
알맞게 주십니다.
그러나 내 잣대로 재고는 받았네, 못 받았네 하면서 투덜댑니다.
그러나 분명 주님께서는 각자에게 알맞은 선물을 주셨습니다.
지금 받은 것에 감사하면 감당할 수 있는 축복이 또 주어집니다.
따라서 우리는 언제나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지금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 복을 받는 길입니다.
명절의 의미는 바로 감사하는 생활을 일깨우는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고향을 방문하여 조상들을 기리며 차례를 지내고 부모형제, 친척과 어른들을 찾아뵙는 것은 감사드림의 한 표현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에게는 감사의 원천인 하느님께로 먼저 눈을 돌려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모두를 마련하시고 우리가 사용할 수 있도록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혈족만이 아니라 모든 이웃에게도 감사하는 마음을 지니고 살아야 합니다.
모두가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하느님의 작품이요, 사랑받는 존재이고 사랑을 받아야 할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독서 민수기(6,22-27)를 보면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 주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하며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을 빌면 주님께서 몸소 복을 내리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복을 받는 일은 먼저 복을 달라고 애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으로 복을 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을 달라고 하기 전에 이웃을 위해 주님의 이름으로 복을 베푸는 몫을 차지해야 하겠습니다.
바로 명절의 두 번째 의미는 복을 빌어주는 생활입니다.
어르신께 세배를 하면서 한 해의 건강과 무사안녕을 기원하며 덕담을 받고 이웃 형제와 서로에게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인사하는 것이 오늘 하루만의 인사치레가 되어서도 덕담으로 끝나서도 안 되겠습니다.
복을 빌어주는 만큼 삶의 모범으로 진정으로 복된 사람이 되어야 하고, 복을 받는 사람도 복 받을 만한 그릇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다른 사람을 진정으로 축복하는 삶, 생활로써 복을 함께 나누고 지켜주면서 감사의 마음을 키워갈 때 우리 주변은 더욱 빛나고 그리스도의 향기가 풍기는 아름다운 환경이 조성될 것입니다.
감사와 축복의 날에 주님께서는 충성스런 종과 불충한 종의 비유를 통해서 “너희는 준비하고 있어라.”(루카 12,40)고 말씀하십니다.
등불을 켜고 주인을 기다리는 충직한 종처럼 감사와 축복으로 매일을, 순간순간을 늘 깨어 준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조상을 위해 기도하고 서로에게 복을 빌어주며 이웃과 더불어 만남을 기뻐하는 날, 정월 초하루!
모두 모두 주님의 복을 많이 받으십시오.
믿는 이들은 영원한 복을 추구합니다.
참으로 복 중의 복은 하느님을 차지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의 모든 복을 주관하시고 천상의 복을 우리에게 약속해 주셨습니다.
이 세상을 넘어 영원한 생명, 하느님의 나라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믿는 이들에게 주시는 복은 이 세상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지속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기뻐하십시오,
이미 하느님을 차지하시고 섬기고 있으니 말입니다.
이 복을 결코 잃지 않으시기 바랍니다.
신명기에는 “너희가 주 하느님의 말씀을 잘 들으면, 이 모든 복이 내려 너희 머리 위에 머무를 것이다. 너희는 성읍 안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다. ...너희의 광주리와 반죽통도 복을 받을 것이다. 너희는 들어올 때에도 복을 받고 나갈 때에도 복을 받을 것이다.”(신명 28,2-6)라고 적혀있습니다.
그러니 주님의 말씀에 순명함으로써 복을 받으시길 희망합니다.
시편에서는 “행복하여라! 악인들의 뜻에 따라 걷지 않고 죄인들의 길에 들지 않으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되새기는 사람, 그는 시냇가에 심겨 제때에 열매를 내며 잎이 시들지 않는 나무와 같아 하는 일마다 잘 되리라.”(시편 1,1-3)고 하였습니다.
만사형통하려면 주님의 말씀을 되새기고 살아야 합니다.
시편 저자는 말합니다.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아, 주님을 신뢰하여라.
주님은 도움이며 방패이시다.
주님께서 우리를 기억하시어 복을 내리시리라.
이스라엘 집안에 복을 내리시고 아론 집안에 복을 내리시리라.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낮은 사람들에게도 높은 사람에게도 복을 내리시리라.
주님께서 너희를, 너희와 너희 자손들을 번성하게 하시리라.
너희는 주님께 복을 받으리라.
하늘과 땅을 만드신 그분께”
(시편 115,11-15)
복을 주시는 분은 주 하느님이심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모든 복은 하느님께로부터 옵니다.
하느님께로부터 복을 충만히 받으시길 기도합니다.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원장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꿈에서 본능이 통제되지 못하는 이유: 잠이 지극히 개인적이기 때문>
오늘은 우리의 명절 ‘설’입니다.
설은 한 해의 시작입니다.
시작은 마침을 전제합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도 심판에 관한 내용이 나옵니다.
주인이 언제 돌아올지 모르니 깨어 있으라는 내용입니다.
주인이 언제 오더라도 깨어 있다가 주인을 맞이하면 그 사람은 행복하다고 합니다.
주인이 그들을 시중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한 명의 종을 대상으로 시중들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루카 12,37)이라고 하십니다.
또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에게 시중들 것이라고 하십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을 만나는 사람은 이미 예수님의 뜻을 따르는 공동체에 머물 줄 아는 사람입니다.
유튜브에 개신교 ‘다니엘라’라고 하는 여자 청년의 간증이 있습니다.
20대로 보이는 이 자매는 부모님을 지독히 미워하였고, 학교에서는 집단 따돌림을 받는 아이였습니다.
그 외로움 속에서 동방신기라는 아이돌을 쫓아다니는 팬클럽 일원이 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알게 된 동성애자들 때문에 자신도 동성애자가 되었습니다.
가족이 그녀를 깨어날 힘을 주지 못했고, 그녀는 예뻐지고 유명해지려는 것, 육체의 쾌락에만 관심을 쏟았습니다.
두바이로 가서는 부잣집 아이들과 어울렸고 어느새 인스타 유명인이 됩니다.
하지만 그녀의 가슴은 텅 비어가고 있었습니다.
교회는 가끔 나가기는 했지만, 설교시간에 나가 화장을 다 고치고 돌아오면 목사님 설교는 이미 끝나있는, 뭐 그런 신앙인이었습니다.
외로워도 보았고 유명해져도 보았지만,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먼지를 먹고 사는 것 같았습니다.
살고 싶지 않았습니다.
다니엘라는 우연히 유튜브에서 찬양을 찾아보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한 오래된 동영상이 그녀를 완전히 바꿔놓았습니다.
1990년대의 교회 집회 영상이었습니다.
세련되지도 않고 그야말로 오래된 기도회 모습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공동체는 뜨거웠습니다.
우리나라를 위해 눈물을 흘리며 진심으로 기도하며 찬양하는 그 뜨거움이 다니엘라를 완전히 바꿔놓았습니다.
다니엘라는 지금 청년들이 회개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 가운데 그런 뜨거운 교회 공동체가 사라진 것이라 말합니다.
젊은 사람들이 목숨을 다해 하느님을 찾지 않고, 무엇보다 목숨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는 공동체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배를 드리는데 왜 요즘 친구들이 하나님을 못 만나냐면 정말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는 교회가 없어서 그래요.
제가 하나님 그렇게 없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님께서는 저같이 악한 자를 하나님께로 돌이키시게 하려고 어떤 세련된 말, 사람을 통해서도 아니고, 누가 나에게 찾아와서도 아니고 그냥 우리나라 성도들이 모여서 나라와 가정을 위해서 기도하는데, 찬양하는데 거기서 예배가 진실하게 드려지니까 그걸 통해서 저에게 임재해 주시는 거예요.”
왜 공동체가 사람을 바꿔놓을까요?
양심을 작동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양심은 혼자 있을 때는 죽은 것이나 다름없고 그리스도 공동체에 속하면 엄청난 힘을 얻습니다.
그래서 변하고 싶은 사람은 변화된 공동체에 머물게 됩니다.
이것이 깨어 있음입니다.
이 깨어 있을 줄 아는 사람들을 보시고 주님은 함께 머무시는 은총을 주십니다.
깨어 있음과 반대로 잠은 매우 ‘개인적’인 것입니다.
사람은 혼자서는 자기 자신을 컨트롤할 수 없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면, ‘꿈을 제어할 수 없다는 사실’로 알 수 있습니다.
프로이트는 꿈은 바로 자신의 ‘무의식의 표현’이라 하였습니다.
무의식이란 바로 세속-육신-마귀의 욕망을 나타냅니다.
지극히 개인적인 잠에 빠졌을 때 양심이 작동하지 않아 욕망이 활개를 쳐서 그런 꿈들이 제어되지 않는 것입니다.
한 여인이 몸이 아프다고 하며 프로이트를 찾아왔습니다.
프로이트는 몸의 증상도 욕망이 충족되지 못한 것에서 기인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녀가 몸이 아픈 이유를 꿈에서 찾으려 했습니다.
꿈은 무의식을 알아볼 수 있는 가장 완전한 통로로 보았습니다.
그녀가 자주 꾸는 꿈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그녀의 조카가 죽어서 장례식에 있었는데 그녀는 전혀 눈물을 흘리지 않고 심지어 기분이 좋은 마음마저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사랑하는 조카가 죽었는데 기분이 좋다는 것에 마음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도 계속 비슷한 꿈을 꾼다는 것입니다.
프로이트는 이야기를 나누며 그녀가 언니의 남편을 좋아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두 사람의 그러한 관계를 언니도 알게 되었고, 그래서 그녀는 형부와의 관계를 청산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언니가 죽게 된 것입니다.
언니가 죽으니 다시 형부와의 관계에 대한 가능성이 열려서 기분이 좋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그러면 안 되는 일입니다.
프로이트는 원초적 욕망을 ‘원초아’(Id)라 하였고, 이 욕망을 제어하는 양심과 같은 기재를 ‘초자아’(Super-ego)라 불렀습니다.
아기가 태어나면 처음엔 원초아밖에 없습니다.
원초적 본능만 살아있는 것입니다.
자아는 초자아보다 더 먼저 형성되는데 젖을 먹고 싶은데 숟가락이 입에 들어올 때 생겨납니다.
자신의 욕망만으로 안 되는 것이 있음을 알게 되면서 자아가 생기는 것입니다.
초자아는 부모님과의 사회적 관계 속에서 형성된 것입니다.
특히 배변 활동을 시작하는 시기에 세상엔 수치스럽고 부끄러운 것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렇게 양심은 사회적인 상황에 놓였을 때 더 활달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말해 원초아 – 자아 – 초자아는 가정에서 사회성이 형성되면서 함께 발달한 것이기에 덜 사회적일수록 더 원초적인 욕망에 휘둘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더 사회적일 때 더 윤리적 인간이 됩니다.
요즘 가정이 많이 분해되고 있습니다.
명절은 특별히 가족이 왜 한데 모여서 친교를 나누어야 하는지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가족은 바로 우리가 생존 본능에서 양심에 통제받는 사람이 되는 성장을 처음으로 이룩한 공동체입니다.
가족이 함께 모이는 이때는 우리가 왜 교회 공동체에서 형제 공동체를 형성해야 함을 일깨워줍니다.
현명한 처녀, 미련한 처녀 내용에서 미련한 처녀들은 현명한 처녀들 안으로 들어올 줄 몰랐습니다.
현명한 처녀 무리로 들어왔다면 그들이 하는 일을 해야 할 수밖에 없습니다.
거기서 얻어지는 성령의 기름으로 죄에 떨어지지 않게 됩니다.
다섯이라는 육체를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다섯이라는 성령으로 육체를 이긴 이들 무리에 머무는 것입니다.
원초아를 눌러줄 초자아는 반드시 공동체와 함께 있을 때 힘을 발휘하는 특징이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 수원교구 영성관장, 수원가톨릭대 교수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한 번뿐인 우리네 인생, 너무 그렇게 심각하게, 너무 전투적으로 살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저희 피정 센터에 멋진 야외 식당을 개장하자마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피정객들이 몰려오셔서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습니다.
오늘 저녁에도 명절을 이곳에서 지내시는 분들이 계셔서 열심히 요리를 했습니다.
뭐니뭐니 해도 밥이 최고더군요.
가마솥 찰진 밥으로 밥을 얹히고, 부랴부랴 제 특기인 자연인표 김치찜에다가, 모듬 조개탕에다가 맛갈진 마약 김치에다가... 순식간에 10인분 저녁 식사가 준비되었습니다.
활활 타오르는 화목 난롯가에서, 밖에는 펄펄 함박눈이 내리는데, 다들 맛있다 맛있다 하면서 드셔주시니 제 마음이 얼마나 뿌듯하고 훈훈해졌는지 모릅니다.
또다시 맞이한 설 명절입니다.
오랜만에 마주한 가족·친지들과 함께 지내면서, 내가 윗사람이니, 니가 아랫사람이니 따지지 말고, 서로가 서로를 위해 앞다투어 따뜻하고 맛깔진 밥 한 끼 차려주면 좋겠습니다.
괜히 1.4후퇴 때 서운했던 이야기 꺼내서 또다시 상처를 주고받지 말고, 서로가 서로에게 이것 먹어봐라, 저것 먹어봐라, 잘 먹어야 힘이 나지 하면서 격려해주고 위로해주는 이번 명절이면 좋겠습니다.
오늘 두 번째 독서인 야고보 서간은 우리 인간 존재의 실체요 본질을 단 한 문장으로 아주 정확하게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
(야고보서 4장 14절)
특별히 설날 아침에 곰곰히 생각해보니, 참으로 지당한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하고 추모하는 분들, 제삿상 건너편에 앉아계신 분들, 한 시대를 풍미했던 분들, 나라며 가문, 공동체나 가정 전체를 쥐락펴락 좌지우지 하셨던 분들...
그 권세, 그 위세가 백 년, 천 년 갈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불과 30년, 50년 지나가니, 그 모든 분들, 마치도 한 줄기 연기처럼, 흔적도 없이 우리네 눈 앞에서 사라지셨습니다.
우리 역시 불과 30년, 50년 후면 어쩔 수 없이 그분들 뒤를 따라나서겠지요.
생각할수록 참으로 아름다운 명문장입니다.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
어찌보면 야고보 서간은 오늘 우리에게 던지는 강력한 경고장입니다.
이 세상 일에만 목숨 거는 사람들, 영혼이나 상위 가치들에 대해서는 일말의 관심도 없는 사람들, 순식간에 우리에게서 멀어지는 지위나 명예, 권력이나 재산을 전부로 여기는 사람들을 향한 경고장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으로서 이 한 세상 살아가면서 늘 염두에 두어야 할 불변의 진리가 하나 있습니다.
인간 세상 안에서, 인간에 의해, 계획되고 진행되는 모든 일들은 다 불확실하다는 것입니다.
오직 하느님만이 확실하십니다.
세상 모든 확실성은 오직 하느님께만 기인합니다.
뭐 엄청나고 대단한 것 같지만 우리네 인생 참으로 덧없습니다.
‘한 줄기 연기!’ 참으로 적절하고 적합한 표현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니 한번 뿐인 우리네 인생, 너무 그렇게 심각하게 살지 말아야겠습니다.
너무 전투적으로도 살지도 말아야겠습니다.
너무 팍팍하게 살아서도 안되겠습니다.
찰나같은 이 세상, 섬광처럼 지나가는 우리네 인생입니다.
해만 뜨면 사라지는 새벽안개 같은 우리네 삶입니다.
하느님의 무한한 시계로 보면 너무나 짧아 아쉬운, 수학여행 같은 우리네 지상 여정입니다.
최대한 기쁘고 신나게, 설레는 가슴을 달래며 흥미진진하게 살아가야겠습니다.
설 명절을 맞아 오랜만에 마주한 가족들, 친지들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봐야겠습니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이 세상 소풍의 둘도 없는 동반자들입니다.
여행의 최종 목적지인 하느님 나라에 도착할 때까지 서로 배려하고 서로 도와주라고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소중한 인연들입니다.
오랜만에 가족 친지들이 한자리에 모이게 되는 설 명절은 서로를 향한 더 많은 배려와 지지가 필요한 순간입니다.
내 목소리는 좀 많이 줄이고, 상대방의 말을 더 많이 경청해야겠습니다.
공동체가 좀 더 살아나기 위해, 내가 좀 더 작아지고 겸손해지며, 좀 더 부드러워지고 온유해져야겠습니다.
우리 가정 공동체 구성원 각자가 서로를 위해 그런 노력을 지속할 때, 주님께서도 우리 가정을 기쁜 마음으로 축복하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 주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
(민수기 6장 24~26절)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깨어 있어라.>
우리가 새해를 맞이한 것은, 우리의 공로나 능력으로 한 일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조금 더 시간을 주신 것입니다.
그 누구에게도 ‘나의 시간’은 없습니다.
인간은 하느님께서 잠시 맡겨주신 시간을 사용할 뿐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시간의 주인이신 하느님 앞에서 겸손해야 합니다.
나이를 한 살 더 먹었다는 것은 남아 있는 시간이 그만큼 줄어들었다는 뜻이고, 또 그만큼 이 세상을 떠날 때가 가까워졌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서로 빌어주는 ‘새해의 복’은 지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일만 바라는 일이 아니라, 아무 두려움 없이 하느님 앞에 서게 되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야 합니다.
설날의 복음 말씀은 바로 그것을 묵상하고 실천하라는 가르침입니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
(루카 12,35-38)
이 말씀에서 강조되고 있는 것은 ‘지금’입니다.
신앙인은 ‘지금’ 깨어 있어야 하고, ‘지금’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라는 말씀은 ‘지금’ 준비되어 있는 상태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이라는 말씀은 ‘언제 돌아올지 알 수 없는’이라는 뜻인데, ‘때’를 결정하는 것은 주님께서 하시는 일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인간은 그 ‘때’를 마음대로 예상하거나 예측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가 이미 시작되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루카 17,21).
종말은 이미 시작되었고, 우리는 종말의 한가운데에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종말의 날’이라는 말은 이미 시작된 종말이 ‘완성’되는 때를 뜻합니다.)
따라서 “문을 두드리면”이라는 말은 언제인지 모르는 먼 훗날에 문을 두드린다는 말이 아니라, 주인이 이미 도착해서 ‘지금’ 문을 두드리고 있는 상황을 나타내는 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옳습니다.
예수님 말씀을 ‘종말’과 ‘재림’에 관한 말씀으로만 생각하면, 이 말씀이 실감나지도 않고, 긴박감도 생기지 않고, 막연한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각 개인의 ‘임종’ 상황으로 바꿔서 생각하면, 뜻이 분명해지고 느낌도 완전히 달라집니다.
어느 날 갑자기 응급실에 실려 가고 수술실과 중환자실에 입원하는 경험을 한 번이라도 해 본 사람이라면 “깨어 있어라.”라는 예수님 말씀이 더욱 실감날 것입니다.
주님께서 허락하신 시간이 몇 시간 뒤에 끝나는지, 오늘 끝나는지, 내일 끝나는지 그것을 모르니까, 하느님 앞으로 갈 준비도 ‘지금’ 해야 하고, 회개도 ‘지금’ 해야 합니다.
복음서에 “신앙생활은 재림하시는 예수님을 잘 맞이할 준비를 하는 생활”로 표현되어 있는 경우가 많은데, 실제 현실에서 우리의 신앙생활은 하느님 앞으로 갈 준비를 하는 생활입니다.
우리는 죽음을 남의 일인 것처럼 생각하거나, 무의식중에 “지금은 아니고 나중에 언젠가” 생길 일이라고만 생각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누구에게나 ‘지금의 일’이 될 수 있음을 의식하면서 자만하지 않고 방심하지 않는 것이 지혜입니다.
예수님 말씀에서 ‘곧바로’라는 말은 주님께서 재림하시면 회개할 시간 없이 곧바로 심판이 진행된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동시에 이 말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면 곧바로 응답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아직 준비가 안 되어 있으니 조금만 더 시간을 달라고 애원할 수도 없고, 왜 벌써 부르셨냐고 항의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부르시면 ‘모든 것’을 그대로 놓아두고 떠나야 합니다.
여기서 ‘행복하다.’는 ‘복되다.’(복을 받을 것이다.)인데, ‘복’은 ‘구원’을 뜻합니다.
주인이 종들의 시중을 들 것이라는 말씀은 충실한 신앙인들이 하느님 나라에서 누리게 될 행복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말씀입니다.
그런데 복음서를 보면, 실제로 주님께서 제자들의 시중을 드는 모습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와서 아침을 먹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는 다가가셔서 빵을 들어 그들에게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주셨다.’
(요한 21,12ㄱ.13)
제자들은 그때 천국의 기쁨과 행복을 체험했을 것입니다.
여기서는 ‘충실한 종들’에 대해서만 말씀하셨지만, 뒤의 45절-46절에는 ‘불충실한 종들’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만일 그 종이 마음속으로 ‘주인이 늦게 오는구나.’ 하고 생각하며, 하인들과 하녀들을 때리고 또 먹고 마시며 술에 취하기 시작하면, 예상하지 못한 날, 짐작하지 못한 시간에 그 종의 주인이 와서, 그를 처단하여 불충실한 자들과 같은 운명을 겪게 할 것이다.”
(루카 12,45-46)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서 행복과 생명을 누리는 사람이 될 것인가, 그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고 처벌을 받는 사람이 될 것인가는 ‘지금’ 각자의 선택과 실천에 달려 있습니다.
“이것을 명심하여라.
도둑이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
(루카 12,39-40)
이 말씀은 그날은 틀림없이 온다는 것과 그날이 언제인지는 모른다는 것, 그리고 ‘지금’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도둑이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은 “도둑이 몇 시에 오는지는 몰라도 틀림없이 온다는 것을 집주인이 알면”입니다.
여기서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올 것이다.”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일부러 사람들이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오신다는 뜻이 아니라, 생각하지도 않고 있다가, 즉 방심하고 있다가 갑자기 당하는 일이 없도록 평소에 잘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는 훈계입니다.
잘 준비한 사람에게는 그날은 갑자기 당하는 무서운 날이 아니라 주님께서 마련해 놓으신 행복을 누리는 ‘기쁜 날’이 될 것입니다(1테살 5,2-10).
- 전주교구 금암성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주님의 복福(성인聖人)이 됩시다 -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새벽 일어나 숙소문을 열으니 새하얀 눈이 온누리를 덮었습니다.
새하얀 침묵의 축복이 온누리에 내린 듯 잠시 황홀했습니다.
새해 첫날 하느님의 축복을 상징합니다.
어제 1월의 끝은 오늘 2월의 시작입니다.
1월 달력을 넘기고 2월 달력을 보는 순간 새로운 풍경의 사진과 더불어 와닿은 깨달음입니다.
2월1일 오늘은 음력으로 새해 첫날인 민족 최대의 명절인 설날입니다.
여전히 코로나로 우울하고 힘든 날의 연속이지만 오늘 하루만이라도, 아니 앞으로 날마다 주님의 복이, 주님의 성인이 되어 사시기 바랍니다.
복 중의 복이 주님의 성인이 되는 복입니다.
누구나에게 주어진 의무이자 권리입니다.
“주 하느님의 어지심을 저희 위에 내리소서.”
미사 중 화답송 후렴 역시 그대로 주님의 복이 되게 해달라는 간청의 기도처럼 들립니다.
제가 참 좋아하는 것이 강복을 주는 일입니다.
사제 수품 후 얼마나 많은 강복을 주었는지 모릅니다.
이제는 존재 자체가 주님의 복이 된 듯합니다.
면담 고백성사 후는 꼭 보속으로 말씀 처방전의 영약과 더불어 강복을 드립니다.
역시 복중의 복이 말씀의 복일 것입니다.
말씀과 하나되면서 주님의 복이 되기 때문입니다.
“전능하시고 자비하신 천주, 성부와 성령은 온누리에 강복하시고, 슬픔과 불안과 병고중에 있는 모든 분들에게 위로와 평화와 치유를 주소서.”
새벽마다 산책시 수도원 십자로 한복판에 서서 동서남북에 십자강복을 하면서 드리는 기도문입니다.
오늘 새해 첫날 설날 미사 중 세 기도문이 은혜롭고 아름다워 그대로 인용해 봅니다.
마음 깊이 새겨 보시기 바랍니다.
“시작이시며 마침이신 주 하느님,
오늘 새해 첫날을 기쁜 마음으로 주님께 봉헌하오니, 온갖 은총과 복을 가득히 베푸시어, 저희가 조상을 기억하며 화목과 친교를 이루게 하시고, 언제나 주님의 뜻을 따르며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게 하소서.”
- 본기도
“주님, 새해 첫날 깨끗한 몸과 마음으로 감사와 찬미의 예물을 봉헌하오니, 저희가 언제나 주님의 뜻을 따르며, 한 해 내내 주님의 풍성한 은혜를 누리게 하소서.”
- 예물기도
“주님, 이 거룩한 친교의 제사에서 성체를 받아 모시고 비오니, 올해도 저희가 주님의 보호로 모든 해악에서 벗어나, 언제나 행복을 누리게 하소서.”
- 영성체후 기도
한 마디로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주님의 복이 되게 해달라는 기도로, 오늘 강론 제목과 일치합니다.
아브라함이 고향을 떠나면서 받은 주님의 축복이 그대로 여러분에게 주어집니다.
창세기 내용 중 일부 인용합니다.
“내가 너에게 큰 복을 내리며, 너의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그리하여 너는 복이 될 것이다.
세상의 모든 이들이 너를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
(창세 12,2-3 참조)
바로 아브라함과 예수님은 물론 우리 하나하나에게 해당되는 복된 말씀입니다.
복중의 복이 하느님 자녀다운 복일 것입니다.
그러니 복받은 사람답게, 하느님의 자녀답게 존엄한 품위를 유지하며 살도록 합시다.
문득 생각나는 말마디입니다.
“그대 하느님의 자랑이듯, 하느님 그대의 자랑이어라!”
얼마나 멋집니까!
이런 긍지와 자부심으로 하느님의 자녀답게 당당하고 멋지고 예쁘고 아름답게 사시기 바랍니다.
오늘 제1독서 민수기를 구약에서 찾아보니 ‘사제의 축복’이란 말마디가 신선한 충격으로 마음에 와닿습니다.
천주교 사제로서 여러분 모두에게 주님의 축복을 드립니다.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 주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
얼마나 좋은 주님의 복인지요!
공동체 전체는 물론 우리 하나하나에게 주시는 주님의 복입니다.
그러니 축복받은 형제 하나하나가 참으로 귀한 하느님의 선물이자 복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형제를 내몸처럼 사랑해야 맞는 것입니다.
새삼 인간의 정의는 주님의 복덩어리 존재임을 깨닫습니다.
그런데 이런 귀한 존재의 나를 방치하거나 함부로 대하는 것만큼 큰 불경의 죄도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을 참으로 슬프게 하는 죄가 바로 이런 죄입니다.
복중의 복이 평화의 복이요 겸손의 복이요 깨어있음의 복입니다.
주님께 평화를 주십사 기도할 것이 아니라 주님의 평화가 되게 하여 주십사 기도하는 것이요, 주님의 겸손이, 깨어 있음이 되게 하여 주십사 기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생명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
도리어 여러분은 ‘주님께서 원하시면 우리가 살아서 이런저런 일을 할 것이다.’하고 말해야 합니다.”
무지에서 나오는 자만입니다.
자만하지 말고 겸손하라는, 각자 본분을 알아 주님의 뜻에 따라 선물 인생 살라는 것입니다.
연기는 안개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얼마나 덧없는 존재인지 살아 있는 한 하느님 공부가 제일임을 깨닫습니다.
무지와 허무에 대한 궁극의 답도 생명과 사랑의 영원하신 하느님뿐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저절로 회개와 더불어 겸손이 뒤따르기 때문입니다.
이런 우리 삶의 궁극 목표이자 방향이요, 중심이자 의미이신 하느님을 망각하여 불행하게도 폐인니아 괴물로 전락하는 사람들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복받은 귀한 존재임을 생각한다면 자살은 꿈에도 상상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을 참으로 슬프게 하는 것이 자포자기의 절망이요 자살일 것입니다.
다음 깨어 있음의 복입니다.
막연한 깨어 있음이 아니라 주님을 기다리는 기쁨의 깨어 있음입니다.
주님을 기다리는 깨어 있음의 기쁨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세상에 주님이 아니곤 기다릴 대상이 어디 있습니까?
사실 저는 하루하루 날마다 매일 주님을 기다렸다 만나는 기쁨에 살아갑니다.
새벽마다 주님 뵈올 기쁨에 잠깨어 강론을 씁니다.
잠자리에 들면 기다렸던 주님 품에 안기듯 잠이 듭니다.
주님의 다음 복음 말씀 구구절절 마음에 와닿습니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런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
깨어 있어야 합니다.
깨어 있음은 영성생활의 목표입니다.
끊임없는 기도도 깨어 있음을 목표로 합니다.
언제 주님이 오실지, 죽음이, 불행이, 사고가, 병이 올지 모르니 깨어 있어야 합니다.
유비무환의 대책에 깨어 있음보다 더 좋은 수행은 없습니다.
참 중요한 것이 깨어 있음의 영성훈련입니다.
하루 중 깨어 있는 시간은 얼마나 됩니까?
깨어 있음의 은총이자 축복입니다.
깨어 있음의 사랑이자 생명이요 빛이자 기쁨입니다.
깨어 있음의 침묵이자 아름다움이자 기품이자 존재의 향기입니다.
깨어 있을 때 어둠의 유혹도 범접치 못합니다.
깨어 있음은 하느님의 현존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깨어 있음의 축복은 끝이 없습니다.
그러니 깨어 있음은 우리의 모두라 할 수 있습니다.
참으로 깨어 미사를 봉헌하는 우리들에게 주님은 온갖 좋은 축복을 내려 주시어 우리 모두 당신의 복이 되어 살게 하십니다.
끝으로 얼마 전에 나눈 새해 소원 기도문을 다시 나눕니다.
새해 소원을 평생 소원으로 바꿨습니다.
한마디로 복의 근원인 하느님이, 하느님의 복이 되게 해달라는 청정욕의 절정이 되는 기도입니다.
이런 소원은 하느님께서도 흡족해 하실 것입니다.
<평생 소원>
나
하느님이 되고 싶다
모세처럼
하느님과 대면하여 대화 나누고 싶다
오소서,
주 하느님!
당신이 되게 하소서
당신의 믿음이
당신의 희망이
당신의 사랑이
당신의 신망애信望愛가 되게 하소서
당신의 진리가
당신의 선이
당신의 아름다움이
당신의 진선미眞善美가 되게 하소서
당신의 말씀이
당신의 빛이
당신의 영이
당신의 품이
당신의 꿈이
당신의 뜻이 되게 하소서
당신의 길이
당신의 문이
당신의 복이
당신의 종이
당신의 벗이 되게 하소서
당신의 증인이
당신의 배경이
당신의 반석이
당신의 생명이
당신의 은총이 되게 하소서
당신의 현존이
당신의 성체가
당신의 신비가
당신의 거룩함이 되게 하소서
당신의 침묵이
당신의 경청이
당신의 순종이
당신의 환대가 되게 하소서
당신의 온유가
당신의 겸손이
당신의 가난이
당신의 비움이
당신의 충만이 되게 하소서
당신의 미풍이
당신의 미소가
당신의 향기가
당신의 순수가
당신의 섬김이 되게 하소서
당신의 친절이
당신의 연민이
당신의 치유가
당신의 지혜가 되게 하소서
당신의 인내가
당신의 자유가
당신의 기쁨이
당신의 정의가 되게 하소서
당신의 평화가
당신의 위로가
당신의 격려가
당신의 선물이 되게 하소서
당신의 자랑이
당신의 행복이
당신의 찬미가
당신의 감사가 되게 하소서
당신의 승리가
당신의 영광이
딩신의 천국이
당신의 모두가 되게 하소서
그리고
마침내 당신이 되게 하소서
당신만 남고
나는 온전히 사라지게 하소서
그리하여
하느님이, 당신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이
마리아 성모님이
성요셉이
성아브라함이
성모세가
성요한이
바로 그러하였나이다
내가
하느님이 될 때
전인적 치유가
온전한 참나眞我의 구원이 이뤄지겠나이다
내 소원
단 하나 이것뿐이옵니다
오, 주 하느님!
일편단심一片丹心 당신만을 사랑하나이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를 받으시옵소서.
아멘
(2021.12.8.원죄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에 드린 헌시獻詩)
- 성 베네딕토회 성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설날입니다.
새해에 복 많이 받으세요.
2022년은 범의 해입니다.
비범하고, 대범한 것도 좋지만 평범한 일상의 행복을 맛볼 수 있는 2022년이 되면 좋겠습니다.
마스크 없이 서로의 환한 얼굴을 마주보고 웃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으로 2022년 모든 일들이 순조롭게 이루어지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새로운 한해를 덤으로 주셨습니다.
어떤 분들은 지난 한해 인생의 그림을 성공적으로 그렸을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분들은 지난 한해 시작부터 인생의 그림을 망치고 후회와 번민 속에서 한해를 마쳤을 것입니다.
또 어떤 분들은 잘 그리던 인생의 그림이 끝에 가서 그만 엉망이 되어버린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우리들에게 새로운 한해라는 흰 색의 도화지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런 하느님의 배려와 따뜻하신 사랑에 감사를 드리면서 새로운 한해 열심히 인생의 그림을 그려야겠습니다.
뉴욕에 있으면서 코로나 검사를 3번 받았습니다.
별 증상이 없어서 가능하면 받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동료 신부님들이 외부활동이 많으니 받아보라고 해서 부득이 검사를 받았습니다.
검사를 받고 하루가 지나면 인터넷으로 결과를 알려줍니다.
음성이 나왔을 때, 기분이 좋았습니다.
요즘은 집에서 손수 검사할 수 있는 도구가 있습니다.
신부님 4명이 약국에서 구입해서 검사를 해 보았습니다.
다행히 4명 모두 음성이 나왔습니다.
오미크론이 등장하면서 주위에 많은 분들이 코로나 확진 판정을 받았습니다.
검사를 받으면서 3부류의 유형을 보았습니다.
본인과 타인의 안전을 위해서 적극적으로 검사를 받자는 경우가 있습니다.
여행을 가기 때문에 비행기를 타려면 증명서가 있어야 하기에 검사를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가능하면 피하고,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하면 검사를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증상이 없는데도 확진 판정을 받으면 격리해야 하는 불편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확진 판정을 받았을 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좋은 생각’ 12월호를 읽으면서 ‘회피, 도피, 대피’에 대한 글을 보았습니다.
피한다는 의미에서는 비슷하지만 심리적인 면에서는 많이 달랐습니다.
회피는 무의식적인 경향이 있습니다.
저도 웬만하면 코로나 검사를 받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회피는 가상의 위험에 대한 반응입니다.
회피는 위험을 외면하는 것입니다.
벌어지지 않은 일을 미리 상상하고 피하는 것입니다.
회피는 위험을 외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도피는 의식적인 차원의 반응입니다.
도피는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알고 반응하는 것입니다.
도피는 실재하는 위험에 대한 반응입니다.
산에서 멧돼지를 만나면 일단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도피는 위험에서 멀어지고 위험을 느낀 대상에서 확실하게 도망치는 것입니다.
대피는 아직 발생하지는 않았지만 생길 수 있는 위험에 대한 준비입니다.
어릴 때 민방위 훈련을 한 적이 있습니다.
정해진 순서에 따라서 위험한 상황에 대처하는 훈련입니다.
컴퓨터의 자료들은 외장하드에 따로 저장해 놓기도 합니다.
삶의 태풍이나 폭설도 마찬가지입니다.
감당할 수 없는 문제와 역경 앞에서는 자신을 보호하는 것이 최선입니다.
위험이 약해지거나, 감당할 힘이 생길 때 앞으로 나가면 됩니다.
‘당랑거철(螳螂拒轍)’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마귀가 팔을 벌려 수레를 막는다.’는 뜻으로, 자신의 분수를 모르고 강한 상대에게 무모하게 덤벼드는 것을 일컫습니다.
공자가 제자 자공에게 “너도 싫어하는 사람이 있느냐”고 물으니 자공이 답했습니다. “
저는 길에서 주워들은 것을 제 것인 양 떠벌리는 사람을 미워하고, 만용을 용기로 아는 자를 미워합니다.”
세상길을 걸어갈 때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만용은 용기와 다릅니다.
셰익스피어는 “세상에 환영받는 충고는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새해에는 남의 탓과 남의 허물을 이야기하기 전에 좀 더 신중할 수 있도록 될 수 있으면 남의 이야기를 하기보다는 자신의 신앙생활을 더욱 성실하게 할 수 있는 그런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새해에도 더욱 건강하시고, 소망하시는 모든 일들이 다 이루어지시기를 바랍니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아는 지인이 감동적인 영상이라면서 제게 하나의 파일을 보내주셨습니다.
미국의 인기 프로그램 ‘아메리칸 갓 탤런트’ 무대에 오른 제인 마르크레프스키라는 어느 여가수의 영상이었습니다.
노래를 부르기 전 인터뷰에서 자신을 이렇게 소개했습니다.
“이 노래는 서른 살 내 생명의 마지막 해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 여성은 폐와 간 그리고 척수까지 전이된 암과 싸우고 있었습니다.
자기 삶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을 알고 있었지만, 그녀는 자작곡으로 ‘It’s Okay’라는 제목의 노래를 들고나왔습니다.
그녀의 노래는 진심에서 우러나온다는 것을 깨닫기에 충분했습니다.
노래 후 그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생이 쉬워질 때까지 기다릴 수 없습니다.
내가 먼저 행복해지도록 결심해야 합니다.”
나의 변화가 먼저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 주변의 환경이 먼저 바뀌기를 바랍니다.
이런 마음으로는 어떤 기회도 얻을 수 없습니다.
일분일초가 소중하다는 것을 기억하며, 나의 행복을 위해 먼저 결심하고 변화되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도 오늘 복음을 통해 지금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말씀하십니다.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루카 12,40)라면서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종처럼 되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우리 모두는 영원한 생명을 목표로 삽니다.
그런데 그 영원한 생명을 언제 얻을 수 있을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언제 이 세상을 마치고 하늘 나라에 갈지를 아무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제1독서의 “나의 이름을 부르면, 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겠다.”(민수 6,27)라는 민수기 말씀처럼 당신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 즉 주님 뜻에 맞게 살아가는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하십니다.
그래서 주님 뜻에 맞게 사는 삶이야말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준비를 잘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후회는 늘 남이나 주변이 먼저 변화되어야 한다면서 기다릴 때 생기는 감정이었습니다.
후회하지 않는 삶이 행복한 삶이라는 점을 인정한다면, 남보다 ‘나’에 더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후회를 줄이면서 행복의 삶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은 설날입니다.
새해를 맞이하면서 사람들은 많은 결심을 합니다.
올해에는 남 탓, 주변 탓, 환경 탓에서 벗어나서, 자신에게 좀 더 집중할 수 있다면 어떨까요?
‘~탓’만 하다가 결국 후회만 남는 마지막 날을 맞이한다면 얼마나 허무할까요?
그래서 주님께서도 오늘 복음에서 준비하고 있으라는 말씀을 힘주어서 하셨습니다.
- 인천교구 갑곶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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