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닝맨
최규리
전면이 거울입니다. 유리벽으로 몰아치는 파도가 반사되어 내 얼굴에 부딪히면 나는 잠시 개운해집니다. 정신이 바짝 들어요. 나는 무척 반갑습니다. 나를 때리고 도망가는 하얀 포말이 꽤 괜찮게 보입니다. 물거품 같은 욕심들이 늘어나고 낭비하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나는 뛰어갑니다. 어디로 뛰어야 할지 고민하지 않습니다. 계속 나타나는 길이 고마울 뿐입니다. 산책길에 만나는 모퉁이나 길을 물어보는 사람들도 없으니 참 편합니다.
출렁이는 뱃살을 거머쥔 손아귀에서 기름진 웃음이 흘러내리고 땀내 나는 운동복이 지난밤에 흘린 정액처럼 흥건해집니다. 손가락 마디를 하나씩 꺾으며 메마른 입술에 침을 묻히며 목젖에 걸리는 말을 되새기며
말은 언제나 뛰는 속성이 있습니다. 뛰는 날에 불쑥 찾아오는 어긋난 시간과 구멍 뚫린 대화의 실마리를 찾아내려 합니다.
뛰다 보면 먼 곳이 그리워집니다. 시간이 갱신될수록 가까워지는 결심들이 깃발처럼 선명하지만, 뒤로 밀려난 미래는 유리벽에 부딪힙니다.
집요하게 페달을 밟던 아주머니가 뒤로 쓰러집니다. 움직이지 않습니다. 비명을 지르고 119를 불러도 달려오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달려야 하니까요. 바닥에 쓰러진 아주머니는 피를 토합니다. 폭포처럼 쏟아지는 붉은 핏덩이를 손으로 받아내며
잠시 멈췄습니다. 정지한 아주머니의 다리를 주무르며 불쑥 나타난 처참한 광경들이 내 기억에서 선명해질까 봐 겁이 납니다. 나를 멈추게 한 시간들을 피거품처럼 손에 받아 들고 멈추지 않고 돌아가는 러닝머신을 바라봅니다.
그것은 다가오면서 바로 사라집니다. 늘어나는 과거와 늘어나는 죽음과 늘어나는 두려움과 늘어나는 출발이 늘어나는 경계선에서
빠르게 돌아갑니다. 그것은 한 몸입니다. 옹졸하면 좀 어떻습니까. 한 번은 싸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자작나무 숲을 헤매어도 찾을 수 없는 것입니다.
뛰어봐야 벼룩인 일상이지만 피 터지게 부딪쳐 볼 만해서요.
꼬리를 밟히면 달아나는 것이 최선이라고 학습되었으니, 피를 토하며 쓰러진 아주머니를 일으켜 세우진 못했습니다. 쓰러진 곳에는 꼬리들이 흩어졌습니다.
아무도 달려오지 않는 날에 붉게 물든 바닥 위를 달립니다. 뛰어도 뛰어도 제자리인 바닥에는 피냄새로 가득합니다.
결국 우리는 만나지 못했습니다. 함박눈이 내리면 가만히 있지 맙시다. 어디든 달려갑시다. 눈이 오지 않아도 매일 달려가는 나와 달아나는 나는
파도가 몰아치는 헬스장 구석에서 종아리를 주무르며 앉아있겠습니다.
웹진 『시인광장』 2024년 1월호 발표
최규리 시인
서울 예대 문예창작과 졸업. 2016년 《시와 세계》로 등단. 시집으로 『질문은 나를 위반한다』(시와세계, 2017)과 『인간 사슬』(천년의시작, 2022)이 있음. 2023년 제14회 <시와세계작품상> 수상. 현재 웹진 《시인광장》 편집장.
[출처] 런닝맨 - 최규리ㅣ■ 웹진 시인광장 2024년 1월호 신작시 □ 20 24년 1월호 ㅣ 2024, January ㅡ 통호 177호 ㅣ Vol 177|작성자 웹진 시인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