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뭣고?’는 스님네만 허는 것이 아닙니다
불법을 믿는 사람은 누구라도 그것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이 몸띵이 끌고 다니는
아무개야!’하고 부르면 ‘예!’허고 대답헐 줄 알고
배고프면 밥 먹을 줄 알고
욕허면 썽낼 줄 알고
칭찬하면 기뻐헐 줄 알고
눈으로는 모든 색상을 보고 ‘붉다’ ‧ ‘파랗다’ ‧ ‘노랗다’ 그것을 분별헐 줄 알고, 귀로 소리를 들으며는 ‘저것은
새소리다’ ‧ ‘저것은 개소리다’ ‧ ‘저것은 음악이다’ ‧ ‘
저것은 자동차소리다
귀로는 모든 것을 분별헐 줄 압니다
그 분별헐 줄 아는 놈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것을마음’이라고도 하고
‘성품(性品)’이라고도 하고 ‘
자성(自性)’이라고도 하고
경전에 따라서는 ‘실상’이라고 허기도 하고
법계’라 하기도 하고 ‘여래장’이라고도...
여러 가지 이름이 수천가지 이름이 있습니다마는
그 자체는 원래 이름이 없습니다. 또 모냥도 없습니다.
모냥도 없고 빛깔도 없고 그러건만 우리는 각기 사람마다 다 그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댕길 수도 있고 앉을 수도 있고 설 수도 있고, 그 생각을 옳게 쓰면 성현이
될 수도 있고 바르지 못하게 쓰며는 아귀도 되고 축생도 되고 독사도 되는 것입니다
사람 몸을 뒤집어쓰고 있으면서도 한 생각에 독사가 되는 것입니다.
아귀가 되는 것입니다. 호랑이가 되는 것입니다.
한 생각을 바르게 쓰면 찰나간에 성현도 되는 것이고.
그 ‘한 생각을 어떻게 단속해나가느냐?
거기에 따라서 하루를 성현의 마음으로 살 수가 있고
한 생각 잘못 쓰면 하루 동안을 독사로 살 수가 있습니다.
남편이 바람을 피우면 그 아내는 질투심이 불타가지고
완전히 사람이면서 사람이 아닙니다.
독사이면서 구렁이가 되는 것이고 사람이면서 호랑이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어떻게 단속허느냐?’
그것만 잘 알고 다스리면 성현으로 일생을 살 수도 있고 그걸 잘못 다스리면 일생을 독사나 호랭이나 구랭이로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살아 생존시에 구랭이와 독사의 마음으로 산 사람이
이 몸띵이가 죽자마자 바로 구랭이나 독사 배때기 속으로 들어갈 수밲에 없지 않겠습니까?
지은 대로 받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 마음 단속하는 법, 살아서 성현이 되고 살아서 극락세계의 삶을 살고 천당의 삶을 살 수 있는 법이
‘이 뭣고?’인 것입니다.
불법은 꼭 <화엄경>을 다 읽어야만 되는 것도 아니고
<법화경>을 다 읽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 읽어봤자 자기 마음을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어데서 언제 무엇을 허더라도 자기를 단속해서
독사가 되지 않도록, 구렁이가 되지 않도록, 호랭이가
되지 않도록
그렇게 바르게 살아가는 법이 바로 ‘이 뭣고?’인
것입니다.
첫댓글 일체 중생 참 나를 깨달라 생사의 윤회에서 벗어 나기를 발원합니다 _()_
감사합니다. 옴 아비라 훔 캄 스바하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