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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엌의 애플' 테팔… 내놓는 제품마다 업계를 뒤집는 비결, 革新을 요리하라 눈으로 볼 수 있게
인구 1만2000여명의 프랑스 중부 도시 루밀리(Rumilly)는 애니메이션 축제로 유명한 안시(Annecy)에서 서쪽 방향, 자동차로 약 30여분 거리에 자리 잡고 있었다. 반나절이면 한 바퀴를 대충 다 둘러볼 정도로 아담한(면적 17㎢) 도시 초입으로 들어선 직후 10여분간 더 차를 달리자, 16만㎡(4만8000만평) 부지에 흩어져 있는 8개의 테팔 공장들이 눈에 들어왔다.
택시 운전사는 뚜렷한 표지판도 붙어 있지 않은, 비슷비슷해 보이는 무채색 건물 사이에서 헤매지 않고 곧바로 목적지인 리셉션 센터와 본관으로 향했다. 테팔 부지의 지리를 훤히 꿰고 있는 듯 익숙한 방향 감각이었다. 알고 보니 루밀리 전체 인구의 약 20%에 가까운 1920명이 테팔에서 근무하고 있다. 마을 전체가 ‘테팔 타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셈이다.
테팔은 연 매출 약 40억6000만유로(7조원·2012년 기준)에 달하는 프랑스의 소형 가전회사 그룹 세브(Group SEB) 산하 24개 자회사 가운데 하나인 주방용품업체다. 2012년 그룹 전체 매출의 약 3분의 1(약 2조원)을 차지해 그룹의 매출 견인차 역할을 담당한다.
테팔이라는 브랜드는 한국 주부들에게도 친숙하다. 독일 시장 조사기관 Gfk에 따르면, 한국 시장에서 테팔의 인지도는 93%였고, 전기주전자는 31%, 전기그릴은 51%의 국내시장 점유율을 기록하고 있다.
테팔의 역사는 58년이다. 수많은 주방용품 브랜드와의 치열한 경쟁 속에서 50년 이상 선도업체로 장수하는 비결은 뭘까. 패트릭 로브레가(Llobregat) 사장은 “늘 소비자가 느끼는 결핍을 찾아다니며 해결해줬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테팔의 58년 역사는 혁신의 역사였다고 볼 수 있다. 1954년 테팔은 세계 최초로 ‘눌어붙지 않는 프라이팬’을 개발했다. 요리를 한 뒤 프라이팬에 눌어붙은 음식물 찌꺼기를 숟가락으로 박박 긁어내는 것은 주부들이 가장 하기 싫어하던 일 가운데 하나였다. 1996년엔 손잡이를 몸체에서 쉽게 분리할 수 있는 프라이팬을 선보여 수납공간이 적은 한국과 일본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2000년 개발한 열 센서 프라이팬은 한가운데 부착된 빨간 센서가 온도에 따라 색깔이 변해서 고기 익힌 정도를 조절하거나 달걀을 반숙, 완숙할 때 편리하다.
로브레가 사장은 “소비자들이 느끼지 못하고 눈에 띄지 않는 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혁신이라고 할 수 없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눌어붙지 않는 프라이팬을 개발했다고 합시다. 그걸 두고 소비자들에게 ‘여기엔 코팅이 어떤 방식으로 사용됐고, 그걸 위해 우리가 개발한 기술은 어떤 것이 있습니다’라고 말로 아무리 설명해 봤자, 소비자들은 그걸 눈으로 볼 수가 없습니다. 들을 땐 ‘아, 그런가 보군’이라고 생각할지 몰라도 회사가 하는 말을 다 신뢰하지 않을 수도 있지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말로 떠들어대는 혁신보다 훨씬 더 ‘보이는 혁신’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디자인이나, 기능이나 등등 여러 가지 측면에서 말이지요. 소비자들이 우리 물건을 사용해 보고, ‘아, 내가 이제까지 바라왔던 걸 드디어 만들어줬군’ 하고 생각하게끔 해야 합니다. 저는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혁신이라고 생각합니다.”
테팔은 보이는 혁신을 만들기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땀방울을 흘리고 있었다. 루밀리에 있는 8개의 빌딩 중 하나인 실험동(棟)에 들어가니 선반에 프라이팬 6개가 저울처럼 생긴 작은 기계 장치 위에 일렬로 나란히 놓여 있었다. 직원 한 명이 기계 옆에 붙은 버튼을 누르자, 기계는 마치 괘종시계 추가 움직이듯 1초마다 오른쪽 왼쪽으로 규칙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유심히 귀를 기울여 보니 프라이팬이 움직일 때마다 사각사각 금속이 긁히는 소리가 들렸다. 프라이팬에 밀착된, 지폐를 절반으로 접은 것 정도 크기의 녹색 수세미 조각이 프라이팬이 움직일 때마다 마찰을 일으켜서 나는 소리였다. 수세미 조각은 움직이지 않도록 천장에 끈으로 단단하게 고정돼 있었다. 설거지를 할 때 수세미로 프라이팬을 얼마나 많이 문질러야 프라이팬에 긁힘이 생기는지 알아보기 위한 실험이었다. 실험실 책임자 조이슬린 보넬씨는 “수세미에는 1.5㎏짜리 추가 위에서 내리누르는 것과 같은 압력을 주도록 설계돼 있다”고 설명했다. 일반적으로 테팔 프라이팬은 5000번의 좌우 왕복 운동을 하기 전까진 생채기가 생기지 않는다고 한다.
테팔의 경영 원칙 중 하나는 “매출의 약 70%를 출시한 지 3~4년 이내 신제품에서 낸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연구개발(R&D)에 많은 돈을 쏟아 붓는다. 매년 5000만~5500만유로(약 700억~800억원)를 투자한다. 매출액 대비 R&D 비율은 4.2~4.6%에 이른다.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국내 R&D 투자 상위 1000대 기업을 놓고 봤을 때 이 비율은 대기업이 평균 2.9%, 중견 기업이 2.3%다. 테팔의 패트릭 로브레가 사장은 “아마 프라이팬이나 냄비를 만드는 회사 가운데 우리처럼 많은 돈을 투자하는 회사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테팔 실험동 건물 메인 룸으로 들어서자, 감자와 베이컨 냄새가 코를 찔렀다. 방 한가운데에선 마치 요리 강좌 같은 장면이 벌어지는 중이었다. 하얀 요리사 가운을 입은 직원 4명이 가스레인지와 싱크대를 종종걸음으로 오가며 팬케이크를 굽고, 냉동 감자와 베이컨을 볶느라 분주했다.
얼마나 많은 열을 가해야 프라이팬 표면이 벗겨지기 시작하는지, 프라이팬 전체에 열이 골고루 전달돼 음식이 맛있게 조리되는지 알아보기 위한 실험이다. 이 실험은 연간 272회 진행된다. 공휴일과 주말을 제외하면 거의 매일 실험을 하는 셈이다. 한 해 동안 실험에 들어가는 감자만 1.25t, 강낭콩과 스테이크가 1.65t에 이른다.
온도 변화를 얼마나 잘 견디는지 알아보는 실험도 있다. 센 불 위에 프라이팬을 올려놨다가 곧바로 차가운 물이 가득 담긴 싱크대에 보내기를 반복해 제품 표면이 벗겨지지 않고 멀쩡하게 유지되는지 알아보는 것이다. 250회 실험을 한 뒤 통과되는 제품만 시장에 나올 수 있다.
방 한곳에 있는 대형 자동 식기세척기 안에선 각종 주방 용구가 빙글빙글 돌면서 끊임없이 자동 세척되고 있었다. 자동 세척기 안에서도 주방 용기 내구성이 얼마나 좋은지 알아보기 위해서다. 세제에 따른 민감도를 측정하기 위해 프랑스뿐 아니라 미국·핀란드 등 각국의 식기세척기 세제까지 종류별로 갖췄다.
식기세척기를 지나치자 직원들이 '고문 실험(torture test)'이라고 부르는 실험대가 보였다. 얼마나 오랫동안 제품들을 '괴롭혀야' 형태에 금이 가고, 흠집이 생기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직원 두 명이 1만5000여 가지의 냄비, 프라이팬 손잡이(제품 몸통과 분리된다)를 때리고, 누르고, 밟으면서 온갖 '고문'을 가하고 있었다. 뒤이어 진행하는 실험에선 프라이팬 손잡이에 얼마나 힘을 가해야 손잡이가 떨어져 나가지 않는지 살펴봤다. 6㎏짜리 추를 손잡이에 매달아서 1시간 동안은 버텨야만 합격이다. 프라이팬으로 가장 자주 요리하는 재료인 계란 흰자, 케첩, 우유를 섭씨 250도로 가열한 프라이팬 위에 한 방울씩 떨어뜨려서 눌어붙는 정도를 체크하는 실험도 있다.
테팔 홍보 담당자 위베르 프랑수아씨는 "실험은 총 100여 가지나 된다"고 말했다. "신제품은 시장에 출시하기까지 실험에 한 달씩 걸리기도 합니다. 또 기존 제품에서 특정 기능이 더해질 경우엔 그 부분에 대한 실험을 집중적으로 실시해서 합격한 제품만 소비자들에게 선보입니다."
아내의 불평이 만든 눌어붙지 않는 프라이팬
공장과 실험실을 방문한 뒤 기자는 패트릭 로브레가(Llobregat) 사장과 마주 앉았다. 그는 2012년부터 사장을 맡아왔다. 익스트림 스포츠를 즐긴다고 해서 근육질의 스포츠맨 타입을 기대했지만, 실제 만나 보니 푸근한 인상이었다.
테팔이 오랫동안 사랑받는 비결을 묻자 그는 눌어붙지 않는 프라이팬의 사례를 들었다. 그 프라이팬을 처음 만든 1954년은 과거엔 없던 '일하는 주부'라는 존재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때였다. 직업과 가사를 함께 하는 주부들은 프라이팬에 눌어붙은 음식 찌꺼기를 긁어내는 데 예전처럼 많은 시간을 들이기 어려웠다.
"눌어붙지 않는 프라이팬은 간편하게 음식을 만들 수 있을 뿐 아니라, 프라이팬으로 음식을 만든 뒤 그걸 치우는 작업까지 편하게 한 제품입니다. 그전까지 누구도, 우리의 경쟁사인 다른 어떤 회사도 한 적이 없는 일이었어요. 우리가 해 온 일들은 다른 누군가 하지 못했던 일을 찾아서, 소비자의 만족도에 결여돼 있던 부분을 채워준 겁니다."
테팔의 창업자인 마크 그레고아르씨는 원래 낚싯줄과 낚시 도구가 엉키는 것을 막기 위한 재료를 개발하다가 유리섬유를 소재로 한 코팅을 발명했다. 당시 유리섬유는 아주 내구성이 좋지만, 일상 생활용품에 접목시키는 사례는 거의 없었다. 어느 날 부엌에서 요리하던 아내가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프라이팬에 요리하다 또 타 버렸네요. 자꾸 음식이 눌어붙어서 떼어내기 어려워요. 새 걸 하나 사 주든지, 아니면 어떻게든 날 좀 도와줘 봐요."
아내의 불평을 듣고, '프라이팬에 유리섬유를 코팅해 보면 어떨까?' 하는 아이디어가 번뜩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고, 기술을 개발해 2년 뒤인 1956년 테팔을 세웠다(테팔은 1968년 그룹 세브에 인수된다).
"저는 이 일화가 혁신이라는 것이 어디서 오는 것인지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사례라고 생각합니다. 혁신을 위해 우리는 소비자들에게 결여된 부분이 무엇인지 날마다 관찰해야 합니다. 혁신은 소비자들에게 근본적으로 결여된 부분을 채워줄 때 생기는 겁니다. 단지 기존 제품에다가 몇 가지 추가 기능을 덧붙인다고 해서 생기는 게 아닙니다."
눈에 띄는 변화를 만들어야 소비자들이 지갑 연다
테팔은 매년 꾸준히 평균 약 100개씩 신제품을 출시하고 있으며, 매출의 약 60~70%를 출시 3~4년 이내 신제품에서 올리고 있다. 요리를 하는 사람들은 이미 요리에 필요한 기본적인 도구는 전부 갖추고 있다. 그런데 왜 소비자들이 신제품이 나올 때마다 그걸 사는 걸까?
"왜냐하면 신제품이 소비자들에게 부가가치를 제공하고, 소비자들의 새로운 요구에 따른 새로운 해결책을 제시해 주니까요. 새로운 스마트폰이 출시되면 소비자들은 앞다퉈서 그걸 사고 싶어 하지요. 아주 비싼 제품이지 않습니까. 하지만 소비자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스마트폰을 사용하고 그러니 좀 비싸더라도 더 좋은 제품이 나오면 그걸 원하는 겁니다.
테팔 같은 주방용품은 전문적인 요리사가 아닌 한 매일 몸에 붙이고 다니는 아이폰만큼 제품과 자주 물리적·신체적 접촉을 하진 않지요. 그렇기 때문에 신제품이 기존 제품과 별반 차이가 없거나, 별로 피부에 와 닿지 않는 차이만 있다면 소비자들은 비싼 돈을 주고 새 제품을 사길 꺼립니다. 하지만 정말로 눈에 띄는 기능들이 추가되고, 그로 인해서 소비자들의 생활과 삶의 질이 훨씬 더 개선된다면 그들은 기꺼이 새 제품을 삽니다. 테팔이 지난 40여년간 해 온 일은 바로 이런 일이었습니다."
―소비자들의 새로운 요구는 어떻게 파악합니까?
"우리는 경쟁사들 제품도 자주 사용합니다. 저와 제 팀은 일주일에 3~4차례씩 주방용품 가게에 들러서 경쟁사 제품 중 새로 출시된 것이 있는지, 그것들이 어떤 특별한 점이 있는지, 또 거기에 무엇이 빠져 있는지 조사합니다.
또 정기적으로 날마다 전문적으로 요리하는 사람들을 만나서 그들이 무엇을 요구하는지 들어 봅니다. '어떤 제품은 오래 사용하니까 손이 쉽게 피로해지더라' '어느 새로운 레시피를 시험해 보려고 하는데 기존 제품으로 만들었더니 무엇이 불편하더라' '오래 불 옆에 놔뒀더니 이 부분이 쉽게 불에 타더라' 등등 여러 가지 자잘한 애로사항을요."
그는 신제품이 시장에서 성공할지는 "아직 출시되기 전 제품을 시험해 본 사용자들 반응을 볼 때 확신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만약 그들이 '음, 뭐 그럭저럭 괜찮네' 하는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인다면, 그 경우엔 잘해 봤자 시장에서 중간 정도의 성공밖에 거둘 수 없습니다. 하지만 사용자들이 '우와, 이런 게 다 있다니. 이건 내가 계속 원해왔던 거였어'라는 반응을 보인다면 그때는 모든 사람이 그 제품을 원할 거라고 확신할 수 있습니다."
몸통과 손잡이 부분이 분리되는 프라이팬과 냄비도 소비자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면밀히 관찰하라는 테팔의 철학에 기인한 것이다.
"일본의 부엌은 대개 매우 좁습니다. 우리는 일본 소비자들이 여러 가지 주방용품을 아주 좁은 공간에 전부 수납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봤습니다. 쉬운 일은 아니었지요. 그런데 몸통과 손잡이가 분리되는 제품(한국에선 '매직 핸즈'라고 불림)은 좁은 공간에 갖가지 주방용품을 보관하기 위해 골머리를 앓는 소비자들에게 아주 안성맞춤이었어요. 여러 종류의 냄비와 프라이팬을 25㎠ 안에 전부 수납할 수 있게 됐으니까요. 그 결과 일본에서 1백만여개가 팔려나가면서 이 제품은 대단히 크게 히트를 쳤습니다." 이 제품의 대성공에 힘입어 테팔은 일본을 프랑스에 이은 제2의 소비 시장으로 키울 수 있었다.
요리 강좌로 사회 변화를 체감한다
테팔의 모기업인 그룹 세브의 주요 이념 중 하나는 '고객의 현재 욕구뿐 아니라 소비자들의 열망과 바람을 예측하고 만족시킬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테팔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소비자들이 '바랄지도 모르는' 미래의 욕구를 어떻게 파악할 수 있을까.
"우리는 알루미늄 냄비와 프라이팬을 만들어 왔어요. 하지만 언젠가는 그것보다 더 싸고 가벼운 재료, 혹은 바닥의 열을 좀 더 골고루 분산시킬 수 있는 프라이팬 재료가 개발되면 사람들이 그것을 원하게 될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늘 새로운 재료를 시장에 들여오기 위해서 항상 연구하고 있습니다.
물론 소비자들이 직접 이런 요구 사항을 표현하진 않죠. '난 앞으로는 더는 알루미늄 팬을 원하지 않아요. 나는 이제 이런저런 재료로 만들어진 프라이팬을 원합니다'라는 식으로 말이죠. 대신 그들은 이렇게 말할 겁니다. '나는 지금까지보다 더 가벼운 프라이팬을 원합니다. 저는 음식이 절대 안 타는 주방 용기를 원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소비자들의 요구를 반영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늘 연구해야 하는 거죠."
테팔은 사회 변화도 늘 주시한다고 답했다.
테팔이 사회 변화를 체감하는 방법의 하나는 요리 강좌이다. "요리 강좌에선 매번 새로운 레시피를 만들고, 우리는 참가자의 면면을 보면서 어떤 연령대와 성별의 사람들이 그 레시피의 주된 소비자가 될 것인지 예측할 수 있습니다. 과거에 비해 젊은 사람, 남성 참가자가 많아졌다면 '아, 어린 사람들이 요리에 많이 관심을 가지는구나. 그러면 좀 더 안전한 조리 솥을 개발해야겠군. 남자들이 많으니까 제품 장치를 좀 더 단순화해야 하겠어'라는 식으로 말입니다."
그는 앞으로 주방 가전제품의 크기가 작아질 것으로 예측했다. "이젠 20~30년 전처럼 식구 4~5명을 위한 음식을 만들 필요가 없어지고 있으니까요. 지금은 1~2명이 먹는 음식을 만드는 작은 용기들이 점차 많아지고 있어요. 우리도 1~2인용 압력솥, 작은 토스터, 혼자 고기를 구워 먹을 수 있는 1인용 그릴 같은 걸 제작하고 있습니다. 주전자 사이즈도 작아졌고요. 이젠 점차 '작은 것이 아름답다(small is beautiful)'는 것이 주방 업계의 트렌드가 되고 있습니다."
로브레가 사장은 "요리는 곧 문화"라며 "테팔은 각 나라의 독특한 문화를 최대한 반영하려 한다"고 말했다. 테팔은 여러 시장의 각각 다른 수요에 맞추기 위해 다양한 현지화 제품을 개발했다. 우리나라에서도 마찬가지다.
대표적인 한국형 제품은 철 주물(쇠붙이를 녹여 거푸집에 부은 다음 굳혀서 만든 물건)에 비해 무게가 가볍고 다루기 쉬운 알루미늄 주물 재질로 만든 주방용품이다. 철 주물 제품과 비교하면 62%가량 가벼워 주부들이 들기 편하다. 코팅은 고급 재료인 티타늄을 사용해 내구성이 좋고, 조리 도중 음식 재료가 눌어붙거나 타지 않는다.
주물 밥솥은 한국 전통 가마솥 원리를 응용했다. 주물 제작 방식으로 만든 뚜껑이 수증기를 잡아주고, 뚜껑 내부 돌기가 수분을 일정하게 유지해 밥맛을 좋게 한다. 또 바닥이 두껍기 때문에 열이 일정하게 가열돼 충분히 뜸을 들일 수 있다.
주물 프라이팬은 한국인의 입맛에 맞게 볶음과 구이 요리가 노릇노릇한 정도로 구워지도록 표면 온도는 섭씨 175도에서 230도 사이로 맞췄고, 주물 냄비는 95~100도 온도로 바닥에서 재료를 뭉근하게 끓일 수 있도록 설계돼 육수가 진하게 우러나오는 국물, 찜 요리를 할 수 있다.
테팔 전기 그릴 제품도 한국 소비자들의 식생활에 맞게 변형했다. 냄새와 연기가 나지 않아 실내에서 간편하게 바비큐를 해 먹을 수 있는 전기그릴 제품은 전 세계적으로 좋은 반응을 얻었는데, 한국 시장에선 한 가지 기능이 추가됐다.
국물 요리를 즐겨 먹고, 그릴 제품 하나로 불고기도 하고 전도 부치는 등 다양한 요리를 하는 한국 소비자들을 위해 제품에 별도로 '전골판'을 하나 더 추가한 것이다. 현재 테팔의 전기그릴 제품은 국내 시장에서 51%의 점유율을 기록하고 있다.
☞ 5大 경영 시사점
결핍, 혁신이란 소비자가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문제에 대한 욕구를 찾아 그 해답을 제공해주는 것이다. 다시 말해 혁신은 결핍을 채워주는 것이다. 따라서 혁신을 할 때 ‘고객 경험’을 기반으로 하는 것이 중요하다. 고객의 진짜 니즈는 벽에 그림을 걸고자 하는 것인데, 못을 만드는 업체는 강하고 벽에 쉽게 박히는 못을 만드는 방법에 대해서만 고민한다. 손잡이가 분리 가능한 프라이팬 같은 제품은 주방기기와 연계된 고객 경험 전반에 대한 심도 깊은 이해 없이는 만들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눈에 보이는 혁신, 테팔의 로브레가 사장은 “말로 설명해야 하는 혁신은 혁신이 아니다”라고 했다. 고객이 혜택을 보고 느낄 수 있어야 비로소 혁신이다. “이렇게 좋은 기술을 만들었는데 왜 쓰지 않는 건가”라고 불평하는 공급자적 관점은 기업이 가장 경계해야 한다.
가이젠(改善), 경영에서 혁신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기존의 패러다임 전체를 바꾸는 혁신, 다른 하나가 기존의 제품이나 기술을 꾸준히 조금씩 개선해 나가는 점진적 개선이다. 도요타 자동차의 ‘가이젠(改善)’도 맥락을 같이한다. 혁신을 꿈꾼다 해서 존재하지 않던 기술이나 제품을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 관념을 가질 필요는 없다. 기존에 가진 것을 꾸준히 담금질해 나가는 것도 혁신이다.
선도 소비자 집단, 기업이 고객 니즈 기반의 혁신 플랫폼을 구축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선도 소비자 집단을 연구 개발과 제품 개발 단계부터 참여시키는 것이다. 테팔은 세계적 요리사들과 긴밀한 협력 관계를 구축하고 그들의 요구 사항들을 수렴해 혁신에 반영했다.
실험, 자동차 회사가 승객 안전을 위해 의무적으로 안전성 실험을 실시해야 하는 것과 달리 주방용품 회사 테팔은 그런 의무가 없다. 하지만 테팔은 시제품을 만든 뒤 시장 출시 전까지 약 한 달간 자체적으로 까다롭기 짝이 없는 실험들을 한다. 제임스 다이슨은 1979년부터 5년간 5127개의 시제품을 만들어본 끝에 먼지 봉투 없는 진공청소기를 개발했다. 테팔과 다이슨의 공통점은 우수한 제품을 향한 고집과 열정이다.
도움말 주신 분: 권상술 IGM 세계경영연구원 교수, 신우석 올리버와이만 코리아 상무, 신정호 맥킨지 코리아 부파트너, 이창양 카이스트 교수, 장대련 연세대 교수(가나다 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