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최초는 ?
무엇이든 최초의 것은 특별한 의미를 가지게 된다.
최근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인 순종(純宗, 1874~1926)과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 1894~1966)가 사용하던 어차(御車)가 문화재로 등록 예고된 것을 계기로 근대 문화유산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 한국역사상 최초의 승용차 '순종 부부의 어차'
순종과 황후의 자동차는 미국 GM社의 1918년식 캐딜락과 영국 다임러社의 1914년식 다임러로 아직도 현존하는 한국 최초의 승용차이다.
두 대의 승용차는 모두 고급스런 마론색(검붉은 색)의 7인승 리무진급 차량으로, 옆문에는 조선황실의 상징인 이화문(李花紋,오얏꽃 무늬)의 금도금 장식이 붙어 있고 내부에는 이화문으로 된 황금색 비단과 고급 카펫으로 장식돼있다.
또한 차체는 현대의 자동차들과 달리 나무로 제작됐고 외부 도장도 칠(漆) 방식을 채택하고 있는 등 전체적으로 마차와 비슷한 모양의 초기 자동차 모델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순종과 황후의 어차는 전문가들에 의해 복원돼 2001년부터 창덕궁 빈청에서 일반에 공개되고 있으며, 문화재청이 동산(動産) 형태의 근대유산으로는 처음으로 문화재로 등록예고했다.
▲ 국내 최초의 자장면집 '공화춘'
한국에만 있는 중화요리인 자장면은 언제 어디서 처음으로 만들어졌을까?
이를 밝혀줄 관련 자료는 거의 없지만 화교들이 '청요리'가 인기를 끌자 부두 근로자들을 상대로 싸고 손쉽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생각하게 됐고 이렇게 해서 볶은 춘장에 국수를 비벼서 먹는 '자장면'을 만들어 팔게됐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리고 정식으로 '자장면'이란 이름으로 음식을 팔기 시작한 곳은 1905년 개업한 '공화춘'으로 알려져있다.
인천시 중구 선린동 38번지에 소재한 공화춘은 지금은 당시 화려했던 옛 건물의 자취만 남아있고, 부근에 후대에 건축된 동명의 신축건물에서 영업을 계속하고 있다.
옛 공화춘 건물은 최근 문화재 246호로 등록됐으며, 인천 중구청은 현재 화교가 소유하고 있는 이 건물을 사들여 자장면 박물관을 건립할 계획이다.
▲ 대한제국 법률 1호 '도량형법'
대한제국에서 제정한 최초의 법률은 바로 '도량형법'이다.
이 법은 근대기(1905년-1945년)에 국가 표준으로 제작·사용됐던 도량형기(度量衡器)를 통용시킬 수 있는 근거를 마련했다. '도'란 자를 이용해 길이를, '양'은 되로 부피를, '형'은 저울로 무게를 재는 것을 말한다.
대한제국은 근대적인 도량형을 도입하기 위해 1902년(광무 6년)에 평식원(平式院)이라는 담당 관청을 설립해 서양식 도량형제인 미돌법(미터법)를 일부 채택하고 1905년(광무 8년)에는 대한제국 법률 제1호로 도량형법을 정했다.
▲ 등대 1호 '팔미도 등대'
국내 최초로 어두운 바다를 밝힌 등대는 인천 앞바다에 있는 '팔미도 등대'이다
인천시 중구 무의동 374번지에 위치한 팔미도는 인천에서 남서쪽으로 8km 지점에 있는 바위섬이며, 이 섬의 해발 71m 정상에 하얀 색의 '팔미도 등대'가 서있다.
'팔미도 등대'가 세워진 것은 1903년으로 일본인들이 프랑스 회사의 기술을 이용해 착공 1년1개월 만에 등대를 설치했다. 등대의 높이는 7.9m로 건설 당시 90촉광짜리 석유등으로 등대를 밝혔으며, 인천 내항과 외항을 구분하는 분기점 역할을 했다.
'팔미도 등대'는 광복 이후 교통부에서 인수해 렌즈 내경 300mm, 초점거리 150mm인 백열등을 자가발전 시설로 설치해 9천 촉광의 밝기를 냈으며, 처음으로 안개 신호기를 설치함으로써 등대로서의 제대로 된 면모를 갖추었다.
'팔미도 등대'는 러일전쟁에서 사용됐고 인천상륙작전 당시에도 등대수들이 피난을 가지 않고 석유등을 켜놓은 채 등명기를 손으로 돌려 상륙에 큰 도움을 주었다.
▲ 최초의 대중가요 '희망가'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 / 부귀와 영화를 누렸으면 희망이 족할까”
국내 최초의 대중가요는 너무나도 유명한 '희망가'이다. 외국곡에 가사를 붙인 '희망가'는 3·1 만세운동의 물결이 지나간 뒤인 1923년 무렵부터 대중 속에 급속하게 퍼졌다.
민족의 염원이 수포로 돌아간 뒤 대중의 마음은 좌절과 허탈감 그 자체였으며, 이런 시대상황에서 애조띤 노래가 유행하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이 노래를 '희망가'라고 칭했다. 작사자와 편곡자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 '수복신'이 등장한 한국 최초의 지폐
이 땅에 처음 등장한 지폐는 1893년(고종 30년)에 만들어진 '호조태환권'이라는 지폐이다. 이 지폐는 제조를 관장했던 부서인 호조에서 당시 화폐로 쓰고 있던 엽전을 회수해 태환(兌換), 즉 지폐로 화폐를 바꾸기 위해 만든 것이다.
그러나 이 지폐는 화폐업무를 담당한 일본인들의 운영권 다툼 때문에 공식적으로 사용되지 못하고 모두 소각됐다.
이후 일제강점기에 지폐들이 발행됐지만 한국의 지폐라고 볼 수 없고, 광복 직후인 1945년 9월 1일부터 사용된 1백원짜리 조선은행권이 한국 최초의 지폐라고 할 수 있다.
이 지폐에 인쇄돼있는 흰 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노인은 과연 누구의 모습을 그린 것인지 수집가들 사이에 논란이 있었지만, 조선은행 영업부 최기룡 부지배인에 의해 지폐 속의 주인공은 장수와 복을 가져다주는 '수복신(壽福神)'으로 확인됐다. 이 최초의 지폐는 정부수립 직전까지 사용됐다.
▲ 최초의 서구식 공원 '자유공원'
자유공원은 인천시 중구 송학동1가와 전동, 북성동3가에 걸쳐 있는 한국 최초의 서구식 공원이다. 인천 앞바다와 인천항, 인천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응봉산에 조성된 공원으로 면적이 6만4천480㎡에 이른다.
자유공원은 1883년 인천의 개항과 함께 응봉산 일대에 일본, 청, 미국, 영국, 러시아 등이 형성한 '만국지계'가 들어서게 되자, 1888년 11월 이들 열강의 공동명의로 '만국공원'이란 이름으로 조성됐다.
그러나 일본 세력의 확장으로 각국 거류지가 철폐되고 공원 관리권이 1914년 인천부로 이관되면서 서공원이라 불렸고, 그후 1957년 인천상륙작전을 지휘한 맥아더 장군의 동상이 세워지면서 자유공원으로 명칭이 바뀌면서 인천의 상징처럼 여겨지고 있다.
▲ 최초의 지진방지 건물 '한전 사옥'
한국전력 사옥은 서울 중구 을지로 2가에 있는 지하1층, 지상7층 규모의 철근콘크리트조 건물로 1928년 경성전기주식회사 사옥으로 건립됐다.
국내 최초로 내화·내진 설계를 적용하고 엘리베이터, 그래스블럭 등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건축으로 눈길을 끌었다. 현재까지도 내·외부 건물 보존상태가 양호하며, 건축사적 가치가 평가돼 1호 등록문화재로 지정됐다.
이밖에 국내 최초이자, 아시아 최초의 해저터널인 통영해저터널(등록문화재 201호), 국내 최초의 철도교인 한강철도교(등록문화재 250호)등도 국내에서 최초의 건축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 국내 최초 다목적댐 ‘섬진강 댐’
다목적댐으로 국내 최초로 건설된 댐은 섬진강댐이다, 공사가 착수된 것은 1940년, 그리고 준공한 때는 1965년. 25년 만에 준공된 섬진강댐은 격동기의 시대상을 그대로 반영하면서 건설된 댐이다. 이 댐이 생기기 전까지만 해도 댐은 관개용으로 건설됐다. 가뭄에 대비해 미리 물을 가두어두었다가 필요할 때 사용하기 위한 것이다.
이때의 댐은 대부분 흑으로 막은 것이었고, 그래서 높이는 높지 않았다. 그러나 인구가 증가하고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물은 관개용만이 아닌 식수, 공업용수 등으로 이용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댐이 다목적용으로 건설되기 시작한 것. 댐 높이 64 m. 제방길이 344.2 m. 저수용량 4억 6600만 t. 동진강(東津江) 하류지역의 수리불안전답과 계화도(界火島) 간척지에 관개용수를 공급하고, 호남지방의 전력난(電力難) 해소에 도움을 주고 있는 댐이다. 이 댐의 완공으로 연간 1억 6634만 7000 kWh의 전기와 연간 2억 2500만 m3의 각종 용수를 공급하게 되었으며, 초당 1,400 m3의 홍수조절 능력을 가지게 됐다.
◆ 수염 긴 노인이 도안된 국내 최초 지폐
우리나라에서 맨 처음 사용된 지폐는 어떤 것일까? 이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우선 고종 30년 1893년에 만들어진 지폐를 언급할 필요가 있다. 바로 호조태환권이라는 지폐. 지폐 제조를 관장했던 부서가 호조였다는 것을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는데, 50냥ㆍ20냥ㆍ10냥ㆍ5냥짜리가 있었다고 한다. 정부에서 이 지폐를 만든 것은 당시 화폐로 쓰고 있던 엽전을 회수하여 새로운 화폐제조를 정착시키기 위해서였다. 태환(兌換)이라는 말은 바로 그렇게 통용되고 있는 화폐와 바꾸는 일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지폐는 만들어놓기만 했지 공식적으로 사용되지 못했다. 화폐 업무를 담당한 일본인들의 운영권 다툼 때문. 만약 그 문제가 해결돼 새로운 화폐로 쓰였다면 호조태환권이야말로 한국 최고의 지폐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 이 지폐는 한 장도 사용되지 못한 채 모두 소각되고 말았다.
이후 나온 지폐는 모두 식민지 시대에 발행된 것이었다. 따라서 그때의 지폐는 우리나라의 돈이라 할 수 없다. 한국의 지폐로 최초인 것은 당연히 광복 이후 맨 먼저 한국인들이 화폐로서 사용한 것을 찾아야 할 것이다. 그때 맨 먼저 사용된 지폐는 1백 원짜리 조선은행권. 1945년 9월 1일부터 사용됐다. 광복이 된 나라에서 발행하여 사용한 지폐이기 때문에 이 돈은 분명 우리나라의 돈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화폐업무를 담당했던 사람들은 모두 일본인들이었다. 일제는 한국인들에게 그런 일을 시키지 않았기 때문에 광복이 되었을 때 우리의 손으로 그 일을 관리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던 것. 광복이 된 상태에서 처음으로 사용된 지폐는 그렇기 때문에 액면도, 모양도, 도안도 모두 일본사람들의 주도하에 만들어졌다. 액면 1백 원은 고액이었다. 통화 조절을 명분으로 남발한 것이었다.
도안도 1915년부터 일제가 각종 지폐에 공용으로 쓰던 것을 그대로 사용했다. 크기는 가로가 162mm, 세로가 93mm, 조선서적주식회사에서 옵셋 인쇄로 제조되었다. 화폐를 인쇄할 수 있는 시설은 일본에 있었는데, 그렇게 국내에서 인쇄한 것은 일제가 전쟁 말기 수송상태가 마비될 것을 염려하여 시설을 서울로 공수해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지폐는 아직까지도 수집가들 사이에 논란이 되고 있다. 다름 아닌 탐스러운 흰 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어느 노인의 모습이 인쇄되어 있는 도안인데, 그 사람이 누구냐 하는 것 때문이다. 화폐 도록에는 이 노인이 운양(雲養) 김윤식(金允植)으로 되어 있고, 그렇게 알려져 왔다. 그는 한일합방 후 일본 정부로부터 자작 벼슬을 받은 반면, 조선 독립의 청원서를 보내기도 한 인물이다. 실제로 그의 사진을 보면 도안의 노인과 비슷하다.
그러나 한 가지 이상한 점은 관보에 그 도안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점이다. 그런데 1947년도 이런 논란 때문에 한 시민이 중앙방송국에 문의를 한 적이 있는데, 그때 조선은행 영업부 부지배인 최기룡 씨는 그 도안의 주인공이 운양이 아니고, 가공적인 수복신(壽福神)이라고 해명해주었다. 이런 사실은 그 프로그램의 질의응답 내용을 책으로 엮은 ‘상식독본’에 실려 있다. 위조 방지를 위해 수염이 있는 인물화를 도안으로 사용하는 것은 흔한 방법이라는 설명을 했던 것. 즉 수염 긴 노인 도안은 수복신 상징. 이 지폐는 정부수립 직전까지 사용되었다.
◆ 국내 최초 근대묘지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
마포구 합정역 근처 바른 편에는 천주교 절두산 기념교회가 왼쪽에는 개신교 외국인 연합교회가 소재해 있다. 두 교회는 공히 양화진이라고 하는 한국적 역사와 맞물려 고난 속에서 역사의 분수령을 넘다가 붉은 태양처럼 몸을 태우며 숨을 거두고 잠들었다는 특징을 간직한 곳이다. 합정동 2호선 전철이 지나는 육교 옆 바른쪽으로 넓게 트인 공원이 있는데, 외국인 묘지다. 100여년이 넘는 시간동안 성장위주의 개발논리에 밀려 무관심 속에 방치되어 온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을 우리의 소중한 근대문화유산이 아닐 수 없다.
마포구 양화진 선교사 묘원에는 우리나라의 근대화에 앞장섰던 많은 저명한 외국인들이 그들이 자녀와 함께 안장되어 있으며, 17개국의 약 430여기의 묘가 조성되어 있어 근대 묘지 형성 과정 및 비문의 변천사를 연구할 수 있는 역사 학습의 장으로 자리매김 하고 있다. 묘원들은 서양 영화 속에서 쉽게 보이는 묘지 형태와 별로 다르지 않다. "여기 주를 사랑하는 종이 세상의 삶을 마치고 누워있다" "한국을 사랑하여 한국인의 영혼을 어루만지다 숨진 아무개가 여기 누워있다“
어느 묘지 뒷면에는 “우리는 결코 한국인을 위해 쏟은 당신의 사랑을 잊지 못할 것입니다”라는 글귀도 새겨져 있다. 하나같이 평토장이고 희미한 봉분이 형태만을 드러낸 애장도 꽤 많다. 일반적인 묘지와는 차별성이 있는 이 묘원은 외국인 선교사로서 고향을 떠나 낯선 이국의 땅에서 옳은 신념을 위해 묵묵히 봉사하다 순교한 순교자들의 숭고한 정신이 깃들어 있기에 가치가 높은 유산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