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과 전북의 경계에 있는 배티재, 산배나무가 많아서 배티재, 이치고개에서 바라보는 대둔산 언제나 보아도 아름답다. 호남의 금강산이라고 부르는 대둔산 자락 이치고개에서 임진왜란 당시 큰 싸움, 이치전투가 벌어졌다. 이치와 웅치 전투의 현장을 답사하기 위해 전라북도 교육연수원 문병기 원장님과 사십여 명의 선생님이 길은 나선 것은 신록이 우거진 5월 이었다.
웅치전투가 있은 지 한 달쯤 뒤인 1592년 8월 13~14일, 금산과 완주를 잇는 대둔산 자락의 이치에서는 진주대첩, 한산대첩, 행주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4대 대첩’으로 꼽히는 큰 싸움이 벌어졌다. 산돌배나무가 있어 배티재라고도 불리던 이치는 높이 350미터의 고개로, 전주에서 고산현을 지나 충청남도 금산군 진산면으로 이어지던 길이다. 전라도 순찰사 이광은 광주 목사 권율을 도절제사로 삼아 일본군을 막게 하였고, 배티재는 동복 현감 황진에게 맡겼다. 2000여 명의 일본군이 배티재를 향해 진격해 왔다. 웅치에서 적의 병력을 파악한 관군과 의병들은 요새를 미리 점령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황진의 부대는 최전방에서 나무를 사람 키 만큼만 남기고 자른 뒤 그 뒤에 숨어 있었다. 상황을 모르는 왜군은 맹렬한 기세로 총공격을 펼쳤다. 형형색색의 군복을 입은 왜군들은 군마를 타고 창검을 번뜩이며 밀려왔고, 왜적이 치는 북소리로 산천이 들썩였다. 조선 병사들은 징 100여 개를 한꺼번에 치며 일제히 화살을 쏘았고, 목숨을 걸고 싸웠다. 불꽃 튀는 대접전 끝에 이치싸움은 조선의 대승리로 끝났는데, 그때의 상황이 조경남이 지은《난중잡록》에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금산의 적 수천 명이 진산에 들어와 불을 놓고 약탈하니, 배치 복병장 공주 목사 권율, 동복 현감 황진이 군사를 독려하여 막아 싸우는데, 황진이 탄환을 맞아 조금 퇴각하는 바람에 적병이 진 채로 뛰어들었다. 우리 군사들이 놀라 무너지는지라, 권율이 칼을 뽑아 들고 후퇴하는 아군을 베이며, 죽음을 무릅쓰고 먼저 오르고, 황진도 역시 상처를 움켜쥐고 다시 싸워 우리 군사 한 명이 백 명의 적을 당하지 않은 자가 없으니, 적병이 크게 패하여 기계를 버리고 달아났다.
패색이 짙어지자 왜군은 염불을 외우기도 하고, 총칼을 내던지고 도망치기도 했다. 왜군의 깃발이 금산 쪽으로 움직였고, 권율과 황진이 거느린 조선군은 왜군을 패퇴시켰다. 이 전투에서 조선군과 왜군이 막대한 피해를 입었는데, 왜군 측의 피해가 더 컸다. 전투를 승리로 이끈 황진은 큰 부상을 입었기에 조선 병사들은 그를 업고 전주성에 입성했고, 전주성은 온통 잔치 분위기였다. 당시 조정에서는 호남마저 잃는 날에는 끝장이라며 개탄하다가 이 승리로 한숨을 돌렸다. 왜군은 이치전투 패배 후 전주를 중심으로 한 호남 점령의 꿈을 완전히 포기하고 남은 병력을 금산으로 집결시켰다.
당시 이순신 장군의 수군은 한산도 싸움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그때 일본군을 물리침으로 해서 곡창 지대인 전라도가 보전될 수 있었고, 왜군의 식량보급이 차단되어 조선을 지키고 왜군이 물러가는 계기가 되었다. 호남이 없었더라면 조선이 망했을 것이라는 말은 웅치와 이치전투 때문에 나왔다. 이 여세를 몰아 권율 장군은 1593년 2월 행주대첩에서도 대승을 거두었다. “전투에는 50가지의 방법이 있는 것이 아니다.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그것은 승리자가 되는 것이다.” 앙드레 말로의 말이다.
이치 전적지 기념비는 대둔산 입구를 지나 금산 가는 길목의 휴게소가 있는 고갯마루에 서 있고, 기념관에는 권율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고종 때 세운 이치대첩비는 1944년 일제의 의해 파손되어 일부분만 남아 있고, 새로 세운 기념비는 강암 송성용 선생이 글씨를 썼다.
조선 전기의 문신이 신숙주가 함경도 온성에서 근무할 때의 쓴 시가 남아 있다. “국경의 달 오랑캐의 피리 소리는 오랜 나그네를 근심하게 하고, 산의 꽃 계곡의 버들은 갠 날씨에 아름답구나.”라고 노래했는데, 그 시를 읽다가 보면 한국 전쟁 당시 미군과 국군이 북진하여 중국군(중공군)과 대치하고 있을 때 피리 소리에 마음이 홀려 고전하였다는 것과 연결 지을 수 있을 것이다.
온성에서 가까운 왕재산은 김일성이 1933년 3월 11일 조선인민혁명군을 이끌고 일제의 국경경비망을 뚫고나와 이른바 ‘왕재산 회의’를 소집했던 곳이라 하여 1975년 이곳에 기념비를 세웠다. 박세길이 지은 《다시 쓰는 한국 현대사》에 는 신숙주가 들었던 그 피리 소리 때문에 국군이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말려든 부분이 자세하게 나와 있다.
10월 25일 오전 11시 한국군 제2연대 제3대대가 평안북도 온정 서북쪽 약 13킬로미터의 우수동 부근 험한 길에 들어서고 있을 때였다. 제2연대가 퇴각 후 집결해 있었던 온정 일대에는 이상한 불안과 공포가 감돌았다. 25일 늦은 밤, 온정을 에워싼 어둠 속으로 부터 갑자기 이상스러운 피리 소리가 울리고, 징을 두드리는 듯한 금속성도 들려왔다. 피리 소리는 중국 악기인 차르멜라에서 울려 나오는 것이었다. 구슬프게 어두운 밤을 뒤 흔드는 차르멜라 소리는 평상시의 길거리에서도 구슬프게 마련인데, 싸움터에서 갑작스럽게 울려 나오니 이상한 불안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 제2연대 병력은 무언가에 홀린 듯, 악령에 쫓기는 듯 완전히 전의를 상실하고 그대로 뿔뿔이 흩어져 청천강 기슭까지 후퇴하고 말았다. (……) 함성이 산 전체를 울리며 메아리치자 미군은 적의 병력이 무한한 것처럼 느꼈다. 이른바 인해전술의 마술에 걸려든 것이다. (……) 북한군과 중국군의 총 반격은 미군과 한국군의 전투 능력을 순식간에 마비시키고 말았다. 달리 말하자면 미군과 한국군의 혼을 빼앗아버린 것이다.
고지마 노보루 기자의 《한국전쟁》에 따르면 대부분의 경우 북한군과 중국군은 실제로는 작은 규모의 병력으로 갖가지 음향 효과를 동원하여 대부대가 갖는 위압감을 연출해냈다.
꽹과리를 치고 바람을 찢을 듯이 울리는 나팔 소리를 내면서 물결과 같은 대군이 들짐승과 같은 함성을 지르며 올라왔다. 추운 밤의 산속이다. 총소리와 나팔, 차르멜라, 피 리, 꽹과리 소리가 숲 속의 나무를 흔들리게 했고, 함성은 골짜기에 메아리쳤다. 한국군으로서는 적의 병력이 무한히 증가되어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당시 피리소리는 두고 떠나온 먼 고향에 대한 향수를 자아냈는데, 500여 년의 세월을 넘어 그 피리 소리가 이어져온 것도 그렇지만, 전통이 현대 의 막강한 병력과 무기를 제압한 것을 무어라고 설명할까?
그로부터 백여 년의 세월이 흐른 뒤 조선 군사들이 징을 치면서 왜군을 패퇴시켰으니, 역사는 항상 돌고 도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