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릉 42기 중 여덟 번째로 남양주의 홍릉을 소개합니다.
순서는 제가 직접 다녀왔던 순서대로 합니다.
남양주 홍릉과 유릉
홍릉(洪陵, 고종과 명성황후)
위치 : 경기 남양주시 홍유릉로 352-1
조성 연도 : 1897년(광무 1), 1900년(광무 4), 1919년
왕릉 형식 : 합장릉
합장릉(合葬陵)
합장릉은 왕과 왕비를 하나의 봉분에 합장한 능이다. 영조 이전의 합장릉은 혼유석을 2좌씩 배치하였으나 영조 이후에는 혼유석을 1좌씩 배치하였다. 대표적으로 세종 영릉, 인조 장릉, 정조 건릉 등 8기의 능이 있다. 특이하게 순종황제 유릉은 황제와 황후 두 분을 하나의 봉분에 합장한 동봉삼실(同封三室) 합장릉이다.
홍릉과 유릉은 기존의 조선왕릉 형식이 아닌 대한제국 황제릉의 형식으로 조성되었다. 고종은 대한제국 선포 전후로 대신들을 중국 황제릉으로 보냈고, 이를 바탕으로 명나라 황제릉의 제도를 일부 인용하고 기존의 조선왕릉 형식을 계승하여 새롭게 대한제국 황제릉 제도를 만들었다.
기존 조선왕릉과 달라진 점은 크게 두 가지인데, 먼저 제향을 지내는 건물인 정자각(丁字閣)을 일자형 침전(寢殿)으로 바꾸었고 침전 안에는 어탑(御榻)과 당가(唐家)를 배치하였다. 또 능침공간에 있던 문석인, 무석인, 석마, 석양, 석호 등을 침전 앞으로 배치하였는데, 석양과 석호를 없애고 기린석, 코끼리석, 사자석, 해치(해태)석, 낙타석, 석마 순서로 바꾸었다.
홍릉과 유릉 주변에는 의민황태자(영친왕)와 황태자비의 영원(英園), 황세손 이구의 회인원(懷仁園), 고종의 아들 의친왕의 묘, 고종의 딸 덕혜옹주의 묘, 고종의 후궁(귀인 장씨, 광화당 귀인 이씨, 삼축당 김씨)과 의친왕의 후실(수관당 정씨, 수인당 김씨)의 묘 등 대한제국 황실 가족의 무덤이 있다.
▷ 홍릉(洪陵) 이야기
홍릉은 대한제국 1대 고종과 명성황후 민씨의 능이다. 홍릉은 한 봉분 안에 황제와 황후를 같이 모신 합장릉(合葬陵)의 형식으로, 기존 조선왕릉의 형식과 다른 대한제국 황제릉의 형식으로 조성되었다. 1895년(고종 32) 명성황후가 을미사변으로 참변을 당한 후 폐위와 복위를 거쳐 현 동구릉 내 숭릉 오른쪽 언덕에 숙릉(肅陵)이라는 이름으로 왕릉공사를 진행하였다. 그러나 친일 내각이 무너지면서 고종은 왕릉공사를 중단시켰다. 1897년 대한제국이 선포된 후 명성황후로 추존하고 홍릉이라는 이름으로 현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에 능을 새로 조성하였다. 이때 대한제국 황제릉 제도를 일부 반영하여 제향을 지내는 건물인 정자각을 침전으로 바꾸었다. 이후 고종은 1900년(광무 4) 새로운 홍릉 자리를 현 남양주시 금곡으로 정하고 대한제국 황제릉 형태로 공사를 진행하였다. 그러나 바로 능을 옮기지 못하였다가 1919년 고종이 세상을 떠나면서 청량리 홍릉을 현재의 자리로 먼저 옮기고, 고종을 합장하여 현재의 홍릉이 되었다.
능침의 봉분은 병풍석과 난간석을 둘렀고, 그 주변으로 석상(혼유석), 망주석, 장명등만 배치하였다. 제향공간인 침전 앞으로 문석인, 무석인, 기린석, 코끼리석, 사자석, 해치(해태)석, 낙타석, 석마 순으로 석물을 배치하였는데, 석마만 2쌍 배치하였다. 비각 안에는 1개의 표석이 있는데 앞면에만 ‘대한 고종태황제 홍릉 명성태황후 부좌’라고 새겨져 있다. 홍살문과 향로와 어로 사이에는 거석(炬石, 횃불을 걸어 놓을 때 쓰는 석조물로 추정)이 있다.
▷ 고종(高宗) 이야기
고종(재세 : 1852년 음력 7월 25일 ~ 1919년 양력 1월 21일, 왕재위 : 1863년 음력 12월 13일 ~ 1897년 양력 10월 11일, 황제재위 : 1897년 양력 10월 12일 ~ 1907년 양력 7월 19일)는 흥선대원군(헌의대원왕)과 여흥부대부인(순목대원비) 민씨의 둘째 아들로 1852년(철종 3) 청니방 사저(운현궁)에서 태어났다.
1863년 철종이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나자 당시 대왕대비인 신정황후(추존 문조의 황후)의 명으로 익종(문조)의 양자로 입양되어 익성군(翼成君)에 봉해졌고, 관례(冠禮)를 행한 뒤 창덕궁 인정문에서 왕위에 올랐다. 12세의 나이로 즉위하여 신정황후가 수렴청정을 하였고, 생부인 흥선대원군이 국정을 운영하였다가 1873년(고종 10) 친정(親政, 왕이 직접 정치를 행함)을 하였다.
재위기간 동안 강화도조약을 시작으로 세계정세에 발맞추고자 문호를 개방하여 서양과 수교를 하였고, 조사시찰단을 파견하여 새로운 문물을 들여왔다. 하지만 개화파(開化派)와 수구파(守舊派)의 대립으로 임오군란(1882년)과 갑신정변(1884년)이 일어났고, 1894년(고종 31) 동학 농민운동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같은 해 갑오개혁을 시행하여 정치·경제·법·사회제도 등을 바꾸었다. 그러나 1895년(고종 32) 을미사변을 겪은 후 신변의 위협을 느껴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기기도 하였다(아관파천). 1897년 자주 독립국가의 체제를 갖추고, 세계열강과 동등한 국격을 갖추기 위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연호(年號)를 광무(光武)로 정한 뒤 환구단에서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황위에 오른 후 개혁을 추진하여 일제를 견제하려 하였으나, 러일전쟁 이후 일제의 압력이 심해지는 가운데 1905년(광무 9)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빼앗겼다.
1907년 을사늑약의 무효함을 주장하기 위해 세계만국평화회담이 열리는 헤이그로 밀사를 파견하였으나 일제의 방해로 실패하였다. 이 일로 일제와 친일파의 강압으로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났고, 순종이 황위에 오른 후 태황제(太皇帝)로 불리다가 1910년 경술국치로 주권을 일제에게 빼앗기면서 조선국 이태왕(덕수궁 이태왕)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후 1919년 덕수궁 함녕전에서 67세로 세상을 떠났는데, 고종의 장례일을 맞추어 3·1운동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 명성황후(明成皇后) 이야기
명성황후 민씨(재세 : 1851년 음력 9월 25일 ~ 1895년 음력 8월 20일)는 본관이 여흥인 여성부원군 민치록과 한창부부인 이씨의 딸로 1851년(철종 2) 여주 사저에서 태어났다. 1866년(고종 3) 고종의 생모 부대부인 민씨의 추천으로 왕비로 책봉되었다. 통상수교거부정책에 맞서 개화정책을 추진하였으나 1882년(고종 19) 임오군란으로 신변이 위험해지자 궁궐을 탈출하여 피신 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갑신정변(1884년) 때에는 급진 개화파를 견제하였으며, 갑오개혁 이후 일제를 견제하기 위한 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1895년(고종 32) 경복궁 건청궁 옥호루에서 45세로 세상을 떠났다.
1894년 갑오개혁이 시행되자 러시아에 접근하여 일본 세력을 추방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를 사주하여 명성황후를 살해할 계획을 세웠다. 미우라는 1895년 10월 2일(양력) 한성신보사에 있는 낭인을 이용하고자 사장 아다치를 공사관으로 불러 거액의 거사자금을 주고 왕비시해의 전위대로 삼아 흥선대원군을 궁중으로 호위하는 일을 담당시켰다. 그 외 일본군 수비대와 일본인 거류지 담당 경찰관을 동원할 계획을 세웠다. 한편 정부에서는 일본 훈련대의 해산과 무장해제를 통고하고, 상황이 급변함을 직감한 일본은 명성황후의 시해 계획을 10월 8일(양력) 새벽으로 정하였다. 일본인 자객들은 명성황후의 처소인 건청궁 옥호루로 들이닥쳐 궁녀들 사이에서 명성황후를 찾아내 처참하게 살해한 후 시신을 불에 태웠다.
명성황후가 시해된 후 일제는 고종을 압박하여 폐위하였으나 곧바로 후궁(빈)으로 삼았고, 두 달 후 다시 왕비의 신분을 회복하였다. 이후 고종은 장례를 준비하였으나 아관파천으로 장례를 중단하였고, 1897년 대한제국 선포 후 명성황후로 추존한 후 황후의 예로 장례를 치렀다.
첫댓글 오늘 좀 늦으셨군요.....지각??
아침부터 종일 미팅에 소개팅에....
@베라루빈 올~~~ 이쁨??/
@supervisor 내일 오전에 에프터 있습니다 ^^
@베라루빈 남 vs 남 ??? ㅎㅎㅎㅎㅎ
@supervisor 늙크크남끼리 2대2
좋은정보와 지식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퍼왔을 뿐인데...
초딩때 징그럽게소풍갔지
중딩때 백일장까지..
하지만 지금은 부모님댁가면 산책하러가는곳
왕릉 근처 초등학교나 어린이집은 단골 소풍장소죠~
아.. 황제릉.. 이건 설명을 안 봤으면 몰랐겠네요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홍릉과 유릉은 대한제국 황제분들의 릉이므로 조선왕릉과는 약간 다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