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도야 울지마라
1.사랑을 팔고사는 꽃 바람속에 너 혼자 지키려는 순정의 등불 홍도야 울지마라 오빠가있다 아내의 나갈 길을 너는지켜라
2.구름에 싸인 달을 너는 보았지 세상은 구름이요 홍도는 달빛 하늘이 믿으시는 네 사랑에는 구름을 걷어주는 바람이 분다
3.홍도야 울지마라 굳세게 살자 진흙에 핀 꽃에도 향기는 높다 네 마음 네 행실만 높게 가지면 즐겁게 웃을 날이 찾아오리라
김영춘 (金英椿 1918-2006.02.22)(본명 김종재) - 홍도야 우지마라
가수 김영춘! 1918년 경남 김해에서 태어난 그는 본명이 김종재입니다. 1937년, 열아홉에 김해농림고등을 졸업하고, 시국이 점차 일제말의 깊은 어둠을 향해 치달아가던 1938년, 김영춘의 나이 불과 스무 살에 콜럼비아레코드사 주최 전국가요콩쿠르에 출전하여 입상하고 가수의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김영춘의 첫 데뷔곡은 그해 11월에 발표한 '항구의 처녀설'(처녀림 작사, 김송규 작곡, 김영춘 노래, 콜럼비아 40838)입니다.
김영춘 노래의 전문작사자로는 처녀림, 김상화, 이고범, 이하윤, 남해림, 부평초, 산호암, 이가실, 함경진, 남려성, 을파소 등이었고, 작곡가로는 김송규, 김준영, 이재호, 이용준, 김기방, 남전, 어용암, 한상기, 손목인, 하영랑, 남전 등입니다. 여기서 처녀림은 극작가 박영호 선생의 필명이고, 이가실은 시인 조명암 선생의 또 다른 필명입니다. 이하윤, 을파소(김종한), 유도순, 이고범(이서구) 등의 문학인들이 노랫말 짓는 일을 맡았지요.
이들과의 합작으로 만들어 김영춘이 불렀던 가요작품들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대히트곡 '홍도야 우지마라'를 비롯하여 '항구의 처녀설' '국경특급' '당신 속을 내 몰랏소' '북국천리' '동트는 대지' '나그네 황혼' '청춘마차' '장장추야' '희미한 달빛' '향수천리' '타향에 운다' '버들닢 신세' '인정사정' '남국의 달밤' '비연의 청춘항' '유랑써커쓰' '항구의 항등' '포구의 여자' '잘 있거라 인풍루' '청노새 극장' '타향사리 목선' '사막의 환호' '바다의 풍운아' '사륜마차' '항구야 잘 있거라' '동아의 여명' '아류산 천리' '목란의 자랑' '의주에 님을 두고' '성황당 고개' '항구의 전야' 등 30여곡이 전부입니다.
워낙 '홍도야 우지마라' 한 곡의 인기가 하늘을 찌를 듯했기 때문에 김영춘의 다른 노래들은 상대적으로 묻혀버리고 만 것이지요. '홍도야 우지마라'는 원래 남일연이 불렀던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란 노래의 뒷면에 실렸는데, 이곡보다 오히려 뒷면의 곡이 대히트곡이 되었고, 이로써 김영춘은 콜럼비아레코드사의 대표가수 자리에 올랐습니다.
일제말 김영춘은 이규남, 송달협, 이화자, 박향림 등과 함께 버라이어티쇼에 출연하지만 생활은 힘들고 곤궁하기만 했습니다. 이윽고 1950년대로 접어들어 가수 박재홍이 '홍도야 우지마라'를 다시 취입하고 크게 히트를 시키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한국인 의식의 원형에서 '슬픈 홍도'가 하나의 표상으로 깊이 각인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1970년대로 접어들어서도 같은 제목의 라디오드라마가 제작되어 방송되기도 했습니다.
1995년 경기도 시흥 방산리에는 '홍도야 우지마라' 가요비가 세워졌는데, 이것은 이 고장 출신 문화인 이서구의 업적을 기리기 위한 뜻으로 만들었습니다. 그 누구도 찾는 이 없는 가수 김영춘의 노후는 한없이 쓸쓸했습니다. 2006년, 88세를 일기로 가수는 세상을 떠났지만 노래 '홍도야 우지마라'는 한국인의 기억 속에서 하나의 원형으로 영원히 자리잡고 있을 것입니다.
(시인·영남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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