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영휘[閔泳徽] 1852(철종 3)~1935. 한말의 문신. 본관은 여흥. 초명은 영준(泳駿). 자는 군팔(君八), 호는 하정(荷汀). 아버지는 증(贈)영의정 두호(斗鎬)이다. 1877년(고종 14) 정시문과에 급제해 주서·정언을 지내고, 민씨척족세력을 배경으로 동지경연사·지돈녕부사 등을 지냈다. 1884년 갑신정변을 진압하는 데 앞장섰고, 1886년 참의내무부사·도승지, 이듬해 주일변리대신(駐日辨理大臣)으로 일본에 파견되었다. 귀국한 뒤 민씨척족세력의 우두머리로 경리사(經理使)·이조판서·선혜아문당상·친군경리사 등을 역임했다. 1894년 갑오농민전쟁이 일어나자 청의 위안스카이[袁世凱]에게 도움을 요청해 토벌하려 했다. 이후 갑오개혁이 실시되자 탐관오리로 논죄되어 전라남도 영광 임자도로 귀양가게 되었으나 탈출해 벽동(碧潼)의 청군부대에 은신하고 있다가 중국으로 도망갔다. 1896년 대사령(大赦令)으로 귀국한 뒤 중추원의장·헌병대사령관 등을 지냈다. 1910년 한일합병 후 일본정부로부터 자작작위를 받았다. 한편 상업은행의 전신인 천일은행(天一銀行)을 세웠고, 1906년 5월에는 휘문학교(徽文學校)를 설립했다.
.................................... 민영준 : 옛날 이름으로 죄지은 게 많아서 이름을 바꾼 사례.. 민영준->민영휘, 장박->장석주
조선 말기 용인 출신의 문신.. 본관은 여흥(驪興). 민두호의 아들이다. 고종(高宗)때 민씨 세도의 거두, 1894년 동학혁명 당시 선혜당상(宣惠堂上) 및 통위사(統衛使)...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마북동에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가 있는데 “비독어국 뇌급어민(奜篤於國 賴及於民)” 곧 “나라의 크나큰 도타움에 백성들이 힘입었네.”(1893년(고종 30년))... 란 어이없는 글~~
민영휘(閔泳徽, 1852~1935) 한일병탄 지지, 일제 강점기 최대갑부, 친일단체간부, 권력형 부정 축재자. 서울 휘문고 전신인 휘문의숙 설립. 현재도 동상이 있으며 후손은 교육계에 뿌리 내림. http://t.co/uSmbj7yn
민영휘 후손 민웅기의 ㈜남이섬 영업이익이 증가한다고 합니다. 그의 부친 민병도는 친일반민족행위 귀속 재산에서 남이섬을 빼돌리기 위해 법인을 설립, 제3자에게 넘겼습니다. 그러나 제3자는 본인이었습니다. http://t.co/E5xrIzZFXY
서울 휘문고 설립자는 일제강점기 최고갑부 친일파 민영휘. 현재도 동상이 있다. 증손자 민덕기는 풍문여고를 설립. 학교법인 휘문의숙은 민영휘의 증손자 민인기, 풍문학원은 고손자 민경현이 이사장을 맡음. http://t.co/VbyW8LwSo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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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 수탈해 갑부되어… ‘재벌 반감’ 씨앗 뿌린 민영휘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조사위원회는 일제로부터 자작 작위를 수여받았던 민영휘와 정미조약 체결에 앞장섰던 이재곤, 한일합방 당시 시종원경을 지낸 윤덕영을 비롯해 민병석, 민상호, 박중양, 이근상, 이근호, 임선준, 한창수 등 친일파 재산 257억 환수, 가장 많은 재산이 국가에 귀속되는 친일반민족행위자는 중추원 참의를 지낸 민상호로 110억128만원가량의 토지.. 민영휘가 시가 56억8756만원 상당의 토지(31만7632㎡)를 환수당해 두 번째였다. 특히 민영휘 소유의 토지에는 백제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청주 상당산성(사적 212호) 일대도 포함돼 있다.
충북참여자치시민연대는 이날 "국가 귀속 결정에서 제외된 민영휘 일가의 상당산성 내 3만여㎡은 그가 친일회사인 계성주식과 조선신탁 등을 통해 수탈한 국가재산"이라며 "철저한 조사를 거쳐 환수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민영휘는 갑신정변을 진압하고 경술국치 이후 일본으로부터 자작의 작위를 수여받았다.(2007년 기사)
서울행정법원 행정합의11부(재판장 서태환)는 민영휘의 후손들이 “충북 청주시 상당구 일대 959㎡의 땅은 거래를 통해 구입한 것으로 증여재산이 아니다”라며 국가를 상대로 낸 친일재산 국가귀속결정 취소 청구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 민영휘 후손들의 재산권 침해 주장에 대해선 “친일재산을 환수하여 민족의 정기를 바로 세워야 할 공익적 필요성은 중대한 반면, 후손들이 입는 불이익은 원래 소유해서는 안 될 친일재산이 국가에 귀속되는 것에 불과하므로 재산권을 침해당했다고 볼 수 없다”고 덧붙였다. 민영휘와 사실혼 관계에 있던 안씨가 1930년 매매를 통해 이 땅의 소유권을 얻은 뒤, 1936년 민씨의 후손들이 공동상속 받았으나 국가 귀속 결정을 내렸고, 이에 불복한 민영휘 후손 19명이 소송을 제기했다.(2011년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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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근대 한국의 자본가들 - 민영휘 한일은행장一家관료에서 기업가로 전환한 숨은 비밀은?
자본주의는 어떤 과정을 통해 한국에 정착될 수 있었을까? 자본주의가 이 땅에 뿌리내릴 수 있게끔 활발하게 자본주의적 경제 활동을 벌인 인물로는 누구를 꼽을 수 있을까? 초기 한국 자본주의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묻고 넘어가야 할 질문들이다.
그러나 초기 한국 자본주의에 대해서는 여전히 식민지 근대화론과 내재적 발전론을 둘러싼 논란만 부각될 뿐, 정작 탐구해야 할 위의 문제들은 상대적으로 소홀하게 다뤄지는 듯하다.
그동안 ‘한국근대자본가연구(2002)’ 등의 저작을 통해 한국 자본주의 연구에 천착해온 저자 오미일은 근대의 다양한 자본가 군상을 그들의 사회적 신분이나 배경, 자본 축적 토대와 경로 등 몇 가지 기준에 의해 분류하여 각 유형의 대표적인 자본가들을 분석하는 작업을 진행해왔다.
2014년 3월 출간했던 ‘근대 한국의 자본가들―민영휘에서 안희제까지, 부산에서 평양까지’는 그 결과물이다. [일요서울]은 이 책을 통해 자본주의의 정착과정을 재구성해본다. 그 첫 번째는 ‘관료에서 기업가로 전환한 민영휘 일가’다.
민영휘 일가가 기업가로서 경제계에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한일은행을 경영하면서였다. 1912년 8월 민영휘는 한일은행 이사로 선출됐다. 전무 백인기가 지배주주로 되면서 초대사장인 조병택을 퇴진시키고 중역 개편을 단행하면서 민영휘를 영입했다. 1915년 3월 대출과다와 불황으로 인해 경영 위기가 닥치자, 그 책임 문제로 백인기가 사임한 후 민영휘가 은행장으로 추대되었다.
한일은행을 시작으로 한 민씨 일가의 기업 투자는 2세에 이르러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1920년 민영휘는 70세의 고령이 되자 한일은쟁장에서 퇴임하고 2세들이 경영 일선에 나섰다. 민영휘에게는 슬하에 4남 2녀가 있었다.
장남 민형식은 양자였기 때문에, 실제 민영휘의 자산을 상속받아 운용한 이는 이남 대식과 삼남 규식이었다. 신문물에 밝았던 대식은 한말부터 직접 기업을 설립해 경영에 나서거나 여러 기업에 투자했다. 1920년 이후 한일은행장으로 활동하면서 재계 거물로 부상했다.
동생 규식은 1912년 유학길에 올라 외국문물을 익히고 1920년 5월 귀국해 한일은행 상담역, 그리고 다시 한 달 후 상무이사로 취임하면서 경영 실무를 익혔다.
자본 축적의 특징
한말 고급관료였던 아버지 민영휘는 권력에 의거한 수탈을 통해 토지를 집적, 자본을 형성했다. 이 자본을 기초로 이후 금융권에 진출해 한일은행장이 되면서 재계에서 기업가로서의 입지를 구축했다.
3세대 민대식과 규식은 제조업에 투자하여 부국직물, 조선견직과 같은 기업체를 경영하기도 했으나 자본 축적의 주요 토대는 토지 소유와 농업경영, 건물 임대 등 부동산 투자에 있었고, 부수적으로 주식투자를 겸했다. 이러한 보수적인 자본 투자 방식 선상에서 체계적인 자산 관리를 위해 1933년과 1935년에 각기 설립한 가족회사인 영보합명회사와 계성주식회사는 10년이 못 되어 3~4배 성장했다.
그러나 전시기에 들어서 양자의 행보는 나뉘었다. 영보는 거액의 대출자금을 군수산업에 투입했으나 계성은 일제의 조선증미계획에 보조를 맞춰 토지 개량과 농업 경영을 고수했다. 기업의 몰락과 성장이 부침했던 1930년대 중반~1940년대에 이러한 확대 성장과 자본 축적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일제 국책금융기관으로부터 적극적인 지원을 받았기 때문이다.
영보와 계성은 금융기관에서 정한 최저금리보다 더 낮은 이자로 총자산의 15~20퍼센트에 이르는 차입금을 동척으로부터 장기대출 받아 토지 구입과 농사 개량, 건물 신축, 제조업 투자와 유가증권 투자 등을 통해 자본을 축적해나갈 수 있었다.
2세대에 와서 유가증권의 비율이 높아졌다고 하나 민대식과 민규식의 부동산 보유 비중은 유가증권에 비해 두 배가 휠씬 넘었다. 그런데 전국에 소재한 토지와 임야(대지)의 관리를 위해서는 능력이 있으면서도 믿을 만한 마름의 존재가 중요했다.
예를 들어 1930년대에 민대식의 마름 중 한 사람은 강번이었다. 강번은 민대식이 사장이었던 한일은행에서 지점 지배인, 서무과장에서 출발해 이사로 승진한 인물이다. 또한 한일은행이 현물보관 창고로 1924년 설립한 남창사의 감사이기도 하다. 남창사가 1929년 대전에 설립한 운수창고업 회사인 선남창고의 사장으로 재직하면서 민대식의 농사 경영도 맡았다.
1924년경 민대식의 동척 대출 때 채무보증인 강번에 대한 동척의 ‘신용조사서’에선두 사람의 관계를 ‘주종관계’로 표기했는데 ‘마름’ 강번은 배재학당 졸업 후 미국 서던캘리포니아대학을 수료한 엘리트였다. 1935년 무렵 충남 대전부회의원과 대전상공회의소 부회두를 지낸 그가 같은 시기 민대식의 마름으로 일했다는 사실은 민씨가의 사회적 지위와 인맥관계가 대단했음을 알려주는 흥미로운 사실이다.
한편 민씨 일가가 이러한 경제적 특수의 수혜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일제 경제 정책에 부응해 시기별로 미간지 개척, 토지 개량과 산미증식, 군수기업 경영과 투자에 앞장섰기 때문이다. 또한 자본 축적의 연장선상에서 정치사회적 활동을 통해 지배체제 유지에 적극 협력했기 때문이다.
민영휘는 일제의 보호통치 하에서 대신이 되기 위해 수차례 이토 통감을 비롯한 일제 고위 관헌에게 성대한 연회를 베풀어 접대하면서 업관 행강을 벌였다. 그리고 병합 이후 ‘조선귀족령’에 따라 일제가 수여한 자작 작위와 함께 5만 원이라는 거액의 은사공채를 받았다.
민대식은 ‘내선융화의 철저한 실행’을 강령으로 조직한 친일단체 동민회의 평의원으로 1924~1929년 동안 활동했다. 1935년 11월에는 일제가 사상범 통제를 목적으로 조직한 소도회의 이사로, 민규식과 함께 활동했다. 민규식 역시 1925~1929년 동민회 평의원으로 활동했다. 1938년 조선총독부가 조선인의 전쟁 동원과 임전체제 유지를 위해 외곽단체로 조직한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발기인·이사·평의원으로 활동했으며 1940년 이후에는 이를 개편한 국민총력조선연맹의 평의원·이사로 일제 전시체제에 적극 협력했다.
1890년데 이후 1세대 민영휘에서 시작된 자본의 형성과 2세대 민대식, 규식에 의한 자본 축척 과정은 한국 근대 자본주의 발달사에 관료로 출발하여 기업가로 전환한 대표 사례로, 한국 자본주의의 일면을 보여주는 구체적인 보기라고 할 것이다.
일제 치하에서 대부분의 식민지 백성들은 가난했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서도 거부(巨富)를 일군 소수의 사람들이
있었다. 식민지 치하라고 하지만 세상의 변화를 일찍 감지해 거부가 된 사람들을 무작정 비난할 수는 없다. 그러나 백성들의 재산을 갈취해 거부가
된 민영휘 부자는 경우가 달랐다.
민영휘가 살던 가옥. 서울 남산 한옥마을에 있다. 철종의 사위 박영효도 한때 살았던 주택이다.
민영휘(아래 사진)는 평안감사 때 착복한 재산을 기반으로 조선 제일의 거부가 되었다. [사진가 권태균]
별건곤 제39호(1931년 4월 1일호)는 조선
사람은 왜 가난해지나?라는 기사에서 “몇몇 부자사람을 제하고 나면 조선사람은 똥가래가 찢어지게 가난하다”라고 묘사하고 있다. 일왕
메이지(明治)는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을 강탈하면서 “(한국) 민중은 직접 짐의 위무 아래에서 그 강복(康福)을 증진할 것”이라고
약속했지만 식민지배 20년이 지난 후 한국 사람들은 더욱 가난해졌다. 일제 식민통치는 자본을 들여와 공장을 설립하는 자본주의 방식이 아니라
식민지 백성들의 농지 등을 빼앗는 근원적 수탈방식이었으므로 더욱 가난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도 ‘몇몇
부자사람’은 존재했다. 언론인 김을한(金乙漢)은 삼천리 1931년 2월 1일호의 조선 최대 재벌
해부(3)라는 글에서 “현하(現下) 조선에 있어서 누가 제일 갑부냐고 하면 제1 민영휘(閔泳徽), 제2 김성수(金性洙), 제3
최창학(崔昌學)의 세 손가락을 꼽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1930년대 식민지 조선의 제일 갑부로 꼽힌 민영휘는 한국 사회에서
재벌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고착되게 만든 원조였다. 민영휘의 원명은 민영준(閔泳駿)이었는데 1901년 처형된 김영준(金永準)과 발음이 같다는
이유로 개명한 것이다. 민영휘의 부친은 민두호(閔斗鎬)인데, 황현(黃玹)은 오하기문(梧下紀聞)에서 “이때 사람들이 민씨
중에 세 도적이 있는데 서울도적 민영주(閔泳柱), 관동(關東:강원도)도적 민두호, 영남도적 민형식”이라고 설명해서 민두호를 왕비 민씨를 등에
업은 외척 도적 셋 중의 한 명으로 지목하고 있다.
황현은
매천야록(梅泉野錄)에서 ‘서울도적 민영주를 과거에 급제시킨 인물이 민영휘’라고 말하고 있다. ‘금수처럼 행동하고 도적처럼
약탈’하는 민영주를 대부분 사람으로 여기지 않았지만 민영휘가 고종에게 “민영주를 사람으로 만들려면 과거에 급제시켜 얽어매야 합니다”라고 상주해
급제시켰다는 것이다.
민영휘의 부친 민두호는 춘천부 유수(留守)를, 민영휘는 평안감사를 역임하는데 이때 강원도와 평안도 백성들의
재산을 갈취한 것이 조선 제일 갑부가 된 원동력이었다. 황현은 오하기문에서 ‘춘천부 유수 민두호의 탐학 때문에 강원도민들은
뿔뿔이 흩어질 수밖에 없었다’면서 백성들이 그를 ‘쇠갈고리 민두호[閔鐵鉤·민철구]’라고 불렀다고 전하고 있다. 민영휘는 민씨 척족 정권 때인
고종 13년(1877)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탐관오리의 길로 들어섰다.
형조참의 지석영은 ‘민영휘 처형’ 상소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민영휘(영준)가 평안감사로 있으면서 고종의 신임을 얻게 된 배경을 설명하고
있다. “남정철(南廷哲:망국 후 일제로부터 남작 수여)이 과거 급제 2년이 채 안 되어 평안감사가 되었는데, 왕비의 친척이 아닌 사람이
이렇게 빨리 귀한 자리에 나간 것은 근세에 없던 일이었다. 그가 평양 감영에서 계속 진헌(進獻:뇌물을 바침)하자 고종은 충성으로 생각해서
영선사(領選使)로 뽑아 천진(天津)으로 보내서 크게 기용할 뜻을 보였다. 그러나 민영준(閔泳駿:민영휘)이 남정철의 자리를 대신한 후 작은
송아지가 끄는 수레를 금으로 주조해서 바치자 고종은 얼굴색이 변해서 ‘남정철은 참으로 큰 도둑이었군. 관서(關西:평안도)에 금이 이렇게 많은데
그가 혼자 독차지했다는 말인가?”라고 말했다. 이때부터 남정철에 대한 총애는 쇠퇴하고 민영준은 날로 중용되었다.(매천야록,
갑오이전)”
민영휘가 바친 금송아지가 평안도 백성들의 고혈이라는 사실을 모른 체했던 고종은 민영휘를 크게 총애했다. 고종
19년(1882) 임오군란 때 집이 불타기도 했지만 고종의 신임은 식지 않았고, 고종 21년(1884)에는 갑신정변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우자
이조참의, 도승지 등으로 계속 승진시켰다.
민영휘에게도 두 번의 위기가 있었다. 한 번은 동학농민혁명을 진압한 일본이 김홍집 등의
온건개화파를 내세워 갑오개혁을 추진할 때였다. 이때 민씨 척족들이 ‘동학란을 불러일으킨 장본인’으로 몰려 몰락하고, 민영휘도 전라도 영광군
임자도로 유배되었다. 이 무렵인 고종 31년(1894) 전 형조참의 지석영(池錫永)은 민영휘를 사형시켜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
“신이 전국의 모든 입을 대신해 자세히 진술하겠습니다. 정사를 전횡하면서 임금의 총명을 가리고, 백성을 수탈하여 소요를
초래해서는 원병(援兵)을 불러들이고는 난이 일어나자 먼저 도망친 자가 간신(奸臣) 민영준(閔泳駿:민영휘)으로서……온 세상 사람들이 그들의 살점을
씹어 먹으려고 합니다.(고종실록, 31년 7월 5일)”
지석영의 말대로 민영휘를 비롯한 민씨 척족들의 탐학이
전국적 농민봉기의 주요한 원인이 되었는데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자 민영휘는 청나라의 원세개(袁世凱)에게 파병을 요청했고, 이는 천진조약에 따라
일본군을 불러들이는 결과를 초래했다. 민씨 척족이 무너지자 민영휘는 유배지로 가는 대신 청나라 군대에 숨어서 청나라로 도주했다. 이 첫 번째
위기는 고종이 1896년 2월 아관파천으로 김홍집의 갑오개혁 내각을 무너뜨린 몇 달 후 특지로 징계를 면해주면서 벗어났다.
고종은
재위 38년(1901)에는 민영휘를 궁내부 특진관에 임명해 왕실 업무를 관장시켰고, 일제에 외교권을 박탈당하기 직전인 재위 42년(1905)
3월에는 정1품 시종원경(侍從院卿)에 임명하고 10월에는 태극장(太極章)까지 하사했다.
그러나 민영휘에게 고종은 이(利)를 위해서
맺어진 사이일 뿐이었다. 민영휘는 왕후 민씨의 총애로 성장했지만 막상 민씨가 죽고 엄비(嚴妃)가 고종의 총애를 받자 백관을 사주해 엄비를
황후(皇后)로 책봉해야 한다는 운동을 전개한 게 그의 성향을 잘 말해준다.
은행·학교 경영 통해 이미지 쇄신
노려 1907년 10월 일본 왕세자가 방한하자 민영휘는 신사회(紳士會) 환영위원장을 맡아 재빨리 일본으로 말을 갈아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종은 민영휘를 계속 총애했다. 대한매일신보는 1907년 12월 20일자 논설에서 ‘국사(國事)가 지금에 이른
것은 민영휘와 조병갑의 탐학이 한 원인’이라고 비판했지만 고종은 헤이그 밀사 사건으로 순종에게 강제 양위를 당하기 넉 달 전인 재위
44년(1907) 7월 민영휘에게 궁내부 특진관(特進官)과 상방사(尙方司) 제조를 겸임시켰다.
민영휘의 두 번째 위기는 1907년
고종이 헤이그밀사 사건으로 강제 양위당하면서 찾아왔다. 고종이 힘을 잃자 민영휘에게 재산을 빼앗긴 사람들이 재산을 되찾겠다고 나선 것이다.
매천야록은 그 상황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민영휘(閔泳徽)가 권력을 잡고 있을 때 백성의 재산을 탈취해서
전후에 거만(鉅萬)의 재산을 갖고 있었다. 이때에 이르자 재산을 빼앗긴 사람들이 모여들어 혹 재판소에 호소하기도 하고 혹 그의 집으로 달려가
칼을 빼어 들고 되찾아오기도 하였다. 또 각 신문에다가 그의 오랜 악행을 날마다 게재하자 민영휘는 이를 걱정해서 변호사에게 후한 뇌물을 주어
재산을 빼앗긴 사람들의 소송을 받지 말게 했다. 또 신문사에도 애걸하여 그 악행을 숨기려 했지만 신문사에서는 그가 애걸하면서 은폐하려 했다는
것까지 함께 보도하자 민영휘는 어찌할 도리가 없어서 가족을 모두 상해(上海)로 데려가려고 하였다.(매천야록
1909년)”
대한매일신보나 황성신문은 1908년경부터 민두호·영휘 부자에게 재산을
빼앗긴 백성들이 부자를 상대로 잇따라 소송을 제기했다고 보도하고 있다. 1908년 안주의 이소사는 민영휘가 평안감사일 때 남편 김희정을 협박해
빼앗은 토지 반환 소송을 제기해 1심에서 승소했다. 공립신보는 1909년 1월 27일자에서 민영휘의
말로란 제목으로 ‘평안감사 재직 때 토색질한 수만금에 대해 억울하게 빼앗긴 백성들이 민씨 집에 답지해서 빼앗긴 물건을 환수하려 하므로
장차 가산이 탕패될 듯 하다더라’고 보도했다.
그러나 재빨리 일제로 말을 갈아탄 민영휘를 백성들이 이길 수는 없어서 이소사의 소송도
2심에서는 민영휘가 승리했다. 일제 통감부문서(1909년 7월 26일)에 따르면 민영휘는 일본 왕가의 시조라는 아마테라스
오오미카미(千照大神)를 신봉하는 신궁봉경회(神宮奉敬會)의 고문이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민영휘는 망국 직후인 1910년 10월 일제에게
자작(子爵)의 작위를 받은 데 이어 이듬해 1월에는 이른바 은사공채(恩賜公債) 5만원을 받았고, 1912년 8월에는
한국병합기념장(韓國倂合記念章)도 받았다.
민영휘는 탐관오리로 축재했지만 한일은행(훗날 東一銀行) 은행장(1915)도 역임하는 등
돈에 대해서는 남다른 감각을 가진 인물이었다. 또한 휘문의숙을 설립하는 등 사회사업을 통한 이미지 쇄신도 꾀했다. 민영휘는 1931년 6월 80
노구로 여의도 조선비행학교를 시찰한 후 비행기를 타고 서울 장안 상공을 비행 유람하는 노익장을 과시했지만 1935년 12월 30일 관훈동
자택에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러자 그가 남긴 1000만여원의 재산을 둘러싸고 소송전이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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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식민지 부호들 ① 민영휘 부자(2)
| 제296호 | 20121111 입력
1930년대 식민지 한국의 최고 부자는 농업재벌인 민영휘로서 그의 재산은 대부분 농토였다. 그만큼 일제시대
자본의 성장이 미미했다는 뜻이다. 그런데 민영휘의 후예들 사이에서 상속소송이 벌어져 세간의 큰 화제가 되었다.
경기도 여주에 있는 감고당. 서울 안국동에 있던 것을 이전복원했다. 감고당은 원래
숙종비 인현왕후 민씨의 사저였다가 고종비 명성황후를 거쳐 민영휘의 소유가 되었다. [사진가 권태균]
1935년 12월 만 여든 셋에 세상을 떠난 민영휘의 인생 자체가 큰 화제가 되었다.
민영휘는 대한제국의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로서 의정부 총리대신에 해당하는 최고의 품계를 받았다. 그럼에도 일제로부터는 1910년
10월 자작(子爵) 작위를 받았고, 이듬해 5만원의 은사금까지 받았다. 동학란을 불러일으킨 장본인이란 비난도 받았고, 친일 김홍집 내각이
집권하자 청나라 군대에 숨어서 청나라로 망명했지만 다시 일본으로 말을 갈아타 자작까지 되었다. 삼천리에서 ‘(민영휘가
세상을 떠나자) 수(壽), 부(富), 귀(貴)가 많은 남자로서 와석종신(臥席終身:집에서 누워서 죽음)한 그의 일대의 영화는 자못 세상 사람의
이야깃거리가 되었다’라고 말한 것이 조금도 과장이 아니었다. 민영휘가 죽자 많은 사람의 관심사는 그가 남긴 유산 규모와 이를 누가 차지할
것이냐는 점이었다.
삼천리 1936년 6월호는 ‘민영휘의 재산이 한때는 4000만원에 달했는데 이는 일본의
스미토모(住友)·미쓰비시(三菱)·미쓰이(三井)에는 비길 수 없다 해도 제2류(第二流)에는 갈 만하다’고 평가하고 있다.
삼천리 1938년 10월호는 민영휘를 “조선에서는 고금 몇 백 년 내에 처음 보는 큰 부자”라면서 그가 남긴 재산 규모가
‘3000만원 혹은 2000만원이라고 말하지만 확실한 측의 조사에 의하면 1200만원 정도’라고 추정하고 있다. 그의 재산은 동산과
부동산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부동산이 전국에 산재해 있어 정확한 액수를 알기 어려웠다. 또 상해(上海)의 외국 은행과 일본에 숨겨둔 재산이 있느냐
여부도 논란거리였다. 민영휘를 총애하던 고종이 강제 양위를 당하자 그에게 재산을 빼앗겼던 백성들이 난입했기 때문에 민영휘는 상해로 도주하려고
했었다. 그래서 그가 죽자 “상해 외국 은행에 저금한 돈이 있느니 내지(內地:일본) 무슨 회사에 비밀히 투자한 돈이 있느니, 있는 풍설, 없는
풍설 자자했다”고 삼천리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민영휘, 여성 편력 심해 첩이
5~6명 민영휘의 유산은 동일은행(東一銀行:옛 한일은행)을 비롯한 각종 주권(株券)이 약 100만원 정도로 추정되었고, 한 해 8만
석을 수확하는 광대한 농토가 약 1000만원 정도로 추정되었다. 민영휘가 13도를 돌아다니며 고르고 고른 옥토양전(沃土良田)이었다. 그 외에
경운정(慶雲町:현 종로구 경운동) 64번지 1600평의 사저, 가회정(嘉會町:현 종로구 가회동)의 아방궁 같은 별장, 그리고 종로를 비롯한 서울
일대에도 부동산이 즐비했다. 민영휘의 경운정 사저는 대한제국 육군 참령 이갑(李甲)이 야반에 뛰어들어 돈을 요구해 오성(五星)학교를 지었다는
유명한 일화가 담긴 집이었다.
동일은행(왼쪽)과 한성은행. 모두 조흥은행의 전신이다. 민영휘 부자가 농업부호에서 금융부호로 넘어가는
데 주요한 역할을 했다.
최소
1200만원에 달하는 민영휘의 유산을 현재 가격으로 환산하면 얼마나 갈까. 쌀값을 기준하면 1934년 쌀 1석(160kg) 가격이
22원30전이다. 이를 현재의 10kg 2만5000원 정도로 환산하면 1600억원을 넘는다.
경성부관내지적목록(京城府管內地籍目錄:1927)은 민영휘 일가의 경운동·관훈동 일대 저택들의 면적이 4137평에 달한다고
하는데, 이를 현재의 부동산 가격으로 환산하면 수조원에 달할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을 다 누린 민영휘였지만 적자(嫡子)만은 갖지
못한 것이 유산 분배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대방(大房)마마’로 불렸던 정실부인 신씨(申氏)는 자식을 낳지 못해 민형식(閔衡植)을 양자로
들였다. 삼천리는 “민영휘씨는 여성이 많았던 만큼 대방마마를 수위로 평양(平壤)마마, 해주(海州)마마를 차석으로,
연당(淵堂)마마, 무슨 마마 하여 5, 6인의 첩실이 각각 주둔소를 설치하여 가지고 열좌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중 이른바 해주마마가
민대식(閔大植)·천식(天植:사망)·규식(奎植)의 아들 셋을 낳아서 가장 세력이 왕성했다.
황현은 매천야록
1909년조에서 “민영휘의 양자 민형식은 선비이므로 의리를 숭상하여 금전을 잘 쓰고 다녔는데 민영휘는 금하지 못하여 거의 윤리를 상하는
상태에까지 이르렀고, 또 그의 서자(庶子) 민대식(閔大植)은 방탕하고 간사하여 날마다 많은 돈을 썼지만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매천야록 1909년)”고 드물게 민형식을 칭찬하고 있다. 민영휘의 양자 민형식에게는 삼천리도
“온후하고 장자의 풍이 있어 궁한 사람을 구하고 없는 친척을 돕는, 민씨가(閔氏家)의 전통을 깬 반역아(?)라는 칭호를 받게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이 때문에 “(민형식은) 완전히 거세를 당하여 명목만 장자로 있게 되어 그의 생활은 궁핍한 정도에
있었다(삼천리 1938년 10월)”고 전해진다. 민씨가의 전통과는 달리 ‘궁한 사람을 구하고 없는 친척을 돕는’ 선행을
했다고 집안에서 축출되다시피 했다는 이야기다.
심지어 민형식은 1931년 11월 20일 경성지방법원으로부터 파산선고까지 받았는데 이
사건은 장안의 큰 화제였다. 민형식은 구자흥(具滋興)에게 8만원을, 원산의 박홍수(朴鴻秀)에게 2만1000원을 빚진 일이 있었다. 그런데 그
대부분이 남을 돕다가 발생한 빚이라는 것이 세간의 시각이었다.
별건곤 1932년 6월호에 따르면 민형식은
조선일보 경영이 어려워졌다는 말을 듣고 두 차례에 걸쳐 유진태 등에게 1만8000원의 약속수형(約束手形)을 써 주었는데 그게 문제가 되었다.
그래서 민형식의 아들 민병주가 유진태를 고소하기에 이르렀다. 별건곤은 ‘민영휘는 자신이 이 빚을 갚아주면 민형식의 허다한
채권자들이 모두 그 수단을 써서 가산이 탕패할 것이기 때문에 창피를 무릅쓰고 손자 민병주를 시켜 유진태를 고소하기에 이르렀다’고 보도하고
있다.
민형식 쪽엔 김병로·이인 등 항일 변호사 민형식은 당대의 명필이기도 했다. 삼천리
1932년 3월호는 “우하(又荷) 민형식씨라면 서화계(書畵界)에 모를 사람이 없을 것”이라면서 “궁한 사람을 도와주는 미덕이 빌미가 되어
파산선고를 받았다는 말까지 있다”고 전한다. 그러면서도 “민대식은 재계에 상당한 이름이 있으면서도 사회적 사업에는 극히 냉담하다”고
비판했다.
민형식은 민영휘 사망 이듬해인 1936년 7월 16일 자작 작위를 습작하면서 기사회생하게 되었다. 작위를 습작했으므로
재산 상속도 요구할 수 있는 자격이 생긴 것이었다. 민형식은 부친의 3년상이 끝난 후 민대식 등을 상대로 유산상속 소송을 제기했다. 이른바
해주마마라고 불렸던 소실 안유풍 소생의 대식·규식 형제를 상대로 경성지방법원에 ‘유산 전부의 신탁을 해제하고 분배 정리를 해 달라’는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민영휘는 원래 장남 형식을 관계(官界)로 보내고, 차남 등은 재산을 관리하는 후계구도를 짰었다. 그래서 민형식은
고종 29년(1892) 문과 급제 후 부친의 후광으로 고종 39년(1902)에는 평안도 관찰사, 고종 43년(1906)에는 학부협판(學部協判)
등을 역임했다.
삼천리는 “민영휘 자작은 생전에 중요한 관직을 역임하는 한편 축재(蓄財)에도 비상한 노력을
다해서… 관권을 이용해 불법 축재한 것이라고 세평이 험악했다”고 전하는 한편, 민형식에 대해서는 “원래 관직에 있으면서도 청렴에 뜻을 두고
서도(書道)와 문학에 전념했다”고 평가했다. 이런 민형식의 성향을 틈타서 민대식 형제는 일제가 토지조사사업을 할 때 대부분의 부동산을 자신들의
명의로 신고하고 은행 주식도 자신들의 명의로 돌려놨다.
그럼에도 민형식은 이 재산을 민대식 형제에게 신탁한 것으로 여기고 장남
병주에게 수익금 일부를 받아오게 했는데 민대식이 그때마다 차용증서에 날인하게 하자 의심이 생겼다. 그후 재산 정리를 요구하니 이 핑계, 저
핑계를 대고 응하지 않기에 삼년상이 끝난 후 소송을 제기했다는 것이다.(삼천리 1938년 10월호)
민대식
형제가 관리하는 재산은 자신이 신탁한 것이라는 민형식의 주장과 민영휘가 생전에 증여한 것이라는 민대식의 주장이 맞선 것이었다. 이 소송은
변호인들의 성격으로도 화제가 되었다. 민형식 쪽의 변호인들은 김병로(金炳魯)·이인(李仁)·신태악(辛泰嶽) 등 독립운동에도 가담했던 항일
변호사들이었던 반면 민대식의 변호사는 친일단체였던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時局對應全鮮思想報國聯盟) 경성지부장을 맡은 이승우(李升雨) 등이었기
때문이다.
이 유산소송은 민대식 형제에게 유리하게 흘러간 것으로 보인다. 민형식은 1938년 경운정 저택까지 경매에 내놔야 했지만
민규식은 1940년 동일은행 취체역 회장을 맡고 있기 때문이다. 삼천리 1940년 6월호는 소설가 박계주(朴啓周)가
동일은행 취체역 회장 민규식에게 인생관과 황금관을 묻자 민규식이 “나는 무엇보다 사람은 사람으로서의 인격을 완성하는 것이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한다”며 “나는 내 자손에게라도 내 재산을 상속해 주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라고 호언했다. 물론 허언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해방 후인 1947년 5월 14일 자유신문은 우하 민형식이 47년 5월 14일 명륜동 자택에서
사망했는데 데라우치 암살 사건에 관련돼 복역했다고 전하고 있다.
그렇게 돈의 역사도 그릇된 역사의 한 부분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문 의 처 : 춘천시청 문화체육과 033-250-3076
소 재 지 : 춘천시 동면 노루목길 21
지정번호 :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66호
지 정 일 : 1985년 1월 17일
시 대 : 1900년초
소 유 자 : 사유
네티즌평가 : ★★★★★
이 가옥의 평면구조는 ㄱ자 모양의 안채와 ㄴ자 모양의 행랑채가 전체적으로 ㅁ형의 배치를 이루는 영서 중부지방의 전통 기와집이다. 특이하게도 안채의 부엌부분은 삼량(三樑)가구 맞배지붕으로 되었고, 웃방대청과 건넌방쪽은 오량(五樑)가구 팔작(八作)지붕으로 결구(結構)된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곳은 지형이 노루의 목 같아 장항(獐項:노루목)이라 불리는 곳으로 일제시대에 휘문중학(徽文中學)을 창립한 하정(荷汀) 민영휘(閔泳徽 1852~1935)의 묘가 있어 보통 민씨묘라 불리는 곳이다.
이 가옥은 바로 이 묘역를 관리하기 위해 지은 묘막(齋室)으로 이곳에 새로 지은 건물은 아니고 1925년도에 화천(華川)에 있던 민가(民家)를 옮겨다 지은 집이다. 제실용도로 사용되고 있으나 일반가옥의 구조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어 문화재로 지정관리하고 있다.
가옥 뒷 편에 민영휘의 묘역이 있고 주변에 울창한 소나무 숲 속에 토담(흙담)과 기와집이 어우러지는 모습이 매우 고풍스럽다.
...............................
[제국의 황혼 '100년전 우리는'] [76] 조선 甲富 민영휘의 '돈 모으는 법'
박기주 성신여대 교수·경제학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1909. 8. 29.~1910. 8. 29.
1935년 12월 말, 조선 내 최대 갑부 중 한 사람으로서 일본의 2류 재벌과 비교되던 민영휘(閔永徽)가 84세를 일기로 사망하자 잡지 삼천리는 '1천 2백만원이라는 민영휘 재산은 어디로 가나'라는 글을 게재한다.
민영휘는 1877년 문과에 급제한 후 승진을 거듭하여 도승지, 평안감사, 강화유수, 내무부사, 선혜청 당상, 좌찬성 등 화려한 관력을 자랑한다. 명성황후와는 촌수가 먼 편이지만 당시 백성의 원성이 자자했던 여흥 민씨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그는 권력을 이용한 토색(討索·재물을 탈취함)으로 단번에 조선 내 유일의 갑부가 된다.
그의 부(父) 민두호도 일찍이 돈을 긁어모아 '쇠갈구리'라는 별명을 얻었다. 당시 신문은 나라가 현재와 같이 된 것은 민영휘의 탐학이 한 원인이라 하고 그를 '망국대부'라 지칭한다(대한매일신보 1907.12.20, 1909.4.18.).
그의 재산 규모에 대해 잡지는 '평안감찰 시대 적부터 삼천리강산에서 성금 격으로 긁어모으고 또 황실 내탕금을 이리저리 하여 모은 것이 4천만원이고 또 그 외에 중국 상해 회풍(홍콩상하이)은행에 적립하여 놓은 것이 수천만원'이라 한다. 4천만원은 현재 화폐로 약 1500억원에 해당한다. 갑오·을미년(1894·95)의 추수곡이 13만석이었는데 10만석으로 잡아도 연간 수입이 50만원이었다.
민영휘가 권좌에서 물러나자 그에게 가산을 탈취당한 이들의 재산환수소송 기사가 지면을 달구었다. 1909년 1월경 9건의 환수소송이 벌어진다.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민영휘가 전권을 행사하고 있을 때 백성으로부터 탈취한 재산이 수만냥을 헤아리는데 이때에 이르러 재산을 빼앗긴 사람들이 모여 혹 재판소에 소송하기도 하고, 혹 그의 집에 뛰어들어 칼을 빼어들고 달라고 요구하기도 하였다"고 기록한다. 민영휘의 상해 이주설도 나돌았다.(신한민보, 1909.3.31.)
국운은 기울어도 그의 권력욕은 끝이 없었다. 그는 "조선이 일본의 형제국이니 일본의 보호국 되는 것은 부끄러울 것 없다"면서 일본황실 종묘를 매년 참배키로 하더니 마침내 총리대신 자리까지 넘보았다. 이런 그를 두고 대한매일신보는 "총리하면 타려고 마차까지 준비하였으나 마차는 부서지고 그 말까지 죽었다니 거미줄로 바위 얽듯 애를 쓰던 경륜이 도로아미타불이라. 말은 비록 미물이나 돈만 아는 저 화상을 주인으로 섬기기가 원통하여 죽었구나. 아들 빚 물어주고 칠 일이나 병 앓더니 이번 저 말 죽은 후엔 며칠이나 통곡할꼬"(1910.2.5.)라고 냉소하였다.
강제병합 후 권력을 탐할 수 없게 되자 민영휘는 경제로 눈을 돌린다. 1915년부터 한일은행장으로 재임하다가 70세에 은퇴하고 2세들에게 경영을 넘긴다. 서자인 대식(大植)·규식(奎植)이 가산을 물려받아 식민지 권력과 유착하면서 부동산과 주식으로 '민씨왕국'을 이룬다. 조선 최대의 부를 가진 민영휘였지만 자선에 인색했던 탓인지 한 일간지만이 짤막한 한 줄 사망기사를 실었을 뿐이다.
첫댓글요즘 사야도께서 경행길에 이곳을 자주 들르시는 모양입니다. 보통 비석이라는 것이 흠결은 감추고 공을 드러내는 것인줄은 알지만, 그래도 고대사가 아닌 근현대사에서 빼도 박도 못할 정도로 역사적 기록이 분명한 이는 그 묘비명을 그대로 읽어서는 안됩니다. 사야도님께서친일파 민영휘를 제대로 알고 인용하셨으면 하는 마음으로 올려둡니다. 민영휘 묘라기 보다는 민성기 가옥으로 더 잘 알려진 것도 그의 친일행적이 알려져서 묘역이 훼손되는 것을 막고자 하는 술수라는 생각이 듭니다. 설명에도 있지만 민성기 가옥으로 알려진 집은 화천의 민가를 옮겨놓은 묘막이지 집이 아니라는 겁니다.
지난 토욜 경행길에 만난 민영휘의 신도비를 보니 호 荷汀은 賜한 것이었더군요. 중국에서는 연꽃을 하화라고 하지요. 친일 반민족 행위자가 부처의 가르침을 상징하는 연꽃을 호로 달고 있으니 연꽃에게 괜히 미안해 집니다. 사야도 말씀이 그의 장자 민형식의 호는 又荷는 아버지 호의 카피라는 군요. 정실부인에게 아들이 없자 양자로 들어온 우하 민형식은 아버지와는 달리 독립운동도 지원하여 유배되는 등 완전 다른 삶을 살았네요. 우하의 묘를 찾아 읽어봐야겠어요.
사야도님이 민영휘가 측실 묘까지 해준걸 보아 좋은 사람이었다고 말씀하셔서 순간 화가 났네요 좋은 사람이라면 양민의 피를 짜서 이룬 재산으로 첩을 들이진 않겠지요. 하긴 긂어죽을 양민 몇명을 첩으로 들여 잘 먹였나? 죽지도 않은 부실의 가묘까지 조성한 건 칭찬할 일은 아닌듯~~ 하지만 본질을 보라네요. 사야도님께서
민형식에 대한 자료 여흥 민씨 척족 세력을 대표하는 인물 중 하나이며 소문난 갑부였던 민영휘에게 정실 자손이 없자 양자로 들어갔다. 1891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평안도 관찰사를 역임하였고, 1904년 일본을 시찰하기도 했다. 귀국 후 법부와 학부에서 협판을 지냈다. 1907년 학부협판으로 재직할 때 나철이 주모한 을사오적 암살 미수 사건에 연루되었다. 민형식은 이때 나철과 오기호 등에게 거액의 자금을 대어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사실이 적발되어 유배되었다가 특사로 풀려났다. 조선총독부 중추원의 참의를 지냈고, 1936년 7월 15일 자신의 아버지였던 민영휘가 받은 자작 작위를 물려받았다.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에 발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모두 선정되었다. 1937년에 강원도 춘천부 동면에서는 면민들이 성금을 모아 민형식과 민대식, 민규식 형제의 송덕비를 세워 2008년까지 비석이 남아 있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이 사실을 제보 받은 뒤 주민들에게 민형식의 친일 행적을 설명하고 비석을 철거하도록 했으나, 일부 지역 유지들이 민형식의 행적에는 문제가 없다며 반발했다.
첫댓글 요즘 사야도께서 경행길에 이곳을 자주 들르시는 모양입니다. 보통 비석이라는 것이 흠결은 감추고 공을 드러내는 것인줄은 알지만, 그래도 고대사가 아닌 근현대사에서 빼도 박도 못할 정도로 역사적 기록이 분명한 이는 그 묘비명을 그대로 읽어서는 안됩니다. 사야도님께서친일파 민영휘를 제대로 알고 인용하셨으면 하는 마음으로 올려둡니다. 민영휘 묘라기 보다는 민성기 가옥으로 더 잘 알려진 것도 그의 친일행적이 알려져서 묘역이 훼손되는 것을 막고자 하는 술수라는 생각이 듭니다. 설명에도 있지만 민성기 가옥으로 알려진 집은 화천의 민가를 옮겨놓은 묘막이지 집이 아니라는 겁니다.
지난 토욜 경행길에 만난 민영휘의 신도비를 보니 호 荷汀은 賜한 것이었더군요. 중국에서는 연꽃을 하화라고 하지요. 친일 반민족 행위자가 부처의 가르침을 상징하는 연꽃을 호로 달고 있으니 연꽃에게 괜히 미안해 집니다. 사야도 말씀이 그의 장자 민형식의 호는 又荷는 아버지 호의 카피라는 군요. 정실부인에게 아들이 없자 양자로 들어온 우하 민형식은 아버지와는 달리 독립운동도 지원하여 유배되는 등 완전 다른 삶을 살았네요. 우하의 묘를 찾아 읽어봐야겠어요.
사야도님이 민영휘가 측실 묘까지 해준걸 보아 좋은 사람이었다고 말씀하셔서 순간 화가 났네요
좋은 사람이라면 양민의 피를 짜서 이룬 재산으로 첩을 들이진 않겠지요. 하긴 긂어죽을 양민 몇명을 첩으로 들여 잘 먹였나? 죽지도 않은 부실의 가묘까지 조성한 건 칭찬할 일은 아닌듯~~ 하지만 본질을 보라네요. 사야도님께서
민형식에 대한 자료
여흥 민씨 척족 세력을 대표하는 인물 중 하나이며 소문난 갑부였던 민영휘에게 정실 자손이 없자 양자로 들어갔다. 1891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평안도 관찰사를 역임하였고, 1904년 일본을 시찰하기도 했다. 귀국 후 법부와 학부에서 협판을 지냈다. 1907년 학부협판으로 재직할 때 나철이 주모한 을사오적 암살 미수 사건에 연루되었다. 민형식은 이때 나철과 오기호 등에게 거액의 자금을 대어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사실이 적발되어 유배되었다가 특사로 풀려났다. 조선총독부 중추원의 참의를 지냈고, 1936년 7월 15일 자신의 아버지였던 민영휘가 받은 자작 작위를 물려받았다.
그러나 신민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민족운동에 기부금을 희사하는 양면적인 모습도 보였다..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에 발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모두 선정되었다. 1937년에 강원도 춘천부 동면에서는 면민들이 성금을 모아 민형식과 민대식, 민규식 형제의 송덕비를 세워 2008년까지 비석이 남아 있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이 사실을 제보 받은 뒤 주민들에게 민형식의 친일 행적을 설명하고 비석을 철거하도록 했으나, 일부 지역 유지들이 민형식의 행적에는 문제가 없다며 반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