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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불교 테라와다 승단 - 보리도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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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마비 路談 (수다방) 우리 아란야가 있는 장학리에 친일파 하정(荷汀)민영휘[閔泳徽]묘와 그의 후손 민성기 가옥
文慧 추천 0 조회 1,620 16.03.01 12:52 댓글 5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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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16.03.01 21:37

    첫댓글 요즘 사야도께서 경행길에 이곳을 자주 들르시는 모양입니다. 보통 비석이라는 것이 흠결은 감추고 공을 드러내는 것인줄은 알지만, 그래도 고대사가 아닌 근현대사에서 빼도 박도 못할 정도로 역사적 기록이 분명한 이는 그 묘비명을 그대로 읽어서는 안됩니다. 사야도님께서친일파 민영휘를 제대로 알고 인용하셨으면 하는 마음으로 올려둡니다. 민영휘 묘라기 보다는 민성기 가옥으로 더 잘 알려진 것도 그의 친일행적이 알려져서 묘역이 훼손되는 것을 막고자 하는 술수라는 생각이 듭니다. 설명에도 있지만 민성기 가옥으로 알려진 집은 화천의 민가를 옮겨놓은 묘막이지 집이 아니라는 겁니다.

  • 작성자 16.03.16 03:42

    지난 토욜 경행길에 만난 민영휘의 신도비를 보니 호 荷汀은 賜한 것이었더군요. 중국에서는 연꽃을 하화라고 하지요. 친일 반민족 행위자가 부처의 가르침을 상징하는 연꽃을 호로 달고 있으니 연꽃에게 괜히 미안해 집니다. 사야도 말씀이 그의 장자 민형식의 호는 又荷는 아버지 호의 카피라는 군요. 정실부인에게 아들이 없자 양자로 들어온 우하 민형식은 아버지와는 달리 독립운동도 지원하여 유배되는 등 완전 다른 삶을 살았네요. 우하의 묘를 찾아 읽어봐야겠어요.

  • 16.03.15 16:49

    사야도님이 민영휘가 측실 묘까지 해준걸 보아 좋은 사람이었다고 말씀하셔서 순간 화가 났네요
    좋은 사람이라면 양민의 피를 짜서 이룬 재산으로 첩을 들이진 않겠지요. 하긴 긂어죽을 양민 몇명을 첩으로 들여 잘 먹였나? 죽지도 않은 부실의 가묘까지 조성한 건 칭찬할 일은 아닌듯~~ 하지만 본질을 보라네요. 사야도님께서

  • 작성자 16.03.16 03:46

    민형식에 대한 자료
    여흥 민씨 척족 세력을 대표하는 인물 중 하나이며 소문난 갑부였던 민영휘에게 정실 자손이 없자 양자로 들어갔다. 1891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평안도 관찰사를 역임하였고, 1904년 일본을 시찰하기도 했다. 귀국 후 법부와 학부에서 협판을 지냈다. 1907년 학부협판으로 재직할 때 나철이 주모한 을사오적 암살 미수 사건에 연루되었다. 민형식은 이때 나철과 오기호 등에게 거액의 자금을 대어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사실이 적발되어 유배되었다가 특사로 풀려났다. 조선총독부 중추원의 참의를 지냈고, 1936년 7월 15일 자신의 아버지였던 민영휘가 받은 자작 작위를 물려받았다.

  • 작성자 16.03.16 03:48

    그러나 신민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민족운동에 기부금을 희사하는 양면적인 모습도 보였다..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에 발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모두 선정되었다. 1937년에 강원도 춘천부 동면에서는 면민들이 성금을 모아 민형식과 민대식, 민규식 형제의 송덕비를 세워 2008년까지 비석이 남아 있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이 사실을 제보 받은 뒤 주민들에게 민형식의 친일 행적을 설명하고 비석을 철거하도록 했으나, 일부 지역 유지들이 민형식의 행적에는 문제가 없다며 반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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