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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레밥의 시학
맹문재
1.
제2차 세계대전은 자본주의 사회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1945년 이후 전쟁에 쓰이는 무기를 생산하던 산업 시설이 대량의 소비 제품을 생산하기 시작한 것이다. 기업들은 생산한 제품들이 시장에서 범람하자 소비자들이 필요한 것 이상의 제품을 구입하도록 유도하는 전술을 생각했다. 더 많은 제품을 생산하고 대중들에게 판매하기 위해서는 새롭게 열리는 경제 체제에 적용하도록 그들을 재교육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감지한 것이다. 그리하여 대중들에게 소비 욕망을 통제하고 한계 짓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욕망을 갖도록 하고, 아무런 죄책감이 들지 않도록 교육했다. 그 결과 욕망에 대한 권리와 자유가 수호되었고, 욕망의 영역은 시장이 제공하는 제품을 소비하는 것에 국한되기 시작했다.
자본주의가 주도하는 교육을 받은 대중들은 소비 세계의 일원이 되기를 희망한다. 자본주의 매체가 전하는 제품을 소유하려고 욕망하는데, 제품 자체보다 제품이 갖는 풍요로운 이미지를 소유하고자 한다. 그렇지만 그것의 획득은 쉽지 않으며, 소유한 경우에도 욕망의 추구를 그치지 않는다. 또 다른 욕망을 추구하느라 결국 욕망의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린다. “통장에 문이 열리면 한 달 수고가/빌딩 무덤으로 들어가” “동굴 문 닫힌 줄도 모르고 달리기만 하는/아득한 늪에 허우적거리”(「늪」)는 것이다.
함진원 시인은 이와 같은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대안으로 두레밥 문화를 제시한다. 두레밥은 두레로 일을 하고 공동으로 먹는 밥이다. 두레꾼들은 일터로 가져온 점심뿐만 아니라 오전 참과 오후 참 등을 먹는데, 자신의 집에서 평소에 먹는 것보다 맛있는 음식을 맛볼 수 있고 공동체의 유대감을 가져, 힘든 농사일을 함께해 나가고 상부상조의 토대를 마련한다. 노동력이 없는 마을의 노약자나 과부의 농사를 지어주거나, 마을 사람들의 대소사에 필요한 자금을 제공해주기도 한다.
두레밥 문화는 일제가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조선인의 토지를 사유제로 만들면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자영 신분의 조선 농민들이 소작인으로 내몰리면서 두레밥을 나누는 토대가 상실된 것이다. 해방 뒤에는 산업화와 도시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농촌의 공동화 현상을 가져와 두레밥 문화는 고전적인 유물이 되었다. 그렇지만 두레밥 문화가 완전하게 소멸된 것은 아니다. 그 형태는 바뀌었지만, 현재의 실생활에서 다양하게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함진원 시인은 두레밥 문화를 재발견하고 자본주의의 한계를 극복하는 방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항아리처럼 넉넉한 사람들과 보리밥 먹”(「증심사에서」)는 것이, “공원 어귀에 밥차”가 들어와 “밥 냄새”를 풍기자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드는 때를 “은빛으로 찰랑거리는 시간”(「은혜로움이여」)으로 여기는 것이 그 모습이다. “아랫마을 감목리댁”이 “건조한 일상 풀어 수제비 쑤는 날”을 “온 동네 까치 떼 함께”(「오후 한때」)하는 잔칫날로 여기는 것도, 아주 추운 날이었지만 “따순 밥 먹자고/손잡아 주는 마음 있”었기에 “환한 모란꽃을 기다”(그 겨울)릴 수 있었다고 고마워하는 것도 그러하다. 나아가 광주 사람들이 “진실은 언젠가 밝혀질 것을 믿”고 “정의롭게 맑고 진실하게 견디”는 마음을 “주먹밥 마음”(그날, 도청에서)으로 인식한 것에서도 볼 수 있다.
2.
모두 아우성
깃발 높이 들고 앞으로 앞으로
이번에는 낭떠러지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낭떠러지
자본이여, 자본님이시여, 굽어살피소서
간절하게 외치지만 발바닥 닳아지게 쳇바퀴를 돌려도
찢어진 깃발만 팔랑팔랑
자본 앞에서 내일 꿰매며 버틴 세월 한가득
모두 아우성
코드블루, 코드블루, 응급 병동 앞의 사이렌 소리 우는 소리 다급한 의사와 간호사의 혼비백산
코드블루, 코드블루. 블루. 블루. 뚜…….
누구 탓을 하기에는 너무 늦어 버린 종말 앞에서
히히덕거리는 자본의 법칙. 코로나19의 계절
모두 아우성
그 사이 희멀건한 가을이 온다
반달이 뜬 하루가 저물고 있다
―「코드블루」 전문
위의 작품의 제목으로 쓰인 “코드블루”(Code Blue)는 중환자실이나 응급 상황에 놓인 환자에게 비상조치가 필요할 때 의사를 호출하는 의료코드이다. 작품의 화자는 코드블루의 상황이 응급 상황에 놓인 환자의 경우에만 해당하지 않는다고, 다시 말해 오늘의 상황에서도 필요하다고 진단한다.
화자가 코드블루가 필요하다고 제시한 상황은 다름 아니라 “코로나19의 계절”이다. 그 누구도 경험해보지 못한 전대미문의 재난이기에 “모두 아우성”이다. “코드블루, 코드블루. 블루. 블루. 뚜……”와 같이 “응급 병동 앞의 사이렌 소리” 요란하다. “다급한 의사와 간호사”는 제대로 된 준비도 없이 밀려드는 환자들을 진료하고, 병실이 모자라 대형 건물을 급조해 입원실로 만들고, 제때 화장하지 못해 쌓여 있는 시신들은 눈 뜨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처참하다.
도시 전체가 외부와 단절되어 거리며 시장이며 식당이 텅 비어 있다. 영화관을 비롯한 문화 공간이며 공항도 을씨년스럽다. 영화의 한 장면이 아니라 실제로 직면한 상황이기에 믿기지 않는다.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 바이러스로 온 세계가 무너져 내리는 모습을 무력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지 못한다. “누구 탓을 하기에는 너무 늦어 버린 종말” 앞에서 망연자실할 뿐이다.
코로나19의 상황에 직면하면서 사람들은 자본주의 체제에 의구심을 가지고 있다. 그동안 높은 생산성과 고임금을 토대로 대량 생산과 대량 소비를 추구하는 경제 및 사회 시스템인 포디즘(Fordism)으로 운영된 자본주의의 본질을 불신하는 것이다. 시장의 이익을 절대적인 목표로 삼아 노동조합 활동이나 사회적 연대를 약화시킨 결과 코로나19의 습격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그뿐만 아니라 계약직이나 일용직 노동자들의 일자리가 더욱 줄어들었고, 영세 자영업자들은 적자 운영을 버틸 수 없어 문을 닫았다. 자본주의의 “깃발 높이 들고 앞으로 앞으로” 나아간 결과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낭떠러지”에 이르고 만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본이여, 자본님이시여, 굽어살피소서”라고 자신을 자본주의에 맡긴다. “간절하게 외치”며 “발바닥 닳아지게 쳇바퀴를 돌려도” 자본주의의 “찢어진 깃발만 팔랑팔랑”하는 데에도 의지한다. 자신을 나락으로 떨어뜨린 자본주의에 구원을 요청하는 모습은 안타깝고 서글프다. 이 모순의 상황은 자본주의를 대신할 체제가 없기 때문이다. 1980년 동구권 사회주의가 몰락한 이후 자본주의를 대체할 새로운 체제가 아직 들어서지 않은 것이다. 또한 자본주의 체제에 순응하는 자신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가 요구하는 자기 이익을 위한 탐욕과 경쟁을 거부하지 못하고 순응하며 따르고 있는 것이다.
비 갠 사이 구워삶는다 살아있는 것이 죄다 검붉은 죄다 지리산자락 칡넝쿨처럼 질긴 인연의 끝, 검불보다 못한 인간사 내려놓지 못해 안달복달 버리지 못한 것 쌓여만 간다 바람 빠진 일상이여, 마량부두까지 내달리며 그새 마른 김밥 한 줄이여, 비만된 일상이여 비곗덩어리 고지서여 형제여, 누이여, 남자들이여, 아줌마들이여, 다들 안녕하신지 일가친척 허접 같은 치욕의 자본이여, 어디로 숨었니 알량한 자존심의 신호등이여, 은은함 사라진 디지털 앞에 오이장아찌 얼굴이여, 보리떡 다섯 개 축복이여, 일상의 무료함이여, 때늦은 슬픔 조각이여, 가시 돋혀 꽃피지 못한 썩은 말이여, 다디단 매실 향 뒤로 앙큼한 독이여, 이중성이여, 배부름의 유희여, 분단된 통일 이루지 못한 채 제2에프티에이(FTA) 먹어 치운 공룡 뱃속이여, 잠깐 숨 돌린 사이 환경은 재가 되었다, 살아있는 것들이 너도 나도 죄다
―「죄는 그렇게 온다」 전문
위의 작품의 화자는 “살아있는 것이 죄”라고, “검붉은 죄”라고 토로한다. 그 이유는 “지리산자락 칡넝쿨처럼 질긴 인연의 끝, 검불보다 못한 인간사 내려놓지 못하고 안달복달하기 때문이다. 버려야 할 것을 버리지 못하는 것은 바람직한 삶의 자세가 아니라 “바람 빠진 일상”에 불과하다. 화자가 내려놓지 못하는 인간사란 자본주의 체제에 순응하는 삶을 의미한다.
사전에 ‘자본주의’라는 단어를 찾아보면 ‘사적 소유와 이익에 대한 동기에 기초한 경제 시스템’으로 기술되어 있다. 이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탐욕이라는 것이다. 보다 많이 소유하고 싶어하고, 보다 이익을 내고 싶어한다. 자신이 첫 번째이고, 자기가 자신을 지켜야 하며, 다른 사람도 그 자신이 스스로 지켜야 한다. 그것이 자본주의의 기본적인 자세이다. 그리고 그것은 오랫동안 기능해왔던 유일한 원칙이다. 그 결과 자본주의는 불평등한 결과를 긍정한다. 경제적 적자는 부적격자를 절멸시킬 것이고, 보다 경쟁력 있는 기업과 개인은 경쟁력이 떨어지는 기업과 개인을 도산 및 실업으로 몰고 가는 것이 당연시된다.
도산 및 실업으로 가난해진 사람들은 사회에서 능력이 부족하거나 실패한 자로 취급된다. 인간의 존엄성과 권리를 인정받지 못한다. 그들의 당면 문제 또한 사회에서 관심 받지 못한다. 이와 같은 차별과 무시로 공동체 가치로부터 결별한 개인이 등장한다. 그들은 공동체에 소속되어 있지 않아도 생존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개인이 공동체와 관계를 맺지 않아도 살 수 있지만 개인이 자본주의의 궁극적인 가치, 즉 돈과의 관계를 맺지 않으면 살 수 없다고 인식한다. 결국 사회 공동체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이기적인 개인의 삶을 추구한다. 공동체 사회에서 필요한 사랑, 양보, 협동, 봉사 등의 가치를 외면하고 자신의 이익 창출에 몰두하는 것이다.
작품의 화자가 자신의 삶을 “비만된 일상”으로, “비곗덩어리 고지서”로 비유하며 반성하는 것이 그 모습이다. 형제여, 누이여, 남자들이여, 아줌마들이여, 다들 안녕하신지”라고 안부를 묻으며 자신의 삶을 조종하는 대상을 “허접 같은 치욕의 자본”이라고 규정하며 자기비판을 가하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다디단 매실 향 뒤로 앙큼한 독”을 건네줄 만큼 철저히 “이중성”을 띤다. “보리떡 다섯 개 축복”을 주면서 “일상의 무료함이”며 “때늦은 슬픔 조각이”며 “가시 돋혀 꽃피지 못한 썩은 말”을 건네준다. 그 결과 “은은함 사라진 디지털 앞에 오이장아찌 얼굴”이 있고 “배부름의 유희”도 있다. 자본주의 체제에 유리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사이에는 소득 차가 심화되어 부익부빈익빈의 현상이 나타난다. 화자는 오늘날 우리나라의 자본주의를 “분단된 통일 이루지 못한 채 제2에프티에이(FTA) 먹어 치운 공룡 뱃속”이라고 비판한다. 자유무역협정도 거대한 자본주의에 영향을 받기에 화자는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살아있는 것들이 너도 나도 죄다”라고 반성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살아가는 “환경은 재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대안은 무엇일까?
3.
사진 정리하다
라일락꽃 그늘 아래서 함박, 웃었던 사진 한 장
꽃무늬 원피스에 긴 머리 단정하게 묶은
라일락 향기가 솔솔 나는 사진 한 장
가난해도 좋았고,
부족해도 좋았고,
그냥 좋았던 시절
스물, 꽃다운 나이
걸어서 걸어서 친구 보러 가고
어른께 땅 닿게 인사하고
밥 먹고 가라고 하면 밥 먹었다고
성실한 착하기만 했던 그 시절
흑백사진 한 장 찍어도
너무 좋아서 눈물이 난다고 웃었던 그 시절
다시 그렇게 살고 싶다
소박하게
작게
그리고 느리게
―「라일락꽃 그늘 아래서」 전문
위의 작품의 화자는 “사진 정리하다”가 “라일락꽃 그늘 아래서 함박, 웃었던 사진 한 장”을 발견한다. 그 사진의 주인공은 “꽃무늬 원피스에 긴 머리 단정하게 묶은/라일락 향기가 솔솔 나는” 화자 자신이다. 화자는 그 사진을 바라보면서 “스물, 꽃다운 나이”인 그때가 행복했다고 생각한다. “가난해도 좋았고/부족해도 좋았”다고 여기는 것이다.
화자가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단순히 젊은 시절이 그리워서가 아니라 “걸어서 친구 보러 가고/어른께 땅 닿게 인사”한 데서 보듯이 함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화자는 친구의 집 어른들이 “밥 먹고 가라고 하면 밥 먹었”듯이 한 식구처럼 어울렸다. 어른들의 말씀을 마치 부모의 뜻처럼 듣고 따른 것이다.
화자는 “다시 그렇게 살고 싶다”고 고백한다. “소박하게/작게/그리고 느리게” 살고 싶어하는 것이다. 화자의 이와 같은 바람은 현재의 삶이 소박하고 작고 느리게 살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화자의 바람은 과거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과거로의 회귀는 자본주의의 모순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이 되지 못한다. 화자는 선조로부터의 중요한 가르침을 현재의 삶을 위한 거울로 삼는다. 과거의 행복한 삶을 현재의 삶이 추구해야 할 가치로 여기고 행하는 것이다.
수수한 사람들끼리 국숫집에서 국수를 먹는다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
기어이 흥을 놓다 콧물 훌쩍인다
여름비는 차갑게 내리고
집에 갈 생각 안 한 채
버스 끊긴 지 오래
선한 사람들끼리 모여 앉아
불어터진 국수 먹으면서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
달빛 몸 불어오고
파꽃 여물어 간다
―「비는 내리는데」 전문
위의 작품의 화자는 “수수한 사람들끼리 국숫집에서 국수를 먹는다”. 단순히 음식을 먹는 것이 아니라 “이런 이야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를 갖고 있다. 핵가족을 넘어 점점 1인 가족이 늘어나 혼밥족, 혼밥남, 혼밥 시대, 혼밥 세대라는 용어가 생겨났듯이 혼밥 생활이 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지인들과 함께 식사를 나누는 것은 공동체 생활의 모습으로 볼 수 있다. 두레밥 문화를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기어이 흥을 놓다 콧물 훌쩍인다”. 서로 속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하다가 즐겁고 기쁘고 애틋해 눈물까지 흘리는 것이다.
화자와 함께하는 지인들은 “집에 갈 생각 안 한 채” 시간을 보내 어느덧 “버스 끊긴 지 오래”이다. 그렇지만 걱정하지 않는다. 손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선한 사람들끼리 모여 앉아/불어터진 국수 먹으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해 한다. “소박하게/작게/그리고 느리게”(「라일락꽃 그늘 아래서」) 살고 싶어하는 희망을 실천하는 것이다.
나는 어떻게 생겼길래 날마다 밥 타령뿐
밥 먹었냐
밥 먹어라
밥 먹자
밥 있냐
밥 자셨어요
나는 어떻게 살았길래 눈만 뜨면 밥 타령
많이 먹어라
이보다 더 좋은 것은 없어
보약이야
없으면 안돼
이게 힘이다
이 냄새가 최고야
나는 어떻게 되었길래 날마다 밥 타령뿐
구수한 누룽지 같은 사람 만나면
날마다 밥 묵었냐
주문을 외우다 웃음도 나온다
감 한 개 열지 못한 먹보 감나무,
너도 오늘 저녁에 밥은 먹었냐
―「밥」 전문
위의 작품의 화자는 자신을 향해 “나는 어떻게 생겼길래 날마다 밥 타령뿐”이냐고 놀리고 있다. 상대방의 안부를 묻는 인사말로 “밥 먹었냐”를 비롯해 “밥 있냐/밥 자셨어요” 등으로 밥 타령을 하기 때문이다. 주요 관심사도 “밥 먹어라/밥 먹자” 등 밥과 관계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화자는 자신의 밥 타령을 부정하기보다는 긍정한다. 단순히 밥의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 문화를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밥을 서로 나누는 문화는 인류의 집단생활이 시작된 이후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 농사철에 두레밥을 나눈 것이 대표적인 모습이다. 화자는 그 두레밥 문화를 일상생활에서 실행하고 있는 것이다.
화자가 “나는 어떻게 살았길래 눈만 뜨면 밥 타령”이냐고 투정 부리는 것은 소중하다. 두레밥 문화가 완전히 소멸하지 않고 이 자본주의 사회에 살아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많이 먹어라/이보다 더 좋은 것은 없어/보약이야”라고 말하는 것도, “구수한 누룽지 같은 사람 만나면/날마다 밥 묵었냐”라고 인사하는 것도 그 모습이다.
4.
어쩌다 본께 봄이 훌쩍 가부렀시야 올 봄에도 니 얼굴 못 보고 말아 분께 쪼까 서운해서 죽것다야 복사꽃도 진즉 피어 불고 유채꽃도 만발해 부럿는디 언제 한번 와 볼란가 모르것데이 그러고 바삐 살아서 어쩐다냐 니기 아부지도 인자 가불고 혼자 일도 못 허것어야 우리도 엄니가 짠해 죽것네 제발 아프지만 마소 일이고 뭐고 아프지나 마소 아프믄 어쩔라고 그런가 대포보다 깡이 센 우리 엄니 겁나게 맘이 적어져 부럿네 어째야 쓴단가 이래도 한세상 저래도 한세상 복사꽃도 져불고 아카시아도 져부럿는디 니기들은 징허니 보고 자퍼야 시상이 요로코롬 바쁘게 돌아간다냐 겁나게 하루하루가 어지러워분다야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모르제만 사람 일을 어떻게 알것냐 니가 좋아하는 꽃도 가물어서 그런지 어째 힘 대가리가 없시야 날씨가 오락가락 혀서 핀지 모르게 피어갔고 진지 모르게 가부렀다야 니기 아부지도 감기 쪼끔 왔는가 했는디 그걸 못젼디고 말 한마디 못 허고 가 부러 갔고 짠하디 짠하다야 있을 때 귀헌줄 몰랐는디 니기들도 일만 허지 말고 쉬어감서 살어 사는 것 잠깐이여 너도 머리가 희게 졌더라 봄이 훌쩍 가분 것처럼 친구들도 몇 안 남았시야 감나무 집 일로 아짐 말이여 그 아짐도 시난고난 허드만 지난달에 가부렀시야 사람, 참 허망혀 나도 혼자 밥해 묵는 것도 귀찮고 약만 늘어 싸서 얼른 갔으면 좋것써야 내 맘대로 어딜 댕기도 못 혀고 밭일도 못 해 옛날 니그 엄니가 아니여 그래도 니기들 키울 때가 좋았제 징글징글 고생같이 했을라고 보리밥이라도 나실나실 하고 쭈물쭈물 반찬해서 니그들이 맛나게 먹을 때 얼마나 오졌는지 몰라야 니그들 건강허고 별일 없이 살어서 인자 눈 감아도 여한이 없데이 너도 적은 나이가 아닌께 몸 조심허고 댕겨 욕심 부리고 살것도 없은께 천천히 살어 안 죽고 살면 언젠가는 훤한 봄도 만나것제
―「봄이 다 가부렀시야」 전문
위의 작품에서 시골에서 지내는 어머니는 도회지에서 살아가는 자식들에게 안부를 전하고 있다. 어머니는 “니기 아부지도 인자 가불고 혼자 일도 못 허것어야”라는 데서 보듯이 연로하다. 또한 “이래도 한세상 저래도 한세상 복사꽃도 져불고 아카시아도 져부럿는디 니기들은 징허니 보고 자퍼야”라고 했듯이 자식들을 보고 싶어한다. 자식들은 도시에서 바쁘게 살아가기 때문에 만나기가 힘들다. 자본주의 사회의 한 일원이 되기 위해 쉬지 않고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자식뿐만 아니라 “시상이 요로코롬 바쁘게 돌아간다냐 겁나게 하루하루가 어지러워분다야”라고 한 데서 볼 수 있듯이 당신 자신도 바쁘다. 자본주의 체제의 운영이 농촌이라고 예외를 두지 않기에 그렇게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하여 어머니는 자식들에게 “니기들도 일만 허지 말고 쉬어감서 살어 사는 것 잠깐이여”라고 당부한다.
어머니는 “그래도 니기들 키울 때가 좋았제”라고 자식을 키울 때를 가장 행복했다고 여긴다. 그 이유는 “징글징글 고생같이 했”지만 “보리밥이라도 나실나실 하고 쭈물쭈물 반찬해서 니그들이 맛나게 먹을 때 얼마나 오졌는지 몰”랐기 때문이다. 집안이 이루 말할 수 없이 가난했지만, 식구들이 함께 밥을 먹을 만큼 인정과 여유가 있었던 것이다.
위의 작품은 코로나19의 재난으로 부모와 자식이 대면하지 못하는 한 가족의 모습으로 보인다. 코로나 상황으로 말미암아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고, 가족들 간에도 만나지 못했다. 이 재난이 언제 끝날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우리를 보호할 수 있는 주체는 시장이나 국가가 아니라 우리들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그동안 자본주의 체제에서 파괴된 인간관계를 복원하는 일이 필요해진 것이다.
우리나라가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 금융을 신청했을 때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지만, 결국 신자유주의로 복원되었다. 코로나19의 결과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예상된다. 자본주의 체제로는 재난을 완전하게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이 판명되었지만, 대체할 체제가 마련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코로나19 이후 사람들은 자본주의가 요구하는 시장 경쟁에 또다시 내몰리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은 차원에서 함진원 시인이 추구하는 두레밥 문화는 주목된다. 시인은 입추의 절기를 “홀로 되신 어머니 옥수수 먹는 팔월”로 개념화하는 것은 물론 넘치는 사랑을 “서로 나눠 먹은 빵”(「은혜로움이여」)으로 구체화하고 있다. 또한 “순하게 살”아가는 삶의 기준을 “꽃과 나무와 강아지 밥 주”(「울지 말아요 미안마」)는 것으로 삼고 있다. 두레밥 문화가 궁극적으로 우리를 보호하고 살릴 수 있다고 인식하는 것이다. 인간은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 부단하게 어울리는 존재라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시켜주며, 그 공동체적 유대감의 필요성을 일깨워주는 것이다.
맹문재 | 문학평론가․안양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