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due course(적당한 시기에)'/중국( 또는 소련)에 지배당했더라면...
■ 나는 역사나 이념을 좋아하지 않는다. 역사 돌고 돈다는데, 어차피 승자의 전리품이란 생각에서이다. 또한 그것들을 핑계삼아 국민들이 먹고 사는데 지장을 주는자를 혐오한다.
학교다닐때 나이든 역사 선생님이 계셨다. 수업 시작되면 교과 제목만 칠판에 적으시고, "책읽어봐 책에 다있어" 하시며 교실을 나가 운동장을 걸으셨다.
경력은 교장, 교감급에다 실력도 있으시다니 누가 나서서 간섭을 하겠는가?
농사일 하는 소도 나이가 들면 선듯 때리기가 부담스럽다. 농사일 많은 경험에다 힐끗 바라보는 큰눈동자 하얀창에서 세월의 연민을 느끼기 때문이다.
2000년대 중반에 들면 미국을 따라 잡을거라던 중국이 휘청거린다. 탄탄한 사회주의 체제, 그래도 인민들이 굶주리고 자유를 속박하면, 정부에 대한 원망이 과하여 정권은 흔들리기 마련이다.
56개라는 소수민족, 확연히 다른 풍습의 그들은 분리 독립을 원하지만, 분리된 대만마져도 무력으로 병합하려 애를 쓴다.
조선말기 그 강대국들 힘의 소용돌이는 결국 1910년 한일병합조약이 이루어지기 전까지 일본과 중국, 러시아는 우리를 잡아 먹으려 했고, 미국과 영국은 조차지(땅을 빌려...)를 마련하려 했던 것 같다.
이 싯점에서 그때 만약 우리가 중국이나 소련에게 지배당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으로 글을 이어가 보았다.
■ 제2차 세계대전 말기인 1943년 11월23일부터 27일까지 이집트 카이로에서 열렸던 미·영·중 3개국 정상회담 끝에 나온 카이로선언에는 ‘in due course(적당한 시기)’라는 말이 들어있었다. 태평양전쟁이 끝나면 한국을 언제 독립시킬 것인가에 대한 결의 속에 든 단어였다. 그 이후 1945년 포츠담선언까지 한반도 문제가 나올 때마다 그 문장이 사용되었다.
연합국 정상들이 한국의 독립시기를 ‘적당한 시기’로 늦추어 잡은 것은 한국인의 정치역량을 과소평가했던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 때문이었다.
3개국 정상은 강한 표현으로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이 탈취한 태평양 제도(諸島:여러섬)를 박탈하고, 또한 만주, 대만, 펑후(澎湖)제도를 중화민국에 반환하며, 일본이 약취한 모든 지역에서 일본세력을 구축(驅逐)한다고 선언했다. 그러면서도 유독 한국의 독립문제에 대해서만은 적당한 시기라는 유보적인 표현을 사용한 것이다.
이처럼 한국문제에 대해서만 특별히 유보적 표현을 쓴 것은 한국에 대해선 일정기간 신탁통치가 필요하다는 루스벨트의 제안 때문이었다.
일본 제국이 패망하자 그들의 식민지는 승전국인 미국, 소련 등 연합국들에 각각 넘어갔다.
한반도는 미국과 소련에 의해 분할 점령되다가 3년 후에 미국이 있는 쪽은 1948년 대한민국(1948.08.15)이, 소련이 있는 쪽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1948.09.09)으로 서로 별개의 정부가 들어서게 된다.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는 일본이 점령하였다가 패전하였다. 호치민은 베트남으로 독립하려 했으나 연합군에서는 만장일치로 프랑스로 넘겼다(1945년에 프랑스와 호치민이 이끄는 베트남 민주 공화국이 4년 간 전쟁 끝에 베트남 민주 공화국으로 독립하였다. 그러나 제네바 협정으로 인해 북위 17도선을 경계로 분단되어 미국이 공산주의를 막기 위해 남베트남을 강제 점령하여 결국 남베트남은 1954년이 돼서야 독립하였다).
타이완은 중화민국에 반환되었고, 나머지 일본의 도서 지역은 미국이 주도하는 연합군 최고사령부의 점령 하에 들어갔다.
괴뢰 국가였던 만주국은 소련에 의해 멸망하였고, 만주는 중화민국에 편입되었다.
한때 일본이 인도네시아를 점령하다가 1945년에 항복하자마자 인도네시아는 독립을 선언했으나 네덜란드가 다시 이 곳을 식민지로 만들려 하자, 수카르노가 4년간 네덜란드와 전쟁하여 1949년이 돼서야 인도네시아로 독립하였다.
○ 카이로 선언은 1943년 11월 27일 미국·영국·중화민국의 3개 연합국이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에 모여 발표한 공동선언이다. 5일간에 걸친 회담에는 프랭클린 D. 루스벨트, 윈스턴 처칠, 장제스 등이 대표로 참가했으며, 회담 결과 발표한 선언에서 연합국은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후 최초로 일본에 대한 전략을 토의했다.
○ 포츠담 선언은 독일 포츠담에서 미국 대통령 해리 S. 트루먼, 영국 총리 클레멘트 애틀리과 중화민국 주석 장제스가 1945년 7월 26일 포츠담 회담 도중 발표한 선언문이다.
「카이로 선언」에는 “한국인의 노예상태에 유의하여 장차 한국을 적절한 시기에 해방시키고 독립시키겠다.”는 조항이 들어있다. 즉 연합국은 「카이로 선언」에서 천명한 한국에 대한 독립 약속을, 「포츠담 선언」을 통해 다시 한 번 확인한 것이다. 실제로 포츠담 회담에 참석한 미국 대통령 트루먼에게 이승만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승인과 광복군의 참전을 요청했을 때, 트루먼은 「포츠담 선언」에서 「카이로 선언」을 재확인했다고 답한 바 있다.
1900년 이후 일본은 한국 보호국화를 국제법상 합법으로 만들기 위해 한국을 둘러싼 열강과 한반도 문제를 치밀하게 조율했다. 대표적인 협정으로는 1902년 영국과 일본 사이의 제1차 영일동맹(英日同盟), 1905년 미국과 일본이 한국 문제를 협의한 가쓰라-태프트 밀약, 제2차 영일동맹, 러시아와 일본이 러일전쟁 후처리 문제를 협상했던 포츠머스 조약을 예로 들 수 있다. 1905년 7월 말 가쓰라와 태프트의 회동 이후 제2차 영일동맹을 거쳐 포츠머스 조약까지 체결하는 데 소요된 기간은 39일에 불과했다. 이외에도 한국을 일본 지배 아래 편입한다는 사항에 미국과 독일이 의견을 일치한 1904년 카이저-루스벨트 합의, 1905년 프랑스의 총리이자 외무장관을 겸임했던 루비에(Maurice Rouvier)와 프랑스 주재 영국 대사 버티(Bertie)의 한반도 문제 협의 등 서양 강대국 간의 합의 또한 이루어졌다. 이렇듯 일본의 한국 보호국화는 근대 국민국가를 중심으로 하는 세계질서와 식민지분할을 꾀하는 제국주의 열강의 정책과 맞물려 진행되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의 국제관계사를 조망해볼 때, 한국은 힘의 공백 상태에 놓여 있었다. 청과 조선의 밀접한 조공책봉관계(朝貢冊封關係)가 청일전쟁(淸日戰爭)으로 단절된 이후는 더욱 그랬다. 이렇게 한반도에서 힘의 공백 상태가 조성되자 일본, 러시아, 영국, 미국 등 한반도에 이해관계를 지닌 주변 열강들은 한국을 비롯한 동북아에서 세력균형을 이루기 위해 경쟁과 협상을 벌였고, 의견을 협의하고 절충하는 과정을 거쳤다. ‘을사조약’의 체결은 제국주의 열강이 힘을 앞세워 세계질서를 강제로 재편하는 흐름 속에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 그때 공산(사회)주의에 지배 당했더라면... 내가 생각하는 방향은 이렇다.
조선말기 우리나라를 차지하기 위하여 앞에서의 여러나라가 다투다가 일본의 세력이 커져 우리나라가 일본에 병합되고, 이후 야욕이 커진 일본이 2차대전의 침략국으로 미국등 연합군에 대응하다 1945년 8월 15일에 패망하고 말았다.
그런데 1943년 11월 27일 카이로에서 후에 승전국이 되는 미국, 영국, 중국(러시아를 대신)의 3개국 대표가 모여 전후 상황을 논의하였고, 우리나라는 적절한 시기에 독립시킬 것을 결의했다.
일본이 항복한 후 일본이 강점한 외국의 영토는 그 이전 식민지를 지배했던 강대국들에게 넘어 갔다.
우리나라에 소련은 1945년 8월 9일에 북한의 일본군을 공격하며 들어왔고, 미군은 광복후 1945년 9월 8일에 인천으로 들어왔다.
1910년 이후 패전국 일본이 아닌 승전국 소련(중국)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었더라면 당연히 그들 나라에 넘어가 공산주의(사회주의)가 되었거나 재수 좋으면 다시 독립을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탐욕많은 그들이 절대 우리를 독립시켜주지 않았을 것 같다.
일본에 점령 당해서 다행이 아니라, 하마트면 북한처럼 되었으면 지금쯤 어떻게 살고 있을까? 하는 현실적인 생각을 해보는 것이다.
나라를 사랑하는 우리의 의지는 매우 중요하지만, 현실은 우리들의 편이 아니다.
역사는 바뀌는게 아니라, 진실이 눈을 뜨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