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늦은 신혼여행- 4
아쉬운 마음으로 스위스를 떠났다.
우리를 실은 버스는 스위스의 산악도로를 달려 이태리를 향했다.
계곡 마다 가을의 정취가 묻어나고, 알록달록한 나뭇잎들이 차창을 스친다.
잠시 창에 기대어 조용히 밖을 응시하며 상념에 젖는다.
아름다운 모습들을 뒤로하는 아쉬움과 새로운 세계에 대한 기대감이 교차된다.
약 6시간을 차로 이동하여 이탈리아의 밀라노에 도착했다.
거의 어둠이 내릴 즈음에 우리는 유럽 최고의 고딕성당인 두오모 성당과
주변의 관광지를 돌아보았다.
어둠이 내린 밀라노 거리는 활기찼다.
대형 유통 상가와 같은 빅토리오 엠마뉴엘레 2세 갤러리아 등을 돌아보았다.
그 건물의 웅장함과 아름다움은 가히 말로 표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밀라노에서 역시 쇼핑을 빼놓을 수 없다.
이태리의 명품들을 구입할 수 있는 기회였다.
사실 쇼핑 시간만 되면 고민이 된다.
많은 사람들이 제각각 물건을 사대는데, 난 아내의 눈치만 살피게 된다.
작은 가방 하나에 백만 원을 호가하는데, 나로서는 가슴 떨리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여행 중반에 들면, 돌아가서 지인들에게 나누어 줄 선물 사는 일에 신경을 쓰게 된다.
마음의 짐을 덜 겸 우리도 대부분의 선물을 이미 구입한 상태였다.
비교적 값이 싸고 좋은 프랑스 화장품류를 주로 샀다.
이태리에서는 처제가 부탁한 가방을 하나 샀다.
알만한 유명 브랜드는 너무 비싸서 중가형으로 구입했다.
그런데 정작 우리 자신을 위한 물건은 이제까지 하나도 구입한 것이 없다.
아내는 자꾸만 명품 가방을 이리 들어보고 저리 들어보고 한다.
고민이다.
하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고생한 아내에게 그까짓 명품가방 하나 못 사줄 것도 없다.
이 여행부터가 순전히 아내를 위한 여행이 아니었던가.
“여보, 맘에 드는 거 하나 골라봐!”
내 목소리에 비장함이 느껴졌다.
마치 내 생애에 있어서 엄청난 결정을 내린 사람 같았다.
아내는 기쁜 얼굴로 이것저것 들어보고 어깨에 걸쳐도 본다.
그런 아내가 사랑스럽고 흐뭇하다.
아무래도 잘 한일이다.
그런데 가방을 고르던 아내가 가방을 하나 들어 보이며 묻는다.
“이거 어때?”
그 순간 가방의 어울림보다는 가격표에 먼저 눈이 간다.
거의 짐작했던 가격이다.
“글쎄?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판단이 안서는 나는 아내가 좋은 대로 결정하라고 했다.
한참을 고르던 아내는 짐짓 고개를 흔들며 말한다.
“나한테 어울리는 것이 없는 것 같아”
그 순간 내 입에서 나온 말은 의외였다.
“그렇지? 물건이 별로 없는 것 같네. 맘에 드는 것 없으면 다음에 사지 뭐!”
내 말에 아내는 더 이상 말을 못하고 가게를 나섰다.
아내의 기분이 우울해진 것을 눈치 챈 것은 한참 후였다.
쉴 새 없이 조잘거리던 아내의 말 수가 갑자기 적어졌다.
급기야는 작은 일에도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갑자기 분위기는 싸늘해지고, 그런 아내의 태도에 속이 상해왔다.
그러게 누가 사지 말랐던가?
사라고해도 자기가 못 사놓고 괜한 짜증을 부린다.
그러나 나라고 잘한 것은 아니다.
그 때, 등 떠다밀어서라도 하나 사게 했어야 했다.
커피 한잔을 사서 말없이 아내에게 건넸다.
아내는 무표정하게 커피를 받았다.
그렇게 커피 한 잔을 마신 다음에야 서로 입을 뗐다.
“여기에도 우리나라에서 볼 수 있는 냉이가 있네?”
별 신기한 것도 아닌데,
화단 한 구석에 나있는 냉이를 보며 우린 서로 신기한 듯이 호들갑을 떨었다.
우린 그렇게 서로에 대한 멋쩍음을 떨어냈다.
나는 안다.
아내가 우울했던 것이 나에 대한 짜증이 아니었던 것을.......
사실 아내도 자신이 명품을 구입하여 들고 다니는 것에 대해 부담을 가진 것이다.
그래서 온 기회도 잡지 못하고 애써 어울리는 것이 없다는 핑계로
가게를 떠난 자신에 대해 화가 나는 것이다.
우린 그렇게 한 세상 살아왔다.
우리보다는 늘 남을 먼저 생각해야 했기에 자신에 대해서는 늘 인색했던 것이다.
남들에게는 좋은 것을 주면서도 우린 늘 시장의 좌판을 뒤져서 옷을 사 입었었다.
수년전 아내는 속상한 얼굴로 자신도 좋은 옷 입고 싶다고 투정을 부렸었다.
우리가 도와 준 어떤 집에 가보았더니,
그 집은 없는 게 없더란다.
사치하며 사는 것을 죄로 여겼기에 물질적 여유가 있으면서도 그 여유를 누려보지 못했었다.
지금은 고등학교에 다니는 딸애가 초등학교 6학년 때에
담임선생님에게 거짓말을 했다고 맞았다고 했다.
선생님께 거짓말을 했으니 맞는 것은 당연하지 않느냐고 했다.
그러나 딸애의 말을 듣고 우리는 충격을 받았다.
그 때까지만 해도 우린 흑백 중고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결혼 후, 아내가 전파상 앞에서 한 달을 서성거려 겨우 구입한 중고 흑백텔레비전이다.
그것을 십 수 년 동안 쓰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만 고장이 나서 그마저도 없어졌다.
학교에 간 아이가 수업시간에 졸자,
선생님은 밤새 텔레비전을 보니 학교에서 존다고 하며 야단을 쳤다.
아이는 당돌하게 우리 집엔 텔레비전이 없어서
밤새 텔레비전을 보았다는 선생님 말씀은 틀렸다고 말했단다.
그러나 선생님은 요즘 세상에 텔레비전 없는 집이 어디 있냐고 하면서
거짓말한다며 매를 댔다는 것이다.
당시에 얼마나 속이 상했는지 그 선생님의 멱살이라도 잡고 집에 와서 보여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그 선생님의 말도 무리는 아니다.
당시 그 읍내에서 가장 큰 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목사네가
텔레비전이 없어서 텔레비전을 못 본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간신히 딸애를 위로한 후에 당장 텔레비전을 샀다.
하지만 그 매장에서 제일 싼 물건이었다.
또 한 번은 당시에 무스탕이 유행을 해서 진짜 큰맘을 먹고 백 몇 십 만 원짜리 좋은 무스탕을 샀다.
하지만 주위에는 가난한 시골 목사님들이 많이 있어서 그것을 입고 나갈 용기가 없었다.
결국 밤 11시에 무스탕을 입고 몰래 동네 한 바퀴를 돌았다.
그리고는 곧바로 그 무스탕은 다른 사람의 손에 들어갔다.
살기를 이렇게 융통성 없이 살아왔으니,
아내가 선뜻 자신을 위해 명품 가방 하나 사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이미 그렇게 길들여져 있었기 때문이다.
아내는 적금을 깨가면서도 남을 돕는 사람이다.
아무 이유도 없이 누군가 내게 고맙다고 인사를 하면,
틀림없이 그 뒤엔 아내의 베풂이 있었다.
지금은 그래도 많이 세속화(?)되어 자신을 위해 돈을 쓰기도 하지만,
아직 명품을 턱하니 살 만큼 대담해지지는 않았던 것이다.
아내는 그러한 자신의 입장을 알면서도 괜히 속상한 거다.
남을 위해서는 선물 한보따리를 샀으면서도
정작 자기 물건은 하나도 사지못하는 자신에 대해 화가 나는 것이다.
그런 아내를 살며시 안으며 한마디 건넸다.
“여보, 사랑해!”
아내는 빙긋이 웃으며 답했다.
“난 당신만 있으면 돼. 다른 거는 필요 없어.”
순간 모든 속상함은 사라지고 밀라노 거리의 불빛 속에 우리의 사랑은 반짝이며 타올랐다.
그렇게 이태리의 밤은 깊어가고 있었다.
(계속)
이태리의 쇼핑가
피사에서 (사진의 날짜 설정이 잘못되었음)
첫댓글 난 당신만 있으면 되 아 ~~~~~~우 늑대 소리일까요 ? 여우소리일까요 ?
아무래도 늑대의 소리 같은데요...ㅎㅎ
영화처럼 엮어가는 두 분의 여행에 덩달아 행복하여집니다..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