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악의 실적을 낸 소니가 아이치현 이치노미야(一宮)시의 공장을 폐쇄키로 하자 지역주민 전체가 큰 충격에 빠져 있다. 이 공장은 소니의 주력공장으로, 지역 경제의 생명줄이다. 이치노미야시 다니 가즈오 시장은 일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소니 공장은 지역민의 자랑이었다"며 "이번 폐쇄결정으로 지역경제가 붕괴될까 두렵다"고 말했다. 지역주민들이 대부분인 700여명의 비정규직은 전원 해고가 불가피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제조업 강국
일본이 글로벌 경기침체로 흔들리고 있다. 일본은 지난해 금융위기 초기만 해도 거품없는 주택시장과 1조달러가 넘는 외환보유고로 반사이익을 볼 것이라는 부러움을 받았지만, 연초부터 제조업체들에 대량 감원 바람이 몰아치고 있다. 소니가 14년 만에 적자를 낸 데 이어 파나소닉·도시바·히타치·NEC 등 주요 전자 업체들이 사상 최악의 실적을 내고 유례없는 감원에 나섰다. 세계 최고 경쟁력을 자랑하던 일본의 자존심 도요타 자동차마저 연간 7조원의 영업손실을 낼 전망이다. 90년대 불황 속에서도 '종신고용'을 자랑했던 캐논마저도 직원을 내보내 일본 사회가 충격에 빠졌다.
일본 제조업의 몰락은 글로벌 경기침체와 엔고(円高)로 인한 가격 경쟁력 상실과 수출 부진이 주요 원인이다. 엔화의 가치가 작년 한해 동안 50% 이상 오르는 바람에 수익성이 급격히 악화됐다. 하지만 예상보다 큰 폭의 실적 악화에 대해 전문가들은 일본 기업들의 경영실패에도 원인이 있다고 진단하고 있다. 영국의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일본 전자업계가 유지해온 백화점식 사업전략의 문제점이 유례없는 불황을 맞아 한꺼번에 수면 위로 부상했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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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계에 이른 백화점식 사업전략일본 전자업체의 문제점은 도쿄 아키하바라 전자상가 거리에 늘어선 매장이나 홈페이지를 방문해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파나소닉은 휴대폰이나 LCD TV 같은 첨단 IT 제품 외에도 진공청소기·밥솥·전동 이발기구·애완견용 털깎이·낚시용품·드라이버·전동자전거·자동차용 내비게이터·도어폰까지 수백 종의 제품을 만든다. 파이오니어는 1980년대 유행했던 레이저디스크 플레이어를 최근까지 생산했다. 자(子)회사도 보통 500개가 넘는다. 업종도 음반·게임 같은 엔터테인먼트에서 여행·요식업·물류 사업까지 도무지 정리가 안 될 정도로 많다.
삼성경제연구소 김재윤 상무는 "일본 전자업체들은 너무 많은 품목을 생산하는 데다가 그것도 상당부분 서로 겹친다"면서 "그러다보니 개별 사업의 규모가 너무 작아 해외 시장에서 경쟁력이 떨어진다"고 말했다.
◆1등 제품이 없다
일본 전자 업체들은 카메라·캠코더 등 광학 분야를 제외하고는 세계 1등 제품이 거의 없다. LCD TV나 인터넷TV 같은 첨단 제품을 먼저 개발하고도 정작 시장 경쟁에서는 밀리기 일쑤다. 삼성전자·LG전자가 첨단 분야에 집중 투자하는 것과 달리, 일본 전자업체는 사업군이 너무 방만, 선택과 집중의 전략이 없었다. 일본 전자업체들이 미래 산업으로 생각했던 엔터테인먼트 분야도 마찬가지다. 일본 소니의 게임 산업은 2000년대 초반만 해도 승기를 잡는 듯했지만 게임에만 집중한 일본 닌텐도에 무참하게 패했다. LG경제연구원 이지평 수석연구원은 "일본 전자업체들이 최근 몇 년간 엔저를 등에 업고 한국을 추격해 왔는데, 이번 불황으로 더 격차가 벌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무리한 확장에 발목 잡힌 도요타
국제신용평가기관 무디스는 도요타의 등급을 최고수준인 'Aaa'에서 'Aa1'으로 낮췄으며, 향후 등급 전망도 '부정적'으로 바꿨다. 현대·기아차는 물론 일본 경쟁사인 혼다도 흑자를 지켜낸데 반해 도요타가 무려 7조원에 가까운 영업손실을 내게 된 것은 성급한 글로벌 확대전략이 한몫했다. 도요타는 2000년 이후 매년 50만대씩 판매를 늘렸고, 작년 말까지 글로벌 1000만대 생산설비를 갖추기 위해 대규모 투자를 단행했다. '세계 1등' 목표에 도취해 2007년 하반기부터 신용위기의 징후가 보이는 데도 확장 일변도였다. 특히 미국시장에서 대형차 고급차 위주로만 생산라인을 구성하는 바람에 불황기의 시장 변화에 빠르게 대처하지 못했다. 생산성의 상징인 도요타에서도 대기업병(病)이 생겼다는 지적도 있다.
전문가들은 그러나 일본의 자동차 업체들이 최근 발 빠른 구조조정에 나서고 있기 때문에 예상외로 빠르게 회복될 수도 있다는 지적이다. 외국인투자회사의 한 자동차산업 분석가는 "일본 자동차회사들은 70년대 오일쇼크와 80년대 플라자합의 등 외부충격을 거치면서 기업체질이 크게 개선됐다"며 "한국차들이 경쟁력 향상에 전력을 다하지 않으면, 지금의 일본차들이 겪는 위기보다 더 큰 낭패를 당할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