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가 불편할 때 우리는 환영을 좇는다. 그러나 그런 환영은 매력적이지만 오래 우리를 지켜주지는 못한다. 역사가 그렇다. 힘든 역사가 있을 때마다 어느 민족이든 영웅신화를 만든다. 그러나 마음과 육체에 안정을 가져다 주는 환영의 장점에도 불구하고 진리에 대한 무시는 한 민족의 미래를 어둡게 한다. 제3공화국 이후의 '이순신 신드롬'이 그렇다.
영화 <명량>의 한장면.
삼국지는 이렇게 시작한다. “정치로부터 그 원하는 바를 얻지 못하면 민중은 일쑤 종교적인 구원에 의지하게 된다.”(이문열 평역 28쪽) 비록 허구적 소설에 있는 말임에도 수천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이 진리는 타당한 것 같다. 정말이지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후유증인 세월호 사건과 종교 집단 구원파, 그리고 영화 <명량>과 함께 등장한 이순신 신드롬은 바로 사람들이 정치로부터 그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없기 때문에 발생된 일일 것이다. 그렇다. 어떤 진리가 우리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할 때면 우리들은 어김없이 그들에게 위안을 주는 환상이나 종교적 구원에 의지하게 된다. 이런 환상의 장점은 우리들을 근심스러운 일상에서 해방시켜주며 거추장스러운 정치적 아젠다에서, 또는 현실이 부여하는 마음의 짐에서 해방시켜주는 것이다. 그러나 진리에 다다르는 길이 험하다 하더라도 이런 환상은 인간을 결코 오래 만족시키지 못한다.
서양철학의 기원으로 꼽히는 『국가』에서 플라톤은 동굴의 비유 형식을 들어가며 이런 환상에 인간이 얼마나 경도되어 있는지를 보여준다. 지하 동굴에 갇혀있는 죄수는 자기가 대면하고 있는 동굴 벽의 거짓 환영(그림자)에 사로잡힌 나머지 스스로 동굴 밖으로 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죄수가 동굴 밖으로 나왔을 때 죄수는 그 태양 아래 펼쳐진 휘황찬란한 세계에 넋을 잃는다. 이제 그가 동굴에 다시 돌아와 다른 죄수들에게 동굴 밖의 세계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그들은 비웃음과 빈정거림으로 이 죄수에게 대꾸한다. 말하자면 이들은 동굴 속 벽에 비친 환영이 거짓일 수 있음을 거부한 것이다. 다른 죄수들이 진리의 세계를 거부한 이유는 아무리 진리가 세상의 일을 올바로 알려준다고 해도 그들의 마음과 육체에 즐거움과 안정감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고대나 원시시대 제의로서 작동한 문학이나 예술은 현대에도 그런 제의의 역할을 하고 있다. 그림이나 음악, 무용, 그리고 영화 같은 것은 어쩌면 그런 제의적 몸짓의 보상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것으로 매우 필요한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 <명량>이 이순신이라는 인물의 환영을 만드는 것은 정치에 염증을 낸 사람들이 원시적 보호본능을 호소하는 매우 긴요한 일일 것이다.
프로이트가 주장하듯이 원초적 불안이나 성적충동이 없다면 우리들은 삶을 큰 문제없이 더 잘 영위해 갈 수 있을 것이고, 부르주아가 제공하는 환상의 이데올로기에 빠지지 않는다면 프롤레타리아 또한 노동의 즐거움으로 자족하면서 살아갈 것이다. 그러나 현세의 불행에 대한 보상으로 이루어진 환영은 그 한계를 가지는 법, 벌거숭이 임금님이 아무리 자기 환상에 머물러 있으려 해도 결국은 자신의 알몸을 드러내고 말 뿐이다.
역사도 마찬가지다. 역사기술은 현재로부터 역사를 바라보는 ‘기억’이라는 해석 필터, 환영이라는 인간의 관점에 의해 굴절된다. 독자들 중 어느 누구도 역사가 독일의 역사학자 레오폴트 랑케가 말한 대로 “있었던 그대로의 과거(wie es eigentlich gewesen)”를 그대로 재현할 수 있다고 믿지는 않을 것이다. 분명코 우리가 직시하는 역사해석이나 역사기술은 정치권력에 의해, 그리고 믿음과 이데올로기에 의해 좌우되고 있음에 틀림없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민중들이 정치에 염증을 느낀 나머지 전설과 신화, 예술적 환상을 좇는다면 진리는 외면되고, 그 결과 병자호란 이후 등장한 『박씨전』 같은 주관적 세계가 만들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영화나 예술이 우리가 환상을 믿게 만든다면 그것은 필경 플라톤이 의심스럽게 바라본 예술적 믿음이 우리가 객관적으로 인정하는 인식론을 능가하는 일이 될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이순신의 관점에서 본(가령 그의 난중일기를 토대로 본) 역사가 정론으로 자리잡는 것은 객관적인 역사기술로 보기 힘들 뿐 아니라 환영에 가까운 그 무엇이다. 물론 그가 민족을 고난에 처하게 했던 전쟁에서 이겼고, 이겼을 뿐 아니라 위대한 그의 행위가 한 민족의 정체성의 일부가 되었다 하더라도 그에 대한 과도한 환상은 역사적 진리가 아니라 환영에 가깝다. 이것은 나쁜 경우에도 적용된다. 연산군일기가 비록 연산군의 사후에 기록된 것은 맞지만 사초를 기록한 이가 연산군의 총애를 받았던 사람이거나 후환이 두려워 사초의 기록을 회피하였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이 일기(일반적으로는 실록이라 함)가 신빙성이 있거나, 랑케가 말한 대로 “있었던 그대로의 과거”는 아닐 것이다. 자신이 스스로에 대한 글을 쓸 때 그것을 우리는 자서전이라 한다. 역사가 자서전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객관적인 관점이 필요한 것이다.
병자호란이 끝난 후, 인조는 청나라 황제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조선의 조정은 대청황제공덕비(삼전도비)를 바쳐야 했는데, 후환을 두려워 한 대신들이 서로 문장을 짓지 않기 위해 피하고, 결국 그 일은 이경석이 맡게 되었다. 그렇다면 그는 역적인가, 아니면 충신인가? 그리고 그가 쓴 비문은 분명 홍타이지의 완력에 의해 지은 것일진대 글을 쓴 조선인(왕)의 진실성을 담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왜 우리 역사는 이순신 같은 영웅의 역사에만 집중하고 그런 치욕적인 역사는 감추려고만 드는가? 이것이 아마 편향된 역사 환영을 부추기고 있지 않은지 반성해보아야 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는 역사기술의 권력으로부터 역사를 있는 그대로, 즉 객관적으로 복원하려고 노력하여야 한다. 내가 하면 사랑, 네가 하면 불륜, 그가 하면 스캔들이라는 말이 있듯이 역사를 해석할 때 내가 하면 학문, 네가 하면 정치적 신념, 그가 하면 이데올로기라는 수렁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역사 해석의 피안, 즉 어느 것도 말한 대로, 쓰인 대로 믿을 수 없다는 역사 저편의 언덕에 도달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순신과 와키자카, 이순신과 원균, 이순신과 선조, 이순신과 배설의 역사도 이데올로기의 함정이 만들어놓은 틀에서 벗어나기 위해 어떤 방법으로 역사를 해석해야 할지 문제성을 지닌 일이라 할 수 있다. 먼저 제시할 방법은 역사를 이념적 해석이 아닌 흔적이라는 측면에서 재구성해야 한다는 원칙이 있다. 사료가 다른 사료와 결속력 coherence이 있는 경우에만 진리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그리고 어떤 힘에 강제된 역사는 진실성을 의심받을 수 있으며, 이 경우 반드시 회귀하여 억압의 흔적을 보존한 반기억 counter-memory이 존재할 수 있다. 역사해석은 그 억압된 회귀의 흔적을 진리의 후보로 받아들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가령 『난중일기』에서 배설이 도망갔다는 기록이 있다면, ‘왜 이순신은 그를 잡아들일 노력을 하지 않았는가?’란 명제와 어떤 진리의 결속력을 생산해야 한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에는 이와 관련한 좋은 예가 나온다(이윤기 번역본 52쪽). “크레타의 여인들은 낯선 남자를 보면 돌연 방어 자세를 취하고 손가락은 블라우스 섶을 꽉 움켜잡는다”는 서술이 있다. “사라센 해적의 침범을 받은 나라의 사람들에게 찾을” 수 있는 기억의 흔적이다.
분명 위안부 과거가 부끄러운 일임에도 과감히 상처를 말하는 위안부 할머니들이 있다면, 이것은 강제된 성노예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다는 뜻이며, 조청전쟁 이후 우리말에 “화냥년”이 만들어졌고, 그것이 나쁜 뜻으로 사용된다면 그 또한 어떤 왜곡된 진리를 간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쯤 되면 한 사람만 영웅이고 다른 모두는 역적이나 배신자라는 환영에서 벗어나야 한다. 원균이나 배설, 김억추 모두 조선인이고 우리가 버릴 수 없는 역사의 담지자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권률, 김덕령, 김시민에 대한 재평가도 이루어져야 한다. 그들의 업적을 무조건 기리거나 폄하하는 대신, 그 업적이 반대편의 주장을 통해 변증법적으로 객관적 진리가 될 수 있는지 평가해보아야 한다. 그들이 무능했는지, 모함을 했는지, 해전에서 물러섰는지, 도망갔는지, 그리고 전쟁에서 작전상 후퇴를 했는지, 권력투쟁과 이념논쟁에서 희생이 되었는지, 이 모든 것을 환영이 아니라 진리에 따라 평가해야 한다. 지하 동굴 감옥에 있는 다른 죄수들처럼 비웃음과 빈정거림으로 역사적 진리를 바라봐서는 안 된다.
놀랄만한 역사왜곡이라고 볼지 모르지만 조일전쟁에서 일본이 평가하는 우리 쪽의 장수는 이순신이 아니고 진주목사 김시민이다(일본 위키피디아). 또한 일본에서는 이순신의 초상이 야만적인 영웅처럼 그려져 있는데 우리 기억사는 오랫동안 이순신의 모습을 자연적인 영웅(원래 영웅은 번덕스럽고 야만적이다)의 모습보다는 그의 인품이 가지는 덕성과 그가 겪은 수난, 그리고 승전이라는 업적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세계의 어떤 표현에도 없는 성웅(聖雄=聖人+英雄?)이란 말을 만들어냈다. 그런 환영을 만들어낼 때는 반드시 정치적 불안이나 불만이 있었을 때이다. 물론 정치가와 민중은 서로 그런 인물을 원한다. 이렇게 한 쪽이 다른 쪽의 역사를 탈루하고, 또 다른 쪽에서도 왜곡하는 것이 정상이다.
요즈음 위안부 문제로 인한 일본과 전세계(유엔)의 기억 전쟁을 보라. 일본이 강제성을 동원할 수 없다고 보는 그곳에 유의미한 억압이 있다고 상정할 수 있다. 그러므로 당시 전투에 참가한 적들의 평가도 조일전쟁을 해석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한다.
필자도 이순신을 존경하지만(그의 어머니는 놀랍게도 나와 같은 본을 쓰는 초계 변씨다) 다만 그가 훌륭하기 때문에 원균과 배설, 김억추 등이 무조건 역적이나 배신자, 도망자라는 역사관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어느 나라든 자기들의 역사가 객관적 역사기술이라고 주장하고 어느 집단이든 자신의 조상이 훌륭한 치적을 거두었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므로 사실상 어느 정도의 역사 주관화는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대부분 근대화를 빨리 이룬 국가들이 시도한 역사의 신화화, 영웅화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부분들이다. 그러나 만약 독일의 계몽주의 학자이자 문학가인 레싱이 유대인 학자인 멘델스존에게 선민의식을 비판하였듯이(“왜 너희들 유대인들은 모든 이들이 선한가?”) 영웅은 어떤 잘못도 없고 도덕적으로 선하고, 영웅이 아닌 사람들의 잘못된 행위나 전술로 인해 그 사람과 그 후손 전체가 손가락질 받는 사회는 바람직하지 않다. 대화, 관용, 용서가 이 시대의 대세라면, 퇴계라는 인물이 진성 이씨만의 선조가 아니듯 전쟁에서 패배한조상도 그들만의 선조가 아니다. 가급적 우리는 역사적 사실에서 어느 가문이 역적이며, 어느 가문이 벼슬을 많이 했느냐를 구할 것이 아니라 역사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를 궁구해야 한다. 토인비는 말했다. “역사적 실패의 절반은 찬란했던 시대에 대한 기억에서 비롯됐다.”고.
이제 글을 마치고자 한다. 역사수업을 한다는 것은 역사 교과의 부활을 의미하지 않는다. 최근 들어 한국사(국사, 국어 대신 한국사, 한국어로 쓰자!)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는 것은 다행한 일이기도 하다. 역사물을 예술로 만들고자 했던 <명량> 같은 영화가 나오는 일도 좋은 일이다. 그리고 최원정 아나운서, 신병주 교수 나오고 류근 시인, 어느 고등학교 교사 나와서 재미있는 멘트 날리고 시시덕거리는 그런 KBS 방송프로그램 같은 것도 좋다. 그러나 역사는 코미디가 아니다. 그리고 허약하기 짝이 없는 민중들에게 진리의 모습만으로 역사를 가까이 가게 할 수도 없다. 그러나 자칫 이런 영화, 이런 환영들이 부메랑처럼 되돌아와 민중들을 다시 역사에서 등을 돌리게 할 수도 있다. 같은 맥락에서 독일의 학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학생들을 교화하지 마라. 주입식 교육을 하지 마라. 교사의 생각을 강요하지 말라. 사회에서 논란이 되는 것은 수업에서도 논란이 되어야 한다.”
영웅의 환영을 좇다가 진리를 놓칠 수는 없다. 삼국지의 두 번째 문장은 이렇게 말한다.
“생각이 밝은 치자(治者)는 민중의 지나치게 종교에 빠져드는 것을 기뻐하지 않고 헤아림이 깊은 식자(識者)는 오히려 그걸 걱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