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南禪軒 독서일기 2025년 12월 12일 금요일]
《『대동야승』 中 趙慶男 著 『續雜錄 속잡록』
인조가 생부를 종묘에 모시려고 고집하다》 (215)
<1634년 갑술년 숭정 7년, 인조 12년>
○ 1월 부원수(副元帥)가 아뢰기를, “호인 차사 야월개(也月介)ㆍ동덕귀(蕫德貴) 등이 수종 호인 46명을 거느리고 나왔는데, 한(汗)의 서한은 먼저 올려보내나이다.” 하였다.
○ 영부사 완평부원군(領府事完平府院君) 삼조원로(三朝元老) 이원익(李元翼)이 죽었다. 그래서 도승지 이민구(李敏求)를 보내어 조상하는 예를 행하게 하였는데, 승지가 와서 아뢰기를, “부원군의 상사는 궁하여 다 이루어지지 못할 모양이옵니다.” 하므로, 명하여 먼저 관판(棺板)과 여러 도구를 보내게 하고, 이어서 예장하게 하였다.
○ 전라 감사 장계에, “옥구 교생(沃溝校生) 강정현(姜廷顯)의 집에서 개가 새끼 7마리를 낳았는데 마지막에 낳은 놈은 한 몸뚱이 한 입에다가 발이 8개입니다.” 하였다.
○ 심 부총병이 서울에 이르니 임금께서 여러 차례 접견했다. 심 부총병은 그로 인해 남한산성에 머물렀다.
○ 2월 1일 부원수가 아뢰기를, “상가희(尙可喜 당장(唐將)으로 도사(都司)이다)가 배반하여 석성(石城)ㆍ광록(廣鹿) 등의 섬을 요략하고, 군사를 거느리고 육지로 내려가니 적들이 와서 맞이하여 들어갔습니다.” 하였다.
[첨언] 명아 패망한 이유 중에 가장 큰 것은 일선 장수들이 배반하고 오랑캐에 붙은 것이다. 以夷制夷가 아니라 以漢制漢이 되어버렸다. 오랑캐들이 아주 영악하다.
○ 22일 함경 감사의 장계에, “호인 차사 대송아(大宋阿)가 시종군 80여 명을 거느리고 회령으로 나왔습니다.” 하였다.
○ 29일 세자를 책봉하였다. 명 나라 사신 패문(牌文)이 나왔다.
○ 4월 금 나라 차사가 서울에 오니 임금께서 불러서 만나 보았다.
○ 명 나라 사신을 접대하는 데 쓸 3결포(三結布)와 각 항의 물건 다수를 내게 하여 제때에 올려보냈다.
○ 6일 원접사 김신국(金藎國)ㆍ종사관 구봉서(具鳳瑞)ㆍ정태화(鄭太和)가 서도로 내려갔다. 전교하기를, “영위승지(迎慰承旨)를 평양으로 내보내고 가승지(假承旨)를 황주(黃州)로 보내라.” 하였다.
○ 이문웅(李文雄)이 이수백(李守白)을 도성 안에서 목 베어 죽였다. 이문웅은 이중로(李重老)의 아들이다. 갑자년 봄에 이괄(李适)이 저탄(猪灘)에 이르렀는데, 이중로는 해서 방어사(海西防禦使)로서 강을 지켰다. 이수백은 적의 선봉이 되어 이중로의 군대를 격파하여 이중로와 박영신(朴英臣) 등을 참수하였는데, 이북(利北)에서 패전하자 이괄의 목을 베어 항복하니 조정에서 그 죄를 용서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사면을 받아 배소(配所)에서 돌아오니 이문웅이 대낮에 그를 목 베었다.
○ 10일 큰 우박이 내렸다.
○ 경상도(慶尙道)의 가덕도(加德島 웅천(熊川) 바다 가운데 있다)의 토병(土兵) 김오동(金汙同)의 집에서 소가 송아지를 낳았는데 한 몸뚱이에 머리가 둘, 눈이 넷, 귀가 셋, 발이 넷이었다. 대구(大丘)에 사는 백성 고영남(高永男)의 집에서 소가 새끼를 낳으려다가 저절로 죽었는데, 배를 갈라보니 그 송아지는 머리는 하나에 눈은 셋이고, 코 둘에 구멍이 여덟에다가 입이 둘, 혀가 둘이었다.
○ 28일 명 나라 사신이 가도(椵島)에 도착하였다.
○ 5월 4일 햇무리가 지다. 15일에 평안도의 운산(雲山) 등지의 읍에 큰 우박이 내려 곡식이 손상되었고, 천둥이 쳐서 사람과 짐승이 많이 죽었다. 조사(詔使)는 가도(椵島)에서 육지로 나와 서울로 향했는데, 일행의 두목들이 약탈하는 행동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반신(伴臣)의 서목에, “여러 가지 벌여 놓은 그릇과 숟가락ㆍ젓가락 등은 모두 탈취하여 즉시 배 위로 보내고, 3일 숙천(肅川)에 이르러서는 길가에 벌여 놓은 잡화를 거둬 배 위로 돌려보냈고, 두목의 차ㆍ떡값은 모두 은자로 받아갔는데, 명 나라 사신은 분부하기를, ‘두목들이 얻은 물건이 다과(多寡)가 고르지 못하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첨언] 가도에 주둔하고 있는 명군의 노략질이 매우 심했다.
○ 황해 감사의 장계에, “참(站)에 들어오면 지대(支待)하는 공장(供帳)과 그릇을 각각 한 벌씩 준비하였는데, 안주(安州)를 지나서는 도처에서 거둬 가지고 갔으니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중간 참에 들리는 곳에다 서둘러 배설할까요?” 하였다.
○ 20일 명 나라 사신이 서울로 들어와 5ㆍ6일을 유숙하는데 그 폐단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서도로 향해 떠났다.
○ 7월 반신이 아뢰기를, “19일에 명 나라 사신이 배를 타고 떠났습니다.” 하였다.
○ 예조에서 아뢰기를, “전하께서는 하늘이 낸 효성이시라 어버이를 높이 받드시는 의식은 지극하다 할 만 합니다. 종묘에 모신다는 하교에 이르러서는 이야말로 막대한 행사이오니 반드시 널리 의론하여 처리하여야 합니다. 본조(本曹)에서 어찌 감히 홀로 맡아서 행하겠습니까. 대신과 의론하여 정탈(定奪)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명분이 이미 정해지고 황제로부터 은봉(恩封)이 또 내렸으니, 이번 종묘에 모시는 것을 막는 것은 실로 불경에 속하는데 예조에서 괴이한 논의를 입을까 두려워서 대신에게 핑계를 대니 일이 매우 해괴하다.” 하였다.
정원에서 아뢰기를, “전하께서 사친(私親)을 현양하고자 하시는 정성이 오랠수록 더욱 두텁습니다. 방금 예조의 회계(回啓)에 대한 비답(批答)에 논의가 두려워서 핑계 댄다고 말씀하셨으나, 예조에서 신중하게 하는 일은 우리 임금으로 하여금 허물이 없는 곳으로 돌아가게 하고자 함인데, 갑자기 엄한 전지를 내리시니 신 등은 후설(喉舌)의 자리에 있으면서 구구한 소회나마 감히 상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전교하기를, “이번에 종묘에 모시는 것은 예의상 당연한 것이다. 저들은 아직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또 절개를 세워서 헛된 명예를 구하고자 하니 그 뜻들이 너무 심하구나.” 하였다. 합사(合司)하여 아뢰기를, “제왕(帝王)의 효도는 비록 어버이를 귀하게 만드는 것을 귀히 여기나 성인(聖人)의 어김이 없어야 한다는 경계를 조금이라도 소홀해서는 불가합니다. 오직 우리 성상께서는 지극한 효성이 하늘에서 나오신 이상 낳은 어버이에게 융숭한 대접을 드리고자 하는 데는 마땅히 더할 수 없이 극진하여야 하겠으나, 전례(典禮)에 있어서는 진실로 지극한 정에 가려 사리에 어긋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추숭(追崇)하는 대례(大禮)는 이미 이루어진 일이니 말하지 않겠습니다만 뜻밖에도 이제 또 종묘에 모신다는 하교가 내리시니 무릇 보고 듣는 사람 중에 누군들 놀라지 않겠습니까. 종묘 소목(昭穆)의 제도는 지극히 엄하고도 중하여 그 자리에 오르지 아니하면 그 묘(廟)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니, 이것은 결코 바꿀 수 없는 떳떳한 법입니다. 원종대왕(元宗大王)께서 비록 성궁(聖躬)을 낳아 키우시어 크게 경사를 여신 성덕이 있으시지만 일찍이 친히 보위(寶位)에 오르시지 못하였으니, 어떻게 여러 성왕과 똑같이 태묘(太廟)에서 향사를 받들어 당연한 순서를 계승하는 것같이 할 수 있겠습니까.
나라에 2묘(二廟)가 있게 되면 묘에 칭위(稱位)가 없었다는 것은 실로 오늘날에 나온 변례(變禮)인데, 예를 잃는 가운데서도 경중이 있으니, 별묘를 세워 권의(權宜)로 제정하는 것이 종묘에 모시는 것처럼 크게 예를 어기는 것보다 낫지 않겠습니까. 조천(祧遷 묘의 위패를 영녕전(永寧殿)으로 모시는 일)하는 한 절차만 해도 또한 극히 난처하니 정리로써 헤아려 보더라도 크게 타당하지 않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지나간 역사를 상고해도 본받을 데가 없고, 예경(禮經)에 질문해도 참고하여 근거할 길이 없으니, 다만 지극한 정에만 따라서 갑자기 예 아닌 예를 행하여 거듭 천하 후세에 비평을 남겨서는 안 됩니다.” 하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합사(合司)하여 잇달아 아뢰었으나 역시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대사헌 강석기(姜碩期)ㆍ전 대사간 조정호(趙廷虎) 등을 불경하여 임금을 경홀히 여긴 죄로 관작을 삭탈하여 문밖으로 내쫓아 보내자, 정원에서 회계하여 막았다. 임금이 재가하여 말하기를, “공을 상주고 죄를 벌하는 것은 나라를 다스리는 큰 권병이라, 사람들이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닌데도 그대들은 임금의 명을 업신여겨 당류(黨類)를 구원하려 하고 이미 내려진 명령을 버젓이 받들지 아니하니 일이 매우 해괴하다. 이 버릇을 징계하여 다스리지 아니하면 임금은 위에서 손이 묶이고 당파는 아래서 마음대로 희롱하여 끝내는 반드시 말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게 될 것이다. 색승지(色承旨) 김남중(金南重)을 파직하라.” 하였다. [한국고전종합D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