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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윤리 스크랩 식사기도의 영성
하늘사랑 추천 0 조회 17 10.02.24 13:1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식사기도의 영성

 

 

1. 영성, 우리 시대의 화두(話頭)?

요사이 영성이라는 단어 여기저기서 튀어나온다. 몇 년 전 까지만 해도 개신교에서는 거의 사용하지 않았던 용어임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어느덧 기독교의 신앙영역에서는 상식적인 통용어가 되어가고 있다.

 

필자가 영성에 대해 강의를 하면서 접하게 되는 문제는 첫째, 영성이라는 용어나 그 내용이 아직 평신도의 신앙과 삶에 아직 녹아있지 못하다는 사실이다. 평신도들은 영성이라는 단어에 익숙하지 않고, 또 그럼으로 말미암아 영성이라는 용어를 들을 때 많은 오해와 혼돈을 가지게 됨을 보게 된다.

 

특히 개신교의 경우 진보적인 성향을 가진 기독교인들에게는 영성훈련은 '보수화'의 현상으로 취급되고,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에게는 비기독교적인 영적 경향성으로 취급되기도 한다. 영성과 관련되어 제기되는 두 번째 문제는 영성이 우리 신앙생활과 별개로 존재하는 어떤 특별한 요소처럼 취급되는 경향이다.

 

사실 우리의 모든 신앙 생활의 행동은 이 영성생활과 직, 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우리가 드리는 예배, 기도, 찬양, 그리고 갖가지 신앙모임을 '영과 진리'로 행한다면 별도의 영성훈련은 필요치 않는 것이다. 영성훈련이 필요하다는 말은 우리의 신앙의 삶이 제대로 영위되지 못하고 있음을 증거 하는 것이기도 하다.

 

형식화 된 예배, 진실하지 못한 기도, 감격되지 않는 찬양 등등이 계속 이어지고 있을 때 어느덧 우리의 영은 점점 허약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성훈련을 멀리서 찾지 말고 우리의 교회의 삶, 신앙의 진정한 실천들이 영성훈련의 장(場)이며 내용임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셋째로, 오늘날 영성과 관련된 문제 중의 하나는 많은 목회자들이 영성에 대한 개인적인 갈증으로 인해 무분별하게 이곳저곳을 기웃거리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현실 목회에서 자신이 먼저 영의 충만함을 경험해야겠다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책을 뒤지거나 갖가지 형태의 영성 세미나 또는 영성 훈련과정에 참여하면서 자신의 영성의 길을 모색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영성의 깊은 맛에 너무도 목말라한 나머지 영성 그 자체에 대한 올바른 이해 없이 하나의 유행처럼 휩쓸려 다니는 현상을 보이고 있다. 영성을 올바로 이해하고 그것을 자신의 삶 속에서 자연스럽게 꽃피우기 위해서는 하루빨리 올바른 영성이해와 훈련의 방향성이 제시되어야 한다. 이웃종교나 혹은 전통수련의 그룹들은 나름대로의 다양한 영성훈련 방법으로 현대인들을 끌어드리는데 기독교는 '자신의 우물에서 물을 기르지 못하고' 남의 샘물에 기웃거리기에 급급한 실정이다. 영성에 대해 이론적으로, 혹은 실제적으로 관심 있는 사람들이 모여 이 문제를 해결하는 모임이 어느 때 보다 절실하다.

2. 몸과 영성 그리고 음식

 

이 글의 제목을 보고 어떤 사람은 '별거에다 영성을 갖다 붙인다'고 조소할지 모르겠다. '밥 한끼 먹으면서 그저 하나님께 주신 음식에 감사하면 됐지 뭐 식사기도에 영성을 운운할 가치가 있다고...' 하면서 말끝을 흐릴 수도 있겠다. 아직 식사기도의 의미에 대한 가르침도 전무한 상태다. 그래서 그런지 여느 기도문집에도 식사기도가 실리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사실 필자도 식사기도의 중요성을 절감하기 시작한지가 얼마 되지 않는다. 그 절감은 '식사기도도 기도의 하나이니까 기도답게 해야겠다'는 문제의식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인간이 '무엇을 먹는가?' '어떻게 먹는가?'가 얼마나 우리의 영성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에 대한 깨달음의 결과였다. '먹을거리'와 '먹는 행위'의 중요성을 깨달았을 때에는 그것을 행하기 이전에 하나님께 드리는 식사기도의 중요성을 깨닫기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몸은 영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고 음식은 바로 영과 연결된 몸을 위한 것인 만큼 그 음식에 '대한', 음식을 '위한' 식사기도이므로 '식사기도의 영성'이라는 말은 결코 어색한 주제가 아니다.

 

1)건강한 몸, 건강한 영성: 조식(調息), 조심(調心), 섭생(攝生)의 조화

 

현재 진행되는 많은 인문학적 영역에서 '몸' 그 자체에 대한 관심이 유행처럼 번져가고 있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현대인들은 인간의 몸의 가치에 대해 올바로 눈뜨지 못하고 몸에 대한 가치폄하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종교계에서는 인간의 영혼과는 유리된 몸 이해가 주류를 이루어서 몸의 반응에 대해서 지극히 물질주의적인 접근만을 시도했다. 그러나 오늘날 몸 그 자체가 지닌 무한한 가치와 사회적 의미가 회복되고 있다. 몸에 대한 현상학적 의의와 가치를 정화열은 다름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첫째, 몸은 타인 그리고 다른 사물들과 함께 세계 안에 창조적으로 존재하는 방식이다. 사회성의 관점에서 보면 몸은 정신보다 존재론적으로 우선한다. 정신은 필연적으로 독백적이지만 몸은 철저히 대화적이다. 따라서 몸은 실체라기보다 관련체이다. 사회적 혹은 인간 관계라 함은 무엇보다도 먼저 신체관계적이어서 몸의 죽음은 사회적인 것 자체의 죽음이다. 둘째로, 살 혹은 육화로서의 몸의 개념은 현상학의 가장 독창적인 특징 중의 하나이다. 육화란 여기서 정신과 몸의 분리불가능성을 의미할 뿐 만 아니라 지각하는 주체 혹은, 더 좋게 표현하면, <동의하는>주체로서의 몸을 긍정한다.' 이처럼 몸은 더 이상 정신이나 영혼에 종속되어 있는 부속물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에서 고유한 주체성을 지닌 관계적 실체이다.

또한 몸과 영성과의 관련 속에서 몸과 마음, 혹은 육체와 영혼을 이분법적으로 분리시켜 사고했던 시기도 이제는 지나갔다. 현재 종교세계는 물론 이거니와 과학이나 철학의 세계에서조차 '몸과 마음', 또는 '몸과 영혼'은 상호 분리될 수 없이 하나의 유기체라는 사실을 상식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몸과 영혼의 불가분리성 때문에 몸의 반응에 우리의 영성이 반응하고, 영성에 따라 몸도 변화된다. 그러므로 몸에 대한 올바른 신학적 인식 없이 진행되는 영성훈련은 반쪽 훈련에 그치고, 그래서 오류를 범할 가능성이 높다. 몸과 영이 상호 창조적인 영향을 주고받을 때 영성의 차원이 보다 깊고 넓게 성숙할 수 있다. 그래서 몸이 건강하지 않으면 영성이 건강하기 힘들다.

우리의 선인들은 몸의 건강을 위해 조식(調息), 즉 숨고르기. 조심(調心), 즉 마음 고르기 그리고 섭생(攝生) , 즉 먹는 것(먹는 행위)의 조화를 필수적인 요소로 보았다. 숨고르기는 신체적으로 볼 때 머리와 우리의 힘의 근원인 배가 서로 잘 교통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즉 단전의 기가 머리까지 잘 통하는 것을 의미하고 그럴 때 몸이 건강하다고 보았다. 만약 내려오는 숨이 가슴에서 멈추고, 올라가는 숨이 머리로 이어지지 않으면 숨이 차서 가빠온다. 이런 병폐를 없애는데 선인들은 숨고르기 훈련을 시도했다. 숨고르기의 핵심의 기본은 들숨과 날숨의 길이를 같게 하고, 될 수 있으면 천천히 높게 올려 줌으로서 아래와 위가 잘 통하게 하는 것이다.

조심(調心)은 마음 다스림을 의미한다. 몸의 차원에서 보면 마음 고르기는 머리의 기운에 비해 배의 기운이 허약할 때 필요한 훈련이다. 기가 머리 쪽으로 몰려있는 사람들은 행동이 가볍고, 흥분을 잘하고, 그래서 스트레스를 쉽게 받는다. 이러한 상황에 처하면 마음이 잘 못쓰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마음 고르기가 필요하다. 마음을 고른다는 것은 말 그대로 마음(心)을 진정시키는 것이다. 이 마음 고르기를 위해 여러 가지 수행이 가능한데 몸의 차원에서 보면 조식훈련이 많은 도움이 된다. 즉 들숨과 날숨의 길이를 같게 하면서 머리와 배의 기의 흐름을 원활하게 하면서 단전에 내려간 기를 남기는 유기(遺氣)의 과정이 유용하다. 이런 과정을 거쳐 단전에 기가 모여 있는 사람은 마음과 행동을 가벼이 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몸이 건강하기 위해서 먹는 것, 즉 올바른 섭생이 매우 중요하다. 먹는 문제에 대해 현대인은 두 극단의 양상을 보인다. 하나는 탐식(貪食)하는 태도이다. 본래 불교에서는 인간을 죽이는 세 가지 독(三毒)을 탐(貪), 진( ), 치(痴)로 보았고 그 중에서 인간의 탐욕의 가지를 성욕, 식욕, 수면욕, 명예욕, 재물욕으로 보았다. 이것이 사람을 망친다는 것인데 현대인들 중의 많은 사람들이 탐식의 우(優)를 범하고 있다는 사람이 너무도 많다. 먹는 것을 너무 좋아하는 나머지 먹는 것에 메어 지내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 그래서 건강에 좋다면 무엇이든지 게걸스럽게 먹고, 맛을 음미하지도 않은 채 무조건 먹어치우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이는 거룩한 음식을 모욕하는 것이다.

조식과 조심, 그리고 섭생의 올바른 조화를 통한 몸의 건강함이 영성훈련의 바탕이 되고 있다.

 

2) 영성과 식욕(食慾)

 

영성훈련과 식욕의 관계는 밀접하다. 영성과 식사기도를 본격적으로 언급하기 전에 왜 많은 수행자들이 수련을 위한 수행 중에서 단식이나 음식의 절제를 중요시했는가를 한번쯤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먹는 것은 인간에게 필수적인 행위이지만 그것을 절제하지 못하고 탐하는 것은 결코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이 주신 몸을 해하게 될 수 있다. 간디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이와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보기를 원하는 구도자에게는 양으로나 질로나 음식을 절제하는 것이 생각과 말을 절제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절대로 필요하다.'

주위를 한번 살펴보면 음식을 절제하지 못하는 사람 치고 말과 행동을 절제하는 사람은 드물다. 말과 행동을 절제할 수 있는 사람은 반드시 음식도 절제할 줄 안다. 본래 음식은 인간의 오장육부의 힘을 주어 몸을 건강하게 유지하는데 도움을 주는 것이다. 그러나 요사이 음식은 인간의 외향적 에너지, 즉 칼로리 보충을 위해서만 먹는 것처럼 그 가치가 추락해 버리고 있다. 거기에다 몸의 건강과는 유리된 미각(味覺)만이 발달되어 버렸다. 이로 인해 음식이 몸의 기(氣)와 상관없이 열량으로 소멸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많은 양을 먹지만 실제 몸은 너무도 약해지고 있는 실정이다. 음식을 먹는 이유는 노동에 즉각적으로 필요한 외부적인 열량을 축적하는 데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온 몸의 기를 건강하게 하는데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래서 혀의 미각이나 위(胃)의 포만감에만 민감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몸의 건강이나 영성수련을 위해서는 소식(小食)이나 채식이 매우 중요하다. 유영모 선생님은 하루 세끼 밥을 그저 하루 한끼 저녁밥으로 해결하셔서 그의 호까지도 저녁 석(夕)자가 세 개 모인 다석(多夕)이셨다. 먹는 습관 하나부터 그 분의 전 ' '을 차게(滿)한 것이다. 탐식을 과식(過食)을 낳고, 과식은 몸과 마음을 병들게 한다. 채근담에는 이런 말이 있다. '입에 맛있는 음식은 모두가 창자를 짓무르게 하고 뼈를 썩게 하는 나쁜 약이다. 실컷 먹지 말고 5분쯤에 멈추면 재앙이 없느니라. 마음에 쾌한 일은 모두 몸을 망치고 덕을 잃게 하는 중매니라. 너무 탐닉하지 말고 5분쯤에 멈추면 뉘우침이 없느니라' .'사람은 먹는 대로된다'

탐식 하는 태도와는 달리 음식에 대해 갖는 또 다른 극단적인 태도는 음식을 경시하는 태도이다. 이것은 먹는 것을 절제하는 행위와는 구별되는 행위이다. 즉 먹을 것을 먹기는 하되 그 음식의 고귀함을 모른 채 밥을 젓가락으로 경망스럽게 먹는 다든지, 심지어는 음식물을 남겨 버리는 행위를 서슴지 않는다. 이러한 행동은 하나님과 생태계 앞에서 자행되는 현대의 가장 큰 죄 중의 하나다. '사는 동안 남긴 음식이 죽은 후 천국 문 앞에 다 쌓여져 있어서 그것을 다 먹기 전에는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이 있다. 우리가 쌀 한 톨에 농부의 땀방울이 일곱 근이 들어있다는 일미칠근(一米七斤)의 깊은 뜻을 헤아리거나, 혹은 절정수(切情水)를 만들어 고춧가루하나 남김없이 들이마시지는 못할 망정 자기 앞에 놓여진 음식을 버리거나 정성스럽게 받지 못한다면 식사기도는 도대체 무엇을 위한 기도인가?

어떤 스님이 절을 방문하기 위해 깊은 산 속 계곡을 오르고 있었다. 길옆으로 작은 계곡에 물이 흐르고 있었는데 가던 길을 멈추고 스님이 가만히 보니 콩나물 하나가 떠내려오는 것이었다. 필시 저 위해 절에서 떠내려 온 것이 분명했다. 그 광경을 보고는 이 스님은 혀를 찼다. '쯔쯔쯔, 이렇게 음식 귀한 줄 모르고 버린 것을 보면 이 절에서 내가 무엇을 배우겠나?'하고는 가던 길을 돌아 내려갔다. 그런데 잠시 후 행자승 하나 헐레벌떡 뛰어오더니 계곡 물에서 그 콩나물 하나를 건져 올라가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 스님이 그 모습을 보고는 '이 절은 필시 배울 것이 있으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다시 절로 올라갔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 작은 콩나물 하나도 가볍게 여기지 않는 마음에서 도(道)는 시작된다는 뜻이 담겨있다. 마음에 담아 둘 이야기이다.

 

음식을 절제하는 것은 영성훈련의 기초이다. 자기의 배를 비울 수 없는 사람이 마음을 비울 수 없고, 마음을 비우지 못하는 사람 속에 그리스도의 영이 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음식의 양 뿐 만이 아니라 음식 그 자체를 귀하게 여기는 그 마음에서 식사기도의 영성은 출발한다.

 

 

3) '음식'과 '음식 먹기'의 신학적 의미

 

음식을 앞에 두고 기도하는 것은 종교들의 공통된 특징 중의 하나이다. 불교에는 식사 때 읊는 오관계라는 게송이 있는데 밥에 대한 깊은 경외의 마음을 담고 있다. 유영모 선생님의 아름다운 풀이로 들어보자: '손에 손이 많이 가고 힘에 힘도 퍽은 드러, 곱게도 지고 지며 바로도 되고 되어온 이 밥을 우리 지은 노릇으론 이에 구태어 받을 수 있사오리까. 거듭 잘못이 없게스리 걸챔부지의 마음을 막고 오직 깨나는 약으로 우리 맡은 것을 맞추기까지 이바지어 삼가 들렵니다.' 사람의 힘과 정성으로 올려진 밥을 받기에 자신의 삶이 부족하지만 마음의 온갖 욕심 버리고 그 밥을 약으로 받들어서 진리(道)를 행하기 위해 음식을 먹겠다는 아름다운 게송이다. 우리 기독교에는 음식에 대한 신앙고백이 없을까? 왜 우리는 음식을 너무도 쉽게 한낱 내 겉 육체만을 유지하는 물질덩어리로만 인식하는 것일까? 음식의 신학적 의미는 무엇인가?

첫째로 이 음식은 하나님의 계속 되는 창조행위의 열매다. 우리는 이 우주가 하나님의 창조물이라는 사실을 늘 신앙 고백한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창조행위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음을 믿는다. 이 우주 삼라만상의 모든 질서가 하나님의 뜻으로 진행되고 있음을 신앙하는 것이다. 따뜻한 햇빛과 비와 바람, 계절의 오고 감 등 이 모든 자연의 변화가 하나님의 손길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한다. 음식은 바로 이런 쉼 없는 하나님의 창조행위의 소산물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귀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밥상에 놓여진 음식을 천천히 들여다보면서 하나님의 창조행위를 바라보고 그 속에 담겨진 뜻을 깨달을 수 있어야 한다. 음식 안에 하나님의 창조행위가 고스란히 담겨져 있기 때문에 감히 '우리 지은 노릇으로는 이에 구태여 받을 수' 없다는 고백이 가능한 것이다.

음식에 대한 또 다른 신학적 의미는 음식에는 하나님의 창조행위에 동참한 인간의 고귀한 노동이 베어있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알 듯이 우리가 먹는 음식이 밥상에 올라오기까지는 그 농산품이 소출 되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의 노동이 동반되어야 한다. 특히 쌀을 묵상하면 농부의 노동이 더욱 고귀하게 느껴진다. 요사이 땅이 점점 허약해지고, 거기다가 각종 농약과 비료에 곡물들이 오염되었다고는 하지만 본래 농부의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거의 다름이 없음을 믿어야 한다. 이 쌀 한 톨, 채소 한 줄기에 하나님의 창조행위와 인간의 노동이 만나 어우러져 있는 것이다. 거기다가 그 음식을 구입하기 위해 가족의 노동까지 더해지니 어찌 귀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내 밥상에 놓인 음식이 품고 있는 노동의 또 다른 차원은 음식을 요리한 사람의 노동과 정성이 깃들여 있다는 점이다. 원재료를 가지고 우리가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만드는 노동은 일종의 예술적인 창조행위이다. 음식이 만들어졌다는 것은 만든 이의 마음이 담겨져 있음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에 음식이 하나님의 창조행위의 결과이자 동시에 인간 노동의 결정체이기도 한 것이다. 만약 음식이 정성스러운 마음 없이 요리되었다면 그 음식은 맛도 없을 뿐더러 먹는 이의 건강에도 별 도움을 주지 못한다.

그렇다면 음식을 먹는 행위 그 자체는 어떤 신학적 의미가 있을까? 우선 이 음식을 먹는 행위는 하나님의 창조행위와 자연의 소출과 인간의 마음을 대면하는 거룩한 행위이며 하나의 예배라는 사실이 부각되어야 한다. 나의 이 몸에 음식이 들어가는 순간 그 음식을 매개로 하나님과 우주와 인간이 만나게 되는 하나의 '우주신인론적 사건'(ein kosmotheandrisches Ereigniss)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 사건은 음식이 우리 안에 들어감으로 인해 '나'라는 존재 안에서 하나님의 창조행위와 인간의 노동과 우주 자연의 세 차원이 마침 하나로 통합되는 놀라운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음식은 물질적인 차원의 이상으로 승화되어 우리의 육체적 열량 뿐 아니라 우리의 영에 에너지를 공급하게 된다. 그래서 음식 먹는 행위는 하나의 제의(祭儀)요 예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김흥호 목사의 다음과 같은 고백을 들어보자: '(하루의 一食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이르는 길이요, 거룩한 길이며, 님께 드리는 제사요,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요 믿음이다.'

이처럼 음식을 먹는 행위는 거룩한 행위이기 때문에 음식을 먹을 때 우리의 몸과 생각을 어수선하게 놀릴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은 음식을 먹을 때 음식보다는 다른 것에 신경을 많이 쓴다. 음식의 의미나 맛에 마음쓰기보다는 신문을 읽거나 혹은 TV에 정신을 쏟아 부어서 먹는 행위는 아주 부수적인 행위로 전락해 버린다. 어떤 이는 먹을 때 말을 많이 해야 소화(消和)에 좋다고 말하는 것에 집중한다. 먹는 행위가 하나님을 모시는 행위일진대 먹는 행위 그 자체에 의미를 두어야 되지 않겠는가?

사람은 음식이나 공기를 받아드리는 순환을 통해 자연과 하나됨을 경험한다. 만약 먹은 행위 속에서 음식이 우리 몸에 들어오고 나감이 항상 일치하지 않거나 일상성을 잃어버리면 몸과 영이 탈난다. 먹은 것을 가벼이 여기거나 먹는 행위를 경박스럽게 행하는 사람은 자연과의 일체감을 느낄 수 없고, 그런 사람의 영성은 건강할 수 없다. 우리에게 '살아 계신 붓다, 살아 계신 그리스도'라는 책으로 많이 알려진 틱낱한 스님은 그의 저서 '평화로움'에서 음식을 먹기 전 심호흡을 길고 천천히 하기를 권장하고 있다. 심호흡으로 먼저 자신을 마음을 다스리고 음식을 대하라고 권장하고 있다: '예를 들어 저녁식사를 하기 전에 모두가 식탁에 둘러앉아서 세 번 느리게 숨을 쉬는 호흡수행을 합니다. 자신을 회복하여 당신 자신이 되도록 숨을 쉽니다. 그렇게 심호흡을 할 때 전적으로 당신 자신이 되는 것을 확인합니다. 그리고 식사를 시작하기 전에 모든 사람을 둘러보고 그들 각자에게 2.3초 동안 미소를 띄웁니다.' 이 언급에서 풍기는 식사 분위기는 진지하고 따뜻한 분위기이다. 실제로 틱낱한 스님이 창설한 프랑스의 '매화마을' 공동체에서는 식사를 하는 동안에는 주위 사람과 어떤 대화도 허락하지 않고 조용히 먹는 행위에 집중하도록 한다. 마음이 흐트러진 상태에서 음식을 대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음식 앞에서 되도록 마음을 다스리고 음식을 진지하게 대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3. 식사기도의 영성

 

식사기도의 영성에 말하기 위해 다소 장황하게 이야기를 펼쳐왔다. 지금까지 말한 것의 핵심은 우리의 먹는 것, 먹는 행위는 우리의 정신적이고 영적인 영역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올바른 영성의 성숙과 실천을 위해서 우리가 먹는 것(무엇)과 먹는 행위(어떻게)의 신학적 의미가 부각되어 한다는 사실이다. 만약 우리가 먹는 음식이 단지 하루 끼니를 때운다는 의미로, 혹은 우리의 육체의 열량을 충족시킨다는 의미로만 이해된다면 식사기도의 영성을 굳이 논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제 이러한 이해 속에서 식사기도가 내포하고 있는 영성적 차원의 4가지 측면을 이해해 보자.

 

1) 창조의 영성을 향한 식사기도

 

우선 식사기도는 창조영성과 긴밀한 관계를 갖게 된다. 필자가 말하는 창조영성이란 하나님의 창조질서 속에서 '생명'을 매개로 활동하시는 그리스도의 영을 통해 형성되는 하나님과 우주 그리고 인간간의 삼중구조의 창조적 관계 우주신인론적 영성이다 이 창조영성을 통해 우리는 창조의 하나님, 우주 만물 속에 현존하시는 그리스도, 그리고 인간의 노동으로 말미암는 창조사역의 신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창조영성은 우주의 신비에 새로운 눈을 뜨게 하며 자연 피조물에 대한 민감성을 회복시킨다. 그러므로 이러한 창조영성은 오늘날 생태계를 위한 대한 실천적 활동의 신앙적 토대를 형성시켜 주기도 한다. 이러한 창조 영성이 식사기도로 더욱 성숙해 질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앞에 놓여진 음식이 하나님의 창조행위의 열매라고 믿는다면 그 음식을 위한 기도는 하나님의 창조행위에 대한 신앙고백이어야 한다. 많은 경우 우리는 식사기도를 '음식에 대한 감사기도'로 이해하고 또 그렇게 기도하지만 그 감사가 하나님의 계속되는 창조행위에 대한 감사로까지 뻗어나가지 못한다. 우리는 밥상 앞에 놓인 음식을 보면서 형식적인 표현으로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기도한다. 그러나 단순히 음식을 주신 것에 대해서만 감사 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이 자연과 인간, 역사를 위해서 지금 일하시고 계신다는 가장 분명한 증거가 바로 우리 식탁에 놓은 음식인 만큼 하나님의 창조세계와 창조행위에 대한 감사는 결코 식사기도에서 지나 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을 어떻게 밥상 앞에서 일일이 기도할 수 있냐'고 반문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언어로 표현하기 이전에 음식 앞에서 눈을 감고 창조의 세계를 가슴속에 그려보는 습관이 필요하다. 그러한 묵상을 통해 하나님의 창조세계 가슴 벅차게 몰려옴을 느낄 수 있다. 이 감사의 묵상을 통해 멀리는 태초의 노동으로 이 세계를 만드시고 우리에게 먹을거리를 주신 하나님의 모습에서 현재에는 이 음식을 위해 사계절을 움직여 오신 창조의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음식 앞에서 이러한 명상이 이루어지면 자연스럽게 두 가지 자문(自問))이 일어난다. 하나는 '지금 나는 하나님의 창조역사에 동참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과연 나는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부합된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질문이다.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일구시는 하나님의 활동하심에 동참하고 있는지, 나의 삶이 하나님이 본래 의도하신 인간과 자연의 조화로운 상생(相生)에 걸맞은 삶인지를 되묻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솟구치는 자문 속에서 때로 우리는 음식 앞에 부끄러움을 느끼고, 회개기도가 나오게 되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무시하고, 자연 생태계를 파괴하는 사람이라면 음식을 먹을 자격도, 식사기도를 할 자격도 없다. 이런 의미에서 식사기도는 창조신학을 올바르게 구현하는 기독교 실천덕목이다.

 

2) 노동의 영성을 향한 식사기도

 

우리의 노동은 하나님의 창조사역에 동참하는 신성한 행위이다. 노동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고 자연과 하나됨을 경험한다. 그러기 때문에 노동은 우리의 기도이다. 현재 잘못된 인간의 노동으로 말미암아 창조질서가 무너지고 자연의 환경이 파괴되어 자연과 인류 모두가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다른 한편에서는 노동의 부족 혹은 이기적인 과욕으로 인간 자신의 몸이 약해지거나 파괴되고 있다. 올바른 노동 회복이 요구되고, 이러한 면에서 노동의 영성은 강조되어야 한다. 만약 노동이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동참으로서 기도이며, 따라서 영성훈련의 하나라면 노동을 통한 그리스도 체험은 엄연한 현실이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우리 앞에 놓여진 음식은 인간이 행한 신성한 노동의 산물이다. 자신 스스로가 그 곡물이나 야채를 생산해낸 농부가 아니더라도 음식 속에 담긴 노동의 의미는 결코 간과될 수 없다. 오히려 고귀한 노동 앞에서 자신의 노동을 되돌아보아야 한다. 그들의 노동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우리 자신의 노동에 대한 의미를 되새길 수 있다. 또한 우리는 그 음식을 요리한 '수고한 손길'에도 적극적인 '노동의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 많은 경우 음식을 만든 여자의 노동의 가치가 폄하되곤 한다. 여자들의 노동을 통해 만들어진 음식은 노동을 통해 '재료'가 '음식'으로 변화의 과정을 거친 것이다. 그래서 그 음식에는 음식을 만드는 사람의 정성과 심미적 감각이 녹아져 있는 하나의 예술품이기도 하다.

이러한 음식을 앞에서 드리는 우리의 식사기도는 우리의 노동을 되뇌이게 한다. 인간의 노동이 깊게 명상되어지는 시간이 바로 식사기도 시간인 것이다. 나의 노동의 가치가 되새겨지고 이웃의 노동에 감사하게 된다. 음식을 통해 노동의 가치가 재 부여됨으로서 음식이 우리 몸에서 에너지로 전환되는 '사건'에 눈을 뜨게 된다. 이러한 사건을 통해 다시 인간은 노동의 삶은 살아갈 수 있는 힘(열량)과 에너지(氣)를 얻게 되는 것이다.

음식의 의미가 살아나기 위한 측면에서 시행하는 기도뿐 아니라 그 음식이 우리 몸에 해가 되지 않도록 그 음식 자체를 위해서 기도해야 하는 것도 식사기도의 중요한 측면이다. 더욱이 오늘날 인간의 이기심으로 말미암는 잘못된 노동의 결과로 농약과 유전자 변형으로 오염된 음식이 우리에게 독(毒)이 될 소지 점점 많아지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기농 생산물이다, 무농약 쌀이다'하는 것들은 점점 부자들의 독점이 되고 있는 실정이다. 안심하고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시대가 지나가고 있다. 그래서 우리가 원하지 않아도 우리 몸에 유익하지 못한 물질이 음식을 통해 들어 올 수 있다. 식사기도는 음식으로 도리어 인해 우리의 몸의 건강함이 해치지 않게 되기를 기도이기 하다. 그것은 '독(毒)을 마셔도 해(害)가 되지 않으리라'는 성서의 말씀에 대한 믿음의 표현이기도 하다. 이것은 잘못된 노동을 극복하는 길이기도 한다. 음식이 우리 몸에 들어가 아무 탈없이 흡수되기를 바라는 마음의 식사기도는 음식을 다 먹은 후 잠시 묵상으로 기도하는 것이 좋다. 천주교에서 식사 후 성호를 긋거나, 불교에서 식사 후 다시 한번 합장(合掌)하는 의미를 기독교의 표현으로 되살릴 수 있는 것이다.

 

 

3) 나눔과 정의의 영성을 위한 식사기도

 

음식은 자신만이 먹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나누기' 위해서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음식을 먹는 행위는 또한 나눔을 경험하는 귀한 시간이다. 한 솥에서 나온 같은 음식을 여럿이 나눔으로 말미암아 함께 하는 이들과 한 몸, 한 지체됨을 경험한다. 우리는 식사시간을 통해 서로의 공동체성을 확인하게 된다. 그러므로 서로를 마주보며 식사를 한다는 것은 우리의 몸과 마음이 함께 하는 매우 진실된 코이노니아의 경험이다.

요사이 많은 교회에서 예배 후 함께 '공동식사'를 한다. 이 공동식사는 초대교회에서부터 내려오는 기독교의 중요한 전통 중의 하나이다. 이 공동식사를 통해 초대교인들은 그리스도에 자신들의 체험과 신앙과 뜻을 나누며 동시에 자신의 것을 함께 나누는 나눔의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현재 음식을 함께 먹을 때 나눔의 의미는 매우 약화되거나 간과되고 있다. 특히 몇몇 여유 있는 공간을 가진 교회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교회에서의 공동 식사시간은 매우 혼잡하고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치뤄진다. 심지어 자리가 모자라는 경우에는 눈치보고 빨리 먹고 일어나야 한다. 밥알이 어디로 들어가는지도 모르게 후닥닥 해치우기 일쑤이다. 식사시간의 음식을 나눔으로 오는 그리스도 공동체의 한 몸됨의 은혜를 체험하기는 요원한 일처럼 보인다. 공간의 비좁음만을 탓할 수도 없다. 여유 있는 공간을 지녔다 하더라도 교회에서 점심은 그저 한 끼를 때우고 간다는 생각이 더 강하게 작용하고 있어서 음식을 통한 코이노니아가 제대로 언급되거나 실천되지 않는다. 이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귀한 '하나 됨'의 기회를 놓치고 있다는 증거이다. 그래서 초대교회에서 떡을 나누고 사랑을 나눈 전통의 외적인 형태만 남아있고 그들의 감격은 전승되지 못하고 있다. 나눔의 공동식사의 본래의미가 상실되고 있는 것이다. 한술 더 떠 일반식당처럼 돈을 받는 교회도 있는데 그것 또한 공동식사의 의미를 감소시키는 요소가 된다. 만약 교회의 재정이 어렵다면 십시일반해서 성미(誠米)를 모으거나, 마음에 우러나오는 헌금을 통해 그 모자람을 채우게 되는 나눔의 기회로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식사는 이러한 나눔의 공동체의 확인이며 나눔과 공동체성에 대한 감격이다. 식사기도를 통해 우리의 공동식사의 의미가 증폭될 수 있다. 비단 교회 뿐 아니라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한 식탁에서 함께 먹은 행위를 통해 사랑과 정을 나누는 것이 식사기도는 이럴 때 의미 있다. '밥상공동체'라는 말이 한때 유행이 되었다. 그 말 그대로 밥상에서 공동체성을 느끼고, 그 느낌이 반복됨을 통해 가정도 교회도 건강하게 유지될 수 있을 것이다.

음식을 나누는 행위를 사회적으로 해석하면 그것은 정의의 실천을 의미한다. 빵을 '독점'하지 않고 나눈다는 의미는 곧 평등한 세계로의 지향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가난한 자와 부자의 불평등은 '빵의 공유화 실천' 속에서 해소되어야 할 불의(不義)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음식을 대할 때마다 자신의 의지와 노력과는 별개로 사회의 구조적 모순으로 인해 음식을 먹지 못하는 가난한 이를 위한 기도를 잊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카르터라는 여성 신학자는 빵과 힘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상징적으로 그리고 있다.

 

태초에 씨앗이 있었다. 씨앗 속에 낟알이 있었다. 낟알 속에 추수가 있었고, 추수 속에 빵이 있었고, 빵 속에 힘이 있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모든 이들이 땅을 먹을 것이다. 모든 이가 씨앗을 먹을 것이다. 모든 이가 낟알을 먹을 것이다. 모든 이가 곡식을 먹을 것이다. 모든 이가 빵을 먹을 것이다. 모든 이가 힘을 먹을 것이다.'(중략)

그리고 나서 하나님은 사랑으로 자신의 용기를 모아 '빵이 있어라' 말씀하셨다. 그러자 하나님의 자매들과 친구들 그리고 사랑하는 이들은 땅에 무릎을 꿇고 씨앗을 뿌린 후 비가 오도록 기도했고, 곡식을 노래하고 추수해서 밀을 갈고 옥수수를 빻아서. 그러자 빵이 생겼다. 그것은 좋았다.

오늘날 하나님의 자매인 우리들은 말한다 '모든 이들이 빵과 힘을 먹을 것이다. 모든 이들이 힘과 빵을 먹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말한다. 빵이 있어라! 힘이 있어라! 빵을 먹고 힘을 먹자 그러며 빵이 부풀어 모든 이들이 채움을 얻게 될 것이다.'(하략)

 

빵 속에 힘이 있기 때문에 이 빵을 독식하는 것은 곧 권력의 독점을 의미하는 것이고, 그것은 실재의 사회적 관계 속에서 불의를 창출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음식을 위해 기도하기 전 우리 앞에 놓은 음식이 정의가 결여된 음식인지를 되물어야 한다. 우리가 만약 그리스도인이라면 공의와 평화가 이루어지도록 기도해야 한다. 그러한 정의에 대한 갈망이 우리의 밥그릇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는지 되돌아보아야 한다. 그리고 음식을 먹으면서 다시 한번 정의를 갈망하는 정의의 영성이 솟아나기를 기도해야 한다. 우리가 우리 것을 나누지 않으면, 그래서 '적극적으로 가난해지기'를 실천하지 않은 자에게 식사기도는 가장 큰 회개와 결단의 기도가 되어야 한다. 음식 속에 있는 그 권력이 나눠지지 않으면 그 음식은 부패한 음식과 다름이 없다.

 

4) 순결과 섬김의 영성: 설거지

 

식사의 마침은 음식을 다 먹는 것에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남은 음식을 정리하고, 음식이 담겼던 그릇을 깨끗이 씻는 설거지까지 연결된다. 즉 설거지는 또한 단순히 그릇을 씻는 행위가 아니라 남은 음식을 깨끗하게 분리하고 보관하는 행위까지 포함되기 때문에 음식을 가벼이 여기지 못하게 하는 출발점이기도 하다. 음식 앞에서 드리는 기도는 언어로 드리는 식사기도라면 설거지는 '몸으로 드리는 식사기도'이다. 설거지는 자신의 그릇을 깨끗이 비우는데 것을 의미함과 동시에 음식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기회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설거지의 의미를 간과할 수 없다. 일찍이 기독교 공동체인 '라브리 공동체'(L'abrie Fellowship)를 창설했던 쉐이퍼(Francis Schaeffer)박사는 '설거지도 기독교다'라고 말했다. 우리의 모든 삶의 영역에 그리스도의 진리는 실천될 수 있다는 것이고, 설거지의 행위 속에서도 기독교의 진리가 얼마든지 표현될 수 있는 것이다.

외국의 많은 기독교 공동체, 혹은 다른 종교의 공동체를 가보면 식사 후 설거지는 개개인이 하거나 혹은 공동으로 하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그것은 일의 효용성에도 그 이유가 있겠지만 그것보다는 설거지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 개신교 교회나 공동체 경우 이에 대한 의미부여 매우 약한 편이다. 필자는 인도 푸나(Poona)에 있는 카톨릭 대학인 드 노빌리(De Novili) 대학에서 3개월 연구원으로 공부한 경험이 있다. 그때 인상 깊었던 것은 학생은 말할 것도 없고 모든 교수들도 자신이 먹은 그릇은 자신이 닦는 모습이었다. 필자가 경험한 다른 종교 공동체들도 마찬가지였다. 한국 개신교 교회나 신학교 식당에는 좀처럼 보기 힘든 광경이다. 여기서부터 벌써 개신교 영성의 힘은 뒤 처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설거지는 일반적으로 귀찮은 일로 치부되기 쉽고, 여성의 일로 생각한다. 교회에서든 가정에서는 설거지는 당연히 여자의 몫이다. 교회에서 남자 목사나 장로들이 설거지하는 것을 본 기억이 없다. 수련회에서 그저 재미로 가끔씩 남자들이 설거지하는 경우를 본다. '몸으로 드리는 식사기도'로서의 설거지는 첫째로 자신의 '마음 그릇'을 씻는 행위로 묵상되면서 순결과 비움의 영성을 되새기게 한다. 우리 자신 자신의 위가 음식으로 채워질 때 하나님의 은혜의 충만함을 경험할 수 있다면, 설거지는 반대로 우리의 영혼의 순결과 비움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다. 오늘 우리의 일상 속에서 우리는 비움과 순결의 영성을 경험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일상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의 비움을 상기하게 하는 경험을 하지 못한다. 그런데 설거지를 통해 그리스도의 비움과 우리 자신의 순결을 되돌아 볼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이 깨끗한 자가 하나님을 볼 수 있다는 말씀을 설거지를 통해 발견할 수 있다면 그릇을 물로 씻는 행위 속에서 우리의 거룩함의 회복을 갈망할 수 있지 않겠는가? 우리가 만약 영성생활의 출발인 자신의 영혼을 비움과 순결함에 유지하지 못한다면 그리스도의 영은 거할 수 없다. 설거지는 자신의 더러움과 교만과 욕심, 사사로운 마음을 씻어내기를 기도의 시간이다.

'몸으로 드리는 식사기도'로서의 설거지는 둘째로, 남을 위한 섬김의 영성을 깊게 한다. 그들의 그릇을 대신 씻어 주는 행위는 남을 자신 보다 낫게 여기는 현대적인 의미에서 또 하나의 세족식(洗足式)을 행하는 것이다. 설거지를 통해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을 때 주님의 심정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설거지는 '크고자 하는 자는 남을 섬기라'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길이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많은 공동체들이 설거지를 스스로 행하게 하는 것은 그 작은 행위를 통해 그리스도의 비움과 섬김의 도를 실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나 가정에서 설거지는 좋은 영성훈련의 실천으로 활용되어야 한다.

 

5. 글을 마치며: 식사기도, 영성생활의 시작

 

여기까지 읽은 사람이라면 혹 이런 저런 불평이 생길지 모르겠다; '이렇게 음식에 의미를 부여하면서 기도하다가는 한 시간해도 모자라겠다' '그렇게 기도하다가는 밥 다 식어서 못 먹겠다' 혹은 '식사기도를 오래하는 사람을 예의가 없는 사람이다' 등등. 지금까지 언급한 식사기도의 의미를 언어로 일일이 표현하면 정말 밥 먹은 시간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식사기도에 담긴 영성적 의미를 잊지 않으면서 주신 음식에 진정으로 감사하는 시간은 그리 오랜 시간을 필요하지 않는다. 굳이 언어로 표현할 필요도 없다. 눈을 감고 음식 앞에서 침묵 가운데 음식에 대한 의미를 되새기면 코끝이 찡한 감사함이 복받쳐 오를 것이다. 많은 말이 필요치 않는다. 때로는 여러 가지 의미 중에서 떠오르는 하나에 집중해서 기도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식사기도를 형식적인 기도로 전락시키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식사기도가 진정한 기도가 될 때 몸 속에 들어가는 음식은 비로소 우리의 온 몸 뿐만이 아니라 우리의 영혼에도 힘을 주는 하나님의 축복이 될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 본대로 식사기도는 영성생활의 주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식사기도를 통해 창조영성과 노동의 영성, 그리고 나눔과 정의의 영성이 자라날 수 있으며, 영혼의 정결함과 섬김의 도가 실천될 수 있다. 식사기도를 가볍게 여기는 자는 그 음식을 위해 일하신 하느님을 가벼이 여기는 자이며, 자신과 남의 노동을 무시하는 사람이다. 영으로 기도하는 사람이 식사기도를 소홀히 할 수 없다. 우리의 식사기도를 한번 살펴보자. 그리고 식사기도를 통해 음식이 '진지'(眞知)가 되고, 음식먹기는 행위가 하나의 예배로 승화되기를 마음 깊이 바래보자.

 

김 진 박사 <>

기사제공 종교신학연구소

- CDN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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