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련화 / 조영식 시, 김동진 작곡 / 테너 엄정행 & photo by 모모수계
https://youtu.be/5NBaCLc82Zs
함부림의 묘비
함부림 필적
함부림이 <태종실록>에는 다르게 전해지나,
이야기와 정사가 동일할 필요는 없다.
함부림은 1392년(공양왕 4년)에 이성계가 득세하자
길재, 이색, 정몽주의 길을 가지 않고 병조의 정랑으로
도평 의사사와 경력사(經歷司)의 도사를 겸했다.
이 해 7월에 이성계가 왕이 된 후 추대한 공으로 삼등 공신이 된다.
조정에 있을 때는 바른말을 하여 관리로서 명성이 높았다.
하지만 그는 이미 고려 말기에 출사 한 인물로,
이때부터 화류가로 방랑하여 풍류남아로서 명성을 떨쳤다.
함부림은 일찍이 호남의 감사로 전주에 머물게 되었다.
으레 감사 방에는 감사를 모시는 기녀가 있어,
감사의 객고를 풀어주고 여러 가지로 위로해주었다.
그러면 풍류를 아는 감사는 마음이 풀린다.
“내 여러 지방에 가보았지만 너같이 똑똑한 기녀는 처음이구나.”
“소녀는 전주 태생이옵니다.
이제 전주에서는 이름이 알려졌으나 한양에서는 모르고 있습니다.”
기녀들은 모두 한양으로 올라가야 출세의 길이 열린다고 생각했다.
전주 기생 막동 역시 감사를 따라 한양으로 올라갈 생각을 품고 있었다.
“오냐, 좋다. 너만 따르면 한양이고 어디고 가자꾸나.”
“대감의 말씀이 정말이 오리까?”
“그렇다. 거짓말이야 하겠느냐!”
함부림은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나
시일이 갈수록 젊은 여성이 마음에 들었다.
저녁이 되어 그녀의 위로를 받으면 새로이 생명이 부풀어 오르는 듯했다.
함부림은 명재상이라 불리며, 무슨 일에든지 근엄하고 성실하여 공사를 잘 처리했다.
함부림의 나이 오십이 거의 되어가고 있었지만
아직은 장년의 힘이 남아 있었다.
오히려 기녀 막동에 대한 연연한 마음은 더욱 커갔다.
풍류남아로서 화류계에서 많은 기녀를 마음대로 꺾은
그도 이제는 철이 드는지 한 여성에 대한 정이 더욱 깊어가는 듯했다.
함부림은 ‘내 어찌 된 셈인가’하고 홀로 생각하며 장차 전주를 떠나갈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막동은 이럴 때면 달려들었다.
“대감, 이제 가시면 언제 오시나요?”
“다시 오기 어렵다.”
“그러시면 천첩을 아주 버리시나요?”
“버릴 수가 없구나.”
함부림은 막동을 버리기 싫어하는 눈치였다. 그럴 때면 막동은 감사에게 더욱 매달렸다.
“소녀도 한양으로 갈 터이니 이곳에서 관기의 적을 뜯어버려 주셔요.”
“오냐. 그러면 내가 호패를 주마.”
함부림은 막동에게 호패까지 떼어주고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며 한양으로 떠났다.
전주의 관기로서는 출세할 좋은 기회였다.
임과 이별한 후 잠시 있다가 막동은 집안일을 정리하고, 한양으로 올라갈 차비를 했다.
언제 오라는 한양의 기별도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자기 일이 끝난 후 막동은 전주 부윤에게 하직을 고했다.
“사또, 쇤네는 한양으로 가겠나이다.”
막둥이 부윤에게 말했다.
“무슨 소리냐? 관기는 마음대로 떠날 수 없다.”
“아니오이다. 전에 내려오시던 감사를 따라갑니다.”
“전의 감사라니, 동원 군 함 부림 대감 말이냐?”
“그러하오이다.”
“안 될 말이다. 동원 군은 우리나라의 명재상이시다.
더구나 지금 대사헌으로 있는 분이 관기를 떼어 간다는 말이냐? 거짓말이렷다.”
부윤은 좀처럼 믿지 않았다. 막동은 함 부림 감사가 주고 간 호패를 내놓았다.
그래도 부윤은 믿지 않았다.
나중에는 사헌부의 대사헌으로서 관기를 부른다는 문서까지 내놓았다.
이제는 전주 부윤 이언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국가의 감찰을 맡은 법관이 어찌 관유물인 관기를 데려간다는 말이냐? 기막힌 노릇이다.
나는 그래도 함 감사는 절개 있는 선비로 알았는데, 이제 보니 아주 하품 인간이로구나.”
이언은 매우 불쾌해하며 막동을 보냈다.
이제부터 전주 관기는 어엿한 대사헌의 첩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함 감사는 관기를 한양으로 불러왔으면서도 그녀를 그다지 가까이하지 않았다.
“대감, 어인 일로 불쾌하게 생각하시나이까?”
“대사헌으로서 관기를 건드릴 수 없어 그런다.”
그래도 오래간만에 만난 함 부림은 전날 전주에서 놀았던 생각을 하고, 다시금 옛정을 이어보았다.
함부림은 청년 시절의 방탕한 생활이 원인이 되었는지 나이가 들어 병상에 눕게 되었다.
한번 자리에 누워 세간의 일을 잊고 있으니 더욱 처량해질 뿐이었다.
그런 중에 자기 앞에 있던 딸이 병들어 죽었다.
이제는 아무도 없었다. 오직 전에 부리던 종 한 사람이 병간호를 해주고 있었다.
이제는 술도 먹지 않으며 본부인은커녕 첩 한 사람도 곁에 남아 있지 않았다.
때로는 끼니까지 걸렀다. 삼등 공신에 봉군까지 받은 사람이 아주 꼴사납게 된 것이다.
한편 막동은 감사의 손에서 다시 관기로 들어가 의녀가 되어,
여의로서 이제는 궁중에서 자리를 튼튼하게 잡았다.
그녀는 함 부림이 불우한 생활을 한다는 소문을 듣고 병중에 찾아왔다.
방 안에 들어서자 악취가 코를 찔렀다. 함 부림은 대변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여의는 손수 방을 치우고 누워 있는 함 부림을 바라보았다.
“대감 쇤네가 왔소이다.”
막둥이 귀에 대고 한마디 했다.
“누구냐?”
“전주에 살던 관기입니다.”
“응, 그러냐? 이제 알겠다.”
“대감, 왜 이렇게 초라하게 지내십니까?”
“세상은 일장춘몽이니라. 아마 전날 풍류장에서 잘 놀던 죄가 닥쳐온 모양이다.
그러니 나의 일은 걱정 마라. 그래, 너는 잘 지내느냐?”
“쇤네는 대감의 천거로 궁중에 들어가 잘 지내고 있습니다.”
“다행한 일이다.”
막동은 지난날을 생각하며 눈물을 훔쳤다.
판서까지 지낸 함 부림은 얼마 후 1410년(태종 10년)에 쉰한 살에 세상을 떠났다.
<출처: 주간 해피데이 www.hdgochang.co.kr /손을주 기자>
첫댓글 엄정핸님의 목련화와 목련꽃 사진을 함께
게시해주셔서 예향의 엄마를 생각하게 되었답니다
태종실록에 나오신 함부림이란 분의 이야기
고려에 대한 절개를 지키지 않고 이씨조선으로 와서
많은 호사를 누리셨던가 본데 너무 풍류를 즐기던지
여색을 가까이 하던지 그러면 수명이 길지 못하고 짦아 지더군요
그래도 말년에는 참으로 많은 고생을 하고 돌아가셔서
조금은 짠한 생각이 드네요
좋은 자료를 게시해주셔서 재미 있게 읽었습니다
따사롭고 아름다운 봄입니다
건강하시고 행복한 한 주 되십시오^^
역사를 보면 지금 우리들의 역사와 다를 바가 없는 듯
지금도 간혹 그런 불미스러운 인물이 잇긴 하지만
옛역사를 보면서
그랬구나를 생각하기도 합니다
이씨 조선의 좋은 것만 남겨 젔드라면 하는 아쉬움을 생각하게 합니다
李氏의 성으로 살아가는 입장에서요 ㅎㅎ
늘 복된 날 되시어요
시인 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