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의 불교이야기] 71- 배를 채우기 위하여 깨달음을 사칭하는 사람들
“배를 채우려 재가에게 ‘서로서로 인간을 뛰어넘는 상태를 성취한 것’처럼 찬탄 말라”
깨달음이란 무엇일까? 수 없이 듣는 말이다. 이 땅에 불교가 전래된 지 천년 이상이 되었지만 불교계에서는 여전히 깨달음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이런 논쟁이 벌어질 때마다 불자들은 헛갈리기만 하다.
깨달음에 대하여
불교를 깨달음의 종교라 한다. 부처를 뜻하는 붓다(Buddha)는 깨달은 자를 말한다. 또 깨달음을 뜻하는 말이 빠알리어로 보디(Bodhi)이다. 이를 한자어로 ‘각(覺)’이라 한다. 그래서 붓다를 ‘각자(覺子)’라고도 한다. 그래서 바르게 깨달은 자를 ‘정등각자’라 하는데 이는 역사적으로 실재하였던 석가모니 부처님을 말한다. 이 정등각자는 빠알리어 ‘삼마삼붓다(sammāsambuddha)’를 번역한 것이다. 영어로는 ‘the perfectly Enlightened one’이라 설명된다.
깨달음을 뜻하는 빠알리 보디는 어떤 뜻일까? 빠알리사전 PCED194에서는 이렇게 설명되어 있다.
bodhi
, (from verbal root budhi, to awaken, to understand): awakenment, enlightenment, supreme knowledge. "(Through Bodhi) one awakens from the slumber or stupor (inflicted upon the mind) by the defilements (kilesa, q.v.) and comprehends the Four Noble Truths (sacca, q.v.)" (Com. to M. 10).
(bodhi, PCED194)
보디는 budhi를 뿌리로 한다고 했다. 이는 깨달음 또는 이해의 뜻이다. 사전에서 깨달음에 대한 정의가 명확하게 나와 있다. 그것은 잠재되어 있는 정신적 오염원의 미혹으로부터 깨어남이고 사성제를 이해하는 것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은 사성제로 요약된다. 사성제를 알고 이해하는 것이 깨달음이다. 사성제를 알고 이해한다는 것은 실천을 요한다. 사성제의 실천은 팔정도로 완성된다. 그래서 부처님은 처음 오비구에게 설법 할 때 사성제와 팔정도를 말하였고, 열반에 들 때 마지막 제자 수밧다에게도 사성제와 팔정도를 설하였다.
사성제는 불교의 근본이다. 사성제를 논하지 않는다면 불교라 볼 수 없다. 사성제를 말하지 않는다면 법사라 볼 수 없다. 그런 사성제는 팔만사천법문의 근간이 된다. 그래서 법의 장군 사리뿟따는 “벗들이여, 움직이는 생물의 발자취는 어떠한 것이든 모두 코끼리의 발자취에 포섭되고 그 크기에서 그들 가운데 최상이듯, 벗들이여, 이와 같이 착하고 건전한 원리라면 어떠한 것이든 모두 네 가지 거룩한 진리에 포섭됩니다. 네 가지는 어떠한 것입니까?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 괴로움의 발생의 거룩한 진리, 괴로움의 소멸의 거룩한 진리,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의 거룩한 진리입니다.” (M28) 라 하였다. 코끼리의 발자국에 모든 동물들의 발자국이 들어가듯이, 사성제에 부처님의 모든 가르침이 들어 있음을 말한다.
인간을 뛰어넘는 상태에 대한 학습계율
깨달음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많다. 오로지 이것만 강조한다. 이것만 알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고 말한다. 마치 만병통치약을 말하는 것 같다. 그런데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있다. 자신의 말만 듣다 보면 어느 순간 깨닫는다는 것이다. 그런 깨달음을 얻는데 있어서 교리를 공부하거나 별도로 수행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 한다.
깨달음을 말하는 사람 중에는 깨달음을 사칭하는 경우도 있다. 자신이 깨달은 것을 알려 주며 돈을 받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사칭은 부처님 당시에도 있었다. 율장에서 승단추방죄로 간주 하고 있는 ‘인간을 뛰어넘는 상태에 대한 학습계율 (Uttarimanussadhammasikhapadā)’이 그것이다.
최근 전재성님은 율장비구계와 율장비구계를 번역하여 출간하였다. 출가자는 물론 재가자를 포함하여 누구나 볼 수 있도록 세상에 공개한 것이다. 율장에서 가장 관심 있게 본 것이 깨달음을 사칭하는 것이다. 이를 ‘인간을 뛰어넘는 상태에 대한 학습계율’이라 한다.
율장에 비구계와 비구니계에서 가장 앞서 나오는 것이 승단추방죄이다. 비구계와 비구니계에 공통적으로 네 가지가 언급되어 있다. 그것은 1) 성적교섭에 대한 학습계율, 2) 주지 않은 것을 빼앗음에 대한 학습계율, 3) 인체의 살해에 대한 학습계율, 4) 인간을 뛰어 넘는 상태에 대한 학습계율이다.
승단추방죄를 ‘바라이죄’라 한다. 어기면 목이 잘리듯이 함께 살 수 없음을 말한다. 대부분 ‘오계’에 대한 것이다. 가장 앞서 나오는 것이 성적 교섭으로서 ‘음행’에 대한 것이고, 두 번째로 빼앗는 것으로 ‘투도’에 대한 것이고, 세 번째로 인체의 살해는 ‘살생’에 대한 것이다. 이는 오계에서 불살생, 불투도, 불사음, 불망어, 불음주의 순과는 어긋난다. 율장에서 가장 중요시 여기는 것이 음행, 투도, 망어 순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일까 율장에서 계율을 보면 음행에 대한 것이 대부분이다.
율장에서 바라이죄는 오계를 근간으로 하고 있다. 그런데 망어와 음주에 대한 것이 보이지 않는다. 그 대신 하나가 추가 되어 있다. 그것은 깨달음을 사칭하는 것에 대한 학습계율이다. 그래서 율장비구계와 비구니계에서는 공통적으로 승단추방죄 항목으로 1) 성적교섭에 대한 학습계율, 2) 주지 않은 것을 빼앗음에 대한 학습계율, 3) 인체의 살해에 대한 학습계율, 4) 인간을 뛰어 넘는 상태에 대한 학습계율이 시설되어 있다.
인연담을 보면
보살계에서는 깨달음에 대한 사칭이야기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빠알리율장에서는 승단추방죄로 엄하게 다스리고 있다. 그렇다면 깨달음 사칭에 대한 학습계율은 어떤 인연으로 시설되었을까? 율장비구계와 율방비구니계에서는 이 학습계율이 시설된 인연담이 소개 되어 있다.
부처님이 베살리의 마하바나 숲에 계실 때의 일이다. 그 당시에 기근이 들었다. 그러자 수행승들은 탁발음식을 얻기가 어려워졌다. 더구나 전염병이 돌아 밧지 족 사람들은 풀뿌리 등으로 연명하였다.
탁발에 의존하던 수행승들은 음식 얻기가 어려워 졌다. 이에 여러 가지 의견이 나왔다. 그 중에 어느 수행승이 이렇게 말하였다.
“자, 우리가 재가자들에게 서로서로 인간을 뛰어넘는 상태를 성취한 것에 대해 이와 같이 ‘저 수행승은 첫 번째 선정을 성취한 자이고, 저 수행승은 두 번째 선정을 성취한 자이고, 저 수행승은 세 번째 선정을 성취한 자이고, 저 수행승은 네 번째 선정을 성취한 자이고, 저 수행승은 흐름에 든 경지를 성취한 자이고, 저 수행승은 한번 돌아오지 않는 경지를 성취한 자이고, 저 수행승은 돌아오지 않는 경지를 성취한 자이고, 저 수행승은 거룩한 경지를 성취한 자이고, 저 수행승은 세 가지 명지를 성취한 자이고, 저 수행승은 여섯 가지 곧바른 앎을 성취한 자이다.’라고 찬탄을 합시다.”
(Uttarimanussadhammasikhapadā-인간을 뛰어 넘는 상태에 대한 학습계율, 승단추방죄법 제4조, 율장비구계, 전재성님역)
기근과 전염병으로 먹을 것을 얻을 수 없게 된 수행승이 한 말이다. 이렇게 말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어지는 말을 보면 “이와 같이 하면, 그들은 우리에게 보시할 것을 생각할 것입니다.”라고 한 것에 알 수 있다. 재가자들이 보시하면 탁발음식 때문에 고민하지 않아도 되고 안거도 편히 보낼 수 있다는 말이다.
수행승들은 재가자들에게 인간을 뛰어 넘는 상태를 이야기하였다. 기근으로 먹을 것이 없음에도 인간을 뛰어넘는 복전에게 보시를 한 것이다. 그래서일까 “그 수행승들은 풍모가 나고 감관이 비대해지고 안색이 좋아지고 피부가 윤택해졌다.”라고 묘사 되어 있다. 오늘날 목살이 나오고 비대하여 뒤뚱거리며 걷는 스님을 연상케 한다.
깨달음을 사칭한 수행승들의 풍채는 좋아 보였다. 그러나 다른 지역의 수행승들의 용모는 형편없었다. 이는 “그때 베살리 지역에서 안거를 든 수행승들은 마르고 수척하고 초췌하고 누렇게 뜨고 혈관이 불거져 나왔다.”라고 표현된 것으로 알 수 있다. 마치 오늘날 일종식을 하며 청정하게 사는 깡마른 수행자를 보는 듯하다.
“여래들은 알면서 질문하기도 하고 알면서 질문하지 않기도 한다”
안거가 끝나자 수행승들은 부처님을 방문하였다. 잘 먹어서 풍채가 좋은 수행승들이나 못 먹어서 깡마른 수행승이나 모두 부처님을 뵈러 간 것이다. 그 때 부처님은 안색이 좋고 기름기 흘러 보이는 수행들에게 “탁발음식 때문에 걱정하지 않았는가?”라며 물었다. 이런 물음에 대하여 율장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 되어 있다.
여래들은 알면서 질문하기도 하고 알면서 질문하지 않기도 한다. 때를 알아서 질문하기도 하고 때를 알아서 질문하지 않기도 한다. 의미 있는 것에 대해서는 질문하고 의미 없는 것에 대해서는 질문하지 않는다. 여래들에게는 의미 없는 것은 교량의 파괴를 뜻한다. 존귀한 부처님들께서는 ‘가르침을 설할 것인가? 제자들을 위하여 학습계율을 시설할 것인가?’라고 수행승들에게 두 가지 형태로 반문한다.
(Uttarimanussadhammasikhapadā-인간을 뛰어 넘는 상태에 대한 학습계율, 승단추방죄법 제4조, 율장비구계, 전재성님역)
이 문장은 율장에서 정형화 되어 있다. 율장 도처에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부처님이 얼굴빛 좋은 수행승들에게 물은 것은 알면서도 물은 것이다. 깨달음을 사칭하여 잘 먹고 잘 산 것에 대하여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여래들에게는 의미 없는 것은 교량의 파괴를 뜻한다.(anatthasaṃhite setughāto tathāgatānaṃ)”라 했다. 깨달음사칭에 대한 학습계율을 시설할 때라 본 것이다.
다 속일 수 있어도 부처님만큼은
부처님은 풍채 좋고 얼굴에 기름기 흐르는 수행승들에게 물었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에게 인간을 뛰어넘는 상태가 있는가? (Kacci pana vo bhikkhave bhūta)”라고 물은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초선정에서부터 아라한에 이르기까지 열 가지 인간을 뛰어 넘는 상태 중의 하나를 성취했는지 물은 것이다. 이런 물음에 수행승들은 “세존이시여, 없습니다. (Abhūtaṃ bhagavā)”라 했다. 부처님 앞에서는 거짓말을 못한 것이다.
얼굴에 기름기 흐르는 수행승들은 기근이 들어 제대로 먹지 못하는 재가자들을 상대로 깨달음을 사칭하였다. 선정에 들지 않았음에도 선정에 들었다고 하는가 하면 깨달은 성자라고 하였다. 이에 재가자들은 복전이라 하여 공양하였을 것이다. 이런 사실을 부처님은 다 알고 있었다. 다 속일 수 있어도 부처님만큼은 속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견책했다.
[세존]
“어리석은 자들이여, 그것은 적절하지 않고, 자연스럽지 않고, 알맞지 않고, 수행자의 삶이 아니고 부당하고, 해서는 안 될 일이다. 어리석은 자들이여, 어찌 그대들은 배를 채우기 위하여 재가자들에게 서로서로 인간을 뛰어넘는 상태를 성취한 것이라고 찬탄할 수 있단 말인가?
어리석은 자들이여, 그대들은 예리한 소 잡는 칼로 배를 가를지언정, 결코 배를 채우기 위하여 재가자들에게 서로서로 인간을 뛰어넘는 상태를 성취한 것이라고 찬탄하지 말라.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어리석은 자들이여, 그것을 인연으로 죽음에 이르거나 죽음에 이르는 고통을 겪게 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몸이 파괴되고 죽은 뒤에 괴로운 곳, 나쁜 곳, 타락한 곳, 지옥에 태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어리석은 자여, 그것은 아직 청정한 믿음이 없는 자를 청정한 믿음으로 이끌고, 이미 청정한 믿음이 있는 자를 더욱더 청정한 믿음으로 이끄는 것이 아니다. 어리석은 자여, 그것은 오히려, 아직 청정한 믿음이 없는 자를 불신으로 이끌고, 이미 청정한 믿음이 있는 자 가운데 어떤 자들을 타락시키는 것이다.”
(Uttarimanussadhammasikhapadā-인간을 뛰어 넘는 상태에 대한 학습계율, 승단추방죄법 제4조, 율장비구계, 전재성님역)
깨달은 자는 깨달은 자를 안다고 했다. 수행승들이 재가자를 속여 배불리 먹고 지낸 것은 깨달음을 사칭한 것이다. 악한 수행승들이 재가자들을 속일 수는 있었어도 부처님만큼은 속일 수 없었다. 이는 부처님이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에게 인간을 뛰어넘는 상태가 있는가? (Kacci pana vo bhikkhave bhūta)”라고 물어 본 것에서 다 들통이 난 것이다.
부처님은 사칭한 자에게 “배를 가를지언정, 결코 배를 채우기 위하여” 깨달음을 사칭하지 말라고 했다. 그렇게 말했음에도 여전히 깨달음을 사칭한다면 현생에서 죽음에 이를 정도로 고통을 받을 뿐만 아니라 반드시 악처에 태어날 것이라 했다. 이 세상에서도 고통 받고 저 세상에서도 고통 받아 두 세상에서 고통 받을 것이라 한다.
깨달음사칭은 망어죄
깨달음을 사칭하는 것은 결국 거짓말을 하는 것과 같다. 율장비구계와 비구니계에서 승단추방죄로 다스리는 깨달음사칭은 ‘망어’에 해당된다. 오계 중에 거짓말하는 죄에 해당되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인간을 뛰어 넘는 상태에 대한 학습계율’은 오계 중에 망어에 해당된 것이라 볼 수 있다.
깨달음사칭이 왜 망어죄에 해당되는가? 이어지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보면 분명하게 드러난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세상에는 이러한 다섯 가지 큰 도둑이 있다. 다섯 가지란 무엇인가?
1)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어떤 큰 도둑들은 이와 같이 ‘나는 실로 백 또는 천의 대중에 둘러싸여 죽이고 죽게 하고 자르고 자르게 하고 괴롭히고 괴롭히면서 마을과 마을을 돌아다닐 것이다.’라고 생각한다.
그는 그 후에 백 또는 천의 대중에 둘러싸여 죽이고 죽게 하고 자르고 자르게 하고 괴롭히고 괴롭히면서 마을과 마을을 돌아다닌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어떤 악한 수행승들은 이와 같이‘나는 실로 백 또는 천의 대중에 둘러싸여 존경받고 존중받고 존숭받고 공경받고 숭앙받고 재가자들 내지 출가자들의 옷과 탁발음식과 와좌구와 필수약품을 얻으며 마을과 마을을 돌아다닐 것이다.’라고 생각한다.
그는 그 후에 백 또는 천의 대중에 둘러싸여 존경받고 존중받고 존숭받고 공경받고 숭앙받고 재가자들 내지 출가자들의 옷과 탁발음식과 와좌구와 필수약품을 얻으며 마을과 마을을 돌아다닌다.
수행승들이여, 이 것이 세상에 존재하는 첫 번째 큰 도둑이다.
2)
수행승들이여, 또한 세상에 어떤 악한 수행들은 여래가 가르친 가르침과 계율을 배워서 자기 것이라 여긴다. 수행승들이여, 이것이 세상에 존재하는 두 번째 큰 도둑이다.
3)
수행승들이여, 또한 세상에 어떤 악한 수행들은 완전한 청정행자로서 온전히 청정한 삶을 사는 자를 근거없이 청정한 삶을 살지 않는 자라고 비난한다. 수행승들이여, 이것이 세상에 존재하는 세 번째 큰 도둑이다.
4)
수행승들이여, 또한 세상에 어떤 악한 수행들은 참모임의 중요한 이나 중요한 자구, 예를 들어, 승원, 승원의 터, 정사, 정사의 터, 침상, 의자, 매트리스, 베게, 구리병, 구리옹기, 구리단지, 까뀌, 도끼, 손도끼, 괭이, 삽, 담쟁이, 대나무, 문자풀, 밥바자풀, 건초풀, 진흙, 목재, 도자가 있는데, 그것들을 재가자들에게 은혜를 베풀고 감언이설로 속인다. 수행승들이여, 이것이 세상에 존재하는 네 번째 큰 도둑이다.
5)
수행승들이여, 신들과 악마들과 하느님들의 세계에서, 성직자들과 수행자들, 그리고 왕들과 백성들과 그 후예들의 세계에서 존재하지 않고 생겨나지 않은 인간을 뛰어넘는 상태를 성취했다고 선언한다면, 그것이 최상의 도둑이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들은 도둑의 마음으로 나라의 음식을 축내기 때문이다.”
(Uttarimanussadhammasikhapadā-인간을 뛰어 넘는 상태에 대한 학습계율, 승단추방죄법 제4조, 율장비구계,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다섯 가지 큰 도둑이 있다고 했다. 악한 수행승을 빗대어 한 말이다. 이득과 명예와 칭송을 바라는 수행승들이다. 오늘날 종단권력을 움켜쥐고 이익을 취하는 권력승과도 같다.
권력승들은 요지와 요직을 독차지 하고 있다. 그들은 ‘그들만의 리그’를 만들어 목 좋은 사찰을 독차지 하고 있다. 그래서 문화재관람료에 크게 의지한다. 또 국가에서 나오는 문화재 보조금으로 살아간다. 그러다 보니 재가자는 안중에도 없다. 굳이 불교신자가 없어도 먹고 살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이익과 명예와 칭송을 탐하는 자들은 도둑놈과 같다. 그래서 부처님은 ‘첫 번째 큰 도둑’이라 했을 것이다.
두 번째 큰 도둑이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마치 자신의 것처럼 여기는 것이다. 법문할 때 부처님이 말씀 하신 것임에도 이를 밝히지 않고 마치 자신이 깨달은 것처럼 태연히 말하는 자들일 것이다.
세 번째 큰 도둑은 청정한 자를 비방하는 자라고 했다. 탐욕 등으로 잔뜩 오염된 반승반속이 청정한 수행자를 몰아내는 것이다. 어떻게 몰아내는가? 주석에 따르면 ‘청정한 삶을 사는 자에게 승단추방죄를 범했다고 매도하고 비난 하는 것’이라 했다.
부처님은 다섯 가지 유형의 큰 도둑이 있다고 했다. 이중 가장 큰 도둑은 깨달음을 사칭하는 자이다. 깨닫지 못했음에도 세상 사람들에게 깨달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른바 ‘인간을 뛰어넘은 상태(uttarimanussadhamma)’를 말하는 것이다. 일종의 사기극이라 볼 수 있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최상의 도둑(mahācora)”라 했다.
‘깨달음 사칭’에 대한 학습계율
부처님은 깨달음을 사칭하는 것에 대하여 학습계율로 시설하였다. 깨달음을 사칭하는 자들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여래들은 알면서 질문하기도 하고 알면서 질문하지 않기도 한다.”라는 구절에서 알 수 있다.
부처님이 알면서도 질문한 것이 바로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에게 인간을 뛰어넘는 상태가 있는가? (Kacci pana vo bhikkhave bhūta)”라는 말이다. 이에 악한 수행승들은 “세존이시여, 없습니다. (Abhūtaṃ bhagavā)”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깨달음 사칭’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학습계율을 시설하였다.
[세존]
“어떠한 수행승이든지 곧바로 알지 못하면서 인간을 뛰어넘는 상태에 대하여 자신과 관계하여 ‘나는 이와 같이 안다. 나는 이와 같이 본다.’라고 충분히 고귀한 앎과 봄을 선언한다면, 그리고 나중에 규명되건 규명되지 않건 간에 타락하여, 죄의 정화를 기대하고 이와 같이 ‘벗이여, 나는 알지 못하는 것을 알고 보지 못하는 것을 본다.’고 운운하며 허황된 말, 거짓된 말, 망언을 한 것이다.’라고 말한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자는 승단추방죄를 범하는 것으로 함께 살 수 없다.”
(Uttarimanussadhammasikhapadā-인간을 뛰어 넘는 상태에 대한 학습계율, 승단추방죄법 제4조, 율장비구계, 전재성님역)
어떤 스님의 법문을 들어 보면 마치 다 아는 것처럼 다 본 것처럼 말한다. 초월적 세계에 갔었다거나 초월적 존재를 보았다고 말하기도 한다. 일반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고, 일반사람들에게는 들리지 않는 것이 들린다고 말한다. 이런 말을 들으면 보통사람들은 믿게 마련이다.
인간의 한계를 뛰어 넘는 것을 이야기할 때 미혹한 사람들은 믿고 따르게 될 것이다. 이처럼 초월적 현상에 대하여 말하는 사람들이 빠짐없이 하는 말이 있다. 그것은 ‘보시’에 대한 이야기이다.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어떤 식으로든지 표현하는 것이다.
깨달음을 사칭하는 자들이 있다. 그들은 보지 못한 것을 보았다고 하고, 도달하지 못한 것을 도달했다고 한다. 이에 대하여 “그들의 마음은 탐욕으로 기울고, 그들의 마음은 성냄으로 기울고, 그들의 마음은 어리석음으로 기울었다.”라 했다. 이익과 명예와 칭송을 추구하는 순간 탐진치에 기울어진 것이다.
깨달음 사기꾼
탐욕과 성냄으로 가득한 자가 초월적이고 신비한 현상을 이야기한다면 어떻게 보아야 할까? 더구나 보시를 유도한다면 또 어떻게 보아야 할까? 깨달음을 사칭하는 것과 같다. 부처님은 사칭하는 자에 대하여 ‘대망어죄’를 짓는 것으로 보았다. 깨달음 사기꾼과 다름없는 것이다. 그래서 승단추방죄에 해당되어 “함께 살 수 없다”라 했다.
[세존]
“존재하는 것과는 달리
자신을 달리 선언한 자는
도박꾼의 사기와 마찬가지로
도둑으로 먹을 것을 얻는 것이다.
많은 자가 목에 가사를 걸쳤어도
악한 원리를 따르고 자제되지 못했다면,
참으로 그들 악한 자들은
악한 행위에 의해서 지옥으로 끌려가리. (Dhp307)
계행을 지키지 않고 자제함이 없는 자가
나라의 음식을 축내는 것보다
불과 같은 뜨거운
쇳덩이를 먹는 것이 차라리 더 낫다.”(Dhp308)
(Uttarimanussadhammasikhapadā-인간을 뛰어 넘는 상태에 대한 학습계율, 승단추방죄법 제4조, 율장비구계, 전재성님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