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온다. 적막으로 가득 찬 밤이다. 추적추적 들리는 빗소리가 가슴을 적신다. 저려오는 가슴을 끌어안으며 눈을 감는다. 하지만 더욱 더 초롱초롱해지는 눈을 감당할 수가 없다. 눈꺼풀을 끌어당겨 손으로 지그시 누른다. 덮여진 동공 가득히 침대가 자리잡는다. 머리맡의 나무판은 나무판대로, 매트리스는 매트리스대로, 서랍은 서랍대로 산산이 분해되어 나뒹구는 침대위로 비가 내린다.
"엄마, 침대에 딱지 붙여서 밖에 내 놓았어요. 저는 이제 짐 싣고 하숙집으로 갑니다." 어제 낮, 전화기를 통해서 들려 온 아들의 목소리다.
두해 전, 아들은 여동생과 자취를 시작했다. 하숙집도, 기숙사도, 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자취가 하고 싶어 여동생을 꼬드겼다. 기숙사에 신물이 난 동생도 아늑한 자기들만의 공간이 그리웠는지 쾌히 동조하며 조그만 빌라로 이사를 했다.
그 날도 비가 내렸다. 각자의 침대, 책상, 옷가지, 부엌용품 등등 이삿짐은 조그만 화물차를 가득 메웠다. 짐이 빠져나간 두 아이의 텅 빈방은 홍수가 쓸고 간 들녘처럼 허허로운 벌판이었다. 딸을 시집 보내는 엄마의 마음이 이랬을까? 가슴이 아려왔다. 비를 맞으며 옮기는 이삿짐이건만 아이들은 신이 난 듯 분주히 움직인다. 다행히 서울에 도착하니 날씨는 화창하게 개어 아이들의 입성을 반기는 듯 했다.
아늑함과 자유로움만을 꿈꾸었던 자취생활은 아이들에게 호락호락한 상대가 될 리 없었다. 해주는 밥 먹고 다니던 아이들이 밥하고 청소하고, 빨래, 설거지 등 살림살이의 고충을 어떻게 상상하였으리. 남매의 티격태격거림은 나날이 늘어갔다. 철두철미한 여동생의 잔소리는 천하태평의 오빠를 닦달하건만 별로 호전되는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자취를 시작한 지 이 년여만에 둘은 백기를 들고 각자의 하숙집으로 진로를 틀었다.
다시는 자취를 하지 않겠다며 손사래를 치는 아이들을 보며 자취생활이 무척 힘들었나 싶어서 애잔한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요즈음 아이들의 나약함을 보는 것 같아 씁쓰름했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 화가 났다. 아이들에게 어려움을 참고 견뎌 나가는 힘을 쌓을 기회를 주지 않은 것이다. 아이들이 힘들어하면 나 자신이 참을 수가 없다. 자식을 고생시키고 싶지 않은 부모의 어리석고 옹졸한 생각이리라.
대처에서 공부하던 시절, 그때도 오빠들과 자취를 했다.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될 열악한 환경에서의 생활이었지만 어려움을 당연한 것인 듯 감수하며 오히려 부모님의 힘드심을 염려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부모님께서도 나처럼 안달하지 않고 초연히 지켜봐 주셨다. 어려움을 헤치며 살아가는 힘을 은연중에 키워주고 계셨으리라. 부모의 무관심과 같이 지나친 관심도 아이들을 점점 더 나약하게 만드는 것 같다.
딸이 하숙집으로 짐을 옮기던 날, 나는 아이들 집으로 갔다. 세탁기, 냉장고, 침대 등 무거운 짐들을 처분하고 잡다한 살림살이만 갖고 올 요량이었다. 재활용센타에서 사람이 왔다. 너무나 터무니없는 가격을 부른다. 그냥 공짜로 먹을 심산이다. 설상가상으로 침대는 나이가 너무 많다며 아예 가져가지 않겠단다. 딸의 침대는 하숙집으로 실려 보내고 헐값으로 다른 사람의 손에 들려져 나가는 냉장고와 세탁기에서 눈을 돌렸다. 어린 시절 소장수의 손에 고삐가 잡힌 채 끌려나가던 우리 집 황소. 원망을 가득 담은 채 끔벅거리던 커다란 눈망울을 잊을 수가 없다. 일주일 후에 옮겨 갈 아들의 짐과 침대만이 놓인 방은 휑하니 바람이 일었다.
그 침대는 아들이 초등학교 때 샀다. 몇 번의 이사로 찍히고 긁힌 자국이 수두룩하다. 뒷 판의 나사마저도 언제 도망을 갔는지 스카치테이프의 힘에 의지하여 벌렁거림을 무마시켜야하는 낡은 침대다. 아들은 땀을 많이 흘린다. 시트를 자주 갈아주건만 침대에는 땀 냄새와 아들의 특유한 냄새가 배어난다. 아들이 군대에 갔을 때 나는 침대에 코를 박고 아들의 냄새를 음미하며 보고픔을 달래곤 했었다.
일주일 후면 쓰레기 딱지가 붙여진 채 아들 곁을 떠나야 할 침대에 자꾸만 눈이 간다. 해져 입지도 못할 아버지의 속옷을 장롱 속에 차곡차곡 챙겨두시던 어머니의 모습을 그려본다.
아버지께서 병원에 가시던 날, 어머니는 아버지께서 갈아입으실 속옷을 내놓으셨다. 그 속옷은 너무 낡아 망사 천처럼 속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다른 것을 찾았다. 장롱 위에는 여러 개의 속옷상자가 가지런히 쌓여 있었다. 새 속옷을 끄집어내는 순간
"아직 더 입을 수 있는데 새것을 낸다."는 어머니의 역정이 떨어졌다. 자식들이 새 옷을 사드려도 잘 입지 않으시는 어머니다. 장롱 깊숙이 넣어 놓고 꺼내 보기만 하신다. 아끼느라 선뜻 입지 못하시는 어머니가 안타까웠다. 어머니께서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나는 새 속옷을 여러 벌 꺼내어 가방에 몰래 숨겨 왔다. 그리고 비누를 흠뻑 먹여 삶아 빨았다. 빤지르르하게 윤기가 돌던 새 속옷은 뜨거운 열기를 감당하지 못하고 쭈글쭈글한 중고품으로 모습을 바꾸었다. '이제 새것이 아니니 어머니도 아깝지 않게 아버지께 드릴 수 있으리라.'
다음날, 빨린 속옷을 본 어머니는 '새 속옷이 아까워서 만은 아니라'며 아버지의 낡은 속옷을 다시 장롱에 넣으셨다. 장롱 속에는 입지 못하는 낡은 속옷이 차곡차곡 챙겨져 있었다. 그것은 구두닦이 걸레나 방청소용에서도 밀려나 쓰레기 매립지에서나 지내야 할 신세이건만. 어머니는 아버지의 체취와 온기가 스며있는 낡은 속옷을 함부로 버릴 수가 없으셨나 보다. 어머니의 애틋한 마음을 가늠하지 못했다. 낡은 속옷에서 느껴지는 아버지의 체취와 온기를 부여잡고 그것을 떠나보내지 못하는 어머니.
내 주변을 둘러본다. 애지중지 했던 것들이 하루아침에 노숙자 신세가 된 듯 쓰레기장으로 내몰린다. 끝없이 줄 것 같던 사랑도 어느 순간 싸늘히 돌아선다. 필요성이 결여되었다는 이유로. 내 사랑방식은 어땠을까? 이기심에 휘감겨 달면 삼키고 쓰면 내뱉지 않았던가.
다시 한번 침대에 코를 박는다. 아들의 냄새가 진하게 묻어난다. 어머니의 꾸지람이 들리는 듯 했다. 나는 얼른 짐을 챙겨 도망치듯 집을 나섰다.
다시 빗줄기가 굵어지는가 보다. 위층에서 내려오는 수통의 물소리가 제법 요란스럽다. 침대위로 떨어질 빗방울이 내 몸을 적시는 양 오싹 한기가 든다. 냉장고와 세탁기는 새 주인을 만나 사랑을 받으리라. 하지만 쓰레기 딱지가 붙여진 침대의 운명은 가늠하기가 힘들다. 세월의 더께가 쌓여갈수록 별리의 아픔도 깊어지는가 보다.
첫댓글공감1:요즈음 아이들의 나약함을 보는 것 같아 씁쓰름했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 화가 났다. 아이들에게 어려움을 참고 견뎌 나가는 힘을 쌓을 기회를 주지 않은 것이다. 아이들이 힘들어하면 나 자신이 참을 수가 없다. 자식을 고생시키고 싶지 않은 부모의 어리석고 옹졸한 생각이리라.
첫댓글 공감1:요즈음 아이들의 나약함을 보는 것 같아 씁쓰름했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 화가 났다. 아이들에게 어려움을 참고 견뎌 나가는 힘을 쌓을 기회를 주지 않은 것이다. 아이들이 힘들어하면 나 자신이 참을 수가 없다. 자식을 고생시키고 싶지 않은 부모의 어리석고 옹졸한 생각이리라.
공감2:재활용센타에서 사람이 왔다. 너무나 터무니없는 가격을 부른다. 그냥 공짜로 먹을 심산이다. 설상가상으로 침대는 나이가 너무 많다며 아예 가져가지 않겠단다.
공감3:어머니는 아버지의 체취와 온기가 스며있는 낡은 속옷을 함부로 버릴 수가 없으셨나 보다. 어머니의 애틋한 마음을 가늠하지 못했다. 낡은 속옷에서 느껴지는 아버지의 체취와 온기를 부여잡고 그것을 떠나보내지 못하는 어머니.
공감4:끝없이 줄 것 같던 사랑도 어느 순간 싸늘히 돌아선다. 필요성이 결여되었다는 이유로. 내 사랑방식은 어땠을까? 이기심에 휘감겨 달면 삼키고 쓰면 내뱉지 않았던가.
※세월의 더께가 쌓여갈수록 별리의 아픔도 깊어지는가 보다. ------------가슴이 짠하게 아려오네요. 좋은 글 읽고 나니 마음이 따스해집니다. 침대로 부터 파장되어지는 잔잔한 화소들이 애틋하군요. 이심전심...^^;;
※개인적인 생각---사람들은 아끼거나 의미 있는 물건을 쉽게, 함부러 버리지 못하는 것 같다. 나역시도 버리고 나서 후회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하물며, 애완동물이나 사랑하는 사람과의 별리는 어떠하랴...이별은 늘 예고없이 우리 곁을 찾아온다.
늦게사 카페에 들어왔습니다. 부좃한 글 찬찬히 읽어 주신 미숙님 고맙습니다. 공감해 주시는 미숙님 덕택에 큰 힘을 얻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글 많이 쓰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