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렌 니어링, 남편 스코트의 삶 회고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정리
자연과 함께 노동하며 살아간 스코트 육식 등 인간이 가진 모든 탐욕 비판 “모든 것은 변한다” 조화로운 삶 강조 수행자적 삶 실천… ‘반면교사’해야 1904년 미국에서 태어난 헬렌 니어링은 문학을 좋아하고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재원으로 그의 어머니는 화가이며 음악 애호가인 아버지는 뉴욕의 성공한 사업가였다. 한때 크리슈나무르티의 연인이기도 했으나 스물네 살에 스코트 니어링을 만나 삶의 방향에 일대 전환이 일어난다. 스코트는 당시 마흔다섯이 었는데 마치 나병환자처럼 사회에서 고립되어 있었으며 가족에게도 버림받은 상태였다고 그녀는 전한다.
헬렌 니어링은 영혼의 동반자 스코트 니어링과 53년을 함께 했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8년 뒤(그녀의 나이 87세) 이 책을 펴내면서 자신의 의도를 이렇게 밝혔다. “이 책은 스코트의 전기나 자서전이 아니고 내가 알고 있는 그 사람의 존재에 대한 헌사이다. 나는 원칙에 충실하고 타협하지 않으며, 지적인 변혁가의 면모와 아울러 꾸밈없고 친절하고 현명한 남편으로서 스코트의 삶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 보이고 싶다.” 반세기 동안 땅에 뿌리박으며 조화로운 삶을 이룩한 이들 부부의 모습에서 필자는 참으로 많은 감명을 전해 받으며 생의 전범(典範)으로 삼고 있다. 그는 평생을 통해 모든 생명을 존중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최선을 다하며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균형 있게 혼신의 힘을 다해 노력했을 뿐만 아니라 백년이라는 짧지 않은 세월을 살고 자의로 삶을 마감하는 순간 ‘좋다’라는 희열을 내뿜으며 지극히 편안하게 고승의 열반처럼 의연하고도 담담한 모습으로 눈을 감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 상류층의 아들로 태어난 스코트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가난한 사람들에게 관심과 동정을 보였으며 대학교수가 되어서는 할아버지가 경영하는 광산에서 노동자와 고용주 사이의 엄청난 급여 차이와 생활조건의 차이를 발견하고는 이에 대해 글을 쓰고 강연을 하기 시작했다. 20대였던 1905년 그는 자유주의적 개혁에 관한 공개강연을 했는데 이것이 사회봉사의 시작이었다. 공개적으로 기존제도와 권력을 비판함으로써 근무하던 대학에서 쫓겨나게 된다.
1932년 가을 버몬트 남쪽의 황량한 지대를 찾아다니다 오래된 나무집을 발견하고 그곳에 정착하게 된다. 농사일과 산림관리, 집짓기, 돌담 쌓기 등 육체노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펜실베니아 할아버지 농장에서 일찍이 체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연 속에서의 자급자족을 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예를 들면 단풍나무 수액을 뽑아 오랜 시간 끓여 시럽을 만드는 양이 연간 수천리터가 되었고, 〈사탕단풍(The Maple of Sugar)〉이란 책을 펴냈는데 반세기가 넘는 지금까지도 고전으로 남아있다.
스코트는 버몬트에서 일하는 동안 〈통합된 세계〉 〈세계권력 소련〉 〈민주주의로는 충분치 않다〉 〈제국의 비극〉 〈전쟁이냐 평화냐〉 〈우리시대의 혁명〉과 같은 사회과학 안내서들을 썼다.
그는 텔레비전은 이류의 사람들이 공급하는 맛없는 음식과 같다고 하며 위험스럽고 바람직하지 못한 최면상태의 중독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뿐만 아니라 그에겐 혐오스런 물건이었을 뿐만 아니라 아이들의 시간을 빼앗는 나쁜 미끼로 보았다. 또 개인을 현실과 갈라서게 하고 무의식속에 해로운 상을 불러 넣으며, 의식을 둔하게 만들고 환각상태를 만든다고 지적했다.
스코트는 번잡한 도시가 아니라 한적한 자연 속에서 노동하고 명상하고 책 읽고 글 쓰고 음악 듣고 연극하는 것을 최선의 삶으로 여겼다.
20년 동안 정붙여 산 버몬트가 개발이라는 명분아래 상류층의 별장과 숙박지로 빠르게 바뀌어가고 전화 라디오 텔레비전이 계곡 속으로 밀고 들어오자 캐나다 쪽 메인 주의 목조집이 딸린 곳으로 옮겼다. 그곳에서 나무를 심고 농사를 지으며 집과 돌담을 쌓았다. 마지막 지은 그 집에 〈헬렌의 집〉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는 소로(Thoreau)의 〈월든(Worlden)〉에서 이 구절을 좋아했다.
“사람이 자기 집을 스스로 짓는 일은 새가 자기 보금자리를 만들 때와 똑같은 합목적성이 어느 정도 있다. 사람이 제 손으로 살집을 짓고 자신과 식구들을 위해 간소하면서도 꼭 필요한 만큼의 양식을 생산한다면, 새가 그런 일을 하면서 언제나 노래 부르듯이, 사람도 시심이 깊어지지 않을 리가 있겠는가. 그러나 아! 우리는 다른 새의 둥지에 알을 낳는 찌르레기나 뻐꾸기처럼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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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코트 니어링과 헬렌 니어링 부부의 사진. 헬렌 니어링은 남편이 죽은 후 그를 회고하는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를 펴냈다. 이 책에는 자연으로 돌아가 단순한 삶을 살면서 타락한 인간성을 회복하고자 한 스코트의 삶과 사상이 잘 녹아있다. | 스코트는 어떤 사람인가? 그 인물됨에 대해 교회 목사인 스테픈 트리치맨은 이렇게 말했다. ‘스코트 니어링은 나와 이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세대차에 대한 매우 잘못된 생각, 곧 젊은이들만이 기쁨을 느끼고 성장할 수 있다는 그릇된 믿음의 불합리함을 깨는 능력을 상징처럼 보여주는 사람입니다. 카잘스, 피카소, 듀브아와 마찬가지로 스코트 니어링은 나이, 인종, 국적, 성별에 관계없이 원기왕성하고, 깨어 있으며 두려움이 없는 모든 이들의 지도자입니다. 그이는 우리 삶에 필요한 철학과 훈련을 구체화했으며, 나아가 스스로 그것을 실천했습니다. 다른 많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 사람은 내게 냉정하면서도 애정이 있고, 사람을 흔들어 놓으며 계시하는 정의의 예언자요, 상식의 본보기이고, 대부분 사람들이 썩어가도록 쓰지 않고 있는 두뇌의 70퍼센트를 쓰는 용기와, 전혀 쓰지 않는 양심의 98퍼센트를 실천하는 용기의 본보기입니다.
이 어리석은 새 시대에, 말 많은 바보들이 고위직을 차지하고 있고, 손가락은 대중들의 잼 항아리에 넣고서 양심은 꽁꽁 묶어 놓은 채 대중을 속이는 분별없는 지도자들이 들끓는 이때에, 스코트 니어링 덕택에 우리는 좀 더 용기 있게 오늘의 이 세상과 마주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일찍이 스코트 니어링만큼 내 명료하지 못한 마음과 겉으로 들어난 양심, 나의 도덕적 오만과 혼란스런 정치관을 날카롭게 다듬는데 모범이 된 교사를 알지 못하며 그에게 경의를 보내는 바입니다. 그이는 내게 있는 인본주의 성격과 사회주의 성격을 계발하는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나는 그이의 백 번째 생일을 맞아 다시 한 번 이 모든 것을 여러분께 말씀드리는 기회를 갖고 싶습니다.’
과연 그의 일생은 평화주의자, 인권옹호자, 생태주의자, 귀농운동가, 미래주의자 일 뿐만 아니라 교육자, 경제학자, 국제사회주의자이며 좌파 정치인이었다. 그의 사회 개혁운동은 전쟁을 없애는 것, 가난을 몰아내는 것, 그리고 모든 형태의 살육을 중지시키는 것이었다. 그러기에 채식주의를 주장하고 몸소 실천하였다. 우선 윤리적으로 생명체에 대한 견해가 확고했다. ‘모든 동물들은 우리 형제들이다. 동물들은 열등하지 않으며, 형태가 다른 자아들이다. 인간 역시 지구상에 살고 있는 생명체 가운데 하나일 뿐, 이런 창조물들에 대해 아무런 권리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는 계속해서 ‘인간은 셀 수없이 많은 숲을 파괴하고, 고기를 얻으려고 지나치게 많은 목초지를 만들고, 드넓은 땅을 황폐화시키고 말았다. 또한 온갖 새와 물고기와 짐승을 죽였다. 그렇다고 볼 때 인간은 단연코 으뜸가는 ‘해충’이라고 단정한다. 나는 여기에서 ‘하늘과 땅은 나와 같은 뿌리(天地與我同根)’라는 부처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그는 생명존중사상과 몸소 자비를 실천하는 거룩한 수행자와 다름없었다.
어느 날 그는 또 종교나 신에 대한 질문을 받고 이렇게 대답한다. “나는 있는 그대로의 우주, 모든 것이 그 나름으로 구현되어 있는 우주를 믿는다. 나는 또한 우주는 순간순간 조금씩 변화하고 있으며 언제나 변화하는 전체로서 그것이 있음을 믿는다.”
‘모든 것은 인과율의 흔들리지 않는 법칙 속에서 다른 모든 것들과 이어져있다’는 인연 생기(生起)의 도리와 ‘모든 것이 끊임없이 변화하지만 어떤 것도 이 우주에서 사라지는 것이 없다’는 불생불멸에 대한 그의 언급을 주목하게 된다. 그리고 그는 자연에 순응하고 조화를 이루며 사는 것이 지극히 자연스런 삶이라고 규정한다.
또한 ‘모든 것은 덧없으며 사라진다’고 역설한다. ‘진실보다 고귀한 신앙은 없다’고 나무판에 새긴 벽걸이는 아마도 그의 좌우명이 아닐까 여겨진다. 그리고 그는 ‘가장 위대한 성공은 일하는 것’이라는 신념과 더불어 ‘쓸모 있고 조화로우며, 해를 끼치지 않고 뭔가를 생산하는 당신 자신의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하다’고 충고한다. 거기에 정신적으로는 원초적이고 우주적인 힘에 대한 이해를 넓히는 것과 원만하고 균형 잡힌 인격체를 완성하는 삶이면 더 바랄 것이 없다는 것이다.
오복(五福)중에 마지막은 고종명(考終命)이요 우리 속담에도 죽을 때 잘 죽는 게 최상의 복이라고 하듯 누구나 죽을 때 자신은 물론 주위사람들에게 고통을 주지 않고 눈을 감기를 원한다.
스코트의 최후는 자의에 의한 끝맺음이었다. 100세가 되고 3주 후에 메인에 있는 ‘헬렌의 집’에서 일부러 음식을 끊음으로써 삶을 마감했다. 참으로 평화롭고 조용히 위엄을 잃지 않고 세상을 떠났다.
이 말을 쓰고 보니 수십 년 전, 저녁 무렵 수덕사를 참배하고 내려오는데 비구니 스님들의 선방이 저만큼 바라다 보였다. 사위가 어둑하게 장막이 내리는 듯한 마루 위에 여러분의 노스님들이 마치 백학이 날개를 접고 내려와 쉬는 것처럼 앉아서 독경도하고 서성대는 모습이 마치 천상세계처럼 고결하게 느껴졌다. 그분들은 열반에 들 때 다 타고난 재가 날아가듯 피안의 세계로 가볍게 건너 뛸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들에겐 결코 고통이나 험악한 죽음의 그림자가 범접할 수 없을 것 같아 얼마나 마음의 위안을 받았는지 모른다.
우리 모두에겐 죽음이라는 가장 궁극적이고 심각한 문제가 가로놓여 있다. 우주만큼이나 불가사의하고 해결할 수 없는 정체 불명한 것이 언제 어떻게 우리 앞에 다가와 덮쳐버릴지 모른다. 제 아무리 과학문명이 발달해서 하늘을 찌를 듯 기세를 떨친들 죽음을 비켜갈 수는 없다.
나같이 맹물처럼 살아오면서, 배고프면 밥 먹고, 잠이 오면 잠이나 자는 단순한 사고의 틀을 가진 맹문이가 죽음에 대해 천착하는 이유가 있다면 아는 것 같으면서도 모르고 나하고는 상관없는 것 같은데 막상 코앞에 닥쳐와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맹랑하게만 느껴지기 때문이다. 실로 멍청이도, 하물며 미물까지도 다 아는 죽음이건만 알려고 파고들면 들수록 수천수만 갈래의 미로가 얽혀져 한도 끝도 없이 뻗어나가 그놈의 정체가 어떻게 돼먹은 것인지 손을 들 수밖에 없으니 답답하기만 하다. 결국 결론은 죽어봐야 알겠는데 그것 또한 깜깜절벽이다. 어쩔 수없이 스코트의 견해로 그 답을 대신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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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기철 도예가 | “많은 사람들은 죽음을 끝으로 생각하지만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죽음은 변화지, 낮에서 밤으로 바뀌는 것과 비슷한 것이다. 사람의 몸뚱이는 생명력이 빠져나가면서 먼지로 바뀌지만, 다른 모습을 띤 삶이 그 생명력을 받아 이어진다. 우리가 죽음이라 부르는 변화는 우리 몸으로 보아서는 끝이지만, 같은 생명력이 더 높은 단계에 접어드는 시작이라고 볼 수 있다. 나는 어떤 식으로든 되살아남 또는 이어짐을 믿는다. 우리 삶은 그렇게 계속되는 것이다.” |
첫댓글 예전에 이 책을 읽고 감명을 받은 바 있었습니다.
부부가 채식을 실천하면서 모든 생명체를 사랑했던 그 정신을 존경합니다.
불교는 모든 생명체를 사랑하는 유일한 종교입니다.
그러나 생명체를 사랑하여 채식을 실천하고자 하나 이를 곱게 보는 사람은 드문 것 같습니다.
부부가 채식을 실천하면 채식에 애로가 없지만 함께가 아니라면 애로가 많은 법입니다.
이 니어링부부는 정말 숭고한 삶을 실천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