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지(閔漬)는 자가 용연(龍涎)이고 여흥(驪興) 사람으로 평장사(平章事) 민영모(閔令謨)의 5세손이다. 원종(元宗) 때 과거에 장원[魁科]으로 발탁되었고 충렬왕(忠烈王) 때에는 지후(祗候)를 거쳐 전중시사(殿中侍史)가 되었다가 관직을 여러 번 옮겨 예빈윤(禮賓尹)이 되었다.
충선왕(忠宣王)이 세자(世子)로서 원(元)에 가자, 민지는 정가신(鄭可臣)과 함께 세자를 호종(扈從)하였다. 하루는 〈원의〉 황제가 공경(公卿)들에게 명하여 교지(交趾)를 정벌하는 것에 대해 의논하게 하였는데 조서를 내려 민지 등과 함께 의논하라 하였다. 대답이 황제의 뜻에 맞았으므로[稱旨] 〈민지를〉 한림직학사 조열대부(翰林直學士 朝列大夫)에 제수하였다. 후에 원이 다시 일본을 정벌하고자 고려[本國]에 전함을 건조하라고 하였다. 왕이 원의 조정에 들어가 일본 정벌[東征]의 불편함을 주장하고자 민지를 좌부승지(左副承旨)로 하여 행차를 호종하게 하였다. 민지는 우연히 『두씨통전(杜氏通典)』을 읽다가 당(唐) 태종(太宗)이 고구려[高麗]를 정벌할 때 위징(魏徵)이 간(諫)하여 아뢰기를, “고구려는 돌밭과 같으므로 가진다고 한들 이익이 없습니다.”라고 한 부분을 보게 되었다.
〈민지는〉 이것을 첨원(僉院) 홍군상(洪君祥)에게 보여주며 말하기를, “왜(倭)의 대원(大元)에 대한 관계가 어찌 당의 고구려[高麗]에 대한 관계와 같을 뿐이겠습니까? 하물며 작년의 역(役)으로 본국 백성들의 힘이 다하였습니다. 지금 만약 쉬지 않는다면, 우리의 민은 어찌합니까? 공께서는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홍군상이 말하기를, “임금의 명령이 있었는데, 감히 따르지 않겠다는 것이오?”라고 하였다. 민지가 홍군상의 말을 호종한 신하들과 의논한 뒤 전함을 건조하는 것을 중지하려고 하였다.
〈그러자〉 인후(印侯)와 장순룡(張舜龍)이 말하기를, “이 일은 조정(朝廷)의 대사(大事)인데 어찌 첨원(僉院) 1명이 한 말 때문에 중지하겠는가?”라고 하였다. 민지가 말하기를, “나중에 만약 따져 꾸짖는다면 내 스스로 감당할 것이니 여러분들이 알 바가 아니오.”라고 하였다. 마침내 왕에게 전함건조를 중지할 것을 아뢰니 사람들은 민지를 굳세고 곧다고 여겼다. 세자가 왕에게 넌지시 아뢰어 서경유수(西京留守) 안열(安悅)로 하여금 치사(致仕)하게 하고 〈자신의〉 수종신으로 그 자리를 대신하게 하려고 하였다. 민지는 안열의 나이가 아직 70세가 되지 않았다고 하여 사양하니 왕이 이에 중지하였다. 세자가 노하여 민지에게 일러 말하기를, “다른 사람의 잘못을 들추어내서 자신의 명성을 구하는 자들 가운데는 경(卿)도 있소.”라고 하였다. 〈이후 민지는〉 밀직학사(密直學士)로 승진하였는데 첨설(添設)이므로 얼마 뒤에 파직되었다. 왕이 일찍이 내료(內僚) 고여주(高汝舟)를 보내 민지로 하여금 시를 짓게 하였는데, 민지는 고여주에게 백주(白酒)와 오이[靑瓜]를 대접하였다. 고여주가 왕에게 아뢰기를, “민지는 비록 재상이나 그 청빈함이 비할 바가 없습니다.” 라고 하였다. 왕이 이에 쌀 100석을 하사하였다. 오랜 시간이 지나 집현전대학사 첨광정원사(集賢殿大學士 僉光政院事)를 제수하였고 동지밀직사사 감찰대부 사림학사승지(同知密直司事 監察大夫 詞林學士承旨)로 고쳐 제수하고 판밀직사(判密直司事)를 더하여 주었다. 충선왕(忠宣王) 초에 첨의정승(僉議政丞)으로 치사하였다. 충숙왕(忠肅王) 8년(1321) 다시 〈관직에 나오게 하여〉 수정승(守政丞)으로 삼고 여흥군(驪興君)으로 봉했다.
〈충숙왕(忠肅王)〉 10년(1323) 민지가 가락군(駕洛君) 허유전(許有全)과 흥녕군(興寧君) 김거(金䝻)와 함께 원(元)에 가서 표(表)를 올려 충선왕(忠宣王)을 소환해 줄 것을 청하였다. 민지가 직접 그 표문을 지었는데, 요약하여 이르자면, “아주 작고 작은 우리나라는[小邦]은 상국(上國)을 의지하고 있습니다. 태조황제(太祖皇帝)께서 왕업을 일으키셨을 때[龍興之際], 거란의 남은 무리가[遺種]가 천자의 그물[天網]에서 빠졌다가, 도망쳐 우리나라로 난입하였는데, 조정에서 합진(哈眞, 카치운)과 찰랄(札刺, 차라) 두 원수를 보내어 토벌하여 주었습니다. 우리 충헌왕(忠憲王)께서 배신(陪臣) 조충(趙冲) 등을 보내 군량을 운송하고 전쟁을 도와 그들을 제거하고, 두 원수와 조충 등이 맹세하여 이르기를, ‘지금 우리 두 나라는 형제가 되기를 약속하니 자손 대대로 서로 잊지 말지어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충경왕(忠敬王)은 세자 때 입조(入朝)하였다가 때마침 세조황제(世祖皇帝)를 만났습니다. 〈세조황제는〉 남정(南征)에서 돌아와 장차 대통(大統)을 계승하려고 하였는데, 우리 충경왕에게 명하여 환국(還國)하여 왕위를 계승하게 하였습니다. 충렬왕(忠烈王) 또한 세자일 때 천자의 조정[天庭]에 입시(入侍)하니 대를 이어 충성스러움과 근실함을 쌓았다고 하여 공주(公主)를 하가(下嫁)하게 하시어[釐降] 왕위를 이을 아들인 전 임금 왕장(王璋)을 낳았습니다. 전왕이 16세가 되었을 때 조서를 받들고 입시하니 세조황제가 세자로 책봉하고 조서를 내려 이르기를, ‘왕위 계승으로 보면 너는 적자(嫡子)이며 친함으로는 실로 나의 외손자이다.’라고 하였다. 이로부터 대도[輦轂]에 머물면서 다섯 황제를 섬겼습니다. 은덕(恩德)과 혜택(惠澤)을 매우 많이 받았고, 총애를 받는 영광스러움을 잊지 못하고 다만 좋은 일을 하여 충성을 다하였습니다. 〈그러나〉 깨닫지도 못하는 사이에 미혹되어 죄를 저지르니 비록 먼 곳에 유배되었다 하더라도 이곳은 제사(帝師)가 복을 일으킨 곳입니다. 다시 마음을 가라앉히고 생각한다면 또한 우리 임금[君父]의 허물을 씻는 약이 될 것이니, 다만 스스로 새로워지는 것이 더딘가 빠른가에 달려있을 뿐, 어찌 옛 은혜와 사랑이 없어서이겠습니까? 신 등은 일찍이 〈우리 임금의〉 언행을 바로 잡을 능력이 없어 〈임금이〉 넘어지는 환난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또 〈임금님의〉 나이도 늙어가므로 신은[犬馬] 임금에 대한 그리운 정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물처럼 흐르는 세월로부터 도망치기는 어려워 마침내 〈임금의〉 음성과 모습에서 멀어진 채로 죽어 땅에 들어갈까 두려운 까닭에 고통은 더욱 깊어져 함께 애절하게 기원합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우리 임금은 생각을 실수한 것이고 다른 마음은 없다는 것을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늙은 것들이 몸도 돌보지 않고 이곳에 온 것을 가엾게 여기시어 새장 속의 학에게 돌아갈 수 있는 날개를 하사하시어 옛 둥지로 돌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바다에서 자라가 다시 산을 이는 나이만큼이나 황제의 수명이 이어지기를 축원하옵니다.”라고 하였다.
또 도당(都堂)에 글을 보내 말하기를, “지금 천하는 땅이 넓고 인민(人民)은 많으니 우주가 생긴 이래 오늘날에 비할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이라도 그 있을 곳을 얻지 못하고 한 개의 물건이 그 마땅한 바를 얻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아직 듣지 못했으니, 실로 여러 상공(相公)들이 황제의 조화로운 다스림[燮理]을 잘 도운 공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전왕은 세조의 외손자로 다섯 황제를 섬겨온 것이 무릇 30년으로, 단지 훌륭한 좋은 인연을 맺어 황제의 장수를 축원하는 것을 자기 임무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루아침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미혹되어 천자께 죄를 입고[獲戾] 멀리 서쪽 땅에 유배된 지가 이제 4년이 되었으니 어찌 애통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나라 백성들이 목석(木石)이 아니온대 누구인들 신하[犬馬]가 임금을 그리워하는 정이 없겠습니까? 그러나 하늘은 아득히 멀고 땅은 떨어져 있어 모기만한 우는 소리가 위에 도달할 길이 없으니, 단지 밤낮으로 부르짖으며 울 뿐입니다. 하물며 민지 등은 일찍이 임용되었던 사람들로 은덕을 입어 이미 명예와 지위가 극에 달하였고 나이 또한 많은 늙은이들이니, 어찌 다른 이들의 정보다 100배는 더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우레와 같은 황제의 위엄이 떨치지 않는 바가 없으니 놀라고 두려워 몸 둘 바를 모르겠으며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다만 하늘의 해를 우러러 바라보며 바다 귀퉁이에서 오래도록 머뭇거리고 있었습니다.
지금 여러 상국각하(相國閣下)께서는 사해에서[四海之內] 하나의 물건이라도 그 있을 바를 얻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하려 하십니다. 만약 지는 해 같은 늙은이들이 임금을 그리워하는 정을 전하지 못하고 홀연히 먼저 아침이슬처럼 죽어버린다면 홀로 태평성대를 저버리고 한이 황천(黃泉)에 미칠 것입니다. 이런 연유로 병을 참고 길을 떠나 어려움과 위험을 두루 겪고도 다행히 아직 숨이 남아 있어 기어서 왔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여러 상공께서는 우리 임금이 먼 지방에 유배되어 여러 해를 보낸 것을 불쌍하게 여겨 주소서. 늙은 몸이 살아서 3,000여리를 건너와 작은 소원을 말하려고 하는 것을 가련하게 여겨 주소서. 〈황제께〉 잘 아뢰어 주시어 황제의 은택을 널리 베풀어 우리 임금이 만리(萬里) 길에서 되돌아오게 해 주신다면, 민지 등은 비록 늙었사오나 몸을 잊고 덕에 보답하는 마음으로 거북이나 뱀에 뒤지지 않게 은덕을 갚겠습니다.”라고 하였다. 민지 등은 원에 반년 가량 머물렀으나 심왕(瀋王)의 무리가 방해하여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왔다.
〈민지는〉 충숙왕 13년(1326) 죽으니 나이는 79세이며 시호는 문인(文仁)이다. 충렬왕이 일찍이 민지에게 명하여 정가신(鄭可臣)이 찬술한 『천추금경록(千秋金鏡錄)』을 증수(增修)하게 하였는데 나라에 변고가 많았던 까닭에 그것을 완성할 겨를이 없었다. 후에 권보와 함께 교열을 보고 찬술하여 완성하고 『세대편년절요(世代編年節要)』라고 이름하였다. 호경대왕(虎景大王)으로부터 원종[元王]에 이르기까지 7권으로 나누었고 세계도(世係圖)를 갖추어 올렸다. 또 『본국편년강목(本國編年綱目)』을 찬술하여 위로는 국조(國祖) 문덕대왕(文德大王)에서 시작하여 아래로는 고종(高宗)에서 마쳤는데 책이 무릇 42권이었다. 그 소목(昭穆)에 대한 논의는 『편년절요(編年節要)』와 같지 않았다. 민지는 글재주는 자못 있었으나 세속의 풍습을 따른 것이 많았고, 심술(心術)이 바르지 못하여 내인(內人)들에게 아첨하기를 일삼았다. 또 성리학(性理學)을 알지 못하여 그가 논하는 것은 성인(聖人)에 위배되는 것이 있었으며, 주자(朱子)의 소목에 대한 논의가 그르다고까지 하였으니 소견이 편협한 것이 이와 같았다.
아들은 민상정(閔祥正)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