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안방준... 1692년(숙종 18) 경상도 성주목사(星州牧使) 안방준(安邦俊)
우리 문강공 안방준(安邦俊,1573~1654) 선생과 동명이인으로 숙종 18년(1692) 성주목사 안방준(安邦俊)의 기록이 있어 여기에 옮겨 본다.
그러나 조성왕조실록에서는 “고 참의 안방준(安邦俊)이 목사”라고 하고 있으나, 승정원일기에서는 “故參判安邦俊”이라고 하고 있어 실록은 참의, 일기는 참판이라고 서로 다른 기록을 남기면서, 안방준(安邦俊)이라는 동명이인의 기록에 우리 문강공 안방준(安邦俊) 선조의 증직된 관직을 잘못 기록하여 넣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것이 아니라면 실제 1692년 성주목사를 지냈고 훗날 참의 또는 참판을 지냈거나 증직된 또 다른 안방준이 있을수도 있겠다.
문강공 안방준 선조는 1653년(효종4) 3월 14일에 이조에서 발급한 통정대부(通政大夫) 공조참의(工曹參議)에 임명한다는 고문서가 우리 문중에 남아있고, 1654년 졸했고, 조선왕조실록 1657년(효종8) 12월 17일 기록에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참판(吏曺參判) 겸(兼)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에 추증했다고 한다.
그러나 숙종 18년(1692)이면 우리 문강공 선조는 이미 1654년에 졸했을 뿐 아니라, 그 어떤 기록에도 경상도 성주목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없으므로, 동명이인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구죽산안씨 시조 안방준,『문화유씨 가정보(文化柳氏嘉靖譜)』에 나오는 1400년 중반의 안세창(安世昌)의 아들로 나오는 안방걸과 형제로 나오는 안방준, 우리 죽산안씨 문강공 안방준, 그리고 이어서 1692년(숙종 18)에 경상도 성주목사(星州牧使)를 지냈다는 안방준까지 4사람의 동명이인이 발견된 것이다.
참고 :『문화유씨가정보』안방준 기록
출처 : 국역조선왕조실록
정조 20년(1796) 3월 26일(임신) 4번째기사
조헌의 시호 개정, 이사룡의 서원에 제수를 보내 줄 것 등을 논의하다
○右議政尹蓍東啓言: “先正臣趙憲道學淵源, 至有配食文廟之議, 殉義立慬, 特其緖餘。 同時如故相臣柳成龍、贈判書金誠一, 皆得道德博問之諡, 而先正則得勤學好問之文、剛克爲伐之烈, 有若隨衆戰亡, 一節褒贈者然, 斯文之不幸, 士林之羞恥, 厥惟久矣。 方當聖朝右文象賢之時, 如此欠典, 合有商量。 雖以故事言之, 文淸公鄭澈, 初諡文介, 故相文忠公、金壽恒, 駁議而建請改諡, 至今稱道。 先正諡號, 亦宜改議。” 上詢大臣, 諸臣無異辭, 命依右相言爲之。 又啓言: “贈參議李士龍書院, 在星州, 故參議安邦俊爲牧使時, 創建于遺墟。 其後故判書吳道一撰其碑, 特坐於其地處, 尙未有表章之擧。 若使本官, 備給春秋祭需, 亦足爲樹風聲之道矣。” 上曰: “若無李士龍一人, 則何以有辭於天下? 依卿言爲之。” 又啓言: “贈判書崔孝一, 賜諡矣, 其孫性烈, 方爲麻田郡守, 邑力難以延諡。 西關相當窠, 分付該曹相換, 使之延諡于官次, 以爲聳勸西土人士之地何如?” 從之。 又啓言: “臣於初筵, 以年富窮經之士, 扶植奬用, 爲奏矣。 故參判金亮行孫直淳、故贊善宋明欽孫啓榦, 經識行誼, 傳誦于士友間。 故家之有此等人, 實是聖朝培養之效, 此兩人, 請別例調用。” 從之。 又啓言: “昔年桂坊之人, 出入書筵者, 今餘三人。 李敏輔位至崇品, 鄭存中亦入耆社, 而獨申光履, 中間流落, 未免潦倒, 年亦恰滿七十, 恐合有優老之典。” 敎曰: “宰臣則自在宮僚, 習知其人, 特除知中樞, 重臣, 令該曹米肉輸送。”
(국역)
우의정 윤시동(尹蓍東)이 아뢰기를,
“선정신 조헌(趙憲)은 도학과 연원으로 보아 문묘에 배향해야 한다는 논의까지 있었으니 순절한 것은 다만 그 나머지의 일입니다. 같은 때 사람으로 고 상신 유성룡(柳成龍) 증 판서 김성일(金誠一)은 모두 도덕박문(道德博聞)의 문(文) 자 시호를 얻었으나 선정 조헌은 근학 호문(勤學好問)의 문(文) 자와 강극 위벌(剛克爲伐)의 열(烈) 자로 되어 있어 마치 대중을 따라서 전사(戰死)한 자에게 한 가지 절개를 포증한 것처럼 되었으므로 사문(斯文)의 불행과 사림(士林)의 수치가 되어온 지 오래입니다. 바야흐로 성조에서 글을 숭상하고 어진이를 본받게 하는 때를 당해서 이와 같은 결여된 전례는 의당 헤아려보아야 합니다. 비록 고사로 말하더라도 문청공(文淸公) 정철(鄭澈)은 처음 시호가 문개(文介)였는데 고 정승 문충공(文忠公) 김수항(金壽恒)이 반박하고 건의하여 시호를 고쳤으므로 지금까지 이를 칭도하고 있으니, 선정의 시호 역시 다시 의논해야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대신에게 물은 결과, 제신이 다른 말이 없으므로 우상의 말에 의해서 하라고 명하였다. 또 아뢰기를,
“증 참의 이사룡(李士龍)의 서원(書院)이 성주(星州)에 있는데, 이는 고 참의 안방준(安邦俊)이 목사로 있을 때 그 유허(遺墟)에 창건한 것입니다. 그후 고 판서 오도일(吳道一)이 그 비문까지 지었는데, 다만 그의 지벌이 미천한 때문에 아직껏 표장(表章)하는 조치가 없었습니다. 만약 본관(本官)으로 하여금 춘추로 제수(祭需)를 마련해 주게 한다면 족히 풍성(風聲)을 수립하는 방도가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만약 이사룡 한 사람이 없었다면 천하에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경의 말대로 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증 판서 최효일(崔孝一)에게 시호를 내렸는데, 그의 손자 최성렬(崔性烈)이 방금 마전 군수(麻田郡守)로 있으나 고을의 힘이 시호를 맞이하기 어려우니, 서관(西關)의 상당한 자리로 해조에 분부하여 서로 바꾸게 해서, 그로 하여금 관에서 시호를 맞이하게 하여 서쪽 지방 사람들을 격려하는 바탕으로 삼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따랐다. 또 아뢰기를,
“신이 첫 번의 연석에서 나이가 젊고 경서를 깊이 연구한 선비들을 북돋아주고 장려하여 등용할 일로 아뢰었었습니다. 고 참판 김양행(金亮行)의 손자 김직순(金直淳)과 고 찬선 송명흠(宋明欽)의 손자 송계간(宋啓榦)은 경학에 대한 식견과 훌륭한 행실이 사우(士友)들 사이에 널리 알려졌습니다. 문벌 좋은 가문에 이런 사람들이 있는 것은 실로 성조에서 인재를 배양한 효과이니, 이 두 사람을 특별한 예로 등용하소서.”
하니, 따랐다. 또 아뢰기를,
“옛날 세자 익위사의 관원으로 서연(書筵)에 출입하던 자로서 지금에 세 사람이 남아 있는데, 이민보(李敏輔)는 지위가 숭품에 이르렀고, 정존중(鄭存中) 역시 기로사에 들었습니다. 그러나 유독 신광리(申光履)만 중간에 유락(流落)하여 불우한 처지를 면치 못하고 있는데, 나이 또한 70세가 찼으니 노인을 우대하는 은전을 베푸는 것이 합당할 듯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한 재신은 궁료(宮僚)로 있을 때부터 그 사람됨을 내가 익히 아는 바이니, 특별히 지중추를 제수하고, 두 중신에게는 해조로 하여금 쌀과 고기를 보내주게 하라.”
하였다.
출처 : 승정원일기 1796년 3월 26일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1796년(정조 20) 3월 26일(17/18)
右議政尹蓍東曰, 贈牧使李士龍, 書院在星州地, 故參判安邦俊爲牧使時, 創建于其遺墟, 買置藏穫田土, 其後故判書吳道一撰碑文, 一道士民莫不感嘆其節義, 而坐於地處, 尙未有表章之擧, 實爲聖朝欠典, 賜額之恩, 在所難愼, 分付道臣, 令本官備給春秋祭需而享之, 亦足爲樹風聲, 聳觀聽之道, 故敢此仰達矣。上曰, 若無贈牧使李士龍一人, 則何以有辭於天下, 卿言甚是矣。依爲之。
출처 : 성주문화관광
성주(星州) 옥천서원(玉川書院)
구분 : 도 기념물 제162호
위치 : 경북 성주군 용암면 대봉5길 33
재질 : 석재
지정일 : 2009년 7월 6일
수량 : 1곽
보유자 : 성산이씨의사공파종중
재작연대 : 조선후기
상세내용
이 서원은 조선중기 인물인 이사룡(李士龍)을 제향하기 위해 건립한 것이다. 서원은 숙종 18년(1692) 성주목사 안방준(安邦俊)과 관내의 사민(士民)들에 의해 그가 살았던 곳인 월항면 인촌리 작촌에 충렬사(忠烈祠)로 처음 건립된 것에서 연유하며, 정조 20년(1796) 사액되었다. 그 후 충렬사는 옥천 충렬사(玉川忠烈祠) 또는 옥천서원(玉川書院)으로 불려지다가 고종 8년(1872)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으며, 1919년 직계후손들의 집성촌이 있는 현 위치에 중건되었다.
이사룡(李士龍, 1595~1641)은 본관이 성산(星山), 자는 사중(士中)으로 조선중기의 무인이다. 그는 인조 18년(1640) 청나라가 명나라를 치기 위한 원병으로 징발되어 동북지방의 전투에 출전하였는데, 이듬해의 접전에서 임진왜란 당시 입은 명의 은혜를 생각하여 전투에 임하여 명군에 공포(空砲)를 쏘다가 발각되어 처형당하였다. 이후 그는 의사(義士)로 불리게 되었으며, 정조 17년(1793) 성주목사에 추증되고 정려(旌閭)가 내려졌다.
서원은 산록 경사지에 위치한 관계로 부지를 4단으로 조성하였고 앞쪽으로 강당인 충의재와 동·서재가 자리하고, 뒤쪽에 사당인 충렬사가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방법을 취하고 있다. 또한 강당 우측에는 서원이 훼철되었다가 중건되기 이전 사당의 역할을 대신하였던 가묘(家廟)의 일곽이 자리하고 있다.
옥천서원은 건축적인 측면에서 사당과 가묘가 일곽 내에 공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서원의 변화된 양상을 살필 수 있을 뿐 아니라, 제향 주인공인 이사룡이 조선후기 숭명배청사상의 중요한 하나의 동기를 부여하고 있는 매우 주목될 수 있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그 문화재적 가치가 높다고 할 것이다.
이사룡(李士龍,1612∼1640)
조선 중기의 의사(義士). 본관은 성주(星州). 수문장 이유문(李有文)의 손자이며, 남한산성에서 인조를 호위한 공으로 무과에 오른 이정건(李廷建)의 아들이다. 1640년(인조 18)청나라가 명나라를 치기 위하여 조선에 원병을 청하자 포사(砲士)로 징발되었는데, 금주(錦州)에서 명장(明將) 조대수(祖大壽)와 대전하였다. 그는 임진왜란 때 명나라의 은혜를 생각하고 공포(空砲)로 응전하였다. 이를 본 동료가 적극 말렸으나 이미 죽음을 각오하였다면서 듣지 않았다. 끝내 청군에게 발각되어 잡혀가서 칼로 위협을 받았으나 청장에게 욕설을 퍼부으면서 굴하지 아니하니, 이때 우리나라 장령(將領)들이 청장에게 용서를 빌어 살려주기로 허락을 받았는데도, 그는 웃으면서 스스로 죽음을 청하여 의롭게 죽었다. 청장들이 비록 그를 죽이기는 하였으나 그의 높은 절의에 크게 감탄하였다. 뒷날 칠포만호 · 성주목사에 추증되고, 성주 충렬사(忠烈祠)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