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가을의 짧은 해가 성급히 산을 넘어갔다. 하늘이 조도를 낮추며 어두워지고 있었다. 산밑이나 논밭에 요새처럼 공장들이 들어 서 있는 마을엔 개 짖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세를 받기 위해 급조한 집들은 방 하나, 부엌 하나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마을 끝에 있는 이 시멘트 블록집도 그런 집이다. 방 하나, 부엌 하나의 구조로 네 가구가 나란히 붙어 있고 마당을 향해 부엌문 겸 현관문이 죽 있고 부엌문을 열면 방으로 통하는 문이 있는 집이었다.
순이는 학생용 가방을 어깨에 맨 채 부엌문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있다. 기다림에 지친 표정으로 턱을 괴고 멍하니 유모차를 바라봤다. 닦아놓은 지 이틀도 안 된 유모차가 먼지를 곱다시 뒤집어쓰고 있다. 순이는 미간을 찡그렸다.
마을 입구에 있는 교회 십자가에 빨간 불이 들어왔다. 순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당장이라도 뛰어갈 듯 주먹을 쥐더니 마당을 벗어나지 못하고 맴을 돌 듯 종종 걸음을 쳤다. 술에 취해 잠든 강씨를 깨울 엄두가 나지 않아 속을 태우고 있었다. 낡은 성경책과 곱게 접은 손수건이 든 가방을 손바닥으로 받치고 몸을 흔들거렸다.
"쨍그랑!"
부엌에서 병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순이는 반사적으로 몸을 웅크렸다.
"이년아, 부르는 소리 안 들려! 이제 귀까지 멀었냐?"
컴컴한 방안에서 강씨의 목소리가 울려나왔다. 아침 일찍 나갔던 강씨는 오후에 돌아와 소주 두 병을 마시곤 주정을 할 기운도 없는지 그대로 쓰러져 잠이 들었었다. 순이는 입을 쑥 내밀고 살그머니 부엌문을 열었다. 부엌 벽을 더듬어 전구스위치를 찾아 눌렀다. 부엌 구석구석에 스며있던 어둠이 순식간에 물러났다. 방문 앞에 강씨가 엎드려 있다. 강씨가 흰자위를 드러내며 순이에게 쏘아붙였다.
"부르면 제까닥 올 것이지, 어딜 깨밀려 다니다 이제 와?"
강씨의 목소리엔 노기가 등등했다.
"아부지 교회 가자. 교회가면 맛있는 것도 주고 아부지 병도 낫는대."
순이가 울먹이며 부엌바닥에 깨진 소주병 조각을 피하며 방으로 들어섰다. 강씨가 순이의 발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그게 다 교회 오게 할려고 꼬시는 거야, 병신아. 너 같은 바보를 누가 좋아한다고 까불어. 이게 뒤지려고."
강씨가 입가에 거품을 물고 팔을 치켜들었다. 순이는 강씨에게 맞은 발을 절름거리며 방구석으로 몸을 피했다. 그 때 옆방 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의 단잠을 깨우는 작자가 대체 누구여?"
옆방에 사는 상태의 목소리였다. 가운데가 텅 빈 벽돌은 소리를 전달하는 울림통 역할을 해서 작은 소리도 증폭시켰다.
순이는 벽에 가방을 붙인 채 게걸음으로 가서 형광등 스위치를 눌렀다. 한참을 깜박거리던 형광등에 불이 들어왔다.
"저 놈은 왜 또 발작이여?"
강씨가 이마를 찡그리며 투덜댔다. 강씨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상태가 순이네 부엌문으로 고개를 내밀고 강씨의 얼굴을 빤히 내려다보며 이기죽거렸다.
"또 술 마셨어요? 아자씨, 나는요, 아자씨처럼 공무원이 아녀요. 출근을 해야 한다구요. 나랏돈으로 먹고사는 사람이 어째 세금 내는 사람의 수면을 방해하고 그런대요."
강씨가 술 마신 날은 동네가 시끄러웠다. 온 동네 참견을 다하며 시비를 걸어서 강씨가 비척대는 그림자만 보여도 사람들은 곁을 주지 않고 슬그머니 피해 다녔다.
"이놈아 지금이 몇 신데 수면방해 타령이야! 니 놈은 허구헌 날 수면타령 밖에 할 짓이 없냐?"
"하루도 편히 잘 수가 없으니까 그렇죠."
가죽공장에서 다니는 상태는 밤 근무라 저녁 8시쯤에 집에서 나갔다. 상태는 헝클어진 머리 속에 손가락을 넣어 벅벅 긁으며 코로 핑, 바람소리를 냈다. 늘 코가 막히는지 습관처럼 콧바람을 불었다. 분에 못 이겨 소리를 지르려던 강씨가 숨이 넘어갈 듯 기침을 해댔다. 결핵 때문에 약을 먹고 있지만 발작처럼 기침이 나왔다. 상태는 께름칙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입술!"
강씨가 숨을 고르며 말했다. 순이는 플라스틱 서랍장 위에 쌓여있는 봉지들을 들어보더니 약봉지를 꺼내와 알약과 물을 강씨에게 내밀었다. 기침이 멎기가 무섭게 강씨가 순이의 손에서 약을 낚아채 듯 가져다 입에 털어 넣었다. 물 한 모금으로 약을 넘기고 억지로 입에 침을 모아 삼키곤 그 자리에 누워버렸다. 상태가 순이의 손에 있는 약봉지를 뺏어들더니 히죽히죽 웃었다.
"약 이름도 참 희한하네."
약봉지에 그려진 그림을 보며 재미있다는 듯 피식 웃던 상태는 쌓여있는 약봉지들을 넘겨다보고 입을 쩍 벌렸다.
"약국 개업 언제 해요? 그러고도 술을 마셔요? 와, 강적이다. 강적!"
떠들어대는 상태를 향해 강씨가 고개를 획, 돌렸다. 상태는 입을 다물고 혀를 차며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순이는 약봉지를 보며 비죽이 웃었다. 강씨는 약만 먹어도 배가 부르다며 보건소에서 타온 약들을 필요할 때만 먹었다. 그러면서도 약 욕심은 많아서 날짜를 어기지 않고 보건소에 가서 약을 타다 쌓아 놓았다. 순이에게 약을 달라고 하면 한참을 들여다보고도 번번이 약을 틀리게 가져오자 강씨는 머리를 썼다. 방바닥에 배를 깔고 누워 순이가 보는 앞에서 결핵 약에는 입술을 그리고 빨갛게 색칠을 하고 침이 사방으로 튀는 모양을 그려놓고 위장약에는 둥그런 배에 엑스 자로 배꼽을 그려 넣더니 간경화 약에서는 머리를 싸고 고민을 하다가 순이에게 간장 병을 가지고 오라고 해서 간장 병을 그려놓았다. 진통제에는 이마에 수건을 두른 모양과 이빨과 무릎을 그렸다. 순이는 강씨가 하는 양을 비스듬히 앉아 들여다보며 킥킥거리고 웃었다. 그 다음부터 강씨가 그림을 대면 틀리는 법이 없었다.
약을 먹은 강씨는 저녁도 안 먹고 다시 자리에 누웠다. 교회 가는 것을 포기하지 못한 순이는 부엌문 앞에 쭈그리고 앉아 흔들그네처럼 몸을 흔들었다. 쌀쌀한 가을 바람이 옷 속을 파고들었다. 하늘이 뿌연 연기로 채워지고 있었다. 날이 어두워지자 엄청난 양의 연기가 가을 바람을 타고 미친 듯이 펄럭이며 마을로 퍼져나갔다. 고무 탄내인지 헝겊이 타는 냄새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 냄새가 마을을 뒤덮고 있었다. 순이는 코를 몇 번 씰룩거리더니 코밑을 마구 비비고 연기의 근원지를 찾는 듯 주위를 둘러보았다. 연기 속에서 멀리 십자가가 보이자 어깨에서 가방을 내려 성경책을 꺼내 척 펼쳤다. 열심히 기도하면 병이 낫는다고 했는데 교회에 가지 않으려고 하는 강씨가 야속하기만 했다. 두 손을 성경책 위에 올려놓고 중얼거렸다. 기도를 하는 것 같기도 하고 혼자 떠드는 것 같기도 했다.
상태가 부엌문을 벌컥 열고 나왔다. 견장이 주렁주렁 붙어있는 검은 색 가죽 자켓에 무릎부위가 너덜너덜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헬멧을 손에 들고 있었다.
"아구, 깜짝야! 아줌마, 거기서 뭐해요? 남편은 괜찮아요?"
순이는 팔을 내저으며 한참이나 입을 씰룩거렸다. 상태는 그런 순이가 재미있다는 듯 핑, 콧소리를 내더니 마당에 세워진 오토바이에 올라탔다.
"교회 가려구요? 아저씨는 교회 못 갈 것 같던데 내가 태워다 줄까요?"
상태는 순이가 가방을 메고 성경책을 들고 있는 걸 보고 실실 웃으며 말했다. 순이는 사색이 되어 팔을 저었다.
"아따, 안 잡아먹어요. 내가 아무려면..."
순이의 조그만 어깨선을 훑어보며 상태가 말끝을 흐렸다.
"저, 저, 아버진데요. 순이 아버지. 아줌마 아닌데, 아, 아줌마, 아닌..."
겨우 입을 연 순이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상태는 오토바이에 시동을 걸고 순이에게 보란듯이 마당을 한바퀴 크게 돌더니 속력을 내어 달려나갔다. 귀를 찢을 듯한 굉음에 순이는 그 자리에서 옆으로 쓰러지며 기절해버렸다. 오토바이 소리가 멀리 사라졌을 때서야 마치 잠에서 깨어난 듯 고개를 흔들고 일어나 눈으로 오토바이를 찾았다. 순이는 자신이 어느 정도의 소음에서 기절을 하는지 알지 못했다. 번번이 다음엔 피해야겠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성경책을 주워 손으로 쓰다듬듯이 흙을 털어 내며 입을 비죽거렸다. 성경책을 가방에 넣고 바지를 구석구석 꼼꼼하게 털었다. 위에 걸친 스웨터에 솔잎이 몇 개 묻어 있었지만 순이는 그걸 보지 못했다. 주머니에서 꼬깃꼬깃 접힌 휴지를 꺼내 귀를 막았다 빼고 다시 막았다 빼기를 반복했다. 지난번에 귀를 막고 있다가 강씨가 부르는 소리를 못 들어서 얻어맞은 자국이 남아있는 손등을 내려다보곤 고개를 흔들었다. 순이는 눈물을 찔끔거리며 휴지를 잘게 찢고 또 찢었다.
무서리가 하얗게 내린 대지에 아침햇살이 퍼졌다. 강씨는 눈뜨자마자 바짝 마른 입안을 물로 헹구고 담배를 입에 물었다. 갑자기 들뜬 베니어판 바람벽이 들썩거렸다. 상태 방에서 꽝꽝 노랫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 소리에 잠이 깼는지 순이가 몸을 웅크리며 귀를 막고 도리질을 쳐댔다. 살살 담배연기를 빨아들이던 강씨는 순이를 힐끗 쳐다보고 기신기신 일어나 앉았다. 벽 전체가 대형 스피커가 되어 울렸다.
강씨는 투덜거리며 메리야스 차림으로 방을 나왔다. 상태는 부엌문을 활짝 열어 놓고 양팔을 괴고 벌렁 누워 있었다.
"신세벽부터 왜 또 지랄이여?"
강씨는 부엌문을 손으로 잡고 방안을 향해 악을 썼다. 노랫소리 때문에 들리지 않는지 상태는 발가락을 까닥거리고 있었다. 강씨는 어기적어기적 방으로 들어가 익숙하게 전원을 꺼 버렸다. 눈을 치켜 뜨며 상태가 벌떡 일어나 앉았다.
"에이, 저것들 땜에 못 살겠다구요. 젠장 노총각 뒤집어지는 꼴을 보려고 저러나 저것들이 밤에도 모자라서 아침까지 지랄들이니.... 날 아주 환장하게 하려고 작당을 했다구요."
"지미 별 걸 가지고 다 지랄일세. 한 두 번도 아니고. 혈기 왕성한 것들이 그 짓도 못해! 자네도 마누라 얻으면 원없이 하면 될 거 아니여."
"저건요. 에티케시 없는 거라구요."
"아따따. 에치켓 좋아하시네. 재밌지 뭘 그래. 아직 안 끝났나?"
강씨가 짓궂은 표정으로 상태의 옆방 벽 쪽으로 가서 귀를 댔다. 수돗물 소리가 쏴, 하고 들렸다.
"끝났겠죠."
"새댁이 씻나봐. 다음엔 노래 틀지 말고 날 불러."
강씨는 비죽이 웃으며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좋은 때다, 좋은 때여."
엉거주춤 일어나며 상태의 심통 난 얼굴을 고소한 듯 내려다봤다.
방으로 돌아온 강씨는 공연히 순이에게 소리를 질렀다.
"벌떡 인나 밥이나 챙겨와."
강씨는 부엌으로 나가는 순이의 허리 사이로 드러난 하얀 살결과 둥근 엉덩이의 곡선을 실눈을 뜨고 훑어봤다. 아랫도리에 힘이 느껴지는지 흡족한 표정을 짓다 이내 인상이 찌그러졌다. 원망하듯 자신의 사타구니를 내려다보며 헛기침을 했다. 기침 소리에 순이가 돌아보자 에구구, 소리를 내며 엉금엉금 기어가 요 위에 누웠다.
마당으로 내리쬐는 오후의 햇살이 깨진 유리조각처럼 날카롭게 빛났다. 며칠 전까지도 하늘을 가득 메웠던 잠자리도 보이지 않았다. 순이는 마당 가운데로 유모차를 끌어내 닦고 있었다.
"그건 뭐하러 닦어?"
부엌문을 열고 나온 강씨가 순이를 타박했다. 순이는 강씨를 쳐다보며 히죽 웃더니 손놀림을 더 크게 했다. 강씨는 씁쓸하게 웃으며 마당 끝에 있는 공동 화장실로 다리를 끌며 걸어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강씨는 유모차에 빈병이나 박스를 주워 팔기도 하고 시장에서 남의 일을 조금씩 거들어 주어 돈 만 원 벌이는 쉽게 했었다. 정부에서 순이와 강씨 몫으로 한 달에 50여 만원과 20k 쌀 두 포대가 나온다. 월세와 세금으로 20여 만원 정도를 내고 남는 돈과 강씨가 버는 돈으로 두 사람이 생활하기엔 부족하지 않았지만 요즘은 정부에서 나오는 돈으로만 생활을 하려니 좀 빠듯하다.
순이는 부러진 바구니를 엮은 빛 바랜 노끈을 만지작거렸다. 언제 나왔는지 상태가 주인집 평상에 널린 고추를 한쪽으로 밀고 엉덩이를 걸쳤다.
"그거 이제 내다 버려요. 내가 볼 적에 아저씨가 거기 실려 다녀야 할 판이네요. 저승사자를 어깨에 달고 다니는데 그걸 언제 쓴다고 지성으로 닦아요?"
순이는 상태 쪽으로 눈을 할깃거리며 입을 내밀었다. 선천적으로 상냥한 기질이 있는 순이는 낯이 익은 사람에겐 제법 인사도 할 줄 아는데 상태에게만은 예외였다. 상태를 굉음을 내며 달리는 오토바이와 같은 존재로 생각했다. 약간 튀어나온 순이의 입이 병 주둥이처럼 뾰족해졌다. 상태는 그런 순이의 입을 쳐다보며 벌죽 웃었다. 아무나 보고 잘 웃고 말도 잘 시키는 순이가 자신에게만은 늘 뾰루통하게 대하는데도 기분이 나쁘지 않은 표정이다.
화장실에서 나온 강씨가 눈을 게슴츠레 뜨고 바지를 올리며 다가왔다. 상태가 놀란 듯 반색을 하며 고추를 평상 한쪽으로 밀어내고 앉기를 권했다.
"어째 자네가 나한테 이리 다감한가? 지은 죄가 있나보지."
강씨가 못이기는 척 평상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상태는 어이없다는 듯 얼른 정색을 했다. 강씨는 상태의 어깨 가까이 얼굴을 대고 목소리를 낮췄다.
"자네 순이한티 맘 쓰나?"
"뭐, 뭐라구요? 무슨 말 같지도 않은...."
말을 더듬으며 엉덩이를 들썩일 정도로 발뺌을 하는 상태를 보며 강씨는 입꼬리를 올려 다정하게 속삭였다.
"소주 남은 거 있나?"
"남은 게 어딨어요."
"그러지 말고, 날도 좋은데 딱 한 잔 어때?"
강씨는 칭얼대는 아이처럼 상태에게 턱을 바쳤다. 상태는 눈을 흘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상태는 소주병과 맥주 잔 두 개와 멸치를 들고 나왔다. 순이는 유모차를 다 닦았는지 이리 저리 밀어보더니 만족스럽게 웃었다. 상태가 술병을 평상에 놓는 걸 본 순이는 강씨를 향해 눈을 껌벅거렸다.
"저것이 그래도 내 생각은 끔찍이 해."
강씨는 반쪽이 부러진 앞니를 드러내고 비죽이 웃었다. 순이는 걸레를 들고 집으로 들어가 버렸다. 상태는 씁쓸하게 웃으며 맥주 잔에 가득히 따른 소주를 강씨 앞에 내밀었다. 강씨는 잔을 들어 목울대를 출렁이며 단숨에 들이켰다. 소주 안주에 멸치를 먹느니 안 먹는 게 낫다며 꾸들꾸들 말라 가는 고추를 하나 집어 손으로 먼지를 닦았다. 부러진 앞니 옆으로 고추를 물고 비틀어 잘랐다. 상태는 한 모금 마신 소주를 강씨 잔에 나누어 따랐다. 강씨는 입을 헤 벌리며 만족감을 표시했다.
"순이 저것도 불쌍한 것이여. 마흔이 다 된 것이 저렇게 모지라니... 그래도 저건 장애인이 아니랴. 아이큐가 장애인 급이 안 된대. 장애인 판정을 받으면 좀 낫겠다, 싶어서 검사를 했더니 정상인도 아니고 장애인도 아니랴. 젠장, 제대로 아는 놈이 있어야지."
"의사가 그래요?"
"아무것도 모르는 새끼들이 7번 염색체가 어쨌대나 하고 떠들지. 자네가 볼 적에 쟤가 정상인가? 조금만 큰소리가 나도 벌떡 벌떡 넘어가고, 특히 자네 오토바이 소리 조심혀. 저것이 그 소리 듣고 기가 넘어 간 게 한 두 번이 아니여."
"왜 기절을 해요?"
"낸들 알아. 기계소리 같은 게 크게 나면 기절하대. 쟤는 좀 나은 편이래. 심한 놈은 청소기나 세탁기 소리에도 기절한대. 저게 그래도 나 만나서 사람됐지. 지가 누구한테 사람 대접받고 살겠어. 나니까 인생이 불쌍해서 데리고 살지."
"솔직히 나오는 돈이 없어도 아저씨가 그러겠어요?"
제법 눈시울을 붉히며 언구럭을 떠는 강씨를 보며 상태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강씨의 얼굴에 노여움이 가득찼다.
"뭐라구? 너 지금 뭐라고 했어? 내가 아니었으면 쟤는 아직 콧구멍 만한 쉼터에서 숨도 못 쉬고 살았을 거라구. 알지도 못하면서 지랄이야!"
어이없다는 듯 픽. 콧소리를 내며 상태가 웃자 강씨는 눈을 치켜 뜨며 술잔을 들었다. 술잔이 비어 있는 걸 보곤 입맛을 다시며 비굴한 표정으로 상태를 쳐다봤다. 상태는 모른 척하고 강씨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두 분이 어떤 사이에요?"
"마누란지, 딸인지, 궁금하다 그건데. 남들이 뭐라 그러던가?"
"말은 딸이라고 하는데 딸이기만 하겠냐고..."
강씨는 이빨이 보일 듯 말 듯 피식, 웃었다. 잔뜩 궁금증이 드러난 상태의 표정을 보더니 재미있어 못 견디겠다는 듯 소리내어 웃었다.
"술이나 더 가져와. 그럼 내가 말해 줄게."
입가에 웃음기가 가시지 않은 강씨가 상태를 구슬렸다.
"아유, 아저씨 안 들어도 되네요. 내가 알아서 뭐해요. 하도 말들이 많으니까 궁금해서 물어본 거지."
말은 그렇게 하고도 상태는 소주 한 병을 더 가져왔다. 강씨는 목마른 사람처럼 소주를 들이키며 자신의 젊었을 때 무용담을 늘어놓았다. 애초부터 상태가 물어본 말에는 대답을 해 줄 생각이 없었던 것으로 보였다.
상태는 건성으로 고개를 주억거리며 순이가 들어간 부엌문 쪽을 힐끗 쳐다봤다. 강씨는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마흔이 넘도록 마누라도 못 얻고 뭐했어? 마누라 얻으면 먹여 살릴 재주는 있나?"
"마누라도 못 먹여 살릴까봐 그래요? 정 안 되면 아저씨처럼 공무원이라도 하죠 뭐."
상태는 발끈 성을 내며 말했다.
"자네도 순이 같은 마누라 하나 있으면 사는데 지장 없을 텐데. 밥해주겠다, 빨래 해주겠다, 밤에 대주겠다, 에그, 나야 있어봤자, 뭐....."
강씨는 술이 오르면서 말이 많아졌다. 순이를 노숙자 쉼터에서 만났을 때는 사람 꼴이 아니었단다. 쉼터라는 곳이 워낙 있을 곳이 못 돼서 나오면서 순이를 데리고 나올 수 밖에 없었다나. 이곳에 와서 기초생활보호 대상자로 만든 이야기며 자기 이름이 강수환인데 이름값을 하느라고 수완이 좋다는 둥, 살면 얼마나 살겠냐, 죽을 때가 되었으니 돌아가야 하지 않겠느냐, 콩튀듯 중구난방으로 떠들면서 중간 중간에 다른 생각을 하는지 이야기가 자꾸 끊겼다.
이제나저제나 강씨의 입만 바라보던 상태는 저절로 하품이 나왔다. 아무리 앉아 있어도 딴소리만 해대는 강씨가 얄미워 상태는 콧바람을 핑, 불고 엉덩이를 털며 일어났다. 강씨가 다급하게 말했다.
"아, 좀 더 앉아 있어 봐. 소주 한 병 더 해야지. 사나이가 이걸로 되나?"
주먹까지 쥐어가며 강씨가 제법 호기를 부렸다.
"없어요!"
상태는 매몰차게 대꾸하고 자기 집으로 들어가 버렸다.
강씨는 입맛을 다시며 상태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혹시 다시 나올까, 하는 마음에 기다리고 앉았다가 꾸벅꾸벅 졸았다. 썰렁해서 눈을 뜨니 이미 해가 넘어가고 보이지 않았다. 강씨는 몸을 부르르 떨며 방으로 들어갔다. 방구석에 놓인 빈 소주병을 들어서 거꾸로 세워보곤 탁 내려놓았다. 순이는 방바닥에 개켜놓은 이불에 엎드려 귀를 막고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술을 더 마시고 싶어 심부름을 시키려던 강씨는 눈을 감으며 요 위에 몸을 뉘었다. 순이가 그러고 있을 때는 강씨의 말도 통하지 않는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교회에서 배운 찬송가인 것 같은데 제법 잘 불렀다. 순이는 오토바이 소리에도 기절을 하면서 노래는 한 두 번만 들으면 똑같이 따라 불렀다. 강씨는 청승맞은 자세로 노래를 부르는 순이를 쳐다봤다.
노래를 마친 순이는 강씨가 들어와 있는 걸 보더니 얼른 가방을 메고 방문 앞으로 갔다. 강씨는 교회 가자는 뜻인 줄 번히 알면서 일부러 눈을 꾹 감았다. 강씨는 순이를 데리고 교회엘 몇 번 갔었다. 가끔씩 목사가 신도들을 데리고 옷가지며 음식을 가지고 와서 예배를 봐주고 가면 순이는 노래도 따라 부르고 즐거워했다. 강씨는 교회에서 도움 받는 것은 좋은데 예배 시간은 영 재미가 없어서 가기가 싫었다. 그런데 재미를 붙인 순이가 교회에 예배가 있는 날이면 해가 넘어가기가 무섭게 가방을 메고 나서는 바람에 귀찮았다.
순이는 부엌문을 열어놓고 들어와 강씨의 얼굴을 이리저리 들여다보며 눈치를 살폈다. 오늘은 어떻게 해서든 강씨와 교회를 가겠다는 생각이었다. 어느새 하늘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해가 저물면서 냉기가 발빠르게 허공을 채웠다. 산밑에 있는 공장의 커다란 굴뚝에서 하얀 연기가 기다랗게 솟아올랐다. 밖을 내다본 순이는 마음이 조급해져서 강씨의 얼굴을 다시 한 번 쳐다봤다. 순이의 눈길을 느낀 강씨는 쫙 벌렸던 사지를 오므리며 끙, 하고 돌아누웠다. 바짝 마른 몸이 나뭇가지처럼 뻣뻣했다. 순이 혼자서는 교회를 갈 수 없다는 걸 아는 강씨는 마음놓고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마당으로 나온 순이는 멀리서 빛나는 십자가를 안타깝게 바라봤다. 어디 갈 때 부엌문을 꼭 잠그라고 한 강씨의 말이 생각난 순이는 숨을 크게 내뱉고 가방에서 열쇠를 꺼냈다.
한참을 망설이던 순이는 부엌문을 밖에서 잠궜다. 어두워진 길에 연기인지 안개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것이 짙게 깔려 있었다. 공장으로 드나드는 차들이 많은데도 길은 겨우 두 대의 차가 비켜갈 정도이고, 가로등도 마을 입구와 가운데 하나 있을 뿐이었다. 순이는 주춤주춤 걸어갔다. 금방이라도 되돌아 갈 것처럼 돌아섰다가 한 발을 떼곤 했다. 그렇게 걸어서 마을 입구까지 나왔다. 멀리서 차 소리가 들렸다. 순이는 길옆 풀섶으로 발을 옮겼다. 상향 등을 켠 차가 지나갔다. 순이는 다시 길 위에 섰지만 쉽게 발걸음을 떼지 못 했다. 오토바이 소리가 서서히 다가왔다. 순이는 눈을 두리번거렸다. 길가에 은행나무가 보였다. 몇 개 남은 은행잎이 바람에 바르르 떨렸다. 순이는 은행나무를 꼭 끌어안았다. 안개 때문인지 천천히 곁을 지나가던 오토바이 소리가 멈췄다. 순이는 한참을 눈을 감고 있다가 살그머니 눈을 떴다. 순이의 볼록한 눈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듯 동그래졌다. 상태가 순이의 얼굴을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뭐해요? 오늘 교회 가는 날도 아닌데...."
"나도 알아요. 누가 모를까봐."
이미 순이의 목소리에는 울음이 잔뜩 배어 있었다. 겁을 먹은 순이의 그렁한 눈을 보자 상태는 뒷목을 벅벅 긁으며 콧바람을 핑, 불고 오토바이로 갔다.
"타요, 태워다 줄게."
오토바이를 끌고 온 상태는 순이에게 뒷자리를 가리켰다. 순이는 슬금슬금 게걸음으로 비켜났다. 오토바이를 집 쪽으로 돌려 끌고 가는 상태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순이가 따라갔다. 순이는 상태와 너무 떨어졌다 싶으면 다시 게걸음으로 거리를 좁혔다. 계속 도리질을 치는 순이를 답답하게 여긴 상태가 소리를 빽 질렀다.
"아, 날 새요. 안 잡아먹을 테니까 타요!"
상태는 순이의 손목을 잡아끌고 오토바이에 태웠다. 아이 손처럼 작고 부드러운 감촉에 상태의 손길이 주춤했지만 내색하지 않으려고 표정을 굳히고 오토바이에 올랐다. 짙은 안개가 구름 덩이처럼 이리 저리 몰려다녔다. 반짝 앞이 잘 보이기도 하고 금방 한증막처럼 보이지 않곤 했다. 순이는 고개를 돌리고 상태의 옷자락을 꽉 잡고 눈을 감았다.
상태는 등이 따뜻해지는 걸 느끼며 마음을 진정시키듯 숨을 크게 한 번 내뱉고 앞을 쳐다봤다. 안개 속을 멍하니 바라보며 오토바이의 시동을 걸었다. 갑자기 등뒤가 허전해지며 땅이 울렸다. 뒤를 돌아본 상태는 얼른 오토바이에서 내렸다. 순이는 땅바닥에 늘어져 있었다. 눈이 휘둥그래진 상태는 순이를 똑바로 뉘고 성급히 인공호흡을 한다고 달려들었다. 가슴을 몇 번 누르고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순이의 볼을 잡고 입을 벌렸다. 들쑥날쑥 덧니가 난 순이의 입에 자신의 입술을 가져다 대고 힘주어 불었다. 다시 가슴을 누르려다 가슴이 발랑거리는 걸 느낀 상태는 순이의 뺨을 두드렸다. 순이는 방금 잠에서 깬 것처럼 부스스 눈을 떴다. 마침 안개를 뚫고 온 주홍빛 가로등 불빛에 비친 순이의 모습은 한 잠 푹 자고 난 아이처럼 볼이 발그레했다. 상태는 앉은 채로 뒤로 물러서며 콧바람을 핑, 불었다. 그때서야 순이가 오토바이 소리에 기절한다는 강씨의 말이 생각났다. 시동을 켠 채 라이트 불빛이 비추는 작은 공간을 바라보며 천천히 오토바이를 끌었다. 순이는 상태의 반대편에서 일정한 거리를 두고 걸었다. 오토바이가 힘겹게 안개를 밀어내는 것처럼 보였다.
안개 속에 쌓인 마을은 고요하기만 했다. 천천히 걸으며 상태는 순이를 수없이 힐끔거렸다. 막연하게 그대로 계속 걸었으면 좋겠다는 바램이 생기기도 했다. 집 앞에 와서 순이에게 들어가라고 하고 상태가 막 오토바이를 돌려 나가려는데 강씨의 고함소리가 들렸다. 부엌 샤시 문이 철렁대며 쇳소리를 냈다. 상태는 순이의 얼굴을 쳐다봤다. 순이는 고개를 숙이고 안절부절 하지 못 했다. 부엌문 앞에 가서야 자물쇠가 걸린 걸 본 상태가 순이에게 열쇠 어딨냐고 물었다. 순이는 주머니 이곳저곳을 건성으로 뒤졌다. 상태가 순이의 주머니를 뒤져 열쇠를 찾아 문을 열었다.
"뭐야? 이것들이 나를 가둬놓고 연놈이 뭔 짓을 하러 다니는 거야?"
강씨는 방금 일어났는지 얼굴에 베개 눌린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강씨는 비실비실 걸어나와 상태의 멱살을 잡았다. 며칠 가둬 놓은 들짐승처럼 눈에서 광채가 번득였다.
"혼자 교회 가길래 데려 왔어요!"
상태가 강씨의 손을 붙잡고 소리쳤다.
"이놈아, 네가 데리고 갔지? 누가 그 속셈을 모를 줄 알아. 진즉부터 저 년한테 눈독들이고 있는 거 내가 모를 줄 아냐?"
강씨가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자 옆방 젊은 부부가 비죽이 부엌문을 열고 내다보고 지나가던 사람들도 걸음을 멈추고 쳐다봤다. 상태는 강씨의 손을 힘주어 떼어냈다. 강씨는 씩씩, 거리며 분을 삭이지 못해 주먹을 휘둘렀다.
"나를 가두면 내가 못 나올 줄 아냐? 네 놈이 죽으라고 고사를 지내봐라. 내가 죽나, 이 오라질 놈아!"
금방이라도 기가 넘어갈 듯 악에 바친 강씨는 주변을 둘러보다 유모차를 집어 던졌다. 유모차가 상태 옆에 풀썩 떨어졌다. 주위를 둘러보던 강씨는 눈에 잡히는 것이 없자 다시 주먹을 쥐고 달려들었다. 입술을 사려 물고 주먹을 쥐었다, 폈다하며 이리저리 피하던 상태가 강씨의 가슴을 주먹으로 한 대 쳤다. 강씨가 맥없이 휘청하더니 그 자리에 드러누웠다.
"아이고, 젊은 놈이 기집에 눈이 멀어서 노인네를 죽이네, 죽여!"
강씨는 배를 움켜쥐고 구경하는 사람들 눈치를 보며 엄살을 떨었다. 옆에서 발을 동동 구르던 순이가 울음을 터뜨렸다. 그때서야 구경하던 사람들이 끼어 들어 말리자 강씨는 못이기는 척 방으로 들어갔다.
구경하던 사람들이 빠르게 흩어지고 상태도 돌아서는데 순이의 어눌한 비명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물건이 부딪히는 소리와 병이 깨지는 소리까지 들렸다. 상태는 마당에서 숨을 들이쉬고 내쉬다 부엌문을 벌컥 당겼다. 부엌문은 안에서 잠겨 있었다.
"문 좀 열어봐요!"
상태는 문을 흔들었다. 안에서는 여전히 비명소리가 나왔다. 부엌문을 마구 두들기며 잡아 당겼다. 샤시 문은 소리만 요란하게 낼 뿐 열리지 않았다. 상태는 샤시 문에 달린 유리를 주먹으로 쳤다. 유리가 깨진 구멍에 손을 넣어 문을 열고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방안은 난장판이 되어있었다. 상태는 다짜고짜 강씨를 향해 주먹을 날렸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순이의 우는 소리만 들렸다. 상태는 정신없이 주먹을 휘둘렀다. 순이가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졌다. 상태는 입술이 터진 채 널부러져 있는 강씨를 일으켜 앉혔다.
"내 잘못이니까 날 때려요. 바보 같은 저 여자 때리지 말고 날 때리라구요!"
상태는 강씨 가슴에 고개를 들이대며 악을 썼다. 강씨는 입술에 묻은 피를 손등으로 닦았다. 분을 삭이지 못해 씩씩거렸다.
"나가, 당장 나가. 내 손에 죽기 전에."
당장 덤벼들 듯 일어났지만 이미 강씨의 말엔 힘이 빠져 있었다. 도망치듯 방을 나온 상태는 짙은 안개 속으로 오토바이를 타고 사라졌다.
아침에 퇴근하면서 상태는 쥬스 한 박스를 사들고 왔다. 오토바이 시동을 끄고 쥬스 박스를 들고 강씨 집 앞에서 문을 두드리지 못하고 서 있었다. 삐딱하게 찌그러진 채 세워져 있는 유모차의 손잡이를 한 손으로 잡고 밀어보았다. 균형이 틀어진 유모차가 휘청거렸다. 상태는 유모차를 찬찬히 뜯어보았다. 중간에 나사가 헐거워져 있고 바퀴 달린 부위가 찌그러지고 바구니는 노끈으로 묶여있던 곳이 깨져 있었다. 손을 봐도 쓸 수 없을 것 같았다.
상태는 쥬스 박스를 자신의 부엌에 내려놓고 방으로 들어왔다. 맥없이 벽에 기대 주저앉아 바람벽에 귀를 댔다. 강씨의 기침소리가 들렸다. 바로 옆에서 나는 것처럼 가깝게 느껴졌지만 엄연히 커다란 벽돌로 막혀 있는 다른 공간이었다.
"박가, 이놈 이리 나와봐!"
강씨가 상태의 부엌문 앞에 와서 소리쳤다.
"너 이놈, 순이 어디다 빼돌렸어?"
강씨가 부엌문을 벌컥 열고 소리쳤다.
"빼돌리긴 누가 빼돌렸다고 그래요? 그 때 출근해서 지금 퇴근하는 사람한테 무슨 억지예요!"
"오라, 이놈아. 네가 그렇게 발뺌하면 내가 모를 줄 아냐? 당장 순이 데려오지 못해!"
"순이씨가 없어졌어요? 언제요?"
강씨는 기가막히다는 듯 입을 벌렸다.
"뭐, 순이씨? 니가 언제부터 순이씨냐? 오냐. 네 놈 짓인 줄 알았다. 혼자서 교회도 못 가는 년이 네 놈 짓이 아니면 어젯밤에 어딜 갔다고 생각하냐?"
상태는 강씨가 떠들거나 말거나 방으로 들어가 오토바이 헬멧을 찾아 들고 나왔다.
"어딜 가, 이놈아!"
"사람이 없어졌는데 찾아봐야죠! 그러게 걸핏하면 사람을 왜 패요!"
상태는 소리를 빽 지르고 오토바이를 타고 나섰다. 강씨는 상태의 오토바이 꽁무니에 대고 삿대질을 하며 소리쳤지만 상태의 귀엔 들리지 않았다.
상태는 우선 동네를 한바퀴 빙 돌며 밤을 지샐 만한 곳을 살펴보고 만나는 사람마다 물어보았지만 순이를 보았다는 사람은 없었다. 혹시 하는 생각에 교회에도 가보고 시내도 샅샅이 뒤졌지만 순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상태는 오토바이를 타고 공장주변을 돌아보기 위해 비포장도로로 들어섰다.
몇 개의 공장 주변을 돌아보고 나염 공장 건물 뒤쪽을 돌아보기 위해 오토바이를 길가에 세워두고 논으로 걸어 들어갔다. 앞쪽은 출퇴근하면서 지나다니는 길이지만 뒤쪽에 와 보는 건 처음이었다. 공장 담 밑에 제법 넓은 웅덩이가 있었다. 물에서 김이 무럭무럭 피어올랐다. 웅덩이 가에 거뭇하고 둥그런 형체가 보였다.
상태는 한눈에 순이임을 알았다. 뿌옇게 김이 솟아오르는 웅덩이 가에 쭈그리고 앉아 물 속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은 분명 순이였다. 상태는 성큼성큼 다가갔다. 얼굴에 멍 자국이 선명한 순이가 상태를 쳐다보며 히죽 웃었다. 순이는 어깨선이 찢어진 스웨터에 맨발로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상태는 자신도 모르게 하마터면 순이를 끌어안을 뻔했다. 순이는 발그레하게 상기된 얼굴로 물 속을 가리켰다. 억지로 감정을 추스른 상태는 순이의 손가락 끝을 쳐다봤다. 김이 무럭무럭 나는 물 속에 빨간 실지렁이가 오글오글 모여 있는 게 보였다. 잿빛 금붕어 한 마리가 한가롭게 오락가락하며 실지렁이를 향해 입질을 하고 있었다. 상태는 물 속에 손을 넣었다. 물은 김이 무럭무럭 나는데도 따끈한 기운도 없이 미지근했다. 상태는 갑자기 목이 꽉 메이고 눈물이 왈칵 솟구쳤다. 눈을 끔벅거리며 윗옷을 벗어 순이의 등에 덮어 주었다. 순이는 다급하게 상태의 팔을 치며 손가락질을 했다. 상태는 뿌연 시선으로 순이의 얼굴부터 어깨, 팔을 따라가 손가락 끝을 봤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빨간 금붕어 한 마리가 보였다. 두 사람은 무릎을 세우고 웅덩이 앞으로 바짝 다가앉았다. 금붕어 두 마리가 춤을 추 듯 꼬리를 흔들었다.(끝)
(원고지 80.1장)
백마
최 영 철
강 재근 검사는 순간 적으로 골치가 아파 옴을 느끼고 이마를 짚었다.
피의자인 문 혜림은 여전히 입을 다물고 있는 조용한 모습이었고 계장인 이 형철은 미리 언질을 받은 후라 처음부터 아예 조사에 참여 하지 못하였다.
삼십대 초반인 강 검사는 강력사건 전담 검사이고 지금 경찰에서 송치한 살인 사건 용의자를 처음으로 대면하여 심사 중이었다.
보통 이런 경우에는 밑에 있는 이 형철이 먼저 조서를 꾸미는 것이 절차였고 자신은 중요한 대목에 의문이 있거나 조서가 끝나야 나서지만, 문 혜림 사건은 그렇게 진행 할 수가 없었다.
처음 강 검사에게 이 사건이 맡아지자 자신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도처에서 연락이 오기 시작 하였고 심지어는 오랫동안 뵙지 못 하였던 대학 은사에게도 연락이 왔다.
오늘 강 검사가 심사 하여야 할 피의자는 모두 여섯 명이었지만 문 혜림 사건이 제일 큰 사건이라 제일 먼저 불러 조사에 들어갔다.
하지만 자신이 사람을 죽였다는 것만 시인 하였을 뿐 그 이후 본격적인 조사에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입을 굳게 다문 문 혜림이었다.
보통 이런 경우에는 피의자의 권리인 묵비권이므로 드러난 증거만 확보를 하고 오히려 악질로 취급하면 된다.
그러나 막강한 검사가 무시하지 못하는 인사에게 청탁을 받으면, 강직한 검사에게도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는데 그것도 여러 군데에서 받는다면 그건 압력이라고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강 검사는 첫 조사부터 시간이 많이 지체 되자 나머지 피의자들을 먼저 심사 하도록 계장인 이 형철에게 넘겼다.
지금은 자연 문 혜림만 맨 나중으로 미루어져 이제 그녀 혼자 마지막 피의자로써 강 검사의 방에 남아 있는 상태였다.
문 혜림이 밖에 대기 하고 있을 때부터 변호사인 고 상근이 나타나 같은 방에 계속 머물고 있었으나 그녀가 한사코 선임을 거부 하여 고 상근마저 변호사가 아닌 손님으로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강 검사는 오늘 따라 많은 커피를 마셨으나 일이 원만히 해결되지 않아 여전히 마음이 편해지지 않았다.
그러나 업무 마감 시간이 되자 일을 마무리 할 수밖에 없었기에 우선 협조하지 않는 문 혜림을 일단 교도소로 보내기로 하였다.
“문 혜림씨. 오늘 조사는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 내일부터 계속 소환할 테니 그렇게 알고 계십시오.”
“네.............”
사 십대 후반의 나이지만, 그보다 훨씬 어려 보이는 문 혜림은 무척이나 고운 용모를 지니고 있었지만 지금은 많이 초췌한 얼굴로 가볍게 머리를 숙이며 간신히 대답하였다.
“이 계장. 밖에 기다리고 있는 교도관들에게 알리게.”
“예.”
오늘 꾸민 조사서를 모두 정리한 이 형철은 강 검사의 지시를 받자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고 변호사인 고 상근도 몸을 일으키면서 강 검사에게 작별을 고하였다.
“강 검사. 내일 다시 찾아오겠소.”
“예. 안녕히 가십시오. 고 변호사님.”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호송 교도관은 이 형철이 부르자 마감 시간이 될 때까지 심사를 한 검사가 못 마땅하였지만 방안에서 문 혜림의 손목에 다시 수갑을 채우고 곧 포승마저 묶으면서 감히 불만스러운 표정은 하지 않았다.
강 검사 방에서 세 사람이 밖으로 나오자 심기가 좋지 않는 호송 교도관은 문 혜림을 복도 끝에 있는 지하로 향하게 하였다.
“내일 교도소에서 뵙겠습니다.”
“네..........”
고 상근은 복도 끝에 다다르자 더 이상 따라 가지 못 하고 문 혜림에게 인사 하였다.
아직 선임하지 않은 변호사의 말이지만 문 혜림은 가볍게 머리 숙여 나직하게 대답하고는 조용히 지하의 계단으로 내려갔다.
지하 복도는 검찰 구치소와 연결이 되어 있었고 밝은 불빛이 있었지만 지하 통로인 만큼 분위기는 아주 침침하였다.
다른 날보다 느린 일정에 심기가 좋지 않은 호송 교도관이었기에 앞에서 조용히 걷고 있는 문 혜림을 재촉 하고 싶었으나 지그시 참았다.
지금 즈음이면 이미 검찰 구치소 앞에서는 교도소로 갈 이송 준비가 다 되어있어 다른 용의자들은 모두 호송 버스에 타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아주 느리게 움직이지 않는 한 간섭을 할 생각이 없는 호송 교도관의 마음이었다.
담당 검사가 무척이나 신경을 쓰는 큰 사건의 용의자이기도 하지만 다른 재소자와 너무나 틀려 보이는 문 혜림이 일반 구속인보다 예사롭지 않게 보여 더 많은 호기심을 느꼈던 호송 교도관이었다.
처음 문 혜림에 관한 서류를 건네받았을 때 나이가 47세로 되어 있었지만 그가 보기에는 삼십대 중반으로 보일 정도로 젊어 보였다.
거기에다 문 혜림의 얼굴은 상당한 미모였고 지적인 현숙함이 돋보여 더욱 더 호기심을 유발 시킨 여인이 남편을 살해한 용의자가 되었다는 사건은 자신도 믿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러한 일이 사실인 모양이라 무척이나 흥미를 느꼈지만 감히 당사자에게 물어 볼 수가 없는 호송 교도관이었다.
고 상근 변호사가 검사실로 다시 들어가자 또 다른 검사인 유 재만이 강 검사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유 재만은 부장 검사로 강 검사의 상관이었는데 고 변호사와도 잘 아는 사이였다.
“아직 선임을 받지 못 하였다고 하더군요.”
“예 그렇습니다.”
유 검사는 고 상근이가 유능한 변호사임을 알지만 이제까지 선임을 못 마친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사건 정황이 확실히 밝혀지더라도 변호사가 없으면 불구속 신청이 어려웠다.
강 검사는 자신에게 질책을 하는 것 같아 마음이 좋지 않았으나 피의자인 문 혜림을 만나본 후에야 조금씩 자신감이 생기기 시작 하였다.
강력 검사인 강 재근은 지금까지 해오던 방식으로 피의자의 불리한 증거를 확보 하는 데 주력 하였으나 이제는 반대 입장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강 검사는 지금까지 청탁을 하는 사람이 무리한 요구를 하더라도 지금까지 소신껏 일을 처리 하려고 노력 하는 인물이었기에 문 혜림을 대면하고부터 그녀가 오히려 피해자 같이 여겨져 마음이 편하였다.
사건을 맡자말자 자신에게 영향을 미칠 유력한 인사들이 앞 다투어 연락을 하자 강 검사는 혹시 오점으로 남을지 모를 사건으로 변질 될까봐 내심 걱정 하였지만 문 혜림을 대하고부터는 양 쪽 모두 득이 될 자신감이 서서히 들었던 것이다.
그런 자세가 되자 강 검사는 자신감이 배여 있는 목소리로 주위를 환기 시켰다.
“오늘은 대면만 하였지만 이제 빠른 시일 내에 좋은 결과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 말을 들으니 안심해도 되겠군. 그럼 난 이만 가네.”
유 검사는 상관이기에 부담을 느꼈는지 근엄한 얼굴을 풀지 않은 채 서둘러 나갔다.
“나도 이만 가 보겠습니다. 앞으로 많은 협조 부탁드립니다.”
“예 안녕히 가십시오.”
강 검사에게는 고 변호사가 대학 선배이므로 사석에서도 함부로 대하지 않았지만 자리가 자리인 만큼 서로가 서로를 존중 한다는 듯이 인사를 나누었다.
책상으로 돌아 온 강 검사는 문 혜림의 서류를 다시 살펴보니 문 혜림은 나이 47세이었고 직업난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용의자가 결혼 한지는 15년 째였지만 아직까지 슬하에 아무 자식도 없었고 유일한 가족이라 할수 있는 남편을 살인 한 혐의로 구속이 되었다.
남편의 이름은 이 진성으로 K 대학교 인문대 교수였고 죽은 이 진성의 사인은 심장 마비였지만 신고자인 부인인 문 혜림은 자신이 죽였다고 신고를 하였다.
처음 신고를 받은 경찰이 황급히 달려갔을 때에는 이 교수는 단정히 잠옷을 입고 자는 듯이 이불에 누워 있는 상태였다.
마치 잠을 자다가 심장 발작을 일으킨 것 같아 보였으나 신고 한 문 혜림이 남편을 죽였다고 하자 경찰에서는 긴급 체포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 진성의 사체에는 아무런 상처가 일절 없었고 문 혜림이 말을 하지 않았으면 모르고 지나갈 정도로 평온한 죽음으로 보였다.
의문을 느낀 경찰은 살인 사건으로 접수 된 만큼 철저한 부검이 이루어 졌다. 하지만 숨만 멈추었다는 것 외에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 부검의의 판단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답답해진 경찰은 남편을 죽였다고 신고한 부인에게 어떤 방식으로 살해 하였냐고 물었으나 문 혜림은 자신이 남편을 죽였다는 것만 시인 할뿐 다른 질문에는 침묵으로 일관 하였다.
경찰은 살인을 저지르고 자수한 모양인 문 혜림에게 어떠한 방법으로 죽게 되었는지 상세히 알고 싶어 재차 조사를 하였으나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사 경찰관은 상관으로부터 미리부터 언질을 받지 않았다면 강경하게 대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조차 없자 할 수 없이 있는 그대로 검찰에 상신 보고를 하였다.
새벽에 벌어진 일이라 관할 경찰서에서 사건을 맡았지만 신문에는 이 사건을 다룬 기사는 전혀 없었고 나중 경찰서에 출입 하는 신문 기자들은 사건을 알았지만 아무도 보도를 하지 않았다.
그것은 비록 큰 사건이었지만 심하게 부정이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면 필요에 따라 서로 간에 협조를 하는 편이었고 그들이 생각하기에도 문 혜림이 피해자 같아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관할 경찰서는 어느 때 보다 시달리게 되었는데 그 중 제일 많이 시달림을 받은 사람은 경찰 서장이었다.
경찰 서장한테 아침부터 위에서 내려온 전화가 있었고 다른 사람보다 조속한 사건 해결을 위하여 남 다른 노력을 보여야 하였기에 다른 업무를 제쳐 두고 계속 조사가 진척 되는 것을 빠짐없이 지켜보았다.
그러나 검찰에 송치를 하기 전에 철저한 조사가 이루어져야 하겠지만 문 혜림은 처음의 태도와 달라진 점이 없었기에 그 이상의 조사는 전개 되지 않았다.
서장은 위에서 부탁 받은 사건이 도저히 진척이 없자 무척 초조 하였고 경찰에서 조사 하는 시간이 제한되어 있는지라 차라리 검찰 쪽에서 구속 영장을 받아 주지 않기를 바랐다.
하지만 몇 번이나 미흡 하다고 영장을 받아 주지 않은 검찰에서도 시일이 경과하자 이제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는지 송치를 받아 주었다.
문 혜림의 주변 사람에게 사건이 알려지자 크게 충격을 받은 사람이 많았는데 그 중 한 사람이 이 진태였다.
이 진태는 죽은 이 진성의 형이었는데 동생의 죽음을 알고 무척이나 당황 하였다.
대기업의 이사로 있는 이 진태는 평소 하나 뿐인 동생이 자신보다 먼저 세상을 하직 한다는 것을 전혀 생각 하지 않았다.
자신이야 말로 젊은 시절부터 험한 일로 서서히 골병이 들기 시작 하였고 이제 어려운 경쟁자를 모두 물리치고 오늘의 자리를 차지 한 뒤에는 건강을 돌보고 싶어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 몸의 상태였다.
그러나 동생은 순탄하게 학자로 성장 하였고 평소에 몸 관리를 잘 하였는지 험한 산이라도 등산을 즐길 만큼 무척 건강하였다.
처음 동생 집에 상주 하는 가정부가 자신에게 동생의 죽음을 알렸을 때 이 진태는 상당히 당황 하였고 더구나 그 죽음이 제수씨로 인한 일이라니 더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사실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지만 그 집에 오래 있었던 가정부가 거짓으로 말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이 진태는 모든 사실을 현실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동생의 부인인 문 혜림을 생각 하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라 다시 한번 더 의문이 생기는 이 진태였지만 모든 것이 사실이라면 반드시 문 혜림에게 필치 못할 사연이 있을 것이라는 것만 짐작 될 뿐이었다.
지금까지 동생 부부에 대하여서는 조금만 일도 다 알고 있는 이 진태였다.
동생이 동갑내기로 서로가 늦게 결혼을 하였지만 부부 사이는 무척 좋았고 그것이 거짓이었다면 자신이 몰랐을 리가 없었다.
나이 터울이 많아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동생은 이 진태를 아버지처럼 대하였고 무슨 일이 있으면 항상 의논을 하는 편이였다.
자기 동생인 이 진성이 결혼을 한 것도 자신이 주도 하여 이루어졌는데 문 혜림의 아버지는 외동딸을 무척이나 사랑하는 유명한 학자였다.
그러기에 노학자는 늦게까지 혼기를 놓친 채 주위에 머무르고 있던 딸이 행복한 가정을 이루기를 바랐지만 한사코 아버지 곁을 떠나기 싫다고 하는 딸을 재촉하지 못하였다.
두 사람이 결혼 한 것은 죽은 이 진성이 문 혜림 부친의 제자였기에 가능 하였다.
대학 시절 은사의 집을 자주 드나들었던 이 진성은 문 혜림의 존재를 소중하게 여겼고 오래 동안 마음속으로만 좋아 하는 순진 파였다.
노학자는 같은 학문의 길을 가는 사랑스런 제자의 속마음을 알아차렸기에 두 사람이 은근히 맺어지기를 바랐지만 그 역시 속마음뿐이었다.
이 진태는 동생이 나이 서른이 훌쩍 넘어서도 결혼 하려고 하지 않자 무척이나 재촉을 하였기에 곧 동생인 이 진성이 은사의 딸인 문 혜림을 마음에 두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주위의 인맥을 통하여 알아 본 결과 문 혜림이 참한 색시 감으로 알려 졌기에 이 진태는 동생을 야단치듯이 하여 두 사람의 결혼을 성사 시켰다.
처음 이 진성은 형이 직접 나서자 속으로는 고마웠지만 난색을 지으며 말리려 하였다.
그러나 역시 난색을 하며 쉽게 응하려고 하지 않았던 문 혜림이 나중에 승낙 하자 마침내 형에게 무척 고마워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고이 간직한 자신 만의 사랑이 세속 적인 일로 깨여진 것 같아 섭섭해 하였다.
이 진태가 보기에 동생 부부는 두 사람 다 늦은 결혼이었지만 무척이나 행복해 보였고 비록 결혼 생활 십 년이 넘어도 슬하에 자식이 없었지만 그들의 애정에는 이상이 없었다.
오 남매를 둔 이 진태는 동생이 자식을 못 보는 것이 밤일을 제대로 못 하는 것 같아 걱정이 되었지만 그 문제만은 자신이 조금도 간섭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 진태는 죽은 동생도 무척 좋아 하였지만 그에 못지않게 문 혜림도 제수씨로 무척 아꼈다. 그러기에 문 혜림의 사건이 알려지자 마음이 무척이나 괴로웠다.
그러나 명예를 소중히 생각 하는 이 진태는 문 혜림에게 말 못할 사정이 있다는 것을 알았기에 이미 죽은 동생을 위해서도 이 사건을 조용히 마무리 하려고 결심하였다.
강 재근 검사는 오늘도 담담한 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문 혜림에게 무척 갑갑해 지는 것을 느꼈지만 일을 결코 서두려고 하지 않았다.
첫 번째로 대면을 한 후 매일 부르다 시피 조사를 하였지만 처음과 달라진 점은 하나도 없었고 문 혜림의 주변이 달라진 점은 호송 하는 교도관이 여성으로 교체 되었고 옷차림이 여자 재소복으로 바뀐 것 밖에 없었다.
그리고 또 다른 변화는 문 혜림이 선임을 거부 하였던 고 상근 변호사가 그녀의 승낙으로 선임 된 것이 새로운 변화라면 변화이지만 그녀가 계속 침묵하면 아무 소용이 없었다.
문 혜림이 고 상근 변호사를 선임한 것은 강력 사건에 피의자가 변호사를 선임 하지 않으면 국선 변호사라도 강제로 할당되기에 그녀로써는 어차피 한 쪽을 선택 할 입장이었다.
문 혜림은 단아한 얼굴이었기에 가슴에 붙은 붉은 명찰만 아니라면 재소자 같지 않았고 더욱 살인을 한 사람 답지 않게 조용한 모습이었다.
“문 혜림씨 학창 시절은 어떻게 보내었는지 궁금하군요.”
“...............”
사건과 관계없는 질문이라 문 혜림의 표정이 약간 변하였으나 곧 원래의 얼굴로 돌아갔고 역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다른 질문을 드린 것은 죄송스럽게 생각 합니다.”
“............”
“대학을 S여대를 다녔더군요. 제 아내도 같은 학교를 졸업 하였습니다.”
“.............”
“나이 차이가 많아 까마득한 후배가 되겠지만 무척이나 학창 시절에 있었던 일을 좋아 하더군요. 자주는 아니지만 그 이야기만 나오면 말이 많아진답니다.”
“..........”
강력 검사실에서 이루어질 수 없는 검사와 피의자의 대화였지만 강 검사로써는 이제까지와는 다른 방법으로 문 혜림을 다루고 싶었다.
“사건과 관계없는 말이라 듣기에 거북 하겠지만 어차피 치러야 할 일이면 피하지 마시고 모든 일을 정확히 밝혀 주셔야 합니다.”
“............”
“주위에서 문 혜림씨를 아끼는 사람을 위해서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죽은 남편을 위해서라도 한시바삐 해결 하도록 합시다.”
“...........”
그때부터 강 검사는 여전히 말을 하지 않는 그녀에게 색 다른 변화를 느끼지 못 하였지만 문 혜림은 강 검사의 달라진 방식에 마음속으로 조금 씩 변화가 생기기 시작 하였다.
문 혜림의 변화를 눈치 차리지 못한 강 검사는 어제 아내와 나누었던 대화가 생각이나 사건과 관계없는 말을 오늘 꺼내었던 것이다.
강력 검사가 된 후에 제대로 된 시간에 퇴근을 하지 못하는 강 재근 검사이었다.
그러나 문 혜림사건을 맡고부터 더 늦게 귀가하기 시작한 강 검사의 변화를 아내는 차츰 알아차리기 시작 하였고 조금이나마 힘이 된다면 돕고 싶은 마음이었다.
결혼한 지 5 년째인 두 사람은 서로의 생활을 존중해 주었고 강 검사의 아내인 박 소희는 작은 화랑을 운영하고 있었고 이제 두 살이 된 딸이 하나 있었다.
“식사 준비가 다 되었어요.”
“응. 알아서.”
늦은 시간에 집에 도착 하였지만 항상 집에서 저녁을 먹는 것이 습관이 된 강 검사였고 간혹 밖에서 식사를 하는 일이 생기면 반드시 사전에 알리는 자상한 남편이었다.
“오늘은 무슨 반찬?”
“호호호 개구리 반찬 빼고는 다 있어요.”
간단한 실내복으로 갈아입은 강 검사의 말에 박 소희는 애정 어린 말로 대꾸하였다.
“흠.. 내가 제일 좋아 하는 것이 그것인데.”
“안 돼요. 우리 엄지공주가 제일 좋아하는 것이 개구리 왕자인데요.”
“하하 벌써 사랑에 빠진 공주라니 말도 안돼.”
강 검사는 늦은 시간이라 귀여운 모습의 딸을 볼수 없었지만 무척이나 사랑하였다.
“당신에게 물어보고 싶은 말이 있는데.”
“무엇인데요.”
집에서 사건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이 강 검사의 신조였지만 요즘 들어 더 신경을 쓰는 아내에게 미안함을 느끼고 조금이라도 위로 해 주고 싶었다.
“당신도 알지 저명한 학자로 알려진 문 정근어른을.”
“네. 잘아요. 석학이면서 유명한 서예가이기도 하시지요.”
“그 분의 따님이 관련된 사건을 맡게 되어서 말이야.”
“네에? 어떤 사건이기에.....”
강 검사는 자신이 집안까지 와서 걱정 하는 것은 사건 때문인지라 자연스럽게 지금 어렵게 생각되는 문 혜림의 사건을 꺼내는 동기가 되었다.
“으음. 도저히 생길 수 없는 일이지만 그 분의 따님이 남편을 살해한 혐의로 조사를 받고 있어.”
“네에?! 살인 사건이라뇨.”
아내가 놀라자 단란한 저녁 식탁에서 나눌 대화가 아니었지만 이왕 내친걸음이라 계속하여 말을 이어 나가는 강 검사였다.
“남편을 죽였다고 자백한 문 혜림을 조사하고 있지만 그 말 이외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아서 내가 고민 중이야.”
“그래요........”
강 검사의 아내인 박 소희는 남편이 자문을 구하는 것은 아니지만 같은 여성으로 문 혜림이 어떠한 마음인지 물어 보는 것을 알았다.
아내를 위한다고 집안에서는 처음으로 사건에 관한 것을 꺼낸 강 검사였지만 박 소희가 듣기에는 전혀 자신을 위한 위로의 말 같지가 않았다.
“밖에 있었던 일은 될 수 있으면 말하지 않으려고 하지만 이번 용의자인 문 혜림은 당신의 대학 선배이기도 하더군.”
“그래요........”
“그래서 말인데 살인 혐의를 받고 있는 용의자가 오히려 피해자같이 생각이 자꾸 들어 그리고 그 당시의 자세한 일을 상세히 알고 싶지만 그 여자가 말을 하지 않는단 말이야.”
“네.....................”
활달한 그녀였기에 남편이 이런 식으로 물어 온다면 충분히 이해 할 수는 있었다. 하지만 자신도 이해하지 못 하는 복잡한 여성 심리를 어떻게 설명 할 수는 없었다.
“중요한 사건이라 여러 곳에서 압력을 가하고 있어.....그렇지만 당신에게 사건 이야기를 꺼낸 것은 어쩌면 ....도움을 청하는 것이 아니라 요즘 따라 더 늦게 오는 나를 걱정하는 당신의 의문을 느꼈기에 내 딴에는 위로 한다고 꺼낸 말이니 조금도 부담은 갖지 마.”
“고마워요. 저도 당신의 마음을 잘 알아요.”
차분히 이야기를 듣는 동안 무엇인가 남편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이 들자 박 소희는 문득 문 혜림이 자신의 동문 선배인 것이 생각이 났다.
“대학 선배가 되는 그분의 나이는 어떻게 되지요?”
“으응. 만으로 47세이더군.”
박 소희는 자신과는 나이 차이가 많은 선배였지만 같은 학교에서 학창 시절을 보낸 인연이 예사롭지 않았고 누군가 나선다면 법조인으로 있는 동문보다 자신이 훨씬 도움이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말을 꺼내었다.
“한번 직접 만나서 이야기 할 수 없나요.”
“안돼!”
강 검사는 막상 아내가 자신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하자 무척 고무되었으나 박 소희가 문 혜림을 직접 만나고 싶다고 하자 난색을 표하고 말을 마쳤던 것이었다.
그것은 강 검사 자신도 문 혜림 사건에 여성 법조인 보다 평범한 여성인 아내가 더 나아 보였지만 설사 아내가 같은 법조인이라고 하더라도 서로의 일에 나설 수 없는 것이다.
강 검사는 오늘도 아무 성과가 없는 가운데 마감 시간이 되자 의욕이 상실 된 목소리로 문 혜림에게 말 하였다.
“그럼 더 이상 할 말이 없는 것으로 알고 오늘은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
“네 죄송합니다. 그 동안 너무 폐를 끼치고 있습니다.”
“예?!”
강 검사는 처음으로 긴 말을 하는 문 혜림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지금까지 강 검사가 그녀에게 들은 말은 ‘네’라고 하는 단 한 마디뿐이었기에 오늘 처음 들어본 짧은 말도 무척 길게 느껴졌다.
무슨 새로운 변화가 있나 하고 강 검사가 그녀를 유심히 쳐다보자 문 혜림도 그 점을 깨달았는지 전처럼 조용한 표정으로 되돌아갔지만 고무적인 변화였다.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어색한 분위기가 생겼지만 강 검사로써는 그러한 것도 반갑게 생각이 되어 다시 그녀에게 인사를 하였다.
“안녕히 가십시오.”
“네..........”
“다음에는 좋은 결과를 기대 하겠습니다.”
“저......”
“무슨 할 말이라도 있어서인지...”
문 혜림은 잠시 망설이다가 얼굴에 조용한 미소를 띠우면서 말하였다.
“실례지만 부인의 성함은 어떻게 되는지요.”
“아! 옛! 아내의 이름은 박 소희입니다.”
강 검사는 문 혜림의 말에 마치 감격 되는 듯이 소리를 높이며 힘차게 말을 하였고 표정까지 그러한 느낌을 주기에 충분하였다.
“네 그렇군요. 그럼 안녕히 계세요.”
그녀는 다른 날과는 달리 많은 말을 남기고 떠나갔다.
문 혜림이 방을 나갔는데도 강 검사의 방에 남아 있었던 계장인 이 형철과 제일 낮은 직급인 타이피스트 심보라도 놀란 표정이 아직 남아 있었다.
그들도 이번 사건에 무척 신경을 쓰고 있었기에 오늘따라 많은 변화를 보인 문 혜림이 새롭게 보이는 모양이었다.
강 검사가 문 혜림을 만나고 있을 때에는 다른 사람의 출입은 드문 편이었고 평소에 자주 드나들던 직원도 그 시간만은 꼭 필요한 용무가 없으면 자제 하는 편이었다.
강 검사는 오랜만에 느껴지는 담배의 참 맛에 기분이 훨씬 밝아지는 느낌이었다.
그 동안 아무런 성과도 없어 자신감을 잃어가던 강 검사는 문 혜림의 새로운 변화가 무엇보다 반가웠기에 서둘러 상관인 유 재만 부장 검사 방으로 갔다.
“부장님. 문 혜림이 말문을 열기 시작하였습니다.”
“으응! 반가운 소식이군.”
자세한 보고를 받은 유 재만은 문 혜림이 말문을 열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일이 잘 풀릴 것이란 예감이 드는 모양이었다.
“저는 이번 기회를 놓치면 문 혜림은 다시 침묵으로 돌아 갈 것입니다.”
“자네에게 좋은 방법이라도 있는 것 같군.”
사건을 맡은 강 검사는 새로운 변화를 보인 문 혜림이 전 보다는 낫겠지만 획기적인 방법이 아니면 여전히 힘이 들것 같은 느낌이 강열하게 왔고 그런 획기적인 방법이란 자신이 그토록 난색을 보였던 아내의 직접 도움이 아니면 안될 것 같은 그런 예감이었다.
“복잡한 여성들의 심리를 잘 아는 것은 여자들입니다.”
“그래서 여직원을 동원 하자는 것이요.”
“아닙니다. 그 보다 문 혜림의 말문을 열게 한 제 아내를 동원하고 싶습니다.”
“흠. 그건 안 되네. 다음에 곤란한 문제도 발생할 수 있네.”
유 재만 부장검사는 난색을 표했다.
“일반 사건이라면 그러한 문제점이 나타나겠지만 지금 용의자인 문 혜림을 구해달라는 인사만 있지 처벌 하라고 하는 인사는 한 명도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 청탁을 하는 인사들이 모두 무시할 수 없기에 오히려 이런 편법을 쓰더라도 결과만 좋으면 서로가 만족 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으음....화가 복이 될 수 있단 말이지. 그럼 자네가 맡은 사건이니 한번 소신껏 잘해보도록 하게.”
“옛! 감사합니다.”
강 검사는 상관인 유 재만의 승낙을 받고 그의 방을 나서면서 기분이 무척 좋았고 내일은 반드시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박 소희와 문 혜림이 처음 만나는 날 강 검사 방의 분위기는 무척 좋았다.
요란 하지는 않지만 밝게 인사를 하는 박 소희를 보고 문 혜림은 무척 조심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어린 후배로 생각하는지 조용한 얼굴에 간혹 미소를 띠우면서 마음을 풀었다.
그러나 문 혜림은 사건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고 박 소희 역시 사건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강 검사는 획기적인 방식을 스스로 선택 하였지만 첫날부터 큰 성과를 기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서서히 그의 기대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는데 그것은 문 혜림이 교도소로 돌아간 뒤 오랫동안 많은 생각을 하였고 이제 모든 것을 정리 하려고 마음먹었기 때문이었다.
문 혜림으로써는 언젠가는 할 일이었지만 후배인 박 소희를 만나고 나서 결정이 빨라 진 것이기에 강 검사에게는 좋은 아내의 협조이었다.
그동안 죄책감에 시달리던 문 혜림은 강 검사의 아내인 박 소희에게서 옛날 자신의 모습을 보았고 박 소희도 서로의 신분을 떠나 순수한 동문 선배로 가식 없이 대해 주었다.
살인 수로 혼거 방에 있지 못하고 독방에 홀로 갇힌 문 혜림은 난생 처음 접하는 교도소 생활이 처음에는 무척 낯설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제 조금 씩 적응해 나가는 자신의 모습에 스스로 놀라워하였고 현재 머물고 있는 이 방에도 숱한 사연을 가진 여자가 거쳐 간 것을 느끼고 있었다.
마음이 진정되자 문 혜림은 자신에게 죽은 남편이 두렵기 보다는 새삼 보고 싶었고 그러한 마음이 들자 가만히 남편의 이름을 되 뇌이며 그리운 추억으로 여행을 떠났다.
문 혜림이 처음으로 이 진성을 보았을 때에는 별 다른 감정이 없었기에 아버지의 여느 제자처럼 대하였다.
차츰 시일이 지나자 이 진성이 자신에게 남 다른 감정을 가졌다는 것을 문 혜림은 알았지만 그런 감정을 느낀 제자는 그 뿐이 아니었다.
어릴 적부터 얼굴이 단아한 문 혜림은 귀하게 자랐지만 항상 조용한 아이로 알려졌고 엄한 학자인 아버지는 대어놓고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무척 귀여워 해주었다.
자신을 낳고 바로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당연히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았지만 어머니의 사진이 남아있어 어릴 적 외로울 때에는 무척 어머니가 그리웠다.
태어나자 말자 어머니를 잃어버린 문 혜림은 어린 시절 대부분을 부산에 있는 외가에서 보내었고 정작 서울에 있는 아버지와 함께 생활 한 것은 국민 학교를 졸업한 후였다.
그러나 외가에서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 문 혜림은 엄한 아버지가 무척 어렵게 생각이 되었지만 재가를 하지 않은 아버지가 무척 고마웠고 항상 조심을 하는 편이었다.
이 진성은 아버지를 연상 시키는 인물이라 문 혜림에게 상반된 두 마음을 가지게 만들었다.
어려움과 호기심을 유발 시키는 사람이었지만 동갑내기라 나중에 자신과 결혼까지 할 줄은 전혀 예측을 하지 않았던 인물이기도 하였다.
처음 이 진성이가 아버지께 자신과의 결혼을 청한 것을 알고 그녀는 무척 놀라워하였다.
문 혜림의 아버지는 즉석에서 대답 하지를 않고 다음으로 미루었고 문 혜림은 나중에 아버지로부터 그의 청혼을 들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결혼이 이루어 진 것은 그 일이 있은 후 일 년이란 시간이 지난 뒤였다.
두 사람의 결혼을 많은 사람들이 축하를 하여 주었지만 두 사람 모두 조용한 성격이라 십 년이 넘는 결혼 생활동안 주위에 특별한 일로 관심을 끄는 일은 한 번도 발생 하지 않았다.
이 진성은 신혼 시절에는 학교와 집밖에 몰랐지만 차츰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에는 부부 동반을 하였고 나중 특정 산악회에 가입하고부터는 자주 같이 행동을 하였다.
이 진성의 취미는 원래 난을 키우는 것이었는데 자신보다 평소 집에만 있는 문 혜림의 건강을 생각 하여 산악회에도 적극적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에게 특별한 일이 생긴 것은 등산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사건이 생긴 것은 포근한 봄날에 맞추어 이 진성 부부를 제자가 초청을 하였고 두 사람은 오랜 만에 봄나들이 가듯이 그 초청에 응하면서 시작 되었다.
초대한 제자는 이 진성을 무척 존경 하는 제자로써 마사회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경마장은 무척 넓었으나 초청한 제자 덕분에 일반인들이 접근하기가 어려운 말의 방사장까지 견학 할 수가 있었다.
두 사람은 오랜 만의 나들이라 충분한 여유를 가지고 한가롭게 산책을 하듯이 많은 것을 구경 하였고 그 때문인지 방사장에서 어떤 흥미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여러 개의 울타리가 있었지만 그중 한 울타리에는 한 마리의 백마만 있었다.
다른 색이 섞이지 않은 백마는 덩치가 상당 하였으며 기마경찰이 타고 다니는 말과 비교 하여도 손색이 없었다.
그들 부부가 방사장을 다 둘러보고 돌아가기 위하여 다시 그 울타리를 지나칠 적에 새로운 변화가 있음을 알고 걸음을 멈추었다.
울타리 안에는 백마가 혼자 있지 않고 그 만한 덩치의 갈색 말이 서성이고 있었다.
갈색 말은 종마로써 매우 탄탄하게 보였지만 백마 옆에서 열심히 눈치만 살피고 있었고 백마는 아무 관심이 없다는 듯이 한가롭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 제서야 두 사람은 백마가 암말인줄 알았고 문 혜림은 새로 나타난 갈색 말이 어떤 역할을 하려는 줄을 알고 얼른 자리를 피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 진성은 무척 흥미를 느꼈는지 그 자리에서 전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아 문 혜림은 남편을 재촉 할수 없었다.
울타리 바깥에는 두 말을 지켜보는 담당 직원들이 잘못 하면 일에 방해가 될지 모르는 두 사람의 등장에 신경을 쓰는 것 같았으나 일반 손님이 아닌 줄 알기에 그대로 두었다.
종마인 갈색 말은 멋진 덩치를 가지고 있었지만 실패의 연속이었는데 그것은 백마가 결정적인 순간이 올 때마다 관계를 거부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일은 많은 시간이 소비되는 일이었다.
말은 영리하여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어느 사람도 태우지 않았고 특히 관계를 가질 때에는 무척이나 까다롭게 굴어 조금이라도 피가 섞였으면 거부하는 동물이었다.
갈색 말은 종마답게 결코 포기를 하지 않고 계속하여 도전을 하였고 자신의 끈질긴 도전에 백마의 분위기가 조금이라도 좋아지면 얼른 관계를 준비하였지만 번번이 백마의 야무진 뒷발에 물러나고 말았다.
하도 여러 번 벌어지는 광경이라 두 말 중 한 마리는 지칠 만 하였으나 그런 일은 계속 진행이 되었고 마치 두 말이 관계를 떠나 서로 유희를 즐기는 듯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끝나지 않는 잔치가 없듯이 갈색 말은 무수한 도전 끝에 마침내 일을 성사 시켰는데 그토록 오랫동안의 유희에 비하면 무척 짧은 관계였다.
문 혜림은 두 말이 모두 사라진 후에야 자리를 떠는 남편이 지금까지 벌어진 일에 무척 흥미를 느낀 것은 알았지만 그날 밤에 그들 부부에게도 이와 비슷한 일이 생길 줄은 전혀 짐작 하지 못하였다.
오랜만에 같이 외출한 두 사람은 초대한 제자의 저녁까지 대접을 받은 후에야 즐거운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왔고 피곤한 일정이었지만 무척 즐거운 하루였다.
이 진성은 집에서 목욕을 마치고 평상시와 같이 서재에 있었으나 마음은 펼쳐진 책에 관심이 없었고 낮에 보았던 백마에게 가 있었다.
백마가 암 말이었기에 자연 유난히 흰 살결을 지닌 사랑스러운 아내와 비교가 되었다.
그들 부부는 결혼 생활이 십 년이 넘었지만 여태 같이 목욕을 한 적은 한 번도 없을 정도로 서로의 알몸에 대하여서는 조금 밖에 몰랐다.
부부 관계는 정상적으로 이루어졌지만 여태까지 자식이 없었고 그 동안 두 사람은 자연적으로 이세가 탄생하기를 서로가 바랐지만 조바심은 가지지 않았다.
슬하에 자식이 없었기 때문인지 세월이 흘러도 아내의 몸매는 처녀 때와 별로 달라지지 않았고 이 진성은 학문에 등한시 하지 않듯이 부부 생활도 소중히 생각을 하였다.
이 진성은 사회생활을 하면서 다른 여성으로부터 몇 번이나 유혹을 받았지만 잘 처신 하여 물리쳤고 그에게는 부인이외의 여성에게는 별 다른 관심이 없었다.
이 진성은 낮에 보았던 일이 도저히 잊어지지가 않았고 그가 방사장에서 보았던 종마와 백마가 벌인 일은 뇌리에서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이 진성이 어린 시절에 보았던 큰 말의 기억은 기마경찰이 탄 것이었고 처음 보았을 때 평소 생각한 것과는 달리 자신이 놀랄 만큼 큰 덩치라 무척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지금도 그런 기마경찰이 존재하는 가는 몰라도 참으로 오래간 만에 보는 대형 말들이었다.
말들이 영리하고 예사롭지 않는 동물이란 것을 알지만 특히 하얀 백마는 보기가 어려운 것이었고 옛날 동화책에 나오는 훌륭한 왕자만이 타는 것으로 알고 자란 이 진성이었다.
그러한 마음을 지닌 이 진성은 잠자리에 들자 낮에 보았던 광경이 아직 남아 오랜만에 부인을 안고 싶어 하였고 문 혜림도 싫어하지 않는 내색이었다.
어둠 속에서 모든 옷을 벗은 두 사람은 평상시와 같이 서로를 안았으나 이 진성이 부인에게 뜻밖의 주문을 하자 잠시 두 사람 사이의 좋은 분위기가 어색 하여졌다.
“혜림이 부탁이 하나 있는데.....”
“네...무엇인데요.”
“........”
“........”
두 사람은 동갑나기라 서로가 말을 높였지만 이 진성이 부인에게 애정을 표현할 때에는 특이 하게도 그만 말을 낮추었다.
이 진성은 처음에는 무척 어색 하였으나 애정 표현이 서툰 그가 사랑하는 부인에게 남달리 애정을 표현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고 문 혜림도 그러한 남편을 좋아 하였다.
잠시 어색한 시간이 지난 뒤 이 진성은 말문을 열었다.
“불을 켜면 안 될까.”
“.........”
문 혜림은 남편의 말에 무척 놀라 잠시 생각에 잠겨야만 되었다.
그 동안 부부 생활을 한 지가 오래 되었으나 이런 말을 듣기는 처음이었고 밤일에는 언제나 수동적인 문 혜림은 아직까지 부끄럼이 많이 남아 있었다.
부인의 침묵은 길었다. 평상시의 두 사람의 대화는 한 쪽이 대답하기 곤란하면 침묵으로 거절을 표시 하였고 그러면 상대방은 그것을 이해하고 자연스럽게 물러났다.
그러나 남편은 계속 부인의 대답을 기다리는 눈치였고 전과 달리 그가 양보 할 마음이 없는 것 같아 문 혜림은 더 이상 침묵만 지킬 수가 없게 되었다.
문 혜림은 분위기가 색 다르게 흘러가자 무척 곤란 하였으나 양단간에 결정을 내리기 어려웠는데 그것은 자신이 거절 하면 순순히 물러날 남편이었기에 더 어려운 처지에 몰렸다.
그러나 이 진성이 그녀를 얼마나 진심으로 사랑 하는 줄 잘 알기에 차마 모른 체 하기 어려웠고 한편으로 거절하고 싶은 말은 입안에서만 머물고 말았다.
“네”
“........”
나이에 관계없는 부끄러움에 여전히 눈을 뜨지 못 하는 문 혜림은 마지못해 승낙을 하면서 이번 한 번 만이라는 단서를 붙이고 싶었지만 자신의 남편은 이런 어려운 부탁을 쉽게 꺼내지 못 하는 것을 알기에 하고 숨겨진 뒷말을 끝내 하지 못하였다.
이 진성은 부인이 승낙을 하자 마치 동심으로 돌아간 것처럼 무척 기분이 좋았다.
그 동안 부부 관계를 가질 때마다 완전히 불을 끄지는 않아 부인의 몸매가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잘 알고 있었지만 환한 불빛 아래서는 처음이었다.
그녀가 승낙 하자 남편은 알몸으로 일어나 불을 환히 밝혔고 가렸던 이불은 옆으로 치워 버리는 재주도 보였다.
눈을 감은 문 혜림은 남편이 환한 불빛 아래 자신의 알몸을 쳐다보는 것을 느끼면서 그녀 자신도 모르게 부끄러움과 함께 묘한 흥분이 몸을 감싸기 시작하였다.
보통 때와는 달리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행동 하는 남편의 손길에 그녀는 색 다른 감흥을 온 몸으로 느꼈고 자신의 숨결도 차츰 거칠어져 묘한 감정을 느꼈다.
“.........”
“............”
문 혜림은 숨결을 가다듬으면서 처음으로 느끼는 색 다른 감각이 싫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부끄럼이 남아 있었기에 될 수 있으면 빨리 마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웬일인지 남편은 보통 때보다 더 한 애정을 표현 하였지만 정작 본론으로 들어갈 마음은 아직도 없는 모양이었다.
이 진성은 지금까지 여자에게 지나친 감정을 품은 사람을 이해하기 어려워하였지만 지금에서야 충분히 알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이 들 정도로 흥분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처음으로 느끼는 황홀감이라 전 보다 더한 흥분을 느꼈으나 마음속에서는 여전히 미흡한 구석이 남아 있었다.
이 진성은 어느 새 부인의 하얀 알몸을 보면서 낮에 보았던 백마를 연상 시키고 있었고 그런 자신의 마음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기에 모처럼 용기를 내어 이룬 일을 쉽게 멈출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저..........”
“.......”
이 진성은 부인 역시 다른 날과 다른 반응을 보이자 또 다시 용기를 내어 평소 같으면 도저히 할 수 없는 말을 꺼내었다.
“우리 말놀이 하자.”
“흡.”
문 혜림은 그 제서야 남편이 무엇 때문에 흥분이 되었는지를 깨닫고 놀란 마음을 진정 시키려고 애를 썼다.
엄한 학자인 아버지의 밑에서 사춘기를 보낸 그녀는 성(性)을 나쁘게 보지는 않았지만 무척 조심 하여야 할 것으로 알고 지내 왔었다.
그러나 어린 시절을 비교적 자유로웠던 부산 외가에서 자란 문 혜림은 지금도 동향의 옛 친구를 만나면 아직 잊지 않았던 억센 경상도 사투리도 한 번씩 사용할 줄 아는 활달함도 지니고 있었다.
그런 시절마저 없었다면 자연스럽게 거절을 하였겠지만 또 다시 달라진 남편의 어투 때문에 거절하기가 무척 어려웠다.
남편이 진한 애정을 나누는 시간에 말을 계속 낮춘다는 것은 드문 경우였다.
그들이 신혼 때에는 익숙하지 않아 그러 하였지만 지금은 아니었고 남편은 이제 멈출 수 없는 형편에 처한 모양이었다.
문 혜림은 차마 바로 대답을 하지 못 하고 나지막하게 고개만 숙이고 대답을 대신 하였다.
“............”
“.............”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한 밤중에 이 교수의 안방에서는 불이 환하게 켜 진채 난데없는 말놀이가 벌어졌고 건너 방에 잠 들은 가정부는 조금도 눈치를 차리지 못하였다.
처음에는 두 사람은 서로가 너무나 어색 하였지만 어느 새 갈색 말을 그럴 듯하게 흉내 내는 남편 때문에 그녀도 어느 새 백마로 변하고 있었다.
문 혜림도 낮에 보았던 백마의 행동에 흥미를 느꼈지만 보통 이상의 감정은 아니었다.
그녀가 낮에 말을 보고 옛날의 추억을 떠 올린 것은 부산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보았던 말과 관련된 일이었다.
외가는 부산 동래에 있었는데 주변에 낮은 산이 있었다.
가끔 그 낮은 산에 말을 타고 올라가는 젊은 사람이 있었기에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주위의 아이들은 무척 흥미를 느꼈고 같이 따라가는 아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기억하는 말은 큰 말이 아니라 조랑말이었고 말에 탄 사람도 젊은 사람이었지만 그 당시 어린 문 혜림의 눈에도 전혀 왕자 같지 않는 생김새였지만 말을 타고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무척 흥미롭게 보였다.
그녀의 어린 시절에는 나무 장사들이, 많은 장작이 실린 달구지를 끌기 위해 소나 말을 이용 하였지만 따로 타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문 혜림이 여느 어린 아이들과 같이 가끔 씩 나타나는 말 탄 사람에게 흥미를 느끼자 외가에서는 엄하게 단속을 하였다.
그 이유는 동래에서 미친 여자가 있었는데 그 여자는 말이 횡포를 부리는 바람에 놀라서 미쳤던 것이었다.
항상 거적을 덮어쓰고 나이 많은 노파처럼 보인 그 미친 여자가 한 때는 고운 자태의 이름 있는 집의 유모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았지만 사실이라고 하였다.
그녀가 기억 하는 말의 기억은 말로 인하여 미친 여자 때문인지 좋은 기억은 아니었다.
그러한 문 혜림이 본의 아니게 백마 노릇까지 하게 되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종마처럼 더욱 더 흥분을 하는 남편이 슬며시 원망이 될 정도로 무척이나 피곤하였다.
그러나 이 진성은 방사장에서 보았던 종마처럼 지칠 줄 모르고 끊임없이 도전을 하였고 그녀는 그만 일을 마치려고 순응 할 자세를 취하면 거친 종마와는 달리 교묘하게 그런 기회를 피하면서 좀더 유희를 즐기려고 하는 남편이었다.
문 혜림이 차츰 정신을 차린 것은 길게 벌린 유희 탓도 있지만 낮에 떠올랐던 어린 시절의 말에 대한 기억이 좋지 않은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히힝........푸르륵..”
“............?”
그러나 남편은 이제 거의 종마로 변하여 마치 말처럼 거친 호흡과 더불어 이따금 말 울음소리마저 내자 문 혜림은 은근한 원망과 함께, 존경 받는 이 교수에서 종마로 변한 남편을 애타게 하고 싶었다.
“헉헉......”
“...........”
그녀는 자신의 주위를 돌며 지칠 줄 모르고 말처럼 뛰어 다니는 남편이 일을 성사 시키려고 하면 야무지게 뒷발을 들어 거절을 하였다.
“히힝........힝!”
“..............”
이 진성은 거절 당 할 때마다 무척 강한 흥분을 느끼고 자신도 모르게 말 울음소리를 내었다. 그러나 시간이 많이 지나자 난생 처음으로 느끼는 강열하고 황홀한 놀이였지만 언제까지나 계속할 수는 없었고 차츰 정신이 들면서 부인에게 너무 무리한 부탁을 한 것 같아 그만 마무리 하고 싶었다.
“헉헉 혜림이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거절하고 그만 두기로 해.”
“....네.”
지칠 대로 지친 부인이었지만 약속대로 한 번은 거절 하려고 재차 도전 하는 남편에게 뒷발을 들어 거절한 부인이었다.
“허헉............”
“..................”
그러나 문 혜림은 서로의 약속대로 마지막으로 하는 도전을 앞두고는 돌이킬 수 없는 큰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이제........그만..........”
“.......네...........”
그런 사실을 짐작 못한 이 진성은 황홀 하였던 유희를 마치려고 하자 거친 숨결을 진정 시키면서 멋지게 마무리를 장식 하려고 하였다.
“흐흡...”
“...........”
마침내 힘 찬 종마처럼 백마의 주위를 한 바퀴 돈 후에야 부인의 뒤쪽으로 안심 하고 다가갔던 남편은 그녀의 뒤에 손이 닿는 순간 그만 큰 충격을 받고 넘어졌다.
“퍽!!”
“아?!”
문 혜림은 갑작스런 남편의 고통에 찬 신음 소리를 듣고 자신의 심장이 덜컥 내려 않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으음!”
“어머나!”
오랫동안 되풀이 하였던 행동이라 자신도 모르게 뒤쪽에서 움직임이 있자 마치 본능처럼 야무지게 뒷발을 들어 방심 하고 있던 남편의 급소를 차 버렸던 것이다.
“으윽..........”
“많이.......다쳤나........요.......”
돌연사태에 평소 침착 하였던 문 혜림도 무척 당황 하여 황급히 남편을 살펴보았다.
남편은 눈을 찌푸리면서 무척 괴로운 듯이 가슴을 부여잡고 고통스러워하였으나 잠시 눈을 뜨더니 자신을 애타게 쳐다보는 부인을 발견하고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곧 평온한 표정으로 변하면서 눈을 감았다.
“무슨 말이...라도.......”
“.................”
당황한 문 혜림은 도저히 정신을 바르게 차릴 수가 없었다.
“여보!”
“...........”
처음에 그토록 괴로워하던 남편이 잠시 후 자신을 쳐다보고는 고통을 잊은 듯이 평온한 표정으로 눈을 감자 마치 장난을 치는 것 같아 무척이나 혼란스러워지는 문 혜림이었다.
“정신 차리세요. 여보!”
“...................”
그러나 다시 한번 눈을 감은 남편이 점점 창백하게 변하자 그 제서야 사태가 심상찮다는 것을 알고 서둘러 대책을 마련하려고 하였지만 그만 늦고 말았다.
“................”
임기웅변에는 남자보다 여자가 훨씬 낫다고 하지만 문 혜림은 너무나 갑작스러운 일이라 모든 것이 꿈처럼 느껴졌고 지금 벌어진 일이 도저히 현실 같지가 않았다.
남편을 돌아보니 여전히 잠자듯이 평온한 얼굴이었지만 이미 숨은 멎어 있었고 이 모든 것은 꿈이 아니라 냉정한 사실이었다.
문 혜림이 사태를 알아 차렸을 때에도 그녀는 아직 알몸의 상태이었고 지금이라도 병원에 연락 하고 싶었지만 때가 너무 늦었다는 것을 알았다.
자신의 명예보다 남편의 명예를 위하여서도 오늘의 일을 감추어야 했으나 경찰에는 바로 연락을 하였다.
경찰이 오기 전에 자신의 옷보다 남편의 옷을 먼저 입히고 난 후 그녀는 마치 준비라도 하듯이 외출복을 입었다.
그 뒤 신고를 받은 경찰이 온 것은 기억이 되지만 모든 것을 잊고 싶었던 그녀였다.
문 혜림은 교도소에서 하얀 밤을 세우면서 추억 여행을 마쳤다.
아침이 되자 여자들만 있는 장소라 그런지 아침 점검이 끝나자마자 혼거방에 있는 여자 재소자들이 반성문을 외우는지 매우 시끄러웠지만 다행스럽게도 독방에 있는 재소자에게는 그런 것을 주문하지 않았다.
여자 재소자만 수감 되어 있는지라 한꺼번에 행하는 반성문을 읽는 시간이 아니면 무척 조용 하였지만 때때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날카로운 여자 재소자의 비명소리가 들릴 때에는 무척 불안하기도 한 문 혜림이었다.
그러나 문 혜림은 이제 그토록 잊고 싶었던 일을 간밤의 추억 여행으로 모두 보냈는지 한결 마음이 진정 됨을 느꼈다.
남편이 생전에 매일 정성들여 보살피던 주위에 대한 생각이 들었고 조금이라도 소홀히 하면 금방 표시가 나던 난에 대해서도 걱정 하게 되었다.
그러나 말(馬)에 대한 생각이 미치자 여자와 말과는 좋지 않는 관계로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자신은 해당 되지 않지만 말띠 여성은 억세다고 다른 띠의 여성에 비해 혼사가 어려웠고 문 혜림이 어린 시절의 기억 중에 말로 인하여 미친 여자가 있는 것은 장차 자신의 미래를 예언 한 것 같아 오늘의 현실이 슬프게 생각 되었다.
교도소의 오전 출정에 불러온 문 혜림이 검사실에 나타나자 그녀는 전날과는 달리 평온한 얼굴이었고 반갑게 맞아 주는 박 소희와 몇 마디 대화를 나누지 않고 바로 본 조사에 들어가기를 원 하였다.
강 재근 검사는 문 혜림이 사건 정황을 정확히 알 수 있게 순순히 이야기를 하자 그 제서야 그 동안의 모든 피로가 저절로 사라짐을 느꼈다.
문 혜림은 본격적인 조사가 벌어지자 대답하기 곤란 한 것은 마치 박 소희가 담당 검사인 것처럼 그녀를 보면서 말을 하였지만 강 검사가 조서를 꾸미는 데에는 아무런 불편함이 조금도 없었다.
문 혜림의 조사가 끝이 나자 강 검사는 무척 상쾌한 기분이었지만 마음 한 구석으로 스며드는 허탈감은 배제 할 수 없었다.
강 검사는 문 혜림이 처음부터 모든 것을 밝혔더라면 자신에게 오기 전에 경찰에서 끝날 사건이었지만 막상 당사자인 그녀가 겪었던 고통을 생각 하면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조사가 마무리 되자 문 혜림의 사건은 일사천리로 해결 되었고 오늘 중으로 그녀는 교도소에서 나오게 되었다.
강 검사는 문 혜림이 떠나자 그때까지 방에 남아 있던 아내에게 고마움을 표시 하였고 박 소희는 더 이상 남편 사무실에서 머물지 못하고 화랑으로 가야 하였다.
강 검사가 그 동안의 노고를 생각 한다는 듯이 ‘같이 경마장에나 놀러갈까’ 하였을 때 박 소희는 매섭게 남편을 노려보았지만 입가에서는 미소가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