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태양 12
상감 연산의 어명이 내리자 그 날로 의금부 낭청(郎廳) 김양필은 약사발을 안고 진도로 내려갔다.
이 때 윤필상의 나이는 일흔여덟이었다.
서울 날씨보다 좋은 진도로 내려온 것이 오히려 세파를 떠나 여생을 즐길 수 있을 것만 같아서 윤필상은
사문을 읽는 것으로 소일을 하고 있었다.
다만 그의 가슴 속에서 떠나지 않는 의문이 가끔 떠올랐다.
젊어서 어느 점쟁이가 삼림(三林) 아래서 죽으리라는 말이었다.
"여보게, 내일 우리 논 김을 맬 테니 일찍 삼림 논으로 오게."
머슴이 옆집 논꾼에게 하는 말이었다.
"여보게, 삼림이라니 임금님의 동산을 삼림이라 하는데 이 곳에도 그런 동산이 있나?"
윤필상은 얼른 농부에게 물었다.
"예, 고개 너머 옛날부터 삼림이 우거져 있는데 큰 동산을 삼림, 그 아래 동산을 중림, 맨 아래 동산을
하림이라고 부르는데 합쳐 삼림이라 합니다."
농부의 대답이었다.
윤필상은 쭈뼛하여 숨을 길게 내쉬었다.
삼림 아래서 죽으리라던 점쟁이의 말이 새삼스럽게 두려웠다.
'그럼 이곳에서 죽는단 말인가.....,'
윤필상은 속으로 뇌어 보았다.
이제 내일 모레면 팔순이다.
여한이 별로 없었다.
나라를 위해 일도 하였거니와 인생으로서 호화스러운 한평생을 보냈다.
그러나 나라의 공신으로서 귀양살이를 하다가 죽을 수 없다는 생각이 늙은 윤필상의 가슴을 설레게 했다.
며칠 후에 김양필이 당도했다.
"어명이오."
사약을 내밀었다.
윤필상은 약사발을 말없이 들어마시고 세상을 떠나 버렸다.
이미 인동(仁同)으로 귀양을 갔던 이극균에게도 사약이 내려졌고, 이세좌는 귀양처인 거제(巨濟)로 내려가던
도중에 어명을 알리자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고, 폐비에게 약사발을 올렸던 김순손은 처참을 당하였다.
상감 연산은 이번에는 직산(稷山)으로 귀양을 내려간 원임영의정 성준을 잡아 올려 군기사(軍器寺) 앞에서
목을 졸라 죽였다.
가뜩이나 성준을 미워하던 연산이 시정기를 뒤적거리다가 성준이 폐비 때 승지로 언문 전교를 받들고 나아가
폐비의 마음이 돌기를 풍간(諷諫)하였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상감 연산이 성준을 미워하기 시작한 것은 벌써 오래 전 일이다.
무오사화도 지난 어느 날, 상감 연산이 후원에다 성대한 연회를 베풀었을 때 성준이 영상으로 입참했다.
술을 하사하여 아름다운 기생들이 재상들에게 연방 술을 따르고 은은한 주악이 흘러나왔다.
"경들에게 술을 하사하니 사양 말고 오늘은 마음껏 즐기오."
상감 연산은 벌써 얼굴에 홍조를 띠고 대신들에게 친히 술을 부어 주기도 했다.
"성은이 망극하와....,"
재상들마다 굽실거리면서 술잔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상감 연산은 잠시 이맛살을 찡그렸다.
워낙 호탕한 성미를 타고난 상감이다.
군신이 동락하는 자리에서 무엄한 짓만 없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자질구레해서야 어찌 나라의 큰일을 제대로 소신껏 할 수 있겠느냐는 아쉬움이 들었던 것이다.
"때로는 군신이 동락하는 것도 좋지 아니하오."
상감 연산은 너그럽게 웃으면서 말했다.
주연은 점점 무르익어 갔다.
남빛, 붉은빛, 흰빛으로 단장한 기생들이 얼씬거리며 토실한 흰 손으로 술을 따랐다.
주악 소리가 이따금 높은 듯하다가도 가늘게 흐르는 사이마다 벌써 술에 취한 얘깃소리가 높았다.
상감 연산의 웃음 소리도 사뭇 들려 왔다.
상감은 기생 연년홍(年年紅)을 옆에 놓고 연방 희롱하고 있었다.
"상감마마, 늙은 재상들도 기생을 좋아하옵니다."
연년홍은 교태를 부리며 말했다.
"그럴 것이 아니냐."
"상감마마, 우리도 늙기 전에 청춘을 즐겨야 하시와요."
"어이구, 착한 소리 하는구나."
술에 취한 상감 연산은 한 손으로 연년홍의 허리를 휘감고 또 한 손으로는 몸을 더듬고 있었다.
상감만이 아니었다.
늙은 재상들마저 기생을 포옹하고 있었다.
주연이 무르익을수록 더욱 난잡한 광경이 벌어졌다.
게다가 주악 소리는 사뭇 드높게 흘러 흥을 돋우었다.
술에 취한데다 워낙 젊은 상감은 이제 연년홍을 번쩍 들어 가로 껴안고 연방 입을 맞추고 있었다.
그러다가도 무릎 위에다 올려놓고 익선관이 찌그러지는 줄도 모르고 소곤거리며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 때, 오직 영상 성준만은 별로 술을 들지 않고 물끄러미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전하, 늙은 신하가 죽지 않은 이상 예에 벗어나서는 아니됩니다."
성준은 보다 못하여 상감의 엎에 읍하여 말했다.
상감 연산은 깜짝 놀라 몽롱한 시선으로 성준을 바라보았다.
"영상, 그게 무슨 말이오."
성준은 더 말을 하지 않았으나 상감 연산은 무안하여 얼굴을 들지 못했다.
상감은 이 일을 두고두고 잊지 않다가 기어이 그를 교살하고야 말았던 것이다.
도성 번화한 거리 모퉁이마다 밤을 자고 나면 피가 마르기도 하고 혹은 피가 뚝뚝 듣는 죄인들의 목이
높다랗게 매달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가슴을 서늘하게 했다.
이렇게 귀양처에서 죽여 목을 잘라 오거나 이미 죽은 사람의 묘를 파헤쳐 목을 잘라 도성에다 효시를 하는
한편, 그 처첩과 자제들에게까지 손을 뻗었다.
이파의 아들은 대역죄로 몰아 교살하고, 윤필상, 성준의 아들은 귀양을 보내고,처첩과 딸은 관노로 삼고,
그 사위들도 변방으로 내쫓았다.
그리고 동성(同姓)의 삼종(三從)까지 곤장을 쳐서 귀양 보내는 동시에 가산을 모조리 적몰해 버렸다.
그리고 상감 연산은 실록의 고계(考啓)에서 누락된 것을 재차 상세히 적어 바치기를 명령했다.
여기에 또 드러났으니 기해(己亥)년 유월 초닷샛날 회릉을 폐할 당시에 언문 전교를 번역한 사람과 사관(史官),
주서(注書), 승지를 기록하여 바쳤다.
승지에 홍귀달, 김승경, 이경동, 김계창, 채수, 변수, 주서에는 신경, 홍형, 사관에 최진, 이세영, 언문으로
변역한'사람은 채수, 이창신, 정성근이다.
또 사약을 내릴 때 승지는 노공필, 이세좌, 성준, 김세적, 강자평, 권건이요, 사관은 신복의, 홍계원이고,
언문 전교를 읽은 내관은 안중경이요, 펴서 보인 사람은 강자평이었다.
"으흐흐, 이런 쳐죽일 놈들! 이러고도 신하라고 국록을 먹고 있었으니 과연 뻔뻔스럽구나....,"
상감 연산은 용포자락을 걷어올리면서 진노했다.
성준과 이세좌는 이미 극형에 처했다.
나머지 사람들은 모조리 잡아 하옥하고 연일 고문을 하여 사실을 밝혔다.
채수만은 폐비할 때 식량과 필목을 하사하여 폐비 윤씨를 보살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던 기록이 나타나
직책만 빼앗고 나머지 사람은 죄다 귀양을 보냈다.
이것이 다 갑자년 사월 중순께 일이었다.
상감 연산은 연일 눈이 핏빛이 되어 죄인 색출에 여념이 없었던 탓으로 몸과 마음이 다 지처서 며칠 동안
자리에 누워 있었다.
상감 연산이 여러 날 만에 수척하여 별전에 나와 혼자 앉아 있을 때였다.
금부도사 이세좌의 아들 삼형제를 하옥하였음을 알렸다.
"끌어 내어라. 내가 한 마디 물어 볼 말이 있다."
상감 연산은 발끈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일렀다.
이윽하여 이세좌의 아들 삼형제는 나란히 뜰에 엎드렸다.
상감은 당신도 모르게 분기가 치밀었다.
당신이 내린 사약을 거부하고 스스로 목을 졸라 죽은 이세좌의 혈육이다.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아라."
상감의 어명이 떨어지자 삼형제는 천천히 머리를 들어 상감을 우러러보았다.
"너희들 애비가 죽을 죄를 지은 것을 알고 있느냐?"
"승지 이세좌의 장자 아뢰오. 한 임금의 충성스런 신하는 지엄한 분부를 거역 못하는 법이외다. 화근이 닥칠
줄 알면서도 복종한 것이 가군인 줄 아옵니다. 가군에게는 죄될 일이 추호도 없는 줄 아외이다."
"예끼, 무엄한 놈 같으니...., 모조리 끌어 내어 처참하여라."
상감 연산은 무안한 생각이 들어 얼떨결에 명령했다.
231에서 계속...
작가 : 박연희
첫댓글 사람백정짓했군
그러니까 임금을 했어도 군으로 후세에 남는 폭군이 되였지요
잘보고 갑니다.
연산군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연산군 잘보고 갑니다.고맙습니다.
연산군이 결국 폭군짓을 하는구먼 .....................
연산군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잘 읽엇습니다.
연산군.230.좋은 글 감사한 마음으로 즐감하고 나갑니다 수고하여 올려 주신 덕분에
편히 앉아서 잠시 즐기면서 머물다 갑니다 항상 건강 하시기를 기원드립니다
소중한 작품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연산군 잘 보고 갑니다.감사합니다.
연산군 서서히 반정이 일어날 조짐을 보이네요
즐감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