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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례
1. 문제 제기 3. 성지 개발의 의미 2. 한국 교회의 영성 1) 성지 순례의 역사 1) 순교 영성 2) 묘소 중심의 순교자 공경 2) 영적 순교 영성 3) 한국 순교자 공경의 발자취 3) 오늘의 영성 4) 한국 교회의 성지는? 4. 나주 무학당 성지 개발의 과제 |
1. 문제 제기
원래 내게 주어진 발표의 주제는 ‘순교 정신과 성지 개발의 의미’였다, 여기서 ‘순교 정신’만은 ‘순교 영성’으로 고쳤다. 순교 정신이라고 할 때, 보통 우리는 그 말을 ‘죽음을 각오한 용기’로 알아듣는다. 이것은 순교의 본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데서 비롯되었다.
순교는 원래 증언을 뜻한다. 증언을 하다 보니 죽게 된 것이지, 죽기 위하여 순교한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일찍이, 순교자가 되게 하는 것은, 죽음이 아니고 죽음에 이르게 한 이유라고 말했다. 그 이유가 바로 신앙의 증언이다. 아마 믿음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믿음의 증언보다는, 죽음 앞에서의 초인적인 용덕이 더 감격적이었을 것이고, 그래서 점차 순교를 죽음과 혼동하게 되고 마침내는 동일시하게 되었을 것이다.
순교 영성과 성지 개발의 의미를 동렬로 놓았기 때문에 양자의 관계를 말하라는 것 같다. 주최자 측으로부터 직접 설명을 듣지 못하였으므로 정확한 의도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저 나름대로의 판단은 이렇다. 순교 영성은 우리가 본받아야 할 것이고, 성지 개발은 순교자 공경을 촉진하기 위한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그 관계를 양자 사이에서 논하기보다는, 보다 포괄적인 주제 즉, ‘순교자 공경과 순교자 본받음’을 전제로 하고, 논하는 것이 더 순리일 것이다. 여러분도 이 큰 주제를 염두에 두고 이 강의를 들어주기를 바란다.
2. 한국 교회의 영성
영성이란 무엇인가? 영성이 도덕이나 종교에 대한 인식 방법과, 그것에 따른 행동 양식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그리스도교 영성은 그리스도교적인 인식 방식이오, 그에 따른 생활 양식을 말한다. 이러한 영성은 그리스도의 계시 진리, 즉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신앙적인 수용에서 시작하고, 기도와 행동에서 표현되고 발전한다. 그리스도교적 영성은 그 대상과 목적이 하느님이기 때문에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만 성립될 수 있다. 이 영성은 기도, 관상, 활동 등, 분야에 따라 다양하게 표현되는데, 순교와 관련하여 나타난 것을 순교 영성이라고 한다.
1) 순교 영성 : 순교 영성은, 순교를 가능하게 한 마음씨, 더 자세히 말하면 순교자들이 믿음으로 받아들인 영원한 구원을 획득하고 동시에 영원한 생명의 근원인 하느님을 위하여 모든 것을 희생하고자 하는, 최고의 가치관에 대한 절대적인 정신 자세이자 그 실천을 말한다.
순교 영성은, 이미 세계 교회사 초기에 순교자들의 탄생과 더불어 나타나기 시작했고, 계속되는 박해에서의 새로운 많은 순교자들과, 순교를 동경하는 남은 신자들에게 이어져 발전했다. 이와 같이 한국 교회도 예외는 아니어서, 이미 초창기에 박해와 더불어 순교자가 나옴에 따라, 최초의 영성으로 나타났고, 계속되는 박해와 함께 근 100년 간 지속되면서 한국 교회의 가장 오래고 가장 이상적인 영성으로 자리잡았다. 1801년에 전주에서 순교한 유명한 순교자 이순이 누갈다는, 순교 직전 언니들에게 보낸 고별 편지에서 이런 뜻깊은 말을 남겼다. “한번 생각했다 하면, 그것은 천주께로 향한 것이고, 한번 숨을 내쉬었다 하면, 그것은 하늘로 향한 것입니다.” 매우 간략하지만 이 말에 한국의 순교 영성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 이것이 한국적인 순교 영성이다.
2) 영적 순교 영성 : 이 영성은 유혈의 순교 영성을 대신하여 등장한 무혈의 순교 영성, 이른바 영적 순교 영성이다. 대표적인 것으로 선종(善終)의 영성과 사주구령(事主救靈)의 영성을 들 수 있다.
선종의 영성은 순교 영성과 거의 동시에, 특히 박해가 뜸해지고 어느 정도 평온을 되찾으면서, 순교를 대신할 수 있는 영성으로 등장하게 된, 종말론적인 경향의 영성이다. 신자들은 선종(善生福終의 줄인 말)을 얻기 위하여 고통을 기꺼이 받아들일 뿐 아니라, 고신극기로 선종을 준비하며 나날을 보냈다. 이 영성은 특히 천주가사, 그 중에서도 사말(四末 : 죽음, 심판, 천당, 지옥)을 묵상하게 하는 천주가사가 신자들 사이에서 널리 애송(愛誦)됨으로써 급속히 대중화되고 생활화되었다.
사주구령의 영성은 선종의 영성에 이어, 아니 거의 동시에 나타났다. 이 영성은 순교자들의 증언의 두 핵심을, 1864년의 성교요리문답에서 시작하여, 개정된 천주교 요리문답에서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개혁의 일환으로 새로운 교리서가 등장하기까지, 그 첫 조목에서 “사람이 무엇을 위하여 세상에 낳느뇨? 천주를 알아 공경하고 자기 영혼을 구하기 위하여 세상에 낳느니라”(事主救靈)고 요약하여 신자들에게 생활화시킴으로써 근 1세기 동안 한국 교회에 군림(군君臨)하였다.
3) 오늘의 영성 : 이상 세 가지 영성은 한국 교회의 과거의 대표적인 영성이다, 그러나 이 영성들, 특히 순교 영성은 현대에 들어와서, 현세보다는 내세에, 사회의 구원보다는 개인의 구원에 치중하였다는 부정적인 비판에 부딪쳤다. 그래서 사회의 구원을 외친 이른바 사회 참여 같은 것이 한때 성행하기도 했다.
현대의 사조인 무신론, 물질주의, 현세주의, 세속주의 등도 순교 영성에 불리하게 작용했다. 물질 만능주의는 유신론자들을 일상 생활에서 무신론자로 만들어, 신앙 따로, 생활 따로 이중 생활을 하게 했다. 세속주의와 현세주의는 신 신앙과 내세 신앙에 위기를 초래했고, 과학과 기술의 발전은 이 위기를 더욱 심화시켰다.
이 위기는 물론 순교자에 대한 신심의 열기도 냉각시켰다. 순교 신심은, 103위 복자의 시성으로 그 절정을 이루어, 한국 교회를 한때 영광 의식에 도취하게 했었다. 그러나 그 영광 의식도 잠시, 마치 시성으로 순교자 현양이 끝나고 완결되기나 한 것처럼, 순교자 공경의 열기는 급격히 식어버렸다. 이제 순교 영성이 한국에 살아 남아 있다고 볼 수 있을까? 아니면 다른 영성이 그것을 대신하고 있는 것일까? 일로 ‘외화내빈’으로 매진하고 있는 오늘의 한국 교회에 도대체 영성이라는 것을 기대할 수 있을까?
그래도 오늘의 신앙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서는 순교 영성을 부활시키는 길밖에 다른 길이 없다고 생각한다. 하느님과 내세는 종교의 근본 신조이자 우리 순교자들의 영성의 근본이었다. 이제 한국 교회, 즉 우리는, 오늘의 신앙 위기에 정말로 위기 의식을 느끼고 또 위기를 오히려 기회로 삼고, 우리의 인습적인 신앙을, 속화된 현대 세계에 대응하고자 신앙을 쇄신하고 적응시킬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 이것이 오늘의 문제이다.
3. 성지 개발의 의미
이 문제 역시 순교 영성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순교자 공경과 본받음’이란 보다 높은 관점에서 고찰되어야 할 것이다. 성지 개발은, 순례자들로 하여금 성스러운 분위기에서 순교자들에게 경건하게 기도를 바치고, 필요한 것을 청하고, 순교자의 영성을 본받아 자신의 신앙을 쇄신할 수 있도록, 그들에게 조용한 기도의 장소와 필요한 시설을 제공하려는 데에 그 의미와 목적이 있다. 오늘날 성지 순례가 관광처럼 점점 세속화되어 가고 있는 실정을 감안한다면, 성지 개발은 일층 중요한 과제에 직면하고 있다. 성지 개발은 순례와 더불어 시작되었고, 그래서 순례와는 떼어놓을 수 없는 의존 관계에 있다.
1) 성지 순례의 역사 : 그리스도인들은 일찍부터, 특히 313년 콘스탄틴 대제에 의하여 교회에 자유가 주어진 이래, 예수 님이 나시고, 사시고,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며 기적을 행하시고, 그 때문에 수난 당하시고, 그러나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한 마디로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의 계시가 특별히 나타난 팔레스티나 지방을 찾아 순례하였다. 이 무렵부터 팔레스티나는 성지(聖地, Holy land)로 불리게 되었다. 이어 곧 팔레스티나 안의 특정 장소, 예컨대 예수의 탄생지 베들레헴의 동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골고다, 그의 시신이 묻혔던 무덤(성묘) 등이 순례지로 추가되었다. 이러한 장소들은 팔레스티나와 같이 ‘성지’로 불리지는 않았고, 그러나 성지에 준하여 ‘거룩한 장소’(聖所, Holy places)로 불렸다. 이와 같이 성소들은 ‘거룩함’에서는 팔레스티나와 차이가 없었고, 다만 지역의 넓이에서만 좀 차이가 있었다. 즉 성지는 ‘지방’이나 ’나라’(land)로, 넓은 지역을 가리켰고, 성소는 ‘장소’(place)로, 그 안의 한 지구, 한정된 지점만을 가리켰다.
성소는 나아가 예수 님의 어머니 마리아에게도 적용되어, 예컨대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한 곳, 아인 카림이 ‘성소’로서 순례지가 되었고, 훨씬 후대에 와서는 성모의 발현 지 예컨대 루르드 같은 곳도 ‘성소’로 인정되어 유명한 순례지가 되었다.
예수와 마리아와 관련된 성지나 성소는 말하자면 장소 중심이었다. 그 이유는, 예수와 마리아의 유해가 없었고, 유물마저도 하나도 남아있지 않은 때문이었다. 만약 그들의 옷 한가지만이라도 남아 있었고, 그것을 간직한 곳이 있었다면, 그 곳은 틀림없이 1등 성지가 되었을 것이다.
2) 묘소 중심의 순교자 공경 : 이어 성소의 개념은 사도와 순교자에게로 확대 적용되었다. 예컨대 에페소의 요한 사도의 묘소, 로마의 성 베드로와 바오로의 묘소가 새로운 성소로 등장하였다. 순교자 공경에서 묘소의 등장은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예수 마리아 공경에서는 장소가 중심이었던 것이, 이제 사람(시신 또는 유해) 중심의 공경으로 이전을 뜻한다. 이때부터 순교자 공경은 묘소 중심으로 발전하게 된다.
순교자에 대한 공식적인 공경은 2세기 말엽, 소아세아의 스미르나 교회에서 처음으로 시작되었다. 요한 사도의 제자이고 또 그에 의하여 이 곳의 주교로 임명된 것으로 전해지는 폴리카르포 주교는 80여세 때인 155-156년에 스미르나의 원형 극장에서 순교하였다. 순교 직후 스미르나 교회에서는 그의 시신을 거두어 스미르나 도시 변두리에 매장했다, 그리고 해마다 그의 순교 일을 맞으면, 교구의 전공동체는 그들의 주교와 함께 그 묘소 앞에 모여 공식적인 전례 의식 즉 미사를 봉헌하며 순교자를 기렸다. 공식 행사는 1년에 한 번뿐이었으므로 이로써 만족하지 못한 신자들은 수시로 그 묘소에 순례하며 사적으로 공경하였다. 순교자의 묘소가 있는 지역 교회에서는 이 예를 따라 그들의 순교자를 공경하게 되었고, 그 결과 4, 5세기에는 순교 일을 축일로 정하고 그들을 공경하는 것이 전교회로 확대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렇게 순교자의 묘소와 순교 일은 순교자 공경에서 없어서는 안될 두 요소가 되었고, 순교자 묘소는 더욱 그러하였다. 묘소가 없으면 순교자 공경이 있을 수 없었고, 순교자의 묘소가 없는 교구에서는 이웃 교구에서 순교자 무덤의 흙의 일부라도 얻어와야만 순교자 공경이 가능하였다. 그런데 순교자들의 묘는 흔히 알려져 있지 않았고, 알려져 있었다 하더라도 세월이 흐르면서 잊혀지게 되었다. 잊혀진 무덤들은 역사가들의 끈질긴 연구로, 다시 발견되거나 확인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고, 그렇게 되면 비로소 순교자의 공경이 시작될 수 있었다.
3) 한국 순교자 공경의 발자취 : 한국 교회의 순교자 공경은 순교자의 시신을 거두어 매장하는 일과 시신에서 일어나는 기적의 체험에서 시작되고 발전해 나아갔다. 신자들은 이 일에 목숨을 걸고 종사하였다. 그들의 헌신 적인 덕분에 한국 교회는 오늘날 그런 대로 꽤 많은 순교자들의 무덤과, 유해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순교자들이 처형된 형지, 즉 순교 지는 박해 시대의 교우들에게는 - 물론 박해란 어쩔 수 없는 조건과 상황이 그렇게 만들었을 것이다 - 애초부터 큰 관심의 대상은 되지 못했다. 순교 지에 대한 관심과 개발은 해방 이후에야 겨우 시작되었다. 1946년에 발족한 한국 천주교 순교자현양회는 순교자 현양의 일환으로 그 해에 순교지 새남터를 매입하고, 그 곳에 현양 탑을 세웠다 그것이 성지 개발의 효시였다. 그 후 성지 개발의 붐이 일어났다. 그 결과 전국 각지에 성지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너무 난발이 아니냐는 원성이 높아졌다.
4) 한국교회의 성지는? : 이른바 한국 교회의 성지들이 팔레스티나와 같은 뜻에서 성지로 불릴 수는 없다. 그러나 순교자와 관련하여 그들의 묘소만은 성소로는 불릴 수 있다. 순교 지로 말하면, 순교자의 묘소가 없는 순교 지에까지 성소의 개념을 확대 적용할 수 있을 지는, 본인이 아는 한에서는 세계 교회사에서도 그런 예를 찾아볼 수 없었으므로, 매우 의심스럽다. 성지로 불려오는 그 밖의 장소, 예컨대 순교자의 탄생지나 거주지, 신학교 터 같은 것은 교회 사적지로 불릴 수는 있되, 성지는 물론이고 성소로도 불릴만한 곳이 못된다고 생각한다.
성소라는 적절한 호칭이 있는 데도 왜 그것이 한국에서 정착하지 못하고 있을까? 아마 그 말의 생소함 때문일 것이다. 그러면 성지(聖址)라는 호칭은 어떨까? 이 호칭은 이미 사용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얼마 안되어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한글로만 적으면 ‘聖地’와 구별이 안되기 때문에 사실상 무의미해졌을 것이다. 어찌 되었던, 이른바 한국의 성지들이 성지의 호칭을 계속 고수한다면, 문제는 계속 그대로 남을 것이다.
4. 나주 무학당 성지(聖址) 개발의 과제
순교자는 교회의 영광인 동시에 교회에 필요한 존재이다. 그 때문에 교회에는 언제나 순교자가 충분히 주어졌다. 그런데 광주 지역 교회는 순교자의 필요를 지금까지 그렇게 절실히 느끼지 못하였든지 순교자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들을 찾을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이제 뒤늦게나마 순교자들의 필요함을 깨닫고 그들을 찾고 또 그 곳을 순례 장소로 만들려는 성역화 작업에 착수했다. 이것부터 우선 축하한다. 동시에 이 사업이 성공을 거둘 수 있도록, 하느님께 전구하여 주기를 이 곳의 순교자들에게 간절히 청한다. 성공하기까지는 아직 갈 길이 요원하고 게다가 거기에는 적지 않은 장애물들이 가로놓여 있다. 이것들이 앞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다. 그 중 몇 가지를 지적하고자 한다.
1) 무학당 순교지의 고증 문제 : 이미 현 나주 초등학교 자리로 밝혀졌다고 한다. 그것이 구전에 의한 고증이라면 문헌에 의한 고증으로도 뒷받침되어야 한다. 어쨌든 개발 전에 철저한 고증이 선행되어야 한다.
2) 순교자의 묘소를 찾는 일 :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순교자 묘소는 순교자 공경의 중심이다. 묘소가 없는 순교 지는 주인이 없는 빈 순교 지에 지나지 않는다. 순교자들의 무덤을 찾아내는 일부터 서둘러야 한다. 예컨대 이 곳에서 3명의 순교를 목격하고, 후일 그들의 순교를 증언한 서윤경 안드레아의 후손을 찾아내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일 것이다. 또 순교자들의 후손을 찾아내 족보를 얻게 된다면 거기서 무덤의 소재가 밝혀질 수도 있을 것이다.
3) 그들의 순교 일을 알아내는 일 : 이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거룩한 곳에서 거룩한 순교 일, 즉 거룩한 때에 맞추어 그들을 공경할 수 있게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금상첨화의 공경일 것이다.
4) 그들의 순교를 증명하는 일 : 이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 참수 순교하지 않고, 하나는 옥사, 둘은 매를 맞고 순교하였기 때문에 소관 관청에 그들에 처형 기록이 남아 있을 가능성이 매우 희박하기 때문이다.
5) 수집한 자료와 유물의 공개 : 수집한 자료와 유물은 반드시 기념관에 보관하고 전시하여 순례자들이 수시로 관람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6) 연구의 필요 : 자료와 유물들은 보관하는 데 그치지 않고, 기념관 안에 연구실을 마련하고, 거기서 전문가로 하여금 연구를 계속하게 해야 한다. 연구가 뒤따르지 않는 성지는 발전을 기약할 수 없음을 명심해야 한다.
한국 교회에서는 103위 시성에 이어 시성에서 빠진 순교자들의 제2차 시복 시성을 위한 조사 작업에 착수하였다. 이번에는 다행히 이 작업이 각 교구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특히 대구교구 같은 데서는 순교자 조사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주교 회의에서 이 조사 작업을 도맡아버렸다. 이 행위는 모처럼 각 교구에서 활성화하기 시작한 순교자에 관한 연구와 순교 신심에 찬물을 끼얹은 셈이 되었다.
끝으로 교구 중심으로 시작된 순교자 현양 사업이 무엇보다도 그간 위축된 순교자 신심을 활성화하는 데 크게 기여할 계기가 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2003. 7.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