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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가 짓고 자기가 거두다
화엄전에 같이 갈 수 있는지 전화해 주신 대선스님이 노포터미널까지 내려와서 30분을 기다려주셨다. 회장스님이 언제나 먼저 전화를 주셨는데 이번달에는 전화를 안주셔서 혼자 화엄전에 올라갔다가 내려오셨다고 했다.
큰스님 컨디션이 아주 좋아보이셨다고 했다.
회장스님과 함께 몇 번 재무스님인 대선스님의 차를 얻어타고 화엄전에 갔었다,
갈 때마다 자리가 파할 때쯤이면 대선스님이 먼저 인사하고 자리를 빠져나가곤 하셨다. 차에 시동도 걸어놓고 출발하기 좋게 자리를 움직여 놓기 위해서였다.
“운전기사 매너인데? 그럴 필요 없어요.”
하고 회장스님이 말씀하시곤 했다. 대선스님은 수긍하셨는데 오랜 버릇이라 안 고쳐진다고 하셨다. 스님은 사중에서 어른스님들을 모시기 위해서 운전을 시작하셨다고 했다. 세월이 많이 흘러서 ‘운전기사’ 소임은 마치고, 이제 기술이 남아서 언제든 어디든 떠나고 싶을 때 훌쩍 갈 수 있다고 하셨다. 이타가 자리가 되는 것, 운전기술 속에도 법문이 있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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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장스님은 법회 시간을 넉넉하게 앞두고 문수선원에 도착하셨다. 용학스님이 불국사 선거에 대해서 물으셨다. 요즘에 두분 대화는 패턴이 있었다. 이번 달까지 답은 ‘아직 공지가 안 떴습니다’이고 ‘아휴 빨리 공고가 나고 진행되어야 할텐데’ 하시면 ‘괜찮습니다. 하던대로 농사짓고 할 일 하면 되니까요.’ 그리고 나서 다음 주제로 넘어가는데 두 분이 항상 만날 때마다 대화하시니까 대화주제도 방대해지고 친근해진다고 느꼈다.
이번에는 회장스님이 발견하신 족보에서 지방 하급관리로 급제한 사실을 거창하게 족보에 올리신 조상이야기가 한창일 때 각명스님이 방에 들어오셨다.
두 스님이 일어서셨고, 세 분이 다 같이 맞절을 하셨다.
“용학스님 법문하시는데 저는 어떻게든 화엄법회에 빠지지 않고 공부하러 오려고 원을 세웠습니다.”
하시면서 오늘은 일이 있어서 수업 중간에 자리를 떠야 한다고 각명스님이 말씀하셨다.
“멀리서 오시는 것도 고맙습니다.”
하고 용학스님이 인사하셨다.
오해할까봐 일러주러 들어오셨다고, 모습만 봐도 늘 감사하다고 각명스님이 나가신 후에 용학스님이 말씀하셨다. 그러면서 여기 오신 분들은 “다 자기가 해놓은 법문 들으러 오는 거지.” 하고 용학스님이 말씀하셨다.
그 이야기는 법문에서 자세히 하셨는데, 큰스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용학스님도 법회 전에 썸네일같은 미리보기를 조금씩 들려주신다는 걸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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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이맘때쯤 큰스님께 호두를 선물하시는 거창에 사시는 무성스님이 선원에 도착하자마자 일부러 오셔서 올해는 사과 농사도 안되고 호두 나무에 호두도 안열렸다고 알려주셨다. 아쉬워서 이웃에 가서 떨어진 호두를 주워와서 씻고 다듬고 불 때는 아궁이 옆에 올려 두었는데 바구니째 사라졌다고 하셨다.
“내가 전생에 그런 짓을 했던 거지 뭐.”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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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오는 길에 유튜브를 보니 오후에 ‘그래도 괜찮아’ 마가스님과 ‘행복은 지금 여기에’ 경조스님과 ‘환경운동가’ 천도스님과 라마가수가 화엄전에 와서 ‘아름다워라 환희로워라 대방광불화엄경’ 노래를 다시 다 같이 부르셨다.
큰스님은 지난 일 년간 이 노래를 법회 전에 꾸준히 청중을 위해 불러주셨다.
라마가수와 함께 불러도 음정 박자 음색이 당당하셨다.
유튜브로 화엄경을 듣는 사람들의 숫자도 날로 늘고 있고, 염화실 TV는 구독자가 2천명이 넘었다.
이윽고 상강례
법회의 시작
大方廣佛華嚴經 卷第五十二
如來出現品 第三十七之三
三. 普賢菩薩의 說法
5. 如來出現의 境界
(1) 如來出現境界의 法
佛子야 菩薩摩訶薩이 應云何知如來應正等覺境界오 佛子야 菩薩摩訶薩이 以無障無礙智慧로 知一切世間境界가 是如來境界하며 知一切三世境界와 一切刹境界와 一切法境界와 一切衆生境界와 眞如無差別境界와 法界無障礙境界와 實際無邊際境界와 虛空無分量境界와 無境界境界가 是如來境界하나니라 佛子야 如一切世間境界無量하야 如來境界도 亦無量하며 如一切三世境界無量하야 如來境界도 亦無量하며 乃至如無境界境界無量하야 如來境界도 亦無量하며 如無境界境界가 一切處無有하야 如來境界도 亦如是一切處無有니라 佛子야 菩薩摩訶薩이 應知心境界가 是如來境界니 如心境界의 無量無邊하며 無縳無脫하야 如來境界도 亦無量無邊하며 無縳無脫이니 何以故오 以如是如是思惟分別로 如是如是無量顯現故니라 佛子야 如大龍王이 隨心降雨에 其雨가 不從內出이며 不從外出인달하야 如來境界도 亦復如是하야隨於如是思惟分別하사 則有如是無量顯일새 於十方中에 悉無來處니라 佛子야 如大海水가 皆從龍王心力所起인달하야 諸佛如來一切智海도 亦復如是하야 皆從如來往昔大願之所生起니라
“불자여, 보살마하살이 어떻게 여래 응공 정등각의 경계를 알아야 하는가. 불자여, 보살마하살은 막힘이 없고 걸림이 없는 지혜로 일체 세간의 경계가 여래의 경계임을 알아야 하느니라. 일체 세 세상 경계와, 일체 세계의 경계와, 일체 법의 경계와, 일체 중생의 경계와, 진여의 차별이 없는 경계와, 법계의 걸림이 없는 경계와, 실제의 그지없는 경계와, 허공의 분량이 없는 경계와, 경계 없는 경계가 여래의 경계임을 알아야 하느니라.
불자여, 일체 세간의 경계가 한량없는 것과 같이 여래의 경계도 또한 한량이 없으며, 일체 세 세상 경계가 한량없는 것과 같이 여래의 경계도 또한 한량이 없느니라. 내지 경계 없는 경계가 한량없는 것과 같이 여래의 경계도 또한 한량이 없으며, 경계 없는 경계가 일체 처소에 없는 것과 같이 여래의 경계도 또한 그와 같아서 일체 처소에 없느니라.
불자여, 보살마하살은 마땅히 마음의 경계가 여래의 경계임을 알며, 마음의 경계가 한량없고 그지없고 속박도 없고 해탈도 없는 것과 같이 여래의 경계도 또한 한량없고 그지없고 속박도 없고 해탈도 없음을 알아야 하느니라. 왜냐하면 이러이러하게 생각하고 분별함으로써 이러이러하게 한량없이 나타나는 연고이니라.
불자여, 마치 큰 용왕이 마음대로 비를 내리지마는 그 비는 안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고 밖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듯이 여래의 경계도 또한 그와 같아서 이렇게 생각하고 분별함을 따라서 이렇게 한량없이 시방에 나타나지마는 모두가 어디로부터 오는 데가 없느니라.
불자여, 마치 큰 바닷물이 다 용왕의 마음의 힘으로 생기듯이 모든 부처님 여래의 온갖 지혜의 바다도 또한 그와 같아서 다 여래의 과거의 큰 서원으로부터 생기는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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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갑다. 오늘은 대방광불화엄경 권 제52를 할 차례다.
여래출현품이 총 세 권인데 마지막 권이다.
지난 시간까지의 내용은 이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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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래가 출현한다, 부처님이 출현한다, 그러면 여래가 출현하는데 어떻게 출현하느냐?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으로 출현할 것이다. 여래의 삼업을 삼밀(三密)이라고 하고 삼륜(三輪)이라고 하기도 한다.
여래의 신업 열 가지는 어떠한 조건이 된다. 무수한 것들이 있겠지만 대략 잡아서 열 가지로 표현하였다.
부처님의 신업 열 가지, 구업 열 가지, 부처님의 말씀은 메아리와 같다든지 부처님의 몸은 허공과 같다든지, 부처님의 몸은 태양과 같이 모든 중생을 널리 비춘다든지, 여러 가지 비유로써 신업이 끝나고, 구업이 끝나고, 의업 부처님의 지혜, 마음은 어떤 것인가 해서, 지난 시간에 끝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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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285페이지(민족사刊 제3권) 여래의 경계에 대해서‘신구의 삼업을 통해서 본격적으로 여래가 출현하는데 그 경계는 어떻게 나타날 것인가?’하는 내용을 살펴볼 것이다. 지난 시간에 꼭지만 조금 열어놓았었다.
‘보살마하살이 어떻게 여래 응공 정등각의 경계를 알아야 하느냐? 부처님의 경계는 도대체 어떻게 되느냐?’ 하면서 ‘부처님의 막힘없는 무애지혜로써 모든 세간의 경계가 여래의 경계인 줄 알아야 한다’고 하였다.
‘세간의 경계가 여래의 경계인 줄 알아야 된다’ 흔히 이 대목을 야마천궁게찬품에서 잘 인용한다.
심불급중생시삼무차별(心佛及衆生是三無差別)이다, 세간의 경계가 여래의 경계다, 속가가 바로 출가다, 출세간법이 세간법이고 세간법이 출세간법이다, 하는 내용들이다.
다시 말하면 마음밖에 법이 없다. 그래서 심불급중생이 시삼무차별이다, 라고 하였다.
그리고 모든 삼세의 경계와 세계의 경계, 공간의 경계, 시간의 경계, 법의 경계 이치의 경계와, 모든 중생의 경계와, 진여의 차별 없는 경계와, 법계에 걸림 없는 경계와, 실제의 그지없는 경계를 말하였다.
실제라고 하는 것은 상구보리 하화중생을 떠나 있는 이상(離相) 무상(無相)의 경지를 실제회향이라고 한다.
삼처회향(三處廻向)이라고 할 때 보리회향(菩提廻向) 중생회향(衆生廻向) 실제회향(實際廻向)이라고 하는데 그 실제를 다른 말로는 법계라고도 한다.
법계에 걸림 없는 경계와 실제의 그지없는 경계와 허공의 한량없는 무량무변한 경계가 나왔다.
지난 시간에 우리가 거기까지 열어두었다.
꿈 없는 꿈, 경계 없는 경계가 바로 여래의 경계임을 알아야 한다.
흔히 우리는 일반적으로 진공이다 묘유다 이렇게 표현한다.
있다는 입장에서는 묘유(妙有)라고 하고, 없다는 입장에서는 진공(眞空)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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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래출현품 전체적으로, 신업 첫째 단락이 끝나고, 어업 부처님의 말씀의 업이 끝났는데 어업은 ‘논리와 진리에 입각해서 설했다’ 이런 말씀이다. 그리고 부처님의 의업 지혜 자비에 대해서 끝났다.
오늘은 여래가 출현하는 경계에 대해서 밝히는 대목, 285페이지(민족사刊 제3권) 본문의 여섯 번째 줄부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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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佛子)야 : 불자야
여일체세간경계무량(如一切世間境界無量)하야 : 일체 모든 세간의 경계가 한량이 없듯이
여래경계(如來境界)도 : 여래의 경계도
역무량(亦無量)하며 : 또한 한량이 없다. 이것은 우리가 화엄경을 처음 배울 때, 세주묘엄품에서부터 화엄사상에서 쭉 끌고 나오는 대목이다.
기세간(器世間)과 중생세간(衆生世間)과 지정각세간(智正覺世間) 이 삼세간이 원융하다. 삼세간원융이 충분히 이해 된다면 여래출현품을 공부하는 데 조금 수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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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일체삼세경계무량(如一切三世境界無量)하야 : 삼세의 모든 과거 현재 미래의 경계가 한량이 없듯이
여래경계(如來境界)도 : 부처님의 경계도
역무량(亦無量)하며 : 한량이 없다.
부처님이 얼마만큼 계시느냐? 중생의 숫자만큼 계신다.
그래서 십주품을 설할 때 33천 도리천에서는 일천불찰 미진수 세계에서 법혜보살이 일천법혜불로부터 가피를 받았다. 수행이 조금 증진되니까 십행법문을 할 때는 공덕림보살이 일만불찰미진수 세계의 공덕림불에게 가피를 받았다. 그리고 또 수행하다가 십회향까지 올라가니까 더욱더 증폭되어 도솔천에서는 금강당보살이 10만불찰 미진수의 금강당부처님에게 가피를 받는다.
십지품을 설한 타화자재천은 어떤가?
십지품에서는 10억 불찰미진수 금강장보살이 10억 불찰미진수의 동명동호(同名同號) 같은 이름을 가진 금강장부처님 앞에 가서 낱낱이 가피를 받았다.
그렇듯이 여기에도 모든 삼세의 경계가 한량이 없다고 하였다. 앞에서는 세간의 경계도 한량이 없고 여래의 경계도 한량이 없다고 하였다.
강물에는 달이 없잖은가. 강물에는 달이 없지만, 강물이 생겨지는 족족 달은 안 뜨는 강이 없이 가서 뜬다.
그러니까 중생이 있으면 없던 부처님도 생겨져야 된다.
나무가 한 그루 돋아나면 없던 이파리가 계속 돋아난다. 가지만큼 이파리가 생겨나듯이.
내지여무경계경계무량(乃至如無境界境界無量)하야 : 내지는 경계 없는 경계가 한량이 없듯이
여래경계(如來境界)도 : 부처님의 경계도
역무량(亦無量)하며 : 한량이 없다. 이것을 우리는 허공계라고 한다. 생겨나서 뾰족이 올라오면 법계라고 하고 푹 꺼져버리면 완전히 무명무상절일체(無名無相絶一切)로 꺼졌을 때가 바로 진법계(眞法界) 허공계(虛空界)라고 하지않는가. 진법계, 허공계.
여무경계경계(如無境界境界)가 : 마치 경계 없는 경계가
일체처무유(一切處無有)하야 : 일체처에 무유하야 온갖 곳에 있는 것이 아니다. 무유하야, 없어서
여래경계(如來境界)도 : 부처님의 경계도
역여시일체처무유(亦如是一切處無有)니라 : 그 어디에도 없다. 동서남북 그 어디에도 없고, 중심에도 없고, 가에도 없고 무앙무변이다. 중앙에도 없고 변에도 없다.
중생의 숫자만큼 여래가 있을 뿐이다.
조금 전에 말씀드렸다시피 달은 없지만 강물만큼 달도 있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강물에는 실제 달이 없다.
중생세간(衆生世間) 지정각세간(智正覺世間) 기세간(器世間)의 원융을 여기 여래출현으로써 잘 나타낸다.
여래는 혼자서 출현하시는 법이 없고, 중생 때문에 출현하신다. 이것을 우리는 진공의 묘유라고 한다.
묘유(妙有), 있으려면 끝까지 다 있고, 진공(眞空), 없으려면 하나도 없다, 이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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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佛子)야 : 불자야, 똑같은 이야기가 거의 프랙탈구조처럼 계속 반복된다. 얼마나 이해하기 힘들면 계속 반복을 할까? 불자야
보살마하살( 菩薩摩訶薩)이 : 보살마하살은
응지심경계(應知心境界)가 : 마땅히 마음의 경계가
시여래경계(是如來境界)니 : 여래의 경계이니, 뒤쪽에 가면 ‘마음이라고 하는 것, 심념(心念)이라고 하는 것은, 심성(心性)하고 불성(佛性)하고는 다르다’ 라고 해놓았다.
그래서 깨달은 사람의 입장에서는 견성성불을 하면 마음이 얼음 녹듯이 풀려서 불성에 가까워질 수 있지만, 깨닫지 못한 사람은 심념에 집착해서 풀려있던 생각이 얼음처럼 꽁꽁 얼어붙어서 사람이 편벽되고 집착이 강하다. ‘아교성이 있다’ 이렇게 이야기하지 않는가.
여기서는 여래성과 심념성 두 개를 다 풀어놓았다.
여심경계(如心境界)의 : 마땅히 마음의 경계가 여래의 경계인 줄을 알지니.
그래서 오늘 여러분들에게 참고하라고 유인물을 두 장 나눠드렸다.
마음의 경계가 무량무변하야 의상스님은 이것을 불수자성수연성(不守自性隨緣成)이라고 해놓았다.
무량무변(無量無邊)하며 : 무량무변하여
무박무탈(無縳無脫)하야 : 무박무탈이라. 속박도 없고 해탈도 없다. 속박도 없고 해탈도 없다는 말을 의상스님은 ‘파식망상필부득(叵息妄想必不得)이다’ 이렇게 말씀했다.
육조스님께서는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이다. 하처(何處)에 야진애(惹塵挨)냐. 보리본무수(菩提本無樹)요 명경역비대(明鏡亦非臺)다.’ 본래 아무것도 없다고 하였다.
가득하다는 말은 무량무변, 묘유이고, 번뇌가 하나도 없다는 말은 무박무탈이다. 속박도 없고 해탈도 없는 것과 같이
여래경계(如來境界)도 : 여래경계도
역무량무변(亦無量無邊)하며 : 무량무변하며
무박무탈(無縳無脫)이니 : 무박무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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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고(何以故)오 : 왜냐하면
이여시여시사유분별(以如是如是思惟分別)로 : 이러이러하게, 이와같이 생각하고 사유분별로, 분별이라고 하는 것은 여기서는 아주 지혜롭게 고찰하는 것이다.
여시여시무량현현고(如是如是無量顯現故)니라 : 이러이러하게 한량없이 나타나는 연고이니라.
*
그러면 잠시 나눠드린 유인물 3페이지 기신론 내용을 한 번 보고 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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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인물> p.3
起信論에 云 唯心所作
是故로 三界虗偽하야 唯心所作이니 離心하면 即無六塵境界하리라
此義가 云何오
以一切法은 皆從心起하야 妄念而生이니
一切分別은 即分別自心이라
心不見心이니 無相可得이니라
當知하라 世間一切境界가 皆依眾生無明妄心하야 而得住持니
是故로 一切法이 如鏡中像하야 無體可得이라
唯心虗妄이니 以心生則種種法이 生하고 心滅則種種法이 滅故니라
『기신론(起信論)』에서 이르기를
이러한 까닭으로 삼계는 허위이며, 오직 마음으로 지은 바이니, 마음을 여의면 곧 육진경계도 없어진다.
이 뜻이 어떠한가?
일체 법이 모두 마음으로부터 일어나서 망념으로 생겨난 까닭이니, 일체의 분별은 곧 스스로의 마음을 분별한 것이며 마음은 마음을 볼 수 없기에 모양을 가히 얻을 수 없다.
마땅히 알지니 세간의 일체 경계는 모두 중생의 무명의 허망심에 의지하여 머무름을 얻는다.
이러한 까닭으로 일체 법이 마치 거울 속에 모습과 같아서 본체를 가히 얻을 수 없다.
오직 마음이며 허망한 것이니,
마음이 생겨나면 갖가지 법이 생겨나고, 마음이 없어지면 갖가지 법도 없어지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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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신론(起信論)에 : 기신론에
운(云)
유심소작(唯心所作) : 심념(心念)이 미끄러져서 유전 연기로 우리 중생이 생각이라 하고 마음이라고 하면서 흔히 살아가는 심념 사유를 어떻게 풀어나가느냐?
*
시고(是故)로 : 이러한 까닭으로
삼계허위(三界虗偽)하야 : 삼계는 허위이다. 욕계 색계 무색계가 모든 세계 삼계의 일체제법이 헛것이다.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이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이다.
유심소작(唯心所作)이니 : 유심소작이라. 오직 마음으로써 지은 바인데, 일체가 유심조이다. 화엄경과 기신론이 똑같다.
이심(離心)하면 : 이심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지난 시간에 뭐라고 하였는가?
이망연야(離妄緣耶) 불이망연야(不離妄緣耶) 불이망연즉(不離妄緣則) 차청산승(且聽山僧) 말후일게(末後一偈)
사대각리여몽중(四大各離如夢中) 육진심식본래공(六塵心識本來空)이 바로 이심(離心)이다.
그것을 무색성향미촉법이요 무안이비설신의다,라고 한다.
조견하사 오온이 개공한 것을 이심(離心)이라고 하고 무심(無心)이라고 한다.
오직 마음으로 조작한 바이니 마음을 떠나버리면, 심념을 떠나버리면, 망상분별을 떠나버리면,
즉무육진경계(即無六塵境界)하리라 : 무육진경계하리라.
반야심경의 무안이비설신의가 될 것이다.
우리가 여기에 못 들어가니까 이 글이 어렵고 힘들지만 여기에 기대면, 이렇게 한 달에 한 번씩 우리가 공부하는 것도, 이런 시간들이 굉장히 소중하게 여겨진다.
차의(此義)가 : 이 뜻이
운하(云何)오 : 어떠하냐?
이일체법(以一切法)은 : 일체법은
개종심기(皆從心起)하야 : 모두 다 마음으로부터 일어나서
망념이생(妄念而生)이니 : 망상분별, 망념, 허망한 생각으로 생겨나는 것이다. 일체법은 그렇다.
우리가 초발심시변성정각이라 한다.
초발심시변정각이라고 하는 대목에서 ‘지일체법(知一切法)이 즉심자성(卽心自性)이라’는 게송이 나온다.
‘일체법이 곧 마음의 자성으로 되어 있다’ 이 말은 ‘마음의 자성이 본래 없다’ 는 말이다.
성취혜신(成就慧身)할 때, 우리가 견성성불 할 때는 불유타오(不由他悟)라, 남에게 빌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내 마음을 깨닫는 것뿐이다.
그러면서 초발심시에 즉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하는 대목이 이 대목이다.
일체법은 모두 마음으로부터 일어났다. 생멸법은 전부 마음으로부터 일어나서 허망한 집착으로부터 생겨지는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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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체분별(一切分別)은 : 일체분별은
즉분별자심(即分別自心)이라 : 즉분별자심이다.
일체분별은 바깥에 무슨 경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자심을 분별했을 뿐이다. 그래서
심불견심(心不見心)이니 : 심은 불견심이다.
눈이 눈을 못 보고 칼이 칼을 썰 수 없듯이 마음은 마음을 절대 볼 수가 없다.
그러니까 혹시 ‘내가 내 마음을 보고, 남의 마음을 봤다’고 하는 것은 전부 착각이다.
심(心)은 불견심(不見心)이다.
기신론의 주제는 이것이 아닐까?
‘심(心)은 불견심(不見心)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는 금강경에서 이렇게 해놓았다.
‘약이색견아(若以色見我) 이음성구아(以音聲求我) 시인행사도(是人行邪道) 불능견여래(不能見如來)라. 범소유상(凡所有相)이 개시허망(皆是虛妄)이라, 약견제상비상(若見諸相非相)해버리면 즉견여래(卽見如來)할 것이다’ ‘무상을 봐야 본다 할 것이다’ 이 말이다.
그것이 바로 심불견심이니 봤다하면 착각이다. 여기서는 모양을 가지고
무상가득(無相可得)이니라 : 무상가득이다, 라고 해놓았고, 그 밑에 줄 그어 놓은 것을 보면 무체가득(無體可得)이라고 해놓았다. 기신론 본문에.
본체도 볼 수 없고 바깥에 본체에서 뻗어주는 모양도 볼 수가 없다.
*
당지(當知)하라 : 마땅히 알아라
세간일체경계(世間一切境界)가 : 세간의 일체 경계가
개의중생무명망념(皆依眾生無明妄念)하야 : 모두 다 의지한다. 중생의 무명으로부터 흔들려서 업상이 일어나서 허망한 망심분별이 일어나니 그것을 의지해서
이득주지(而得住持)니 : 이득주지라. 버티고 ‘나’라고 하는 아집을 가지고 바깥으로 탐진치를 일으키고 교만을 일으키고 의심을 일으키고 우리가 산다.
이득주지라. 주지가 딱 안쪽에 마음을 아만탱천해서 버티고 있지 않은가.
시고(是故)로 : 이러한 까닭으로
일체법(一切法)이 :일체법이
여경중상(如鏡中像)하야 : 전부 일체법이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이다. 유위법이 됐든 무위법이 됐든 전부 경중상이다. 거울 속의 모양이라서, 거울 속에 있는 사람을 보고 부르면 거울 속에서 대답을 하는가?
제가 한 번씩 말하곤 한다.
텔레비전 뉴스에서 빌딩에 불이 나는 것이 막 나오길래 뜨거운가 싶어서 손을 대보면 안 뜨겁더라.
나이아가라 폭포가 막 텔레비전 나오길래 물 좀 받아보려고 가니까 물이 한 방울도 안 튄다.
여경중상(如鏡中像)이다. 그런 걸 안다면 우리가 공부하다가 한로축괴(韓盧逐塊)라고 흙덩어리를 쫓아갈 것인지, 흙덩어리를 던진 사람을 물어버릴 것인지, 사자교인(獅子咬人)이 될 것인지, 분명하지 않는가?
무체가득(無體可得)이요 : 마지막에 그렇게 해놓았다.
바로 사람을 물어버리는 사자가 돼라, 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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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심허망(唯心虗妄)이니 : 오직 마음이 허망하다. 이래서 우리가 유식이다 유심이다 한다.
유식이라고 하는 것은 뭔가? 뇌피셜로 오직 생각으로만 있을 뿐이지 ‘현실은 없다’ 이 말 아닌가?
좋은 꿈이 됐든 나쁜 꿈이 됐든 꿈에서 천 발자국을 가든 만발자국을 가든 꿈을 깨고 나면 한 발자국도 안 간 것을 어떻게 하겠는가?
의상스님은 그 대목을 지지발처(至至發處)요, 행행본처(行行本處)라고 하였다.
말은 아는데 실질적으로 하려니까 어렵지만, 그런 구절들이 와닿으면서 인생에서 서로 시비하는 것들이 많이 사그라든다. 유심허망이니까 되게 말을 안들으면 ‘아이고 니 소임이다’ 해버린다. 그다음 대목은 그 유명한 원효스님께서 깨달은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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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심생즉종종법(以心生則種種法)이 : 마음, 심념, 생각이
생(生)하고 : 일어나니까 갖가지 법이 일어나고
심멸즉종종법(心滅則種種法)이 : 한 생각이 꺼져버리니까 심멸즉종종법
멸고(滅故)니라 : 멸고니라.
해골바가지도 둘이 아니더라. 갖가지 법이 다 꺼져버렸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하는 대목하고 기신론 대목하고 견주어서 금강경을 조금 양념 뿌려가면서 살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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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본문으로 돌아가겠다. 오늘 말씀을 조금 빨리 해서 드리는 것은 어쨌든지 진도를 빨리 나가보려는 것이다. 너무 진도가 늦어서 완행열차 같다.
불자(佛子)야 : 불자야
여대용왕(如大龍王)이 : 마치 큰 용왕이
수심강우(隨心降雨)에 : 수심강우에 마음을 따라서 마음껏 비를 내리지만
기우(其雨)가 : 그 비가
부종내출(不從內出)이며 : 안에서 나온 것도 아니고
부종외출(不從外出)인달하야 : 밖에서 나온 것도 아니다.
부종내출 부종외출이라.
이것은 우리가 능엄경의 칠처징심(七處徵心)에서 재내(在內) 재외(在外) 잠근(潛根) 장암(藏暗) 중간(中間) 수합(隨合) 무착(無着)이라고 따져봤지 않은가.
팔환변견(八還辨見)의 명(明), 암(暗), 통(通), 색(色), 연(緣), 공(空), 울(鬱), 청(晴) 그 여덟 가지와 칠처징심의 일곱 가지에서 아무리 따져봐도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없다.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안에도 없고 밖에도 없고 중간에도 없고 그 어디에도 없다.
이래서 육조스님은 ‘본래 없다’ 이렇게 한다.
그 비유들이 똑같이 나온다.
여래경계(如來境界)도 : 여래의 경계도
역부여시(亦復如是)하야 : 역부여시하야 안팎이 없다.
아와 아소의 어디도 없다는 말이다.
수어여시사유분별(隨於如是思惟分別)하사 : 이렇게 생각하고 여시사유 분별한다. 이와 같이 생각하고 분별을 따라서
즉유여시무량현(則有如是無量顯)일새 : 이와 같이 한량없이
어시방중(於十方中)에 : 시방에 나타나기는 하지만
실무래처(悉無來處)니라 : 여래자는 무소종래며 역무소거라 하는 것처럼 어디서부터 오는 데가 없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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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佛子)야 : 불자야
여대해수(如大海水)가 : 마치 바닷물이
개종용왕심력소기(皆從龍王心力所起)인달하야 : 모두 다 용왕의 심력으로부터, 용왕의 마음으로부터, 마음의 힘으로부터 생겨지듯이
제불여래일체지해(諸佛如來一切智海)도 : 모든 부처님의 일체 지혜의 바다도 그와 같아서, 부처님의 일체 지혜의 바다는 어디에서 생겨지느냐? 부처님의 원력으로 생겨졌다.
역부여시(亦復如是)하야 : 역부하시하야
개종여래왕석대원지소생기(皆從如來往昔大願之所生起)니라: 여래왕석부처님께서 먼먼 아승지겁 숱한 세월 전부터 중생을 제도해야 되겠다고 하는 큰 서원을 세웠다. 큰 서원으로부터 부처님의 지혜가 생긴다. 남을 도와주려고 하면 어떻게든지 방편이 생긴다. 꾀나 편법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방편이 생겨진다. 남을 도와주려면 어떤 방법이든지 도와주게 되지 않는가.
그래서 십지품에는 어떻게 나오는가?
우리가 외우고 있는 게송이 있다.
여수이멸번뇌화(汝雖已滅煩惱火)나, 그대 이미 번뇌의 불꽃이 다 꺼졌다 하더라도
세간혹염유치연(世間惑焰猶熾然)이라, 세간의 저 중생들은 미혹한 번뇌의 불꽃이 유치연이라. 아직도 펄펄 끓는 용광로처럼 세간 사람들이 열 받아가며 살지 않느냐?
당념본원(當念本願)이라, 마땅히 부처님의 본래 원력을 생각해서, 부처님의 본래 원력이 무엇인가? 도중생(度衆生)이라. 중생을 제도하라. 그 중생을 어떻게 제도해야 하는가?
실사수인(悉使修因)이라, 그들로 하여금 수인(修因), 바라밀의 씨앗을 뿌리고 취해탈(趣解脫)이라, 모두 이고득락(離苦得樂) 할 수 있도록 하라. 이것이 부처님의 본래원력이다.
(2) 如來出現境界의 譬喩
佛子야 一切智海가 無量無邊하야 不可思議며 不可言說이나 然我今者에 略說譬喩호리니 汝應諦聽이어다
佛子야 此閻浮提에 有二千五百河가 流入大海하고 西拘耶尼에 有五千河가 流入大海하고 東弗婆提에 有七千五百河가 流入大海하고 北鬱單越에 有一萬河가 流入大海하니라
佛子야 此四天下에 如是二萬五千河가 相續不絶하야 流入大海하나니 於意云何오 此水가 多不아 答言하사대 甚多니이다
佛子야 復有十光明龍王이 雨大海中에 水倍過前하며 百光明龍王이 雨大海中에 水復倍前하며 大莊嚴龍王과 摩那斯龍王과 雷震龍王과 難陀跋難陀龍王과 無量光明龍王과 連澍不斷龍王과 大勝龍王과 大奮迅龍王과 如是等八十億諸大龍王이 各雨大海에 皆悉展轉하야 倍過於前하며 娑竭羅龍王太子가 名閻浮幢이니 雨大海中에 水復倍前하니라
佛子야 十光明龍王의 宮殿中水가 流入大海에 復倍過前하며 百光明龍王의 宮殿中水가 流入大海에 復倍過前하며 大莊嚴龍王과 摩那斯龍王과 雷震龍王과 難陀跋難陀龍王과 無量光明龍王과 連澍不斷龍王과 大勝龍王과 大奮迅龍王과 如是等八十億諸大龍王의 宮殿各別이어든 其中有水가 流入大海에 皆悉展轉하야 倍過於前하며 娑竭羅龍王太子閻浮幢의 宮殿中水가 流入大海에 復倍過前하니라
佛子야 娑竭羅龍王이 連雨大海에 水復倍前하며 其娑竭羅龍王의 宮殿中水가 涌出入海에 復倍於前하니 其所出水가 紺琉璃色이며 涌出有時일새 是故大海가 潮不失時니라
佛子야 如是大海에 其水無量하며 衆寶無量하며 衆生無量하며 所依大地도 亦復無量하니 佛子야 於汝意云何오 彼大海가 爲無量不아 答言하사대 實爲無量하야 不可爲喩니이다
佛子야 此大海無量이 於如來智海無量에 百分에 不及一이며 千分에 不及一이며 乃至優波尼沙陀分에 不及其一이로대 但隨衆生心하야 爲作譬喩언정 而佛境界는 非譬所及이니라
“불자여, 일체 지혜의 바다는 한량없고 그지없고 헤아릴 수 없고 말할 수 없지마는 그러나 내가 이제 간략히 비유를 말하리니 그대들은 자세히 들어라.
불자여, 이 염부제(閻浮提)에는 2천5백 개의 강이 흘러서 바다에 들어가고 서구야니(西拘耶尼)주에는 5천 개의 강이 흘러서 바다에 들어가고 동불바제(東弗婆提)주에는 7천5백 개의 강이 흘러서 바다에 들어가고 북울단월(北鬱單越)에는 1만 개의 강이 흘러서 바다에 들어가느니라.
불자여, 이 사천하에서 이러한 2만5천 개의 강이 계속하여 끊이지 않고 흘러서 바다에 들어가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 물이 많은가?” 대답하되, “매우 많습니다.”
“불자여, 다시 10광명용왕이 바다에 내리는 물은 앞의 것보다 배가 되고 1백 광명용왕이 바다에 내리는 물은 또 앞의 것보다 배가 되고 대장엄(大莊嚴)용왕과 마나사(摩那斯)용왕과 뇌진(雷震)용왕과 난타발난타(難陀跋難陀)용왕과 무량광명(無量光明)용왕과 연주부단(連澍不斷)용왕과 대승(大勝)용왕과 대분신(大奮迅)용왕 등 이와 같은 80억 여러 큰 용왕들이 바다에 내리는 비는 차례차례 앞의 것보다 또 배가 되느니라.
사갈라(娑竭羅)용왕의 태자 염부당(閻浮幢)이 바다에 내리는 물은 또 앞의 것보다 배가 되느니라.
불자여, 10광명용왕의 궁전에 물이 흘러서 바다에 들어가는 것은 또 앞의 것보다 배가 되느니라.
1백 광명용왕의 궁전에 물이 흘러서 바다에 들어가는 것은 또 앞의 것보다 배가 되고 대장엄용왕과 마나사용왕과 뇌진용왕과 난타발난타용왕과 무량광명용왕과 연주부단용왕과 대승용왕과 대분신용왕 등 이와 같은 80억 여러 큰 용왕의 궁전이 각각 다르며, 그 가운데에 있는 물이 흘러서 바다로 들어가는 것이 차례차례 앞의 것보다 또 배가 되느니라.
사갈라용왕의 태자 염부당의 궁전의 물이 흘러서 바다로 들어가는 것은 또 앞의 것보다 배가 되느니라.
불자여, 사갈라용왕이 계속하여 바다로 내리는 물은 또 앞의 것보다 배가 되고, 사갈라용왕의 궁전의 물이 솟아올라서 바다에 들어가는 것은 또다시 앞의 것보다 배가 되며, 그 솟아오르는 물은 감유리(紺琉璃)빛으로서 솟는 때가 있으므로 바다의 조수가 때를 어기지 않느니라.
불자여, 이와 같이 큰 바다에는 물이 한량이 없고, 보배도 한량이 없고, 중생도 한량이 없고, 의지한 땅덩이도 또한 한량이 없느니라.”
“불자여, 그대의 뜻은 어떠한가? 저 큰 바다는 한량이 없겠는가?” 대답해 말하되 “실로 한량이 없으며 비유할 수가 없습니다.”
“불자여, 이 바다의 한량없는 것으로 저 여래 지혜 바다의 한량없음에 비하면 백 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고, 천 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며, 내지 우파니사타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느니라. 다만 중생의 마음을 따라 비유를 하지마는 부처님의 경계는 비유할 수가 없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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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래출현경계(如來出現境界)의 비유(譬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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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佛子)야 : 불자야
일체지해( 一切智海)가 : 일체 지혜의 바다는
무량무변(無量無邊)하야 : 한량없고 그지없고
불가사의(不可思議)며 : 불가사의라.
불가언설(不可言說)이나 : 말로 다 할 수도 없고
연아금자(然我今者)에 : 연아금자에, 하도 허공이 넓어서 자를 가지고 30cm 자로 잴 수는 없지만 한번 재보자 이 말이다.
약설비유(略說譬喩)호리니 : 알아들을 수 있게끔 간략하게 조금만 비유하겠다.
여응체청(汝應諦聽)이어다 : 그대들은 자세히 들어라. 여응체청이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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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佛子)야 : 불자야
차염부제(此閻浮提)에 : 이 남섬부주에는
유이천오백하(有二千五百河)가 : 2천5백 개의 강이 흘러서
유입대해(流入大海)하고 : 바다에 들어가고, 비유하자면 오늘도 엄청난 강물이 한 시간도, 한 시간이 뭔가, 한 순간도 일초도 안 쉬고 계속 떠밀려 들어가는데 바다는 넘치고 이런 것이 없다. 신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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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야니(西拘耶尼)에 : 서구야니주에는
유오천하(有五千河)가 : 5천 개의 강이 흘러서
유입대해(流入大海)하고 : 바다에 들어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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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불바제(東弗婆提)에 : 동불바제주에는
유칠십오백하(有七千五百河)가 : 7천 5백 개의 강이 흘러서
유입대해(流入大海)하고 : 바다에 들어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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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울단월(北鬱單越)에 : 북울단월에는
유일만하(有一萬河)가 : 1만 개의 강이 흘러서
유입대해(流入大海)하니라 : 바다에 들어가느니라.
4분의 1씩 딱 끊어놓고, 2천 5백개씩 계속 플러스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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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목은 능엄경 제4권 부루나장에 보면 자세하게 나온다. 참고해 보면 좋겠다.
심궁만법결통의체(深窮萬法決通疑滯)라 해서, 중생기시(衆生起始) 업과기시(業果起始) 세계기시(世界起始)가 일어난다.
화엄경을 보면서 능엄경이 이해가 되고, 능엄경을 보면서 화엄경이 이해가 된다. 또 금강경을 보면서 화엄경이 이해가 되고, 화엄경을 보면서 금강경이 이해가 된다. 화엄경을 보면서 반야심경이 이해가 되고, 반야심경을 보면서 화엄경이 이해가 되고 서로가 이렇게 도와주는 역할을 하는 것 같다.
어떤 때는 심지어 80권 화엄경을 보다가 60권 화엄경을 보면 본문만 보더라도 60권 화엄경이 80권 화엄경을 해석해준다. 그렇게 같이 비교해 보는 것이 제가 보니까 공부할 때는 좀 상당히 수월하다.
소초 보고 한문 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번역본을 비교해서 보는 것도 도움이 된다.
금강경도 여섯 본이 있지 않는가?
우리가 흔히 보는 것은 누구의 금강경인가?
구마라지바, 보리유지, 진제삼장, 달마급다, 현장법사, 의정스님 것이 있다.
의정스님은 충분하게 번역을 다 해놓으셨다.
민족사에서 1997년도에 <금강경전서>라는 책을 발간했는데, 제가 편집했고, 어른스님이 감수하신 책이다. 1997년도 그 책을 냈으니까 벌써 한 이십오육 년이 지난 것 같다.
거기에는 금강경 산스크리트본도 있고 무착게송도 있고, 천친보살 세친게송도 있고, 육역본 육가해 번역도 있다.
함허스님 해설 설의(說誼)도 있고, 규봉스님 찬요(纂要)도 있고 종경스님 종경은 누구인가? 지각영명연수선사다, 종경스님의 제강(提綱)도 있고 부대사의 찬(贊)도 있고 야보스님의 송(頌)도 있다.
흔히 우리가 오가해라고 하는데, <금강경전서>는 13가해를 가지고 거의 넉 달 동안 밤잠 안 자면서 똘똘 뭉쳐서 매진했던 기억이 난다.
한 경전을 두고 여러 번역해 놓은 사람들을 일대일로 다 번역해서 보면 금강경의 뜻이 더욱더 명확해진다.
예를 들어서 현장법사 같은 경우는 경전 내용을 한 글자도 잘 안 뺀다. 우리가 아상 인상 중생상 이렇게 이야기 하지만 현장법사는 한 개 더 넣어서 번역하기도 하고, 또 어떤 스님은 줄여서 하기도 한다. 또 달마급다 스님은 범어인 산스크리트 순서대로 하기도 하고 다 다르다.
참고로 그런 것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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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佛子)야 : 불자야
차사천하(此四天下)에 :이 사천하에
여시이만오천하(如是二萬五千河)가 : 이와 같이 2만 5천 개의 강이
상속부절(相續不絶)하야 : 상속하여 끊이지 않고 흘러서
유입대해(流入大海)하나니 : 바다에 들어가는 데
어의운하(於意云何)오 : 어떻게 생각하는가?
차수(此水)가 : 이 물이
다부(多不)아 : 많으냐 적으냐?
답언(答言)하사대 : 대답하되
심다(甚多)니이다 : 매우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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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흘러들어가는 강물이 너무너무 많다. 그중에는 맑은 강물도 있을 것이고, 똥물 같은 강물도 있을 것이고, 오염되어서 완전히 방사능 강물도 있을 것이다. 이런 물들이 바다로 일단 다 들어간다는 것이다.
이런 데서 우리가 견주어 볼 것은 무엇인가?
화엄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그것이다.
화엄경은 ‘망상을 지우고 진짜를 구한다’ 는 것이 아니다.
‘진망교철(眞妄交徹)’이라고 청량국사가 처음부터 이야기해 놓았지 않은가.
심장과 연결된 동맥에서부터 저 모세혈관까지 병들었든 어떻든지 똑같은 피다. 모세혈관 말초신경부터 번뇌 분별사식부터 심장으로 들어오는 진심, 본심의 자리까지가 전부 다 똑같은 핏덩어리로 연결된다. 정맥이 됐든 동맥이 됐든 탁하든 맑든 청탁을 안 가린다.
이 여래출현품의 뒤에 가면 이 대목이 나온다.
‘깨달아도 마음이고 못 깨달아도 마음이고 마음 밖의 법은 없다.’
우리가 일반적으로는 깨달은 사람만 높이 존중하고 못 깨달은 사람은 낮춰보지만 세주묘엄품의 시성정각(始成正覺)이라고 하는 부분은 부처님이 그렇게 고준하게 거룩하게 깨달았음에도 불구하고, 하찮은 새카만 중생이 똑같은 존재이고 거룩하다고 봐버린다. 그것이 화엄사상이고 그것이 융통이고 원융이다.
그런데 우리는 화엄의 일승을 보면서 해석은 삼승으로 한다. 그래서 뭔가 발전해야 될 것이 더 있고, 더 다듬어야 될 것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마음은 수행하는 것이 아니다. 심성은 수행하는 것이 아니다. 수행을 해야된다는 분별심, 집착심을 어떻게 ‘그것은 내 것이 아니다’ 하고 털어내버리느냐, 이것이 중요하다는 말씀이다.
여기서는 점층적으로 몇 가지 비유를 해놓았다.
그것이 설명하는 것은 무엇인가?
마음이 광대무변해서 도저히 우리가 감당이 안 되는 정도, 쪼잔한 생각으로서 감당이 안 되는 것을 지금 표현하고 있다.
*
불자(佛子)야 : 불자야
부유십광명용왕(復有十光明龍王)이 : 다시 있다. 십광명, 십광명이 나왔으니까 숫자적으로 조금 올리면 뭐가 되는가? 백광명 천광명 만광명 억광명 이렇게 나와야 될 것이 아닌가? 그런 것이 본래 없는데 우리를 가르치려고 이렇게 나왔구나, 라고 보면 된다. 열 개의 광명용왕이
우대해중(雨大海中)에 : 바다에 내리는 물은
수배과전(水倍過前)하며 : 앞에 것보다 배가 되고, 이제까지 나온 것도 굉장했는데, 2만 5천 강물이 들어가는 바다보다 몇 배나 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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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광명용왕(百光明龍王)이 : 또 백광명용왕은 십광명용왕보다
우대해중(雨大海中)에 : 물이 또
수부배전(水復倍前)하며 : 그 앞에 것보다 더 배가 되고, 그다음에 하다 하다 안 되니까 대빵 용왕들의 이름이 다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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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엄용왕(大莊嚴龍王)과 : 대장엄용왕과
마나사용왕(摩那斯龍王)과 : 마나사용왕과
뇌진용왕(雷震龍王)과 : 뇌진용왕과
난타발난타용왕(難陀跋難陀龍王)과 : 난타발난타용왕과
무량광명용왕(無量光明龍王)과 : 무량광명용왕과 하다하다 안되니까 나중에 뭐가 나왔는가? 십광명부터 시작해서는 글을 마치려니 나중에는 무량광명용왕이 나왔다.
우리가 얼마나 둔하면 이만큼 해놓았겠는가?
화엄경 저 뒤에 보면 이렇게 해놓았다.
맹구부목(盲龜浮木)이라. 맹구가 부목 나무를 만나는 것이나 또 내지는 바늘 하나가 저 깊은 바다 밑 360층 밑에 떨어져 있는데, 바다 밑에 바늘을 한 개 잃었는데, 그것을 찾는 일이 우리 목숨을 다시 받는 것보다 쉽다고 하였다. 그런 일들이 목숨을 다시 받는 것보다 쉽다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이렇게 화엄경을 보고 경전 공부를 하면서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만만하게 생각한다.
그런데 여기서 일실인신(一失人身), 한 번 사람 몸을 잃어버리면 저 바다에서 바늘을 찾기보다 더 힘들다. 경전에는 그렇게 써놓았다. 백천만겁난조우(百千萬劫難遭遇)다. 그런 글을 보니까 아예 그냥 ‘하루종일 화엄경을 붙들고 살아라’ 이 말 같다. 저도 인생이 있지, 제 개인적인 삶이 있는데 부처님이 그런 식으로 무지막지하게 해놓으셨다.
그리고 또 뭐라고 하는가?
저기 제석천 꼭대기에서 바늘 하나를 겨자 위에 탁 떨어뜨리는데 그것도 수미산을 일곱 바퀴 돌고 딱 정확하게 떨어뜨린다고 하였다. 범어사 대웅전 앞 탑 옆에 모래알 위에 딱 꽂혀라, 하는 것과 똑같다는 말이다.
그만큼 우리가 한 번 잃어버리면 다시 돌아갈 길은 없다고 화엄경에서는 표현한다.
특히 일승 화엄을 만났을 때는 그만큼 법에 대해서 소중하다 보니 이렇게 증폭, 증폭시켜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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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주부단용왕(連澍不斷龍王)과 : 연주부단용왕과
대승용왕(大勝龍王)과 : 대승용왕과
대분신용왕(大奮迅龍王)과 : 대분신용왕과
여시등팔십억제대용왕(如是等八十億諸大龍王)이 : 이와 같은 80억 여러 큰 용왕들이
각우대해(各雨大海)에 : 바다에 내리는 비는, 1억 용왕이 내려도 엄청날 것인데 80억 용왕이 비 내리니까
개실전전(皆悉展轉)하야 : 차례차례 앞의 것보다도
배과어전(倍過於前)하며 : 또 두 배가 된다.
*
세주묘엄품에 나오는 대빵 용왕이 사갈라용왕이다.
사갈라를 대해라고도 한다.
방생갈 때 ‘사가라 용왕 사가라 용왕’ 염불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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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갈라용왕태자(娑竭羅龍王太子)가 :사갈라용왕 태자
명염부당(名閻浮幢)이니 :염부당이
우대해중(雨大海中)에 : 바다에 내리는 물은
수부배전(水復倍前)하니라 : 앞의 것보다 더 배나 된다.
*
불자(佛子)야 : 불자야
십광명용왕(十光明龍王)의 : 십광명용왕의
궁전중수(宮殿中水)가 : 궁전의 물이 흘러서
유입대해(流入大海)에 : 바다에 들어가는 것은
부배과전(復倍過前)하며 : 또 앞의 것보다 배가 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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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광명용왕(百光明龍王)의 :백광명 용왕의
궁전중수(宮殿中水)가 : 궁전의
유입대해(流入大海)에 : 물이 흘러서
부배과전(復倍過前)하며 : 바다에 들어가는 것은 또 앞의 것보다 배가 된다.
*
대장엄용왕(大莊嚴龍王)과 : 대장엄용왕과
마나사용왕(摩那斯龍王)과 : 마나사용왕과
뇌진용왕(雷震龍王)과 : 뇌진용왕과
난타발난타용왕(難陀跋難陀龍王)과 : 난타발난타용왕과
무량광명용왕(無量光明龍王)과 : 무량광명용왕과
연주부단용왕(連澍不斷龍王)과 : 연주부단용왕과
대승용왕(大勝龍王)과 : 대승용왕과
대분신용왕(大奮迅龍王)과 : 대분신용왕과
여시등팔십억제대용왕(如是等八十億諸大龍王)의 : 이와 같은 등 팔십억제대용왕의
궁전각별(宮殿各別)이어든 : 궁전도 각별하거든
기중유수(其中有水)가 : 그중에 있는 물이
유입대해(流入大海)에 : 유입되어 흘러서 바다에 들어가는 것이
개실전전(皆悉展轉)하야 : 모두 다 전전하여
배과어전(倍過於前)하며 : 차례차례 해서 앞에 것보다 또 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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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갈라용왕태자염부당(娑竭羅龍王太子閻浮幢)의 : 사갈라용왕태자 염부당의
궁전중수(宮殿中水)가 : 궁전 가운데의 물이 궁전중수가
유입대해(流入大海)에 : 대해에 또 유입하는 것이
부배과전(復倍過前)하니라 : 다시 앞에 것보다 배가 넘는다.
*
불자(佛子)야 : 불자야
사갈라용왕(娑竭羅龍王)이 : 사갈라용왕이
연우대해(連雨大海)에 : 바다로 흘려내리는 물은, 비 내리는 물은, 연이어서 내리는 물은
수부배전(水復倍前)하며 : 그 물이 앞에 것보다 또 다시 배가 되고
기사갈라용왕(其娑竭羅龍王)의 : 그 사갈라용왕의
궁전중수(宮殿中水)가 : 궁전 가운데 물이
용출입해(涌出入海)에 : 또 솟아올라서 바다로 들어가는 것이
부배어전(復倍於前)하니 : 앞에 것보다 또다시 배가 되고
기소출수(其所出水)가 : 거기에서 솟아난 바 물은
감유리색(紺琉璃色)이며 : 아주 푸른 빛, 감빛색이 도는 유리색, 유리빛으로
용출유시(涌出有時)일새 : 쏟는 때가 있으므로
시고대해(是故大海)가 : 시고로 대해가
조불실시(潮不失時)니라 : 바다의 조수간만 해조가 때를 어기지 않느니라.
*
불자(佛子)야 :불자야
여시대해(如是大海)에 : 이렇게 큰 바다에는
기수대량(其水無量)하며 : 그 물이 한량이 없고
중보무량(衆寶無量)하며 : 여러 가지 보배도 한량이 없다.
결국 부처님의 마음이 본래 없지만, 펼치면 한량이 없다라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 이와 같은 비유를 자꾸 들고 있다.
중생무량(衆生無量)하며 : 중생도 한량이 없고
소의대지(所依大地)도 : 의지하는 땅덩어리도
역부무량(亦復無量)하니 : 한량이 없다.
중생세간 기세간 지정각세간이 원융하다. 삼세간이 원융하다. 세주묘엄품에 나왔던 그 구절을 여기 여래출현품에서는 ‘여래가 출현하는 건 어떻습니까?’‘부처님의 출현은 삼세간이 원융하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다. 다른 말로는 농심라면이다. 무슨 말인가? 신토불이(身土不異)다. 신토불이도 화엄경 세주묘엄품에 나오는 구절이 신토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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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佛子)야 : 불자야
어여의운하( 於汝意云何)오 : 그대의 뜻에는 어떠하냐?
피대해(彼大海)가 : 저 큰 바다가
위무량부(爲無量不)아 : 한량없는 것이 되겠느냐?
답언(答言)하사대 : 답하기를
실위무량(實爲無量)하야 : 실로 참으로 무량해서
불가위유(不可爲喩)니이다 : 어떤 것으로도 비유할 수가 없다. 이 마음을 비유할 수 있는 것은 없지만 오직 딱 하나만 예외로 하겠다. 마음을 비유할 수 있는 것으로서 허공만 예외로 하겠다.
여래출현품에 나오는 허공의 비유 중에 이렇게 해놓았다.
허공이 끝없는 것은, 어떤 새 한 마리가 알에서 깨어나서 날아온 시간, 지나온 허공도 끝이 없는데, 앞으로 지나갈, 지금까지 안 날아갔던 허공, 남은 허공도 무량하다.
새가 한 100년쯤 산다 하면 그 새가 한 50년 날았던 허공의 길이도 무량하고, 앞으로 날아갈 허공도 무량하다.
우리가 생각하면 이제까지 생각했던 것도 무량하고, 앞으로 일으킬 생각도 무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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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佛子)야 : 불자야
차대해무량(此大海無量)이 : 이 바다에 한량없는 것, 원효스님은 기신론 서문에서 이 바다의 한량 없는 것, 허공의 한량 없는 것이 비유하자면 사사로움이 없는 마음의 경지와 같다고 하였다. 지극히 무사공평한 마음의 경지를 비유하자면 바다와 같고 허공과 같다고 이야기한다.
원효스님 기신론 서문이 너무나 잘 돼 있으니까 청량국사가 화엄경을 해석하시면서 왕복서의 ‘명진체어만화지역(冥真體於萬化之域)’ 하는 대목을 보고 ‘본각은 원효스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우리 마음의 본체는 현지우현지(玄之又玄之)하고’ 라고 언급해 놓았다.
참고해 보시기 바란다. 이 대해무량이 대해가 한량없는 것으로는
어여래지해무량(於如來智海無量)에 : 저 한량없는 여래 지혜의 바다에 비하면
백분(百分)에 : 백분의
불급일(不及一)이며 : 불급일이고
능엄경는 심지어 이렇게까지 해놓았다.
‘공생대각중(空生大覺中)하니 여해일구발(如海一漚發)이라’
저 넓은 허공도 대각 가운데 본심, 우리 마음의 본체 가운데서 생겨났는데 마치 저 넓은 태평양 바다에 여해일구발이라. 태평양 바다가 우리 마음이라고 하면 이 허공은 어떠냐?
물거품 물방울 하나가 뽀글뽀글 일어나는 것과 똑같다.
원각경에도 그렇게 해놨다. ‘무변허공(無邊虛空)이 각소현발(覺所顯發)이라’ 허공이 아무리 넓고 크다 하더라도 대각, 시성정각, 마음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 우리 본심에서 현발한 것일 뿐이다. 일체유심조라.
원각경을 보든지 능엄경을 보든지 이 화엄경을 보든지 그것을 갖다가 얼마나 내 일상이나 수행에 당겨오느냐가 문제다. 글자로만 가만히 보고 있으면 인생에 변화가 없다. 맨날 쪼잔하게 ‘니 콩 몇 개 가져갈래? 내 몇 개 가져갈까?’ 그래서 조삼모사(朝三暮四)한다.
원숭이한테 “아침에 사과 3개 주고 저녁에 4개 줄까?” 하니까 원숭이가 “그런 게 어딨냐.”고 성질을 내버렸다.
“아 그러면 아침에 4개 주고 저녁에 3개 줄게.”
“예,예.”
하면서 원숭이가 웃었다잖은가.
아침에 4개 먹으나 저녁에 4개 먹으나 똑같다.
그런데 아침에 조금 적게 주고 저녁에는 4개 준다니까 원숭이가 주둥이가 그냥 이만큼 튀어나와 버렸다.
우리는 늘 그런 틈바구니 속에서 산다.
이런 이치가 이해가 안 되기 때문에 그렇다. 백분의 일
천분(千分)에 :천분의
불급일(不及一)이며: 일
내지우파니사타분(乃至優波尼沙陀分)에 : 우파니사타분의
불급기일(不及其一)이로대 : 일, 중간에도 할 말은 많을 것이다. 불급기일이로되, 우파니사타분의 하나에도 미치지 못하나니
단수중생심(但隨衆生心)하야 :다만 중생의 마음을 따라서
위작비유(爲作譬喩)언정 : 할 수 없어서 유치원생 가르치듯이 이렇게 화엄경에 글자 몇 개로써 설명을 하지만, 실제로
이불경계(而佛境界)는 : 부처님의 경계는
비비소급(非譬所及)이니라 : 어떤 비유로도 미칠 수가 없다.
그러니까 화엄경의 제일 마지막에 이렇게 해놓았다.
찰진신념가수지(刹塵信念可數知)
대해중수가음진(大海中水可飮盡)
허공가량풍가계(虛空可量風可繫)
무능진설불공덕(無能盡說佛功德)
그것이 입법계품 마지막 게송이지만 여기 여래출현품에 전부 해당하는 대목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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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
뽀족> 뾰족
이: 떠날 리
이심
불이>불리
각리
@연기의 도리와 인생을 알고자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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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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