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 이야기
히브리서 11:8-14
아브라함은 본래 우르(Ur)라는 곳에 살고 있다가 아버지 데라를 따라 하란(Haran)이라는 곳에 살고
있었습니다.
우르는 그 당시 메소포타미아 지역 남부에서 일어난 수메르 문명의 중심지였습니다.
지금의 이라크 남부에 속한 지역입니다. 수메르인들은 어디서부터 왔는지 그 기원이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학자들은 대략 기원전 3,500년 경부터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이 갈라지는 지역에서 수메르 문명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수메르 문명은 세계에서 제일 오래된 문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가 무슨 이유로 우르를 떠나 하란으로 옮겨 갔는지, 그리고 무슨 이유로 그는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려고 했는지 (창세기 11:31) 성경의 미스터리입니다.
다행히 성경 두 곳에서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나는 너를 갈대아 우르에서 인도해 낸 여호와이다. 내가 너를 이끌어 낸 것은 이 땅을 너에게 주기 위해서이다 (창세기 15:7).” “주는 하나님 여호와이십니다.
주께서 아브람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를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 내시고 그의 이름을 아브라함이라고 부르셨습니다 (느헤미야 9:7).” 우리는 이런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관심의 초점이 데라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에게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을 이끌어내기 위하여 아버지 데라를 사용하신 것이지요. 하나님은 처음부터 아브라함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무튼 아브라함은 하란에서 다시 “하란을 따나라”는, 아버지 데라가 들었던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하란은 지금의 터키와 시리아의 접경 지역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정확하게는 시리아 영토에 속한 지역입니다. 하란 역시 그 당시 에블라 문명의 중심지로, 상업, 문화, 종교의 중심지였습니다.
학자들은 에블라 문명은 그 후에 수메르인들에게 의해서 흡수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데라가 하란에서 얼마나 오래 살았는지 알 수 없지만, 아브라함이 하란을 떠났을 때 나이가 75세였다고 한 것을 보면 꽤 오래 하란에서 살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에게는 하란이 “본토 친척 아비집 (창세기 12:1)”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데라가 우르를 떠난 것이나, 아브라함이 하란을 떠난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그들은 모두 그 당시 문명의 중심지를 떠나서 미지의 땅, 가나안으로 이사를 했던 것입니다. 그들의 이동 경로는 우르에서 북서쪽으로 하란으로 이동을 했다가 다시 남서쪽으로 내려가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갔던 것입니다. 성경에는 단순히 “아브람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하란을 떠났습니다 (창세기 12:4)”라고만 나와 있습니다.
오늘 읽은 히브리서 말씀에는 “그는 가야 할 곳도 모른 채 자기 고향을 떠났습니다 (히브리서 11:8)”라고 나와 있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가나안 땅에 대한 전혀 아무 정보가 없었고, 그 땅에 들어가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구체적인 계획이 없었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에서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을 바로 잡아야 합니다. 여기서 성경 말씀은 아브라함의 믿음과 순종을 중요하게 보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언제부터 하나님을 알았는지는 성경에 나와 있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그대로 순종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순종의 밑바닥에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이 있습니다. 이 믿음이 아브라함의 생애 전반에 걸쳐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의 믿음을 끊임 없이 시험하십니다. 시험은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을 다루시는 방식입니다. 역설적으로,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말하지요? “하나님께로부터 시험을 받는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다 (히브리서 12:6-11).”
창세기 말씀에 찬송가의 후렴 (refrain)처럼 자주 등장하는 말씀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아브람은 여호와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그런즉 여호와께서는 이런 아브람의 믿음을 보시고 아브람을 의롭게 여기셨습니다. 아브람을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해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삶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따르면 됩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인정을 받은 것도 다른 것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복잡하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또 믿기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그 때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더 깊어지고 성숙해졌습니다.
어떤 사람이 히브리서 11장에 “믿음의 전당 (The Hall of Faith)”이라는 제목을 붙인 것을 보았습니다. “믿음의 전당”이라는 말은 잘 몰라도 “명예의 전당 (The Hall of Fame)”이라는 말은 잘 압니다. 주로 스포츠 분야에서 탁월한 성적을 낸 선수들이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립니다.
성경의 인물 중에 바울은 신학적인 사고의 천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바울의 눈에 아브라함이라는 사람이 어떻게 보였을까? 그런 생각을 해 보셨습니까? 로마서 4장에 바울의 눈에 비친 아브라함은 어떤 사람이었는지 나와 있습니다. 바울의 눈으로 재해석한 아브라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말씀 중에 눈에 띄는 말씀이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20절)”라는 말씀입니다.
믿음을 버릴 수 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 아브라함은 오히려 더 믿음이 견고해졌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전당에 들어가는 사람들의 자격입니다.
끝으로 한가지 더 말씀 드릴 것이 있습니다. 13절 말씀입니다. “이 사람들은 모두 믿음을 따라 살다가 죽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약속하신 것을 받지는 못했으나, 앞으로 올 것들을 멀리서 보고 기뻐하였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자신들이 이 땅에서 나그네일 뿐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nomads”라는 말은 한 곳에 정착해서 살지 않는 유목민을 말하지요?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사람은 이 세상을 “노매드(nomads)”로 살아 갑니다. 아브라함을 비롯해서 믿음으로 살았던 사람들은 모두 한가지 사실에 동의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영원히 살 사람들이 아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노매드로 살아간다!”
얼마나 멋지고, 얼마나 감동적인 선언입니까? 저와 여러분은 천국의 노매드들입니다. 유목민들이 양들을 치기에 좋은 곳을 찾아 다니듯이, 저와 여러분은 이 세상에 마음을 두지 않고 영원한 고향을 향하여 길을 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자신들이 이 땅에서 나그네일 뿐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진짜 고향을 찾고 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무슨 말씀인지 아시겠습니까?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저에게는 돌아갈 진짜 고향이 있습니다” 이 사실을 말과 행동과 가치관으로 증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 저 사람은 진짜 고향이 있는 사람이구나!” 하는 것을 주변 사람들이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명절이 되어서 청승 맞게 방구석에 앉아서 “고향이 그리워도 못 가는 신세” 하면서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사용하는 언어, 그리고, 그 사람의 삶을 지탱하고 있는 가치관이 천국의 노매드인 것을 증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이야기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그 다음 16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위해 한 도시를 준비해 놓고 계셨기 때문에, 그들의 하나님이라고 불리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많이 들었던 뻔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뻔하다”는 말은 “어떤 일의 결과나 상태 따위가 훤하게 들여다보이듯이 분명하다”는 뜻입니다. 결말이 어떻게 될지 뻔한 드라마는 보는 사람이 식상합니다. 아무 것도 기대할 것이 없습니다.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너무 많이 들었던 뻔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상상력을 가지고 들으면 들을 때마다 새롭게 들리는 것이 아브라함의 이야기입니다. 아무 이유 없이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에게는 믿음에 대해서 알 수 있는 그 무엇이 있습니다. 믿음의 오리진 (origin)이라고 할까요? 아브라함에게는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믿음의 오리진이 있습니다. 천국의 노매드로 이 세상을 당당하게 살았던 사람! 그의 삶을 뜯어보면 그 속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던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 아브라함입니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 그 믿음이 더욱 빛이 났던 사람이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언제 들어도 새로운 도전을 주는 감동적인 이야기가 되게 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