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비게이션
류 근만
하루가 번쩍, 한 달이 훌쩍 간다. 해가 바뀌면 정초에 새로운 각오를 다지곤 했다. 그런데 올해는 미적거리다 보니 벌써 2월도 막바지에 와 있다. 내 삶에 방향을 잃은 기분이다. 봄이 오는 소리에 이끌리듯 무작정 나가고 싶어졌다. 자동차 시동을 걸고 네비게이션을 켰다. 언젠가 지인들과 맛있게 먹었던 바닷가 ‘할머니 아귀탕’ 집을 목적지로 찍었다. 나이가 들었는지 씽씽 달리는 고속 길 보다, ‘세월~아, 네 월~아.’ 하는 무료 길을 선택했다.
식당에 들어서니 손님들이 북적인다. 잘 찾아왔다고 생각하면서 2인용 식탁에 자리를 잡았다. 모처럼 두 식구의 오붓한 외식이다. 그것도 언젠가 경험했던 맛을 상기시키면서다. 식사 후에는 커피점에 앉아서 한가한 시간도 보냈다. 창 너머로 철썩거리는 파도에 내 마음도 쓸려 보낸다. 이게 얼마만 인가
아내는 눈에 보이는 것엔 감정을 싣는데 걷는 그것은 젬병이다. 집을 나간 김에 편히 쉬고 있자니 몸도 마음도 편안해 보였다. 언제나 무뚝뚝한 나는 감정의 굴곡이 없다. 말없이 앉아 있다가 앞에 있는 그에게 꾸벅거렸다. 분명 인사하는 그것은 아니지만, 눈치 없는 행동에 한마디 듣고서야 정신을 차렸다. 뉘엿뉘엿 서쪽 하늘은 떠날 시간을 말해주는 듯했다. 귀갓길은 내비게이션에 맡기면 됐다. 기다리는 사람이 없으니 서두르지 않고 느긋하다.
네비게이션이 없던 시절엔 낯선 길을 가려면 바쁘게 지나는 사람 붙들고 길을 묻곤 했다. 불과 이십여 년 전 일이다. 이제는 그런 걱정도 없어졌으니 참으로 살기 좋은 세상이다. 초행길 한번 나갈라치면 걱정하느라 밤잠을 설치기 일쑤였다. 이제는 운전 초보자도 그런 걱정이 없어 진지 오래다.
나는 네비게이션을 ‘우리 집’으로 찍었다. 다소 번거로운 읍내 길을 벗어나니 촌길이 나온다. 새롭게 단장된 가로를 보니 최근에 개설한 외곽도로다. 매끄럽게 안내하던 길 도우미가 이상 해졌다. 헤매는 것 같다. 그런데 웬일인지 지난 추석 때 방송에 나오던 그런 현상이 벌어진 것 같다. 귀성객들이 농로로 모여들었던 황당한 사건 말이다. 나에게도 그런 상황이 벌어졌다. 어촌의 마을길을 거쳐 농로로 향하는 그것이 아닌가? 가던 길을 헤매다가 오던 길로 되돌려야 했다. 참으로 난감했다.
잠시 후 방향이 다시 잡혔다. 아마도 유통기간이 지난 그것은 아닌지 걱정이 됐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네비게이션을 업그레드 시킨 지가 꽤 오래되었다. 나는 운전을 한지가 여러 해 됐지만 연료보충과 이따금 하는 세차 정도가 차관리가 다다. 모든 사물이 다 그렇듯 주인을 잘 만나야 하는데, 나는 그렇지 못한 것이다. 유통기한이 지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 지를 경험했다.
그래도 오늘 하루는 잘 버텼다. 출발할 때는 청춘 같았고, 맛있게 먹은 아귀탕 맛은 더 구미를 당겼다. 점심 한 끼 만족스러웠고 감미로운 차 맛 역시 행복했다. 다만 반주 한 잔 못한 것이 아쉬웠다. 하지만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니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귀갓길은 석양인데 네비게이션이 까탈을 부려 내 삶을 되돌아보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나도 이제는 인생살이 팔 부 능선을 향하고 있으니 그럴 만도 하다. 뒤돌아보면 사십여 년의 공직에 청춘을 다 보냈다. 환갑을 넘기면서 이모작 인생에 진입했었고, 사도삼촌(四都三村) 생활에 광풍처럼 몰아치는 유행에 휩싸여 꿈도 부풀었었다. 갇혔던 새가 창공을 넘나들 듯 내 세상인 양 즐겁게 지냈다. 그런데도 거기서 그걸 찾지 못한 그것이 아쉽다. 하얗게 쌓인 눈길을 걷다가 되돌아봐야 ‘뽀드득거린 발자국’을 볼 수 있듯이 말이다.
언제나 내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뒷북을 친다. 젊어서는 성공과 출세가 늦게 찾아오는 것이 답답했다. 뛰어 보고 달려 보고 하였지만 언제나 그 자리였다. 즐거움과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불감증이었는지 모른다. 시간은 붙들려 있지 않고 내가 아는 행복은 이미 떠나버렸다. 내 삶의 네비게이션이 정상 작동했다면 이런 우를 범하지는 않았을 텐데 말이다.
며칠 전, 아침밥을 먹는 중인데 이(齒)가 시큰거렸다. 그래서 치과의원을 갔었다. 의사 앞에서 작은 입을 하마처럼 벌려야 하는 신세가 됐다. 입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팠다. 어금니 두 개가 없는데 오래 버텼다고 한다. 만 65세 이상 노인들에게는 치아 두 개까지 보험이 적용된다. 그러나 나는 이미 그것을 다 소진한 상태이다.
병원엘 자주 가다 보니 새로운 정보가 넘친다. 요즈음엔 임플란트 내비게이션도 있다고 한다. 네비게이션도 다양하다. 노인 성공 내비게이션, 간호사 네비게이션도 있다고 한다. 참으로 희한한 세상이다.
나만 현실에 동떨어진 구식 사람인 것 같다. 나에겐 임플란트 네비게이션도 간호사 네비게이션도 먼 훗날 얘기로 들린다. 난 네비게이션이 차량에만 있는 줄만 알았다. 2천 년대 초반 자가용이 대중화되면서 일상에 필수품이 된 것이다. 그동안 나는 완행으로 살았고 세상은 급속으로 변했다. 이제는 흘러가는 변화의 흐름에 순응해야 함을 절실히 느낀다. 과속하지 말고 천천히, 그것도 아주 느리게,
난 집에 오는 길에 카센터에 가서 네비게이션 업그레이드를 받았다. 이제는 나 자신 스스로 의 삶도 녹슬지 않도록 업그레이드시킬 일만 남은 것 같다. 흘러가는 구름 가듯, 시냇물 흘러가듯, 가는 세월에 내 몸과 마음까지도 맡기고 싶어진다.
첫댓글 류근만님 드디어 카페에 작품을 올려주셨군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