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변 감옥 파옥 기념비 소나무
- 항일독립군의 사기를 드높인 파옥투쟁
1910년 8월 29일은 한일강제병합 경술늑약이 체결된 경술국치일이다. 그리고 125년이 흐른 2025년에도 그때와 별로 다르지 않은 것은 오늘에도 친일 매국 극우정치 모리배들이 12·3 내란에 동조, 득세하며 위안부와 강제징용 문제,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와 독도 문제, 사도광산 문제 등에서 일본의 행태에 부응하고 들러리 서고 있기 때문이다.
당시 매국노의 작태와 한치도 다르지 않은 그자들과 이완용의 얼굴이 겹치는 건 당연지사다. 이완용은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에 찬성한 다섯 명 중 한 명이다. 또 1907년 7월 24일 정미7늑약에 앞장선 정미칠적 수괴이다. 더하여 1910년 8월 29일 경술늑약 체결의 주적이니 을사늑약, 정미칠적, 경술국적 등 친일반민족 행위에 모두 참여한 매국노 3관왕이다.
만주의 중국 동북 3성인 요동, 길림, 흑룡강성과 시베리아인 러시아 연해주는 고조선과 고구려, 그리고 발해의 옛터이니 우리 땅이다. 또 일제강점기에는 독립투사들의 항일 무장투쟁 본거지이고 독립전쟁터였다.
그리고 오늘에도 중국이 조선족, 러시아가 고려인이라고 하는 우리 동족이 뿌리를 이으며 살고 있다. 그 우리 옛터를 다시 회복하는 일은 앞으로 역사가 어떻게 흘러가고 바뀌느냐이겠지만, 변하지 않는 사실은 우리 민족이 그곳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맘속으로는 여전히 우리 땅인 그 길림성 조선족 자치주 연변의 주도인 연길시는 우리 선열의 항일독립전쟁 현장이다. 이곳의 ‘연길감옥 항일투쟁 기념비’는 그날의 핏빛 역사를 오늘의 우리에게 증언해준다.
연길감옥은 당시 조선인들이 ‘연집강’이라 불렀던 연길시 한복판을 가로질러 두만강이 되는 부르하통하강 남쪽 지금의 연변예술극장(동자 문화궁) 자리에 있었다. 1924년 일제가 높은 회색 벽돌 담장에 전기 가시철망까지 둘러 지은 감옥이다. 첫 탈옥투쟁이 있었던 1931년의 ‘9·18사건’ 전에는 강북대옥(江北大獄) 혹은 ‘길림성 제4감옥’, ‘연길 모범감옥’이라 했다.
항일 무장투쟁을 벌이던 독립투사들이 이곳에 갇혀 일제의 모진 고문과 악형에 시달리며 1931년 초부터 탈옥을 몇 차례 시도했으나 변절자 때문에 실패했다. 1933년 겨울에도 김훈, 윤범, 신춘, 리진 등 지도자급 항일 전사들이 연집강 대교 아래에 수장 되는 등 참혹하게 살해되었다. 이때 ‘리진’이 사형장으로 끌려가며 부른 노래가 ‘연길 감옥가’이다.
‘바람 세찬 남북 만주 광막한 들에/ 붉은 기에 폭탄 차고 싸우던 몸이/ 연길감옥 갇힌 뒤에 몸은 여위어도/ 혁명으로 끓는 피야 어찌 식으랴.’
그리고 1935년 6월 7일이다. 김명주가 이끄는 김영춘, 리대근 등 17명의 결사대는 간수들 대부분이 단오절 운동회에 가느라 경비가 허술해진 틈에 일본인 지도관 히카시 마코도, 감옥장 하승림과 간수 등을 처단하고 무기를 탈취한 뒤 항일투사 수백 명을 탈옥시켰다. 이 연길 감옥 파옥투쟁은 유일하게 성공한 파옥투쟁으로 항일독립군의 의기를 드높였다.
2024년 여름 그 연길감옥을 찾아 당시 파옥투쟁의 영웅들 사진과 기록을 둘러보고 기념비 앞을 지키는 소나무에도 허리를 굽힌다. 문득 떠오르는 매국노 이완용의 얼굴 위에 홍범도 장군 등을 폄훼하고 일본의 정책에 옹호 부응하는 윤석열 정부, 국회, 군인, 방통위 등의 얼굴이 겹친다. 조국을 팔아먹는 파렴치한 자들과 조국의 독립을 위해 생명을 초개와 같이 버린 순결한 독립투사들을 생각하노라니…. 다시 바라보는 항일 독립영웅들의 얼굴이 서글픔이다. 역사를 청산치 못한 후손으로 죄송키도 하고 가혹한 운명과 현실에 그저 가슴이 아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