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岳友 5人의 智異山 縱走記
오전 9시 30분. 남부터미날에서 5인의 岳友들이 구례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실었다기 보다는 도시생활에서의 탈출이다. 60 ~ 70년대 청춘의 꿈을 안고 또는 가난의 질곡에서 벗어나려고 벽파진에서 목선을 타고 진도를 탈출했던 것과는 다르다.
그동안 몇몇 친구들과 서울근교 산에 오르곤 하였다. 이것은 만남과 우정 나누기, 스트레스를 풀고 건강을 다지는 하이킹이다. 요즈음 주말이 되면 산행인파로 발디딜 틈이 없다. 혼란스럽고 짜증나고 눈살 사나운 일이 자주 목격되어 근교 주말산행은 자제하고 있다.
60 중반에 지리산 종주는 다소 무리일지 모른다. 집사람이 몸도 좋지 않은데 동네산이나 오르내리지 그 먼 곳을 왜 가느냐 한다. 요번 종주는 6번째이지만 7년만에 다시 가는 지리산 종주이니 그때는 50대 중반이고 지금은 60대 중반이니 체력 등 모든 신체적 조건이 그때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등산 중 사망원인 제1위는 심장마비다. 나는 협심증과 부정맥으로 무리한 운동을 하면 호흡곤란을 느끼며 특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그러나 무엇이 우리를 남한땅 제일 높은 곳으로 3박4일의 고행(苦行)길을 가게 하는 것인가. 친구가 함께하고 두 다리와 두 눈, 산과 길이 있기 때문인지 모른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는 진리를 깨닫기 위해서 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지리산(智異山)을 글자 그대로 풀면 "지혜로운 이인(異人)의 산" 이라 한다. 구름 위에 떠 있는 고봉 준령마다 영기가 서리고, 계곡은 웅장하면서도 유현(幽玄)함을 잃지 않는다. 천왕봉에서 노고단에 이르는 주 능선의 거리만 25.5km로 60여리가 되고, 둘레는 320여 km로 800리쯤 된다. 지리산의 너른 품안에는 1,500m가 넘는 20여개의 봉우리가 천왕봉(1,915m), 반야봉(1,732m), 노고단(1,507m)의 3대 주봉을 중심으로 병풍처럼 펼쳐져 있으며, 20여개의 긴 능선이 있고 그 품속에는 피아골계곡, 뱀사골계곡, 칠선계곡, 한신계곡, 대원사계곡 등 큰 계곡이 있으며, 아직도 이름을 얻지 못한 봉우리나 계곡이 많다.
1억 3천만 평에 이르는 지리산의 넓이가 펼치는 넉넉함은 보지 못하고 눈에 들어오는 능선과 계곡만을 오르내리는 사람들은 20여번 왔다 가면 지리산 박사가 되지만 100번 ,200번이 넘도록 다니는 사람들은 "지리산은 보아도 보아도 볼 수가 없는 산이다."라고 토로한다. 잘난 자식도 모정을 헤아리지 못하는 것처럼.
구례읍에 도착하여 하나로마트에서 쌀, 갓김치, 배추김치, 소주, 과일, 풋고추 등을 사 배분하니 배낭무게가 2 ~ 3kg씩 늘어난다.. 가능한 배낭무게를 줄일려고 기본반찬 등을 최소화했지만 배낭을 다시 짊어지니 무릎이 무겁다고 반응한다.
택시 타고 성삼재(1,102m) 도착하니 햇볕은 쨍쨍내리 쬐지만 서울 근교산에서는 느낄 수 없는 상쾌한 공기에 코끝이 시원하다. 심장이 좋지 않은 나는 이 상쾌한 공기가 너무 아까워 심호흡으로 마음껏 들어 마셨다. 평소 주말이면 관광버스 등으로 혼잡을 이루던 곳인데 오늘은 우리 일행 이외의 단체 관광객은 일체사절한다는 안내문이 어딘가 걸려 있는 모양이다. 다음 주부터는 대학이 방학에 들어간다. 주말이면 대피소의 잠자리, 화장실, 식수 및 취사장 등이 매우 혼란스럽다. 이런 혼란을 피해 우리일행은 아까운 짬을 내어 주중에 산행하고 있는 것이다. 복받은 자의 화려한 탈출이다.
성삼재에서 2.5km의 임도를 따라 올라가면 노고단대피소가 나온다. 건물이 두 동이었는데 하나는 허물고 그 곳에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변했다. 노고단대피소 주변은 약 4천여 평에 이르는 거의 평지에 가까운 지형으로, 일제시대 미, 호주 외국인 선교사들의 별장을 50여 채나 지었던 곳이다. 1948년 여순사건이 발발한 이후 근 한 달간 이상 반란군들이 이곳 별장촌을 근거지로 삼았다고 하여 그후 국군 토벌대가 다시 들어와 점령하면서 빨치산 거점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불태워 버려 지금은 그 옛 건물 흔적만 공허하게 남아 있을 뿐이다. 1948년 12월쯤 별장 건물들이 불타 파괴되면서 이 당시 노고단 주변의 수목들도 때아닌 피해를 입어 지금도 노고단 일대에는 큰 수목이 보이지 않고 싸리나무 등 관목류만이 잎을 커다랗게 펴고 키를 낮춘다. 마치 포복하는 것처럼 보인다.
노고단대피소에서 노고단정상으로 가는 계단 길은 천국의 계단으로 통한다. 하늘로 길이 나 있다. 산 끝에 마치 천공이 난 것처럼 하늘이 걸려있다 계단길은 내일아침 걷기로 하고 임도를 따라 노고단정상까지 갈려고 했으나 노고단의 자연학습탐방시간이 종료되어 더 이상 올라가지 못한다.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가 미소를 머금고 우리들을 기다린 듯이 돌탑 위에 앉아 있다. 짬이 생겨 서울에서 홀로 무작정 지리산을 찾아 온 국어선생님이란다. 사진도 찍고 담소도 나누다 보니 바람은 거세지고 여기저기서 운무가 석양노을 속에서 학처럼 춤을 춘다. 전쟁의 상처로 많은 사람들이 지병 앓듯 아파한 60년이지만 노고단은 말이 없다. 다만 붉다. 지리산이 붉다.
둘째날 산행(6월13일(수))
어제 저녁부터 한밤중까지 제법 많은 비가 내렸다. 밝은 햇살에 이른 아침 공기는 더욱 상쾌하다. 자연이 준 최대의 산행이 될 것 같다. 매점에서 식수, 라면, 화장지를 사고 노고단 선녀와 함께 서둘러 천국의 계단을 타고 어제 왔던 노고단돌탑에 도달하니 50 ~ 60여명의 등산객이 본격 등산채비를 하고 있다.
등산로가 변경되었다. 옛날에는 자연학습탐방로를 따라 노고단정상 근처까지 갈 수 있었는데 지금은 아예 탐방로입구에서 왼쪽의 비탈길을 따라 새로운 등산로를 만들었다.. 일부 등산객들이 노고단정상 옆에 텐트를 치고 야영하는 일이 종종 있어 이를 막기 위해 새로운 등산로를 만들었다 한다. 이들은 산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아니며 지리산 한번 간 것을 자랑으로 삼는 버러지 인간들이다.
이젠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 노익장(老益壯)인가? 아니면 노욕(老慾)인가? 7년만의 지리산 종주이며 어쩌면 요번이 마지막 종주가 될 수도 있다. 노고단에서 천왕봉을 거쳐 유평리까지 총 35.7km의 능선과 계곡을 일행 모두가 보조를 계속하기는 많은 인내가 요구될 것같다. 주종찬, 하인규, 박경선, 박기청 악우는 영원한 준마(駿馬)지만 나는 이젠 둔마(鈍馬)로 퇴보됬고 더욱 슬로우 스타터(slow starter)이다. 둔마가 준마를 따라 가다가는 도중에 쓰러질거고 준마가 둔마에 맞추는 것은 산행의 묘미를 반감시킨다.
오늘은 노고단대피소(1,507m) → 임걸령(1,320) →노루목 → 반야봉(1,733.5)) → 삼도봉(1,550) → 화개재( 뱀사골대피소:中食)) → 토끼봉(1,534) → 명선봉(1,586) →연하천대피소 → 삼각봉(1.462) → 벽소령대피소(1,350)까지 14.1km를 걸어야 한다.
나는 노루목에서 반야봉에 올라가지 않고 삼도봉으로 직행, 나머지 악우들은 반야봉을 거쳐 삼도봉에서 만나기로 하고 나는 선녀하고 노고단을 출발하였다.
어제 내린 비로 땅은 촉촉하고 때론 너덜지대의 돌은 미끄럽기도 하다. 울창한 나무그늘을 24~26도의 적당한 온도, 습도 및 산들바람에 미모의 선녀와 대자연을 걸으니 천지를 얻은 것같다. 어느덧 임걸령에 도달하니 악우들이 기다리고 있다. 이곳 샘물은 지상최고의 물맛으로 소문나 있다. 물맛은 변함이 없다. 선녀도 지상의 물맛에 감탄한다.
임걸령샘터를 지나면 15분 정도 가파른 오르막이 이어지지만 노루목까지는 비교적 평탄한 길을 지상낙원의 교육, 종교, 자식, 결혼 등의 얘기를 나누며 키만큼 자란 관목숲을 헤쳐 나간다. 많은 등산객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는 노루목에 도착하지만 우리 일행은 줄곳 반야봉으로 올라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노고단선녀가 두손을 내밀며 작별인사를 고한다. 반야봉까지 갔다 다시 하산하여 오늘 서울로 가야 한다. 작별인사를 나누는 것을 보고 어제부터 같이했던 등산객들은 우리가 부녀지간인 줄 알았다 한다. 당당하고 건강하고, 행복하게 이 지상에서 오래오래 살기를 지리산 나무꾼 아비는 빌어 본다.
삐죽삐죽한 돌들이 발바닥을 찌를 듯한 너덜지대 100m를 지나니 평범한 흙길이 나온다. 종주 끝가지 평탄한 흙길이 100m이상 연속되는 되는 곳이 없고 하루종일 200m~ 300m를 오르내린다.
반야봉(1,733.5)은 호남 제일의 봉우리로 무등산과 덕유산, 화창한 날씨에는 한라산도 보인다. 몇번 올라가 본적이 있지만 준마조와 일정을 맞추기 위한 고육지책으로 둔마인 나는 왕복 1시간이상 소요되는 반야봉은 건너뛴다. 전라남북도, 경상남도의 경계선이 모이는 삼도봉에 도달하여 시원한 나무그늘 밑에 자리잡고 일행을 기다린다. 삼도봉에서 보이는 전망 역시 훌륭한데 불무장동 능선과 피아골계곡이 내려다 보이고 건너편에 토끼봉이 복스럽게 걸려있다.
세상을 잊기 위해 나는
산으로 가는데
물은 산 아래
세상으로 내려간다
버릴 것이 있다는 듯
버리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있다는 듯
나만 홀로 산으로 가는데
채울 것이 있다는 듯
채워야 할 빈자리가 있다는 듯
물은 자꾸만
산 아래 세상으로 흘러간다
지금은 그리움의 덧문을 닫을 시간
눈을 감고
내 안에 앉아
빈 자리에 그 반짝이는 물 출렁이는 걸
바라봐야 할 시간
- 지금은 그리움의 덧문을 닫을 시간 (류시화)-
때론 삶의 무게에 짓눌리고 때론 삶의 허전함을 이기지 못해 깊은 산이나 산사를 찾아 헤맨지가 수십년이다. 나는 무엇인가? 나는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는 것인가? 평생을 생각해도 깨우치지 못하고 있다. 종주의 고행길이 잠시나마 세상을 잊고 자신을 바라볼 시간을 갖게 한다.
반야봉에서 삼도봉을 거쳐 화개재로 가는 길은 약 400m 높이를 내려가는 내리막길이며 화개재는 지리산 능선길에서 제일 낮은 곳이다. 이곳 아래는 뱀사골계곡으로 이어지며 남원과 하동간의 왕래길로 양지방 생산물유통의 주 통로였다.
6년전까지는 이곳 뱀사골대피소에서 매점에서 황도, 참치캔도 사고 점심도 해먹고 하루밤 쉬어가기도 하던 곳이다. 지금은 폐쇄된 무인 대피소로 건물만 남아 있다. 대피소가 계곡상류에 위치하여 뱀사골계곡물을 오염시키는 주범이 되어 폐쇄한 것이다. 실제로 계곡을 따라 내려가면 여기저기 이끼가 눈에 띈다. 맑은 물에서는 이끼가 자라지 않는다.
조금 더 내려가면 간장소(沼)가 있다. 옛날 하동에서 보부상들이 남원으로 소금을 팔러 다녔다. 돌다리 옆에 작대기로 소금지게를 받혀놓고 쉬고 있다. 근처 숲속에서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 한쌍이 꼬리를 틀고 짝짓기하는 것을 보고 갑자기 욕정이 발동하여 손장난을 치고 만다.
아무도 보이지 않는 곳에 (四顧無人處)
옷벗고 다릿가에 닿았음을 (脫袴到脚邊)
그님을 마음속에 그리면서 (玉妓心中憶)
붉은 기둥 주먹속을 뚫어 가누나. (朱柱拳中穿)
아롱아롱 붙는 정은 땅 위에 있고 (圈圈情墮地)
눈에 삼삼 그리움에 하늘도 높아 (龍龍日上天)
그대에게 무슨 죄를 짓기로 서니 (郞得何許罪)
헛되이 수천 주먹 수고롭고나. (空手數千拳)
절정에 이르자 자기도 모르게 다리를 쭉 뻣다 작대기를 발로 차고말았다. 지게는 넘어지고 소금가마니는 데굴데굴 굴러 소로 떨어진다.
지리산은 대피소 이외에서는 야영이나 취사행위가 오래전부터 금지되어 있다. 노고단대피소 근무직원이 뱀사골대피소 안에서는 취사가 가능하다 했으니 우리 일행은 여기서 점심을 준비하기 위해 150m의 급경사계단을 내려와 배낭을 풀었다. 지금은 대피소가 관리되지 않으니 샘도 자연적으로 토사에 묻혀 옛날 흔적을 찾기 어렵다. 골짜기에 약간씩 흐르는 물을 식수통에 담아 두번 나르니 취사도하고 식기세척도 가능하다. 밥과 라면에 참치, 김치찌개, 소주 한잔 걸치니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화개재에서 토끼봉으로 오르는 길은 점차 경사를 더해가는 힘든 길이지만 울창한 구상나무, 전나무숲을 거닐어 진달래 관목지대가 펼쳐지는 정상에 오르면 전망이 더할 나위 없이 좋고 또 4월말경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하는 진달래가 토끼봉정상을 온통 붉게 물들여 진한 꽃내음에 흠뻑 취할 수 있는 곳이다. 뒤돌아보면 듬직한 반야봉과 뒤쳐져 따라올 듯한 노고단이 훤하고 천왕봉, 세석, 명선봉으로 이어지는 지리연봉의 위용도 가관이다.
토끼봉이란 명칭은 주변에 토끼가 많다거나 봉우리가 토끼 모양이라서 그러는 게 아니고 반야봉을 기점으로 동쪽, 즉 24방위의 정동(正東)에 해당되는 묘방(卯方)이라 해서 토끼봉(卯峯)으로 부르는 것이다. 토끼봉에서 하늘을 찌를 듯 치솟은 구상나무숲을 내려서면 갖가지 잡목숲을 지나 완만한 능선안부에 이르렀다가 고목나무가 쓰러져 나뒹구는 경사길을 오른다. 능선 평지길이 한동안 계속되다가 돌밭길을 서서히 오르면 총각샘 이정표가 있다는데 찾을 수가 없다. 총각샘은 갈수기에는 말라버리는게 흠인데 지금의 가뭄에는 물한방울 없을 것이니 찾은 들 무슨 소용있겠나. 요번 산행은 앞서가는 준마조를 열심히 따라 가느라 둔마인 나와 기청악우(실은 기청이는 처지는 나를 챙기느라)는 주변경치를 관상할 겨를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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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가다보면 둘레에 7개의 암봉이 기묘한 조화로 우뚝 서 있는 칠선봉이 나온다. 마치 그 암봉들이 일곱 선녀가 노니는 모습 같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칠선봉에서 두어 번 암봉을 넘으면 북변의 경사 급한 바윗길이 나타난다. 노출된 나무뿌리에 의지하여 힘들게 이곳을 올라서면 영신봉이 바로 코앞에 다가선다. 영신봉에 오르면 사방이 두루 조망되면서 광활한 세석평전의 전모가 한눈에 들어온다.
하루밤을 잔 적이 있는 세석대피소는 수용인원 190명을 자랑하는 대규모의 시설로 지리산 대피소 중 가장 크고 운치가 뛰어나다고 평가 받는다. 다만 물사정이 좋지 않다. 노고단 또는 천왕봉에서 오는 종주객, 백무동, 거림, 쌍계사 및 청학동에서 올라오는 등산객으로 항상 붐빈다. 이곳과 장터목대피소는 예약없이는 숙박하기 어렵다. 숙박 15일전 오전 10시부터 인터넷예약이 가능하지만 불과 1~2분만에 동이나고 만다. 너무지쳐 밥맛도 없다. 겨우 한 공기를 물에 말아먹다. 어디 빈터서 잠 한숨 자고 싶지만 적당한 곳을 발견하기 쉽지 않다.
세석대피서에서 촛대봉까지는 완만한 오르막길이다. 폭 1~2m 정도로 잘 다듬어진 아름다운 길이다. 올망졸망한 바위들의 군집체인 촛대봉은 그 바위모양들이 마치 촛농이 흘러내린 듯하다 해서 그렇게 부른다. 햇볕에 따스하게 덥혀진 평평한 바위위에 누워 쳐다본 하늘은 높고 푸르다.
청산은 나를 보고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 하네 탐욕도 벗어 놓고 성냄도 벗어 놓고 물같이 바람 같이 살다가 가라 하네
세상은 나를 보고 덧없다 하지 않고 우주는 나를 보고 곳없다 하지 않네 번뇌도 벗어 놓고 욕심도 벗어 놓고 강같이 구름 같이 말없이 가라 하네. - 나옹선사(懶翁禪師)-
잠이 들었다가 코고는 소리에 놀라 깨었다. 기청악우도 단잠을 잔 것같다. 한숨 자고 일어나니 몸이 한결 가볍다.
어제 벽소령대피소부터 함께 했던 고등학생들이 하나 둘 몰려온다. 가끔 여학생도 있다. 똑똑하고 귀엽게 생겼다. 자기 선생님한테는 인사하지 않는 것같지만 나에게는 볼 때마다 인사한다. 그놈들, 인사성 하나는 밝다. 전주 모 고등학생으로 학년별 10명의 엘리티를 선발하여 천왕봉까지 간다 한다. 장하다. 심신을 연마해서 사회와 국가의 큰 동량이 되길 바란다.
10여년전 6월 하순경, 초등학생 4학년, 6학년 두 아들을 데리고 2박3일 종주하는 부부가 있었다. 학기중인데 수업은 어떻게 하느냐 하니 그게 그리 중요한 일은 아니란다. 가족끼리 지리산 종주를 통해 배울게 더 많을 것이다. 지금은 당당하고 건강한 청년으로 자랐을 것이다. 만나보고 싶다.
처음으로 평탄한 길을 300m정도 걸은 다음 비교적 순탄한 오르막을 오르니 어느덧 연하봉에 도착한다. 장터목대피소와 천왕봉이 가까이 보인다. 장터목은 옛날 산청군 시천면 주민과 함양군 마천면 주민들이 물품교역을 하던 곳이다. 장터목대피소는 목조 2층 마루방으로 수용인원 136명으로 천왕봉 일출감상을 위해 몰려드는 많은 등산객을 수용하지 못해, 휴가철은 물론 눈이나 비가 와 야영하기가 불편한 날에는 심하게 붐비는 곳이다. | |||
종찬악우와 인규악우는 대피소에 배낭을 내려 놓고 천왕봉에 올라가고 경선악우가 밥을 짓고 있다. 내일 새벽에는 랜턴을 끼고 올라가야 하기 때문에 일몰이 다소 이른 이때 제석봉, 통천문을 거쳐 천왕봉에 올라가 석양을 감상하는 것도 보람있는 일이다. 이곳 대피소는 사방이 펑 터져 있어 한여름 저녁에도 바깥에 있기 힘들 정도로 찬바람이 분다. 이른 식사를 마치고 모포를 받아들고 잠자리에 든다. 이곳 등산객 대부분은 천왕봉 일출구경을 원하는 사람들로 모두 일찍 꿈나라에 간다.
마지막날 산행(6월15일(금))
주위가 소란하다. 눈을 떠보니 3시다. 기청악우는 초저녁부터 깊은 잠에 떨어지더만 벌써 일어나서 내 핸드폰 바테리까지 충전해 놓았다. 나는 너무 지쳐 깊은 잠에 빠져들지 못하고 비몽사몽 보내고 말았으니 오늘 하루 등산길이 걱정스럽다. 오늘 일출시각이5시15분. 천왕봉까지 1시간 30분 잡고 3시 반에는 출발해야 한다. 아침 군것질거리로 영양갱 하나, 초코파이 2개, 식수 한통씩을 분배하여 배낭에 넣고 대피소를 나선다. |
하늘에는 그믐달과 별빛이 초롱초롱하다. 어쩌면 오늘은 일출구경이 가능할지 모른다는 기대감에 아침공기가 한없이 상쾌하다.마음껏 대자연을 들어 마시자. 장터목에서 천왕봉으로 오르는 길은 산장 우측으로 경사 급한 돌밭길을 오르는데서 시작된다. 구상나무숲과 기암이 보이다가 어느덧 고사목과 황량한 초원지대 제석봉이 나오는데 6.25 후까지만 하더라도 아름드리 전나무, 구상나무, 주목들이 울창하였다 한다
어느 정도 오르니 숨이 차고, 안개비도 내리며 바람결은 더욱 차가워 진다. 방한복을 꺼내 머리까지 덮다. 랜턴을 착용하지만 운무로 앞뒤가 잘 안 보인다. 아, 오늘도 일출은 틀렸는가? 천왕봉 일출구경하려면 3대가 기도해야 한다더니.
제석봉을 지나 좌우로 암벽 비탈길이 고산지대 특유의 정취를 느끼게 하는 소위 '톱날능선'이라 부르는 암봉연릉길이 이어진다. 능선안부를 거쳐 얼마 오르면 통천문(通天門)에 이른다.
예로부터 부정한 사람은 오르지 못했다고 하는 하늘에 오르는 길목, 통천문은 깍아지는 벼랑 속으로 작은 통로가 있어 그 사이를 비집고 오르게 되어 있는데 몇 해 전까지 나무사다리로 힘겹게 오르던 길이었지만 지금은 철사다리를 타고 갈지(之)자로 편하게 오를 수 있다. 통천문 위로해서 잠시 평탄한 길이 나오다가 거대한 암벽 비탈과 만난다. 우측으로는 사태난 듯 아찔한 낭떠러지이고 그 옆의 튼튼한 쇠줄에 의지하여 어둠과 안개속으로 스릴을 느끼며 올라 간다.
지금 시각은 4시 30분. 아직 일출시각이 45분 남았다. 황량한 천왕봉의 바람을 피하기 위해 몇몇 등산객과 함께 큰 바위밑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인규악우가 어디에 있느냐고 전화를 걸어온다. 잘못 발을 디디면 수백미터 낭떠지로 떨어진다. 아직은 어두워서 피아(彼我)구분이 안되니 걱정스런 모양이다.
일출시각이 가까워져서 천왕봉정상에 오르니 발 디딜 틈도 없다. 바람은 춥고 거칠며, 안개비로 시야는 어둡다. 시간은 지나가고 있지만 태양은 운무속에서 끝내 얼굴을 내밀지 않는다. 운명은 재천이라고 했느가. 아니면 내 기도가 아직 하늘까지 닿지 않음인가.
해발 1,915m로 남한에서는 한라산(1,950m) 다음으로 높은 지리산 최고봉 천왕봉은 하늘을 떠받치는 거대한 암괴로 이루어져 있다. 사방을 빙 둘러보아도 거칠 것 하나 없는 장쾌한 전망을 가진 천왕봉은 하늘에 닿을 듯 웅대한 기상으로 우뚝 솟아 있는데 정상에는 몇 차례 푯말이 바뀌면서 지금은 "智異山天王峯 1,915m", "韓國人의 氣象 여기서 發源되다" 라고 각각 양면에 음각된 높이 1m 정도의 타원형 돌비석이 세워져 있다.
고등학교 한문선생 출신 경선악우는 피곤하지도 않은지 하루종일 입을 쉬지 않는다. 남명 조식선생의 천왕봉 시를 반복해 읊고 설명하니 어찌 배우지 않을 수 있는가.
請看千石鐘 천석 종을 한번 보게
大扣無聲 큰 것으로 두드리지 않으면 소리가 없네
萬古天王峯 만고의 저 천왕봉은
天鳴猶不鳴 하늘이 울어도 소리 하나 없네
- 天王峯 曺植 -
조식(1501 -1571). 호는 남명(南冥). 성리학자.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義를 내세우며 평생 처사로 지냄. 광해군때 영의정으로 추존되다
사진을 찍은 후 하산했다. 천왕봉에서의 하산코스로는 남쪽 법계사-중산리 코스가 가장 지름길로 많이 이용되고 장터목으로 다시 되돌아 내려와 백무동 쪽으로 하산하는 것도 부담없다. 동쪽으로 중봉-써리봉-치밭목산장-대원사코스도 길지만 잡아볼 수 있다.
오늘은 장터목대피소(1,650) →제석봉(1,806) →천왕봉(1,915) → 중봉(1,875) → 싸리봉(1,642) → 치밭목대피소(朝食) → 유평리(中食) → 대원사버스정류장(18km)까지 간다.
위대한 사람은 목표가 있고 평범한 사람은 소망이 있을 뿐이라 한다. 이번 산행의 간절한 소망은 무사고, 안전이다. 건강 및 나이에 다소 무리라 생각했지만 아직은 일행 모두 안전하니 이보다 더 축복받은 일은 없다. 6번째 종주지만 과거 종주에는 사소한 사고와 부상이 한두 건씩 있었다.
안개비 때문에 주위는 아직도 어둡지만 미끄러운 바윗길을 조심스레 내려간다. 중봉-써리봉-치밭목산장-대원사코스는 한번 걸어 본 사람은 두번 다시 걷고 싶지 않다. 전체적으로는 하산코스지만 중간중간 오르내리막길의 연속이고, 여기저기 파이고 미끄러운 나무뿌리들, 수없이 오르내리는 철계단들, 젖고 흙투성이인 밧줄, 가도가도 끝이 없는 너덜지대. 위험하고 힘들고 지루하다.
왜 우리는 이 지옥 같은 길을 가야하나?
달마는 동쪽으로 갔다. 할 수 있으면 힘이 다하는 한 고행(苦行)의 만행(萬行)길을 가자. 마지막일지도 모른다.
악우들의 헌신적인 노력과 희생 없이는 심장문제를 안고 있는 나는 종주를 계속할 수 있을까?. 코펠, 버너, 가스 등을 짊어지고, 빨리 가서 식수받아 밥짓고, 식기세척하고 어렵고 구진 일들을 도맡아 처리했던 종찬, 인규, 경선, 기청악우들의 짙은 우정이 한없이 고맙고 감사하다.
50여년 지기(知己)지만 그동안 몇십년은 소식도 모른 체, 몇 년은 일년에 한두번 만남이 고작이었고, 60이 넘어서야 한달에 겨우 한두번 만나는 친구들. 먼 곳에서도 서로를 믿고 생각했던 친구들. 함께 있지 않아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서로를 걱정하고 칭찬하던 친구들. 각자의 만족보다는 서로의 만족에 더 즐거워하는 친구이고, 사랑보다는 우정, 우정보다는 진실이란 말이 더 잘 어울리는 친구들. 천국은 연인끼리 가는거구 지옥은 친구랑 가는거래
밥 익는 냄새가 난다. 어제 영신봉을 오르는데 갑자기 밥 익는 냄새가 나 너무지쳐 헛냄새가 나는가 했더니 기청악우도 냄새를 맡고 있단다. 조금 지나니 치밭목대피소 1.8km라는 이정표가 나온다. 인적없는 깊은 산속에서 며칠을 보내다 나오면 지나가는 행인, 특히 여인의 화장품 냄새가 너무 역거워 토하기도 한다. 사람은 식물성, 동물성, 술 및 담배 등등을 가르지 않는 최고의 잡식성 동물이다. 사람시체 썩는 냄새가 제일 독하다. 산짐승들에게는 지나가는 등산객의 냄새가 얼마나 지독할가. 등산로 곳곳에 반담골 주의 현수막이 걸려 있다. 7년전에는 보이지 않던 현수막이다. 역겨운 냄새를 풍기는 등산객이 던지는 음식물에 익숙한 산짐승들은 허기를 느껴 지나가는 인간을 공격하는 일이 종종 발생하니 산짐승에게 음식물 투척을 금하고 있다.
치밭목대피소가 보인다. 먼저 도착한 악우들이 식사를 준비하고 있다.어제 점심, 저녁밥을 거의 들지 못했던 나는 꿀맛 같은 식사다. 지금 시각은 9시.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다.
이곳 대피소는 수용인원 40명의 재래식으로 민간인이 운영하고 있다. 이곳을 지나는 등산객이 뜸해 수지타산 맞추기 어려워 일부 정부보조가 있지 않나 생각한다. 야외 취사장이 새롭게 생겼다. 대피소관리인과는 7년만의 재회이다. 이젠 나이가 들어 보인다. 산림에 대해서는 누구에게도 뒤지질 않을 전문가다. 담배 한대 얻어 피며 담소를 나눈다. 과거에는 물줄기가 좋았는데 7년전에 이곳에 와보니 집중폭우로 산사태가 나 샘이 자치를 감추고 말았다. 지금은 그아래 새롭게 샘이 만들어 졌지만 물줄기가 약하고 차가워 세면하기에도 너무 시럽다.
이젠 계곡을 따라 펼쳐지는 미끄럽고 지루한 5.8km의 너덜지대를 통과하면 유평리 마을에 도착한다. 죽음의 계곡이다. 8년전 동행하던 악우가 무릎이 좋지 않아 두개의 배낭을 짊어 졌다. 그날도 오늘처럼 햇볕구경하기 어려운 안개비가 하루종일 내려 돌들이 매우 미끄러 다들 한번씩은 넘어졌다. 삐쪽삐쪽한 돌들을 건너 뛰다 뒤로 벌렁 넘어졌다. 두개의 배낭이 머리위까지 솟아있어 머리를 보호해 다행히 뇌진탕은 당하지 않았지만 죽음의 일보직전까지 갔던 기억이 나를 긴장시킨다.
음산하다. 울창한 숲속에 햇빛마저 없어 어둡다. 공포감을 느낀다. 어제부터 무릎도 아프고 어깨쭉지도 떨어져 나갈 것같이 쑤신다. 등에 담걸린 것같다. 등근육이 파동을 일으키며 떨고 있다. 3일동안 침상에 모포 한장 깔고 잠을 잤으니 휴유증이 나타니는 것같다. 집에서는 침대는 없애고 메트리스 두장을 포개서 깔고 잔다. 이젠 몸이 늙어 용수철이나 고무줄같은 탄력성이 없어진 것같다. 지리산종주는 이것이 마지막이라고 여러번 되뇌인다.
그동안 등산길이 폭우에 많이 망가진 것같다. 흙은 휩쓸러 갔고 돌들은 더욱 날카로 졌고, 길도 여기저기 끊어진 곳이 많다. 계곡물도 말랐다. 이 깊은 산중에서도 인부들이 길을 보수하고, 나무계단과 다리도 설치하고 있다. 만날 때마다 인부들에게 수고하신다는 인사말을 전한다.
먼저 도착한 악우들이 계곡물울 발견하고 탁족하며 쉬고 있다. 나도 3일만에 처음으로 세수하고 발을 씻는다.
빗방울은 점점 커지고 이젠 먹거리가 텅 빈 배낭이지만 무게는 점점늘어만 간다. 다들 언제쯤 이 길이 끝나느냐 하는 눈치다. 한참을 걸어 내려오니 멀리 산아래 달리는 자동차가 보이고 어디선가 송아지 울음소리도 들린다. 마을이 가까워 지고 있는 것같다.
아, 드디어 지붕이 보인다. 좀만 내려가면 유평리 마을, 식당들이 나온다. 평소 주말이면 붐비던 곳인데 비오는 금요일 오후라 문 닫은 식당들이 많다. 여기 올 때마다 식사하고 두번이나 숙박했던 갑을식당만이 장사를 하고있다. 치밭목대피소 관리인의 말에 의하면 주인 아주머니가 치매걸려 식당을 다른 사람에게 넘겼다 한다. 친절한 백발의 아주머니였는데. 나도 늙고, 산천도 늙어가고, 인심도 늙고, 여인도 늙어갔다. 아! 세월의 무상함이여.
계곡물이 내료다 보이는 평상에서 토종닭백숙, 도토리묵, 동동주, 소주를 차려놓고 지난 4일간의 피로와 회포를 푸니 그동안의 허기와 고통이 어느정도 사라지고 만다. 식당주인 내외는 6년전 서울에서 내려왔다 한다. 옛날 갑을식당은 딸내외와 아들내외가 직접 산나물을 채취하고 농사 짓고 닭도 키우는 가운데 할머니 손맛으로 만들어 내는 향취있고 쫄깃쫄깃한 산나물이 별미였는데 지금은 이 맛을 볼 수없어 아쉽다.
비는 계속 내리고 있다. 식당주인이 봉고차로 대원사 버스정류장까지 실어준다. 실어 달라고 부탁하긴 했지만 특별서비스로 고맙게 생각하라는 표정이다. 바쁜척하고 다소 한량기가 있어 보여 대원사 구경하고 가자는 소리는 어울리지 않는 것같다.
대원사 사리전은 비구니스님들이 참선정진 수행도량이다. 대원사를 꼭 들르고 싶은 추억이 있다. 몇년전 유평리에서 숙박하고 이른 아침에 대원사를 찾았다. 경내가 너무 깨끗하고 비구니스님들의 경읽는 소리가 들려온다. 한 비구니스님이 우리 앞을 지나간다.
파르르 빛나는 깍아머리, 아침이슬같은 청초한 얼굴, 난초같은 가냘픈 몸매의 단정하고 소박한 승복, 진리를 갈망하는 청노루 눈빛. 넋을 잃고 미동도 않고 심장고동도 정지된 체 그냥 바라만 본다. 우리 일행 아무도 움직이지 않는다, 조그마한 미동, 소리, 바람에도 모든 것이 날아가 버릴 것같다.
석가는 돌아가기 전 마지막 설법에서 ‘너희들은 저마다 자기자신을 등불로 삼고 자기를 의지하라. 또한 진리를 등불로 삼고 진리를 의지하라. 이밖에 다른 것에 의지해서는 안 된다’라고 설하였다.
이것을 한자로 표현한 것이 ‘자등명법등명(自燈明法燈明)’이다. 석가 스스로 자신이 지도자임을 내세우지 않았다. 석가가 만일 자신을 강조하였다면 ‘나는 세상을 구제하는 자이므로 나를 등불로 삼고 의지하라. 그렇지 않다면 지옥에 가게 될 것이다’라고 설법하였을지도 모른다.
구도자(求道者)는 고행을 통해 진리를 깨닫고 지혜를 얻어 일체중생에게 삶의 지혜와 마음의 양식을 주고 봉사하는 자다. 석가, 예수, 마리아 모두 언어의 고정관념일 뿐, 그분들의 말씀은 한결같다. 선하게 살라는 것이다.
발로, 눈으로, 귀, 코로 지리산을 보았다. 하지만 마음으로 지리산을 보기에는 부족함이 많다. 지리산을 읽으며 비구니스님을 바라보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을 때까지 만행(萬行)길은 멈추지 않는다.
- 2012년 6월. 조규익-
첫댓글 지리산 종주기는 잘 읽었네. 이렇게 많은 분량의 컴퓨터 키보드 눌러 대니라고 손 끝마디가 많이 닳았겠구만...
지리산에 굳이 갈 필요없이 이글을 읽고나면 지리산의 모든것은 종주한 사람보다 더 훤하게 알수있겠네
성치도 않은 몸으로 악우4명을 데리고 등반대장 하느라 고생 많았고 종주기 쓰느라 고생 많았고 고맙네.
다음에 막걸리 한잔 따라줌세.
지리산 전경을 발로 글로 그려내느라 고생한 대장에게 경의를 표하네. 세월이 흘러 60대 중반까지 쉼없이
달려왔지만, 앞으로도 기회는 얼마든지 있는게 아닌가? 대장! 힘내서 가을에 다시한번 가보세나...
인생을 어차피 여정이라 하지 않는가? 살아았는 동안 쉼없이 가보세나
저 황톳빛 세계에 다다를때까지..........
경선, 기청, 인규, 종찬악우들 수고 많았고, 여러가지 고맙게 생각하네. 종종 서울을 떠나 속세를 잊어 버리고 살세.
편집과정에서 일부누락이 있어 내용, 특히 간장소 얘기를 추가하였네.
넋을 잃고 내가 그곳에 간것처럼 읽었네요.규익씨 글솜씨가 정말 대단합니다.나도 따라 가고 싶습니다. 2013년 가을에 힘 모아 함께 갑시다.20살에 갔었던 그때의 지리산의 모습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네요.많이 변한 지리산이 우리를 부르고 있는것 같네요.잘 읽었습니다.
명례 학우, 오래만이요. 과찬의 말씀 들으니 부그럽기 한이 없소. 길순 학우가 여자 혼자 가기가 뭣해 동행하지 않았는데 명례 학우와 같이 갔으면 좋았을 것같네요. 몇년전 결혼식당에서 본 것 같은데 얼굴 잊어 먹게 생겼소.
서울 근교산이라도 종종 같이 합시다. 연락드리 겠습니다.
그때가 언제인가, 처음 지리산 종주를 하던 젊었던 시절을 생각하면서 잘 읽었네, 아련한 추억을 떠올리게 해주어서 고맙네, 그리고 늦게나마 무사 종주를 축하하네, 꼭 다시 한번 종주하고 싶다는 욕망이 가슴 한쪽에서 꿈틀거리네, 5인의 산사람이 하산한 그 코스는 2004년 비오는 8월 어느날 2번째 종주를 하면서 내려온 기억이 나네, 좋은글 좋은 소식 진심으로 감사드리네, 건강하게 ... 박대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