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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진의 한국 나들이]
아침 먹을 사이도 없이 나는 사우나에서 나서는 길로 춘석이가 전날밤에 전화로 알려주던 길을 따라 반시간 남짓이 걸어 예정된 시간에 예정된 지점에 이르렀다. 여덟시 직전이면 내가 가야 할 회사의 통근차가 그곳을 지나므로 손을 들어 차를 세우고 올라 타라는 것이였다.
나는 십자거리 네길목을 순회로 응시하면서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렸다. 춘석이 말로는 여덟시 직전이면 틀림 없이 꼭 온다며 시간을 절대 어기지 말라던 통근차가 여덟시 넘었는데도 나타나지를 않았다. <혹시 오늘은 다른 날 보담 일찍이 지나간거나 아닐까? 나의 시선이 헛갈려 번호판을 잘 못 보고 놓쳐 버린거나 아닐까? 아니면 기다리고 섰는 곳이…> 생각 할 수록 뭔가가 잘 못 되여 헛물 켜고 있는듯 싶었다. 나는 춘석이한테 다시 전화를 걸었다. 춘석이는 인츰 정황을 자기보담 더 잘 알고 있는 박동무한테 전화를 넘겼다. 그도 연길 사람이고 춘석이의 친구였다.
그는 먼저 전화로 내가 기다리고 있는 위치부터 확인 하였다. 위치는 틀리지 않았다. 자주빛 중형 뻐스이고 ㅁㅁ74번인데 내가 섰는 건너편 거리로부터 나를 향해 마주 오다가 네거리에서 90도로 굽어들어 마침 나의 앞을 지난다는 것이였다. 간혹 길이 막혀 조금씩 늦어 올 때도 있으니 조급해 할 것은 없고 차를 못 만나면 다시 전화를 쳐 달라는 것이였다. 자기가 회사에 전화를 걸어 래일 갈거라고 설명할 것이라 했다. 시름이 놓였다. 또한 차의 형태와 색갈, 오는 방향까지 알고나니 감시하기가 무척이나 쉬웠다. 인츰 목표물이 나타났다.
통근차는 도중에 둬사람 더 주어싣고 쏜살같이 달리더니 여덟시반 정각에 한 회사 대문안에 들어섰다. 내가 차에 오리기전 로상에서 좀 지체 된 모양이였다.
정규적인 회사라서 엘지 건설장에서 본것처럼 조회를 거르지 않았다. 조회 형식은 회사마다 제마끔이였다. 마당에 커다란 원을 짓고 사 오십명 되는 사람들이 빙 둘러섰다. 키가 자그마한 50세 쯤 돼 보이는 남자가 몇가지 지시를 내리고 40세쯤 돼 보이는 키큰 남자가 보충 지시를 했다. 후에 알고보니 키가 자그마한 중년자가 그 회사의 박사장이고 보충 지시를 내리던 젊은이는 생산부 박부장이였다. 두사람 지시가 끝난 후 뒷사람이 두 손으로 앞 사람의 두 어깨를 눌러짚고 유아원 애들이 기차놀이 하듯이 박부장의 “하낫, 둘, 셋, 넷…”하는 구령 소리에 발 맞추어 한동안 돌았다. 박부장이 “얏샤!”를 부르니 사람들은 걸음을 멈추고 두손을 하늘로 뻗으며 “야샤!”를 세번 소리 높이 웨치고는 헤여져 공장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누구도 나를 보는척 하지 않았다.
나는 공장안으로 들어서는 박부장을 따라섰다. 그때엔 부장인줄 몰랐지만 무슨 책임자임이 분명했고 먼저 발언하던 중년자는 건물 밖에 각철과 철판으로 달아놓은 층계를 밟으며 2층으로 급히 올라가고 있었다.
“여봐요!”하고 나는 박부장을 불러 세웠다.
“이곳에서 용접공을 쓴다고 알려주어서 찾아왔습니다.”
“그래요?” 그는 나를 깐깐히 훑어보는 것이였다. “용접은 해보셨겠죠?”
“예, 조금요.” 나는 사실대로 대답 했다.
“이리 와 봐요.”하며 그는 나를 용접 작업장으로 데리고 갔다. 손바닥 만큼한 철편 두 쪼박을 주어 작업대 위에 던지더니 “세워서 부쳐보세요.”하는 것이였다. 어쩐지 가슴이 두근거리고 손이 떨렸다. 채용되지 못하면 저녁에 다시 사우나에 가면 되는 것인데 못나게 땜질하여 망신 당할까봐 겁났다. 박씨는 내속을 아는듯 “긴장하지 마시고 맘 편하게 하세요.”하며 고무까지 해 준다. 무슨 원숭이 광대 구경이라도 생긴듯 작업전 사람들이 하나 둘 다가오더니 나를 둘러쌌다. 사실 난 용접공이 아니다. 경력은 40년이라 할 수 있지만 자격증도 없고 용접공으로 불리워 본 일도 없다. 그래서 떨리는 것이였다.
63년도 구정 전이였으니깐 근 40년전, 중학교에 붙은 해의 일이다. 그때의 아이들은 화약총을 만들어 참새 잡이하는 장난을 많이 하였었다. 송아지 친구 두찬이와 나는 그깟 참새는 싫고 산속에 들어가 멧돼지나 곰을 잡아야 한다고 총대가 한메터 되는 장총 제작에 착수 하였다. 바위에 난포 구멍을 뚫을 때 쓰는 속에 작은 물 구멍이 난 강철지레대를 주어왔고 부근 공장에 가 드릴과 용접봉 몇대를 훔쳐왔다. 드릴에 한메터 되는 쇠꼬챙이를 때부쳐야 지레대의 타원형 작은 구멍을 수동 보르반으로 둥글게 다시 뚫을 수 있었다.
나는 전선의 음극과 양극을 접촉시키면 불이 일고 용접봉이 녹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하여 전선 하나는 쇠꼬챙이에 감고 다른 하나는 용접봉에 감아 집게로 꽉 집어들고 드릴과 쇠꼬챙이의 용접 부위에 가져다 대였다. 대였다 뗀 시간이 몇십분의 일초나 될런지 한데 순식간 온 집안에 연기가 꽉 찼고 천정 밑에 늘여진 두갈래의 검은 전선에선 흰연기가 물물 피여오르고 있었다. 하마트면 집에 불을 지르고 밖에 나앉아 설을 쇨번 하였다. 빠짝 놀란 나는 이건 아니다 싶어 마을 탈곡장으로 나갔다. 눈 덮인 탈곡장엔 세갈래의 굵다란 전선줄이 전주를 타고 내려와 눈속에 박혀 있을뿐 아무것도 없으니 화재 위험도 없었다. 결국 첫 용접에 성공 하였고 용접 불빛에 눈을 상하여 한주일간 죽을 고생을 겪어야 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용접모자와 용접집게를 잡았다. 사람들은 불빛을 피하려고 돌아서는데 박부장은 용접모자로 얼굴을 가리우고 주시한다. 나는 먼저 불을 일궈 본 후 용접기의 전류를 조절 하였다. 전류가 너무 낮으면 용접봉을 녹일 수 없고 너무 높으면 엷은 철편까지 녹여버리고 마는 것이다. 나는 단숨에 반뼘가량 때여나갔다. 용접일에서 제일 쉬운것이 두 물체의 내각을 때는 것이다. 용해된 용접봉 철물이 식으면 수축 하기에 각도가 줄어든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나는 실기측험에 합격된 셈이다. 박부장은 나에게 파트너를 소개해 주었다. 그는 서른 댓살 돼 보이는 반 번대머리 젊은이였다. 기술측험에 쉽게 통과된 나는 인간 관계 측험에 걸리고 말았다.
그날 휴식 시간이였다. 번대머리 젊은이는 나를 데리고 휴식실(식당)로 갔다. 자판기에서 커피 두컵을 뽑아 나에게 하나 주었다. 우리는 빈 밥상에 마주 앉아 커피를 마시며 담배를 부쳤다.
“어저씨, 아저씨 보기엔 제가 몇살이나 돼 보여요?”
“음ㅡ한 사십세?” 그의 물음에 한동안 고려하다가 높이 부쳐 대답 했다.
“예?!…” 그는 놀란 나머지 입을 크게 벌린채 아랫말을 찾지 못하였다.
“미안합니다, 나는 원래 사람 나이를 제대로 볼 줄 몰라서…”
“아저씨 큰 실수 한겁니다. 어쩌면 그렇게 엄청나게 볼 수가 있어요?”
참으로 실수 한 것이였다. 그의 머리가 반쯤 벗겨진 탓에 나이보담 늙어 보이는건 사실이지만 40까지는 안 돼 보인다. 그의 실제 나이 스물 아홉밖에 안 되였는데 사람들마다 서른 대 여섯으로 보니 기분이 상한다는 것이다. 내가 만일 그의 나이를 낮추어 스물 대 여섯으로 말했더라면 그는 너무 좋아 기장밥은 몰라도 소주 한잔 사주었을지 모른다. 그자식의 그따위 심리나 신세를 전혀 알리 없는 나는 그래도 그의 나이를 적게 말하면 자기를 깔보는 것이라 할까봐 서른 다섯에 다섯을 더해 마흔으로 말했더니 개판이 돼버린 것이다.
만난지도 얼마 안되는 나하고 제일 처음 한다는 소리가 자기 나이를 알아 맞추라는 것으로 보아도 걷늙어 보이는 자기 주제에 얼마나 신경을 쓰고 골머리를 앓고 있는 놈인지를 알 수 있다. 그 심리적 행실이 병태적이 아닌가 의심을 쌀 정도였다. 아마 누가 그를 나이 많은 것으로 보면 그 어떤 모욕감 아니면 좌절감 같은 것을 느끼는 모양이다. 특히는 이성들 앞에서.
“씹 할, 젊어 보이면 뭘 해? 장가도 못 간 주제에. 내 이마 벗겨 진게 뭐 저하구 밥 달래 술 달래? 제동생하구 아들까지 팍팍 낳고 잘 살고만 있구만…”
가만히 들어볼라니 자기 이상 처남을 욕해대는 소리였다. 내가 제나이를 높이 짚었다고 “아저씨 어찌해도 앞으로 나하구 친해 지긴 천만번 글렀어요.”라고 공개적으로 말하는 어처구니 없는 놈이다.
지금 아무리 생각 해봐도 그회사 이름이 뭣이던지 알 수 없다. 기억력이 말이 아니다. 60명 좌우의 일군을 가진 작은 회사였는데 철판으로 당안궤와 책꽂이를 만드는 것이 주업이였다. 그러니 그회사를 “책꼬지”회사라 부를 수 밖에 없다.
일미리메터 두께의 랭간압연강판(冷轧钢板)을 집채만큼 큰 기대 앞에 끌러 놓아두면 자동으로 한장씩 기대 안으로 빨려 들어간다. 뒤로 돌아가 보면 철궤의 본체나 문짝이 흘러나와 차곡차곡 쌓인다. 그처럼 거대하고 령민한 자동 기대는 처음 보았고 상상도 못했었다. 그기대에서 흘러나온 형체물을 한켠에서 두 검은 피부 젊은이가 전기 점접기로 용접하고 문짝에는 아줌마 둘이 마주앉아 잠글쇠와 손잡이를 단다. 다음 두 젊은이가 본체에 문짝을 두개씩 접시로 련결 해 놓으면 당안궤는 끝난다. 이것들을 큰 트럭에 실어 전문으로 뼁끼칠 하여 구워내는 공장(烤漆厂)에 가져간다. 색칠이 다 되면 다시 실어다 포장하여 팔아먹는데 국내의 곳곳은 물론 세계 곳곳에까지 수출한다.
지붕만 높이 받쳐놓은 넓다란 바깥에 이산화탄소 용접을 하는 사람이 하나 있고 전기 용접공은 번대머리 젊은이와 나 둘뿐이다. 우리가 하는 것은 철제 책꽂이에 들어가는 여러가지 부속품들을 용접 하는 외에 주로는 책꽂이의 샤시 (底架)를 때붙히는 일이다. 삼미리 두께인 열간압연강판(热轧钢板)을 규격에 맞춰 재단하고 형단조프레스(冲床)로 각종 모양를 눌러오면 우리는 그것들을 표준틀에 올려놓고 용접 한다.
그들의 “표준틀”은 여러개의 고압공기 피스톤을 리용하여 용접 하고저하는 물체를 눌러주고 밀어주고 조여주게끔 만들어진, 나로서는 역시 처음 보는 묘하고 멋들어진 설비였다. 장기간 공장 일을 하면서 한개 기술공정 일군으로서 나 역시 많은 표준틀을 설계 하고 제조 하여 생산에 사용 하도록 하였었건만 그들은 모두 용수철이거나 라사를 틀게끔 한 락후한 설계들이였다. 일후에 만약 또 표준틀을 만든다면 꼭 압축공기 피스톤을 써가며 멋들어지게 만들 것이라고 속구구 하였다.
용접이 끝난 샤시는 40-50쎈치메터 가량의 넓이에 4-5메터가량의 길이인데 40-50공근 정도의 무거운 것이라 혼자 다루긴 불편한 것이였다. 그것을 열개 높이로 스무개씩 철편 포장끈으로 묶어놓으면 지게차가 트럭에 실어준다. 검은 색칠을 하여다가 거기에 궤도 위에서 굴러다닐 수 있도록 홈이 진 바퀴도 달고 자전거 사슬바퀴도 달고 변속기와 전동기도 달고 포장한다.
책꼬지의 두메터 높이도 넘는 웃틀은 조립하지 않은 각철대로 따로 포장 하였다가 회사원이 현장에 가 안장 해주고 궤도도 늘여주고 시험조작도 해준다. 궤도란 직경이 30미리메터인 랭발원강(冷拔圆钢)을 한끝엔 구멍을 뚫고 한끝은 구멍에 들어 갈 수 있도록 깎아버리고 콩크리트나 나무마루 바닥에 고정 할 수 있도록 구멍난 철편을 두개씩 용접한 3메터 길이의 철근이다. 건물의 작은 공간에 보다 많은 책들을 넣기 위하여 궤도 위의 책시렁들은 틈 없이 촘촘히 서있다가 컴퓨터에 찾으려는 책의 제목을 쳐 넣으면 틈이 벌러져 책을 꺼낼 수 있도록 한다. 아주 현대적인 책꽂이를 생산하고 있었다.
나는 번대머리 파트너와 표준틀 량켠에 서서 철물들을 주어올리고 자기 앞부분을 용접 하는데 햇내기라서 숙련된 그의 속도를 따를 수가 없었다. 일에 숙달하지 못하니 일로임을 잠시 5만원으로 정한다고 박부장이 알려주었다. 나는 그것으로도 만족하였다. 하루 건너로 곱대거리를 하였는데 저녁 아홉시 까지이다. 그러면 반날 로임을 부가해 준다. 곱대거리는 몇 개인이나 반조가 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전 회사 직원이 한사람도 빠짐 없이 다같이 하는 것이였다. 곱대거리 때엔 용접일 외에 철판 재단도 하고 형재 압연도 하고 밑판 조립도 하고 어느곳이 일이 처지면 어느곳에 가서 하였다. 반달 후 로임 발급이 되여 90만원을 탔다.
새벽에 부천 집 근처에서 마을뻐스에 올라 역곡역에 가 전철을 타고 부평역에서 내려 길가로 나가 잠깐만 기다리면 책꼬지회사의 통근차가 지나간다. 퇴근 할 때도 통근차로 부평역까지 오고 전철을 갈아타고 역곡동에 오고 다시 뻐스를 바꿔 타고 부천 오정동까지 온다. 곱 대거리를 한 날이면 밤 열한시가 넘어야 귀가 하는데 아침 다섯시 전이면 다시 출발 해야 한다. 비록 피로하긴 하지만 능히 견뎌낼 수가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결막염인지 뭔지하는 홍안병에 걸렸다. 나는 처음엔 불찰로 용접 불빛에 상했거나 피곤해서 그렇거니 했었는데 보니 그것이 아니였다. 그시기 그곳에 그병이 한창 많이 돌고 있었던 것이다.
결막염은 서로 마주보기만 해도 옮는다고들 하는데 참말인지는 모른다. 박사장이 일하는 나를 찾아 와 돌아가 치료하고 눈병이 나으면 다시 출근 하라고 말하였다. 틀림 없이 번들이마가 올라가 나를 일 못하게 방간질 했을 것이다. 전날 그자식의 막걸리 심부름을 거절 했더니 보복한 것이다. 돈 이천원을 주면서 회사 대문밖에 나가서 막걸리 한병만 사다달라고 자기 아비벌같은 사람한테 술 심부름을 시키는 것이였다.
“아저씨는 대문밖에 맘대로 나들어도 말 할 놈 없어요”라는 리론이였다. 나도 그들과 한가지로 출퇴근시 접수실 카드에 이름을 적어넣고 거기에따라 돈을 탄다. 보아하니 그놈은 작업시간에 막걸리 마시러 다녀 욕깨나 얻어먹어 온 터다. 그런대로 처음 한번은 참고 들어주었다. 그런데 전날엔 문지기 눈이 어려워 못 나가겠노라 말했더니 더 시키지는 못 하고 망치며 용접모 같은 공구들을 탕탕 내동댕이치며 성난 기색을 보였다.
내 일 솜씨가 굼뜨다고 두덜거리는 때도 많았다. 처음 하는 내가 어떻게 10년을 그것만 해먹은 놈과 비길 수 있단말인가? 어떤곳은 빠뜨리고 용접하지 않아 조립공들이 보충용접을 하라고 부르는 때도 많았는데 언제나 보면 그자가 용접한 켠임이 분명한데 그자는 사람들 앞에서 내탈을 하군한다. 그렇다고 그와 옳거니 글커니 시비 할 수도 없는 신세다. 내가 네깐놈의 스트레스를 꼭 받으며 살아야 하는거냐고 뿌리치고 말고픈 생각이 굴뚝처럼 치솟을 때가 한두번이 아니였으나 나는 참아왔다.
나란 작자는 원래 못나게도 성미가 어질고 나약하고 비겁하다. 어지간한 일이면 손해를 보면서도 덮어버리고 참고 삼킨다. 그러니 무지막지한 놈들은 내 머리위에 올라앉아 똥 싸려한다. 남한테 약하게 보여서는 안된다. 자기자랑 같은것도 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런데 나는 그렇지가 못하다. 그러니 늘상 손해만 보고 큰 일을 못 한다. 인생의 막바지에 와서야 깨달은듯 후회하고 있으니 어처구니 없는 일이고 눈물 나게 기가 막힌 인생이다.
부천에 돌아와 약방에 들리였다. 눈약이나 한통 사다가 잠자리에 들 때 떨궈 넣어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연필 꽁다리만큼한 눈약 하나 사려는데 의사의 진단이 있어야 판다고 한다. 그들이 가르켜주는대로 길 건너 맞은편 자그마한 진료소로 찾아갔다. 의사의 처방을 들고 다시 약상점에 가서 약을 사고 또 다시 진료소에 가서 주사를 맞고… 헛돈 4만원을 썼다.
얼마전 부천 한 미장원에 들어갔다가 4만원을 판 일도 있다. 먼저 젊은 리발쟁이가 대수간 짤라주고는 안마실에 들어가라는 것이였다.
나는 안마는 필요 없고 머리만 짜르면 된다고 하였다. 리발쟁이가 나가더니 요염하게 분장하고 어깨와 허벅지를 드러낸 30쯤 돼보이는 여인이 들어왔다. 나의 어깨와 머리를 몇번 주무른 후 “아저씨 참으로 멋지시네요!”하고는 나가버렸다. 그러고는 4만원을 내란다. 멋지다는 소리에 누가 넘어 갈까봐. 돼지농장에서 일 할 때 북면이나 병천에 가면 머리를 곱게 짜르고 감고 하는데 7-8천원밖에 안 썼는데 이거야말로 산 눈 빼 처백일놈의 세상이 아닌가?
작은 조카애 영이는 “삼촌, 또 당했구만!”하고 나를 놀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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