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에 왔습니다.
지금 강릉에 와 있습니다.
사전에 계획된 여행이 전혀 아니었는데,
어떻게 갑자기 오게 되었습니다.
은행 통장 잔고를 생각하면 부지런히 나가서 벌어도 시원찮은 마당에
이렇게 나와서 거금을 쓰고 돌아다니고 있으니
마음 한 구석이 편치를 않습니다.
이번 여행은 나에게 작지 않은 모험이었습니다.
난생 처음 중고 승용차를 구입한 뒤,줄곳 일터로 출퇴근만 하다가
충주를 벗어나 본 것도 처음이고,
고속도로를 달려보기도 이번이 처음이기 때문입니다.
네비의 자세한 안내를 받으면서 왔는데도 너무 긴장을 해서
도중에 길을 잘못 들어 50KM를 되돌아와야 했고
고속도로 톨게이트 요금소에서는 멋도 모르고 하이패스 전용 구간을 통과했다가
나오는 요금소에서는 사무실로 끌려 들어가
내가 제천 톨게이트에서 들어왔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또 한참의 시간을 허비 하였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강릉 경포 앞바다에 섰을 때,
그제서야 딱딱하게 굳어져서 우울하던 내 마음에 숨통이 좀 트이는 것 같았습니다.
생명이 맨처음 바닷속에서 탄생했다니,
내가 마치 아득한 세월을 타향에서 떠돌다가
지치고 상처 받은 고단한 몸을 이끌고
오랜만에 고향에 돌아온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오대양 육대주를 돌고돌아 경포 해변에 부서지는 저 파도는
나에게 가슴 아픈 인사를 건낸 뒤
또 어디를 향해 먼 길을 떠나려고 하는지.
해변 모래밭에 털썩 주져 앉아 날이 저물도록 바다를 보고 있자니까
뒤에서는 횟집,모텔,편의점 등 상가들이 하나,둘 불을 밝히기 시작했고
그 오색 불빛들이 반짝반짝 파도 위에 부서졌습니다.
숙박료가 싼 여인숙을 찿아 나는 다시 시내로 들어 왔고
역전 앞 허름한 여인숙에 방을 하나 잡아 놓은 뒤
저녁을 겸해 소주를 한 잔 걸친 다음 pc방에 들어와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4.11총선.
이제와서 이런 얘기 해 본들 무슨 소용 있겠습니까마는
내가 도저히 견디지 못하고 마치 탈출하듯 집을 떠난 것도
사실을 그 때문이었습니다.
"전국민 투표거부" 라는 한 가지 주제를 가지고 무려 230편의 글을 썼고
그 글들을 10여 개의 싸이트에 올리면서
이번 선거에서만큼은 이 국민이
자존심을 제대로 한번 보여 줄 것으로 나는 굳게 믿었었습니다.
하지만 선거 결과는 너무도 참혹 했고
내 몸과 정신에서는 힘과 기운이 마치 썰물처럼 빠져나가
앉아 있기도 힘든 물먹은 솜같은 몸을
쓰러지듯 침대에 벌렁 눕히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때 내 마음의 화면에 펼쳐진 광경이 넓디넓은 동해 바다였고
그래서 면도기와 속옷만을 챙겨들고 즉시 집을 나섰습니다.
생각 같아서는 한 며칠 더 돌아다니고 싶지만
내일 일정은 내일 아침에 결정하기로 했습니다.
이번 4.11총선,
아무리 생각 해도 괴롭기만 하고,
잊으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하는데도
마치 찰거머리처럼 따라 붙으며
내 피를 빠는 것 같네요.
내일은 어디에서 이 글을 이어 나갈지...
2012년 4월 12일.
강릉에서 강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