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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가의 이상, 범패로 구현하고 있다
덕림스님
경남 하동군 출생. 1990년 범어사 금강계단 사미계, 1993년 범어사 금강계단 구족계 수지
현, 대한불교조계종 교육원 불학연구소장. 대한불교조계종 어산종장
지리산이 품은 깊고도 화사한 고을, 그 옛날 여기에서 자연과 이상을 노래하며 철학과 인생을 논했을 숱한 문인과 가객들도, 그 깊은 골속마다 깃들어 살던 수행자들도 찬탄했던 천혜의 고장,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쌍계사 아래로 흐르는 화개천(花開川)변의 아름다운 마을에서 나는 태어났다. 아마도 그때 민족문화대백과사전보다 많았을 내 윤회의 페이지가 또 한 장 넘어온 상황이었으리라. 작년부터 교육원 소임을 보면서 부쩍 바빠진 일상 중에 ‘나의 출가’라는 주제로 원고청탁을 받아놓고 번다한 업무와 일정 때문에 미루다가 결국은 책상 앞에 앉을 작정을 했다.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지만 나의 내면을 검색할 때면 언제나 들려오는 소리가 있다. 내 고향 쌍계사(雙溪寺)라는 이름이 그렇듯이 드넓은 지리산 품 섶에서 흘러내리는 두 줄기의 풍부한 산수가 절 아래에서 합류되어 큰 계곡을 이루고 화개장터 바로 아래로 쪽빛 나는 섬진강 어귀까지 쉴 새 없이 뇌까리며 달려 내려가는 화개천의 물소리, 나는 그 물소리를 태어나면서부터 유년기까지 줄곧 들었던 것이다.
나의 어린 시절은 그럭저럭했으며 나는 뭐든 그렇고 그런 법이라고 생각하며 지냈었다. 각박한 세상에 적응하며 살아야 하는 요즘은 훨씬 덜 그렇고 불평불만도 많지만 어린 시절 나의 성격은 대체로 그런 편이었다. 그래서 그랬는지 몰라도 나는 학업에도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핑계기는 하지만 공부에 대해서는 나는 못 했다기보다는 안 했다고 늘 생각했었다. 처음에는 꽤 했으나 나중에는 뒤 쳐졌다. 먼저 태어난 나의 형제들은 어릴 때부터 공부도 잘하고 시골 중학교에서 누이동생끼리 전교 회장, 부회장도 도맡아 하고 대학도 잘 가서 지금도 직장에서 전공을 살려 그럭저럭 근실한 가정을 꾸리며 잘살고 있다지만 나는 제일 늦게 태어나서 막내라고 해서 특별한 대우도 없는 집안에서 느긋함을 천성으로 여기며 살았고 어머니는 그런 나를 작정하고 미워했다. 그러다 보니 바쁘게 성장해 가는 형제들에 비해 나는 뒤쳐졌고 혼자 생각에 잠기는 습관이 생겼다. 그래도 나는 나의 습관대로 생각에 침잠하고 고기잡이도 다니고 자연도 바라보며 여유롭게 살았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서 또래 아이들처럼 나도 성장을 하자 내 여유 있는 생활은 과보를 받았다. 중학교에 진학해서는 공부가 점점 힘겨워지기 시작했고 조금씩 마음마저 힘들어졌다. 이제 막 주니어가 되어 자존감이라는 감정이 형성되기 시작한 나에게 공부로 인해 조금씩 힘겨워지는 상황은 어린 마음에도 고민이 되었던 것이다. 그 시절, 나는 내 나름 그 문제에 대해서 여러모로 고려하고 계획도 세워 보았지만 나의 기대와 달리 향상은 없었다. 그 무렵 나는 등교 때마다 교정에 새겨져 있던 글귀에 눈길이 갔고 언제부턴가 그 글귀가 나의 뇌리를 맴돌기 시작했다. 진리탐구..., 진리탐구란 무슨 뜻일까?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으며 결국 그 생각은 내가 봉착하고 있었던 모든 문제와 연결되기 시작했다. 나는 내가 힘들게 느끼는 그 모든 일의 원인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그 끝에서 무너지고 있었던 나의 자존감을 날아오르게 해줄 뭔가 멋진 세계를 만날 것 같다는 희망이 싹트기 시작했다. 그렇게 문제의식을 매만져 가던 시기의 나에게 불교가 다가왔다.
내가 중학교를 다니고 있던 80년대 중반에는 승려 문인들이 많았다. 걸레 중광, 이청화, 정다운, 이향봉 같이 활달한 젊은 스님들의 책이 그 시절 서점가에서 어린 나의 눈길을 끌었다. 한편 구산스님, 성철스님, 경산스님과 같이 노숙한 큰스님들의 문집들은 젊은 스님들의 문집보다 한 차원 높은 가르침으로 보여 나는 그 책들을 제법 경건하게 한 장씩 넘겨 가며 자세히 읽고 곱씹기를 되풀이했다. 그러다 보니 17세 무렵일 때, 나의 주얼리는 108염주가 되어 있었고 옷도 헐렁한 바지에 벙거지 모자를 즐겨 쓰는 스타일로 변했다. 어느 날 나는 출가의 결심을 굳히고 아버지께 말씀드렸다. “아버지, 저 출가하겠습니다.” 아들의 말을 들은 아버지는 그만 주룩 눈물을 보이셨다. 짧은 순간이었다. 어린애가 하는 짓이 심상찮음을 아버지도 줄곧 바라보고 계셨겠지만 갑자기 출가를 한다는 말에 그동안 못해 줬다는 미안함과 아쉬움이 놀라움의 파도를 일으키셨으리라. 그런 아버지께 미안한 마음이 들어 “그럼 3년만 더 기다렸다가 출가하겠습니다.” 했고 그 약속은 지켜졌다.
그날 이후로도 끝없이 밀려드는 생각은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나를 몰아갔고 나는 숨을 고르고 밥을 줄여가면서까지 생각에 몰입하는 일이 잦아졌다. 삶은 무엇이고 죽음은 무엇이며 내가 보는 이 모든 현상들은 다 무엇인가? 그렇게 생각에 빠져 고등학교도 자퇴를 했고 끝없이 일어나서 실타래처럼 뒤엉킨 삶과 죽음의 의문들은 끝이 보이지 않는 미궁으로 나를 끌고 들어갔다. 이미 성장한 형제들은 세상 고민 혼자 다 하냐고 놀리듯이 말하지만 나는 심각했다. 어떤 때는 휘영청 달 밝은 학교 운동장을 수십 바퀴 이상 달려야 마음이 풀렸고 어떤 때는 불길처럼 치밀어 오르는 의문에 땅바닥에 몸을 던지며 몸부림도 쳤다. 오랫동안 그렇게 하다 보니 미결된 생각들은 나의 작은 머릿속을 꽉 메워버렸고 더 이상 새로운 생각들도, 미결된 생각들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상태가 이어졌다. 답답한 마음을 달랠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는 이름모를 소녀의 가수 김정호의 노래였다. 지리산 화개 십리벚꽃길이 유명하다지만 한밤중에는 아무도 다니지 않고 굽이쳐 흐르는 화개천의 물소리만 들려오는 그 길을 혼자 걸으며 나는 목청껏 노래를 하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석사자(石獅子)라는 구산스님의 법문집을 보다가 한 문구에 눈길이 닿았다. 그리고 그 순간 수년 동안 이어져 왔던 나의 끈질긴 생각의 고리들이 한 순간에 다 끊어져서 사라져버린 느낌이 들었다. 그 문구는 색즉시공(色卽是空)이라는 법문이었다. 전에도 금강경을 간혹 봤지만 반야심경을 모르던 내가 난생 처음 그 한마디를 보는 순간 내 모든 마음의 의문들이 사라져버렸다! 여러 해 동안 그토록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던 의문덩어리들이 한순간에 사라져버렸음을 안 그 순간 어찌나 시원하고 개운하던지 이후 나는 무엇을 어떻게 했는지 모를 정도로 끝없이 이어지는 편안함에 참으로 오랜만에 깊은 안도를 느끼게 되었다. 나는 쾌재를 불렀다. 옳다. 불교란 이렇구나! 그렇다면 이미 결심했듯이 출가는 어차피 결정해 놓은 일이니 그 일은 그때 가서 제대로 해 보리라 생각하고 그때부터는 모든 생각을 놓아버리고 그저 하고 싶은 대로 주유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약속한 3년이 다 되어 내 나이 갓 스무살, 한 달을 남긴 만 18세의 나이로 나는 출가를 단행했다. 사는 꼴을 보니 사회와는 도무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나의 행각에 가족 모두 체념을 했음인지 부모님은 물론 형제들도 괜찮겠냐는 말 한마디 없었고 그 후에도 20년 동안은 아무도 연락을 해오는 일도 없었다. 그러니 절에서 살면서도 우리집은 이상하다고... 생각한 적도 더러는 있었다. 우리집은 처음에는 유교를 봉대하는 분위기였고 중간에 도회지로 옮기면서 형님 누나는 잠깐 교회 오빠, 교회 누나 노릇도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 불교로 전향하고 말았다는 사실을 한참 후에 알았다. 출가한 형제를 생각해서 가족들이 스스로 불교를 원했다는 것이다. 이렇듯 가족 포교는 생각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알아서 잘들 하고 계신 셈이니 출가한 나 역시 제 앞가림만 잘하면 되는 셈이 아니었던가 싶다. 부처님 가르침 그대로 인과응보요 자작자수(自作自受)인 것을, 각자 제 할 일만 잘하고 있으면 되는 것을 누가 누구를 이상하다고 하겠는가?
집 떠나는 날 아침 “아버지 어머니 저 갑니다.” “그래 가나?” 서운하고 가슴도 아팠겠지만 우리의 대화는 짧았다. 애정표현이라고는 세상에서 제일 어색한 사람들이 우리 가족이 아니었던가? 나는 그 길로 진주 터미널로 달려갔다. 터미널에 도착하니 빨간 글씨로 합천 해인사라는 이름을 앞유리에 꽂고 기다리는 직행버스가 있었다. 아 이제 출가로구나... 버스에 몸을 맡기니 저승가는 사자처럼 득달같이 해인사 터미널까지 달려가 준다. 아디다스 스포츠 가방에 갈아입을 팬티와 바지 한 장만 달랑 넣고 세상 홀가분한 마음으로 해인사 터미널에 도착한 나는 그 길로 그 시원하고 넉넉한 가야산의 솔바람을 아직 무명초에 덮힌 뒷덜미로 흠씬 맞으면서 산문에 도착했다. 금강문과 사천왕문을 지나서는 큰법당을 먼저 가야 한다는 생각의 겨를도 없이 행자실로 찾아갔다. 해인사로 출가한다! 오직 그 일만이 내 앞에 놓인 하나의 목표였고 다른 생각은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원주실에 도착해서 처음 보는 행자님께 출가의 의사를 밝히니 입고 온 옷을 헌 옷으로 갈아입혀 놓고 골방에 들어가서 벽 보고 앉아 있으라고 한다. 해거름에 안내한 수각(水閣)에서는 한 선배 행자님이 바가지를 들고 옆에 지켜 서서 세수하고 발 씻고 양말 빠는 데까지 물 한 바가지로 해결하라고 해서 당황했던 기억이 33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다. 행자실에는 나름대로 지켜온 전통이 있었다. 상행자들은 엄격하기 그지없어서 걸핏하면 108배 참회나 300배 참회를 내리면서 입버릇처럼 하심하라고 하니 그 말이 진정 와닿지 않았던 나는 앞뒤 잴 것도 없이 참고 또 참아야만 했다. 그래도 억울하고 못 견디겠으면 속으로 악이다. 깡이다. 외쳐대며 견디는 것이 내 나름에는 최선이었다. 그렇게 달 반여가 지나고 3월이 되니 앞서 고생한 선배 행자들은 모두 수계식장으로 떠났다. 이제는 후발로 도착한 나와 동기들이 해인사 후원(後院)을 관리하고 새로 오는 행자들을 맞이하면서 동고동락하기를 다시 6개월이 지나서 나와 동기생들 역시 수계식장으로 향하게 되었다.
나는 1990년 9월에 범어사 금강계단에서 사미계를 받고 바로 은사스님을 따라 선원에서 동안거를 시작했다. 그 길로 수도암, 용화사로 돌면서 안거하면서 이뭣고? 화두 하나만을 붙들고 심기일전하던 나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 마음이란 옛 조사의 길도 큰스님들의 길도 아닌 오직 나의 길을 가겠다는 소신이었다. 선원을 나와서 원력이 크시다는 지장보살님께 여쭤보면 길을 알려 주실까 하고 한겨울 눈 덮인 고창 선운산 도솔암에서 소매가 닳아 목화솜이 나올 정도로 열심히 백일기도를 올리고는 바로 서울로 상경했다. 기도의 가피가 있었던지 해가 지고 캄캄할 때 서울에 입성했지만 그날 밤 바로 시내 복판에 있는 훌륭한 절에 방부를 들일 수 있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 절은 근대불교의 선각자이셨던 백용성스님께서 창건하신 대각사였다. 나는 그 절에서 기도소임을 보며 출가로 잠시 미뤘던 검정고시를 마쳤으며 이후에는 범패학원을 등록했다. 기왕에 출가했으니 의식도 여법하게 모시고 싶다는 바램이었다.
당시 신문광고를 보고 찾아간 학원은 신대방동에 있었는데 원장님은 박송암스님의 제자로 범패의 기량이 뛰어나기로 유명한 오송강스님이셨다. 나는 일주일에 두 번씩 부지런히 학원을 다니면서 스님이 가르쳐 주시는 대로 한 소절씩 따라 배우고 그 즉시 테이프에 녹음을 떠다가 절에 오면 외워서 한주가 지나면 어김없이 새로운 곡을 익히곤 했다. 절에는 연습할 장소도 없어서 불빛도 없고 한 평도 안 되는 계단 및 창고를 비집고 들어가서 그날 배운 범패를 외웠고 기왕이면 걸어 다니면서도 외우고 지하철을 타고 이동하면서도 시간을 아껴가면서 범패를 외웠는데 그렇게 하다보니 어느새 상주권공을 거의 다 외울 수 있었다. 이듬해인 1994년에 안암동에 있는 중앙승가대에 입학해서 불교학도 공부하고 써클에 가입해서 도반들과 함께 무예도 연마했다. 언제나 수업을 마치면 운동을 했고 운동을 마치고 나면 혼자 테니스장으로 가서 그 야심한 밤에 목이 쉬도록 고성으로 범패를 부르곤 했다. 지금이라면 어려운 일이겠지만 그때는 연습할 때 남 눈치도 안 봤으며 체력이 달려도 이를 악물고 연습했다. 그 결과 전승련체육대회에 나가서 대상의 영예를 안았고 범패합창단을 결성해서 가을축제 무대에서도 도반과 선후배스님들께 선보여서 박수갈채도 받았다.
어느듯 세월이 흘러서 그렇게 범패를 시작한지도 벌써 30년이 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고단함을 이겨내며 열심히 연습했던 것이 오늘까지 범패와 나의 인연을 이어 준 밑천이 되었지 않았나 싶다. 출가를 하면 다 버려야 한다는 말을 흔히 들었지만 나는 버릴래야 버릴 것도 없는 어린 나이였기에, 버릴 때 버릴지언정 아 여기까지구나! 하는 확신이 들 때까지는 무엇이든 아 이것이다! 싶은 일을 하면서 누구의 길도 아닌 나의 길을 가리라 맹세하고 시작한 길, 그렇게 스물셋에 시작한 그 길을 지금도 걸어가고 있다. 이 길을 오래 가다 보니 지루한 생각도 들고 마음 속 걸음에 돌부리가 걸릴 때면 고단하다는 생각도 많이 든다. 결자해지(結者解之)! 스스로 묶은 것은 스스로 풀어야 한다는 생각이 끝내 옳은지는 몰라도 스스로 만든 그 의무감은 사람의 삶을 이토록 고달프게 하는 모양이다. 그럴 때면 그런 생각 자체가 잘못이었나? 묶였더라도 묶인 채로 그냥 살아도 되지는 않았었나? 하는 의문이 들 때도 있다. 삼십년째 걸어오던 그 고단한 길 위에서 이제나 저제나 처음 세운 출가의 이상을 보며 고뇌하고 있던 수일 전, 나는 종단의 부름을 받았다. 위로는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는 대한불교조계종의 종지를 받들고 어산어장(魚山魚丈)이신 인묵스님과 동희스님의 가르침을 이어서 4억8천만 불교인의 행복을 위한 불교의례 범패의 교육과 연구를 담당하는 어산종장(魚山宗匠)으로 임명한다는 소식이었다.
이로서 미루어보니 하늘은 큰일을 맡길 사람에게는 반드시 시련을 준다는 옛사람의 말처럼 비록 어려운 길이었지만 처음 세운 서원을 버리지 않고 정진해 온 과정이나 근래에 있었던 일이 모두 부처님의 가피를 벗어나지 않았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우러러 시방세계에 항상 계옵신 부처님께 일편향(一片香)을 바치오며, 그 옛날 옥천(玉川)의 흑두타께서 부른 범음(梵音)의 메아리가 용궁의 향로를 울릴 때마다 그 소리 듣는 이 태평가로 화답하기를 기원하나이다_()_
- <불교와 문학> 2023년 가을호 中
첫댓글 佛法僧 三寶님께 歸依합니다.
거룩하시고 慈悲하신 부처님의 加被와 慈悲光明이 비춰주시길 至極한 마음으로 祈禱드립니다. 感謝합니다.
成佛하십시요.
南無阿彌陀佛 觀世音菩薩()()()
I return to Buddha, Law, and Seung Sambo.
I pray with all my heart that the holy and merciful Buddha's skin and mercy light will be reflected. Thank you.
Holy Father.
Avalokitesvara Bodhisattva ()()()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