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정 해부학적 명칭을 표방하는 영화 제목에 혹해서 상영관으로 달려갔습니다. 객석에는 생각 외로 빈자리가 없었는데, 대부분 고등학생들이네요. 췌장병을 얻어 이제 얼마 살 수 없는 여고생 사쿠라와, 그녀의 마지막을 지켜주는 남학생 하루키가 그리는 애틋한 사랑(?) 이야기입니다. 물론 췌장도 큰 몫을 합니다.
그런데 영화의 제목이 왜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일까요? 사쿠라 양은 췌장에 대해 이런 말을 합니다. “옛날 사람들은 내장이 병들면 건강한 내장을 먹어 병을 치료했다”, “죽은 사람의 몸을 먹으면 그 사람의 영혼이 깃든다”. 앞의 말은 의학역사상 팩트입니다. 뒤의 말은 인류학적으로 팩트입니다.
인간은 오랫동안 자신의 병을 치료하거나 건강을 얻기 위해 다른 동물의 장기(臟器)를 먹어왔습니다. 곰의 쓸개(웅담), 사슴의 뿔(녹용, 녹각), 물개의 고환(해구신), 소의 담석(우황), 호랑이 뼈(호골), 노루피(장혈)… 특히 동양의학에서는 장기를 약재로 많이 썼습니다. 서양 의학도 마찬가집니다. 다만 동양은 장기를 달여 먹었다면, 서양은 추출해서 주사제로 만들었지요.
동서양 모두 동물의 장기에 관심이 많았다는 말입니다. 그 중에는 췌장도 빠지지 않았는데, 특히 췌장은 약재가 되기 이전에는 ‘스윗브레드(sweetbread)’라 불린 식재료이기도 했습니다.
서양 의학에서는 동물의 장기를 이용해 사람의 병을 치료하는 것을 장기치료(organotherapy)라 불렀습니다. 그 역사는 그리스-로마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가장 활발히 연구되고 이용되었던 때는 19세기 말~20세기 초였습니다. 처음에는 장기 자체를 갈아서 즙으로 먹거나 주사로 맞다가 나중에는 추출물을 주사로 사용합니다. 이런 식으로 제일 먼저 분리된 동물 장기의 유효 성분은 에피네프린입니다. 하지만 그 전에 아주 기발한 연구가 있었습니다.
1889년, 저명한 신경학자인 브라운-세카르(Charles-Édouard Brown-Séquard; 1817~1894)는 ‘기니피그의 고환’에서 추출한 성분을 자신의 몸에 수 차례 주사한 후 회춘을 경험했다며, 고환에 회춘 성분이 있을 것이라는 주장을 합니다. 그때가 일흔도 넘은 나이였는데, 어떤 회춘 현상을 겪었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아이들이나 걸리는 백일해를 앓았다는 후문은 있습니다.

기니피그 고환 추출물을 스스로 주사한 브라운-세카르. ⓒ 위키백과
여하튼, 브라운-세카르의 발표는 많은 연구자들의 의욕을 회춘시켜(!), 고환 추출물을 이런저런 병의 치료제로 시도해봅니다. 더 나아가 고환뿐만 아니라 다른 장기들의 추출물로 병을 치료해보기 시작합니다.
1893년에 영국 의사 조지 올리버(George Oliver; 1841~1915)는 허약한 아들에게 양의 부신(副腎) 추출물을 먹입니다. 부신에는 혈관을 수축시키는 성분이 있다고 알려졌기 때문입니다. 아들이 건실해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5년후 미국 약리학자인 존 아벨(John Jacob Abel; 1857~1938)은 부신에서 유효 성분을 분리해 에피네프린(epinephrine)이라 부릅니다. 동물의 장기에서 처음으로 추출한 유효 성분으로 아드레날린(adrenaline)이란 상품명으로도 유명합니다.

에피네프린을 추출한 존 아벨. ⓒ 위키백과
에피네프린/아드레날린은 의사들이 아주 좋아하는 약물입니다. 혈관을 수축시켜 피를 멎게 하는 지혈제, 쇼크에 빠진 환자의 혈압을 올리게 하는 승압제, 호흡 곤란에 빠진 환자들에겐 숨통을 틔워주는 기관지 확장제로 쓸 수 있는 만능 일꾼과도 같은 약이니까요. 의학 현장을 다룬 영화나 드라마에서 심폐소생술 장면에서도 빠지지 않고 나오는 약물이지요.
그런데 부신에는 에피네프린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벨의 에피네프린은 부신의 10%를 차지하는 속인 수질(髓質)에서 나온 것이었는데, 부신의 90%를 차지하는 겉 부분인 피질(皮質)에서는 또 다른 중요 물질인 부신피질스테로이드(corticosteroid)가 있었답니다(36화 <레슬러>편 참고).
브라운-세카르의 영향을 받은 사람은 또 있습니다. 1891년에 영국 의사 조지 메레이(George Redmayne Murray; 1865~1939)는 갑상선 기능저하증 환자에게 갑상선 추출물을 주사해 효과를 봅니다. 20세기 초에는 말린 난소나 그 추출물을 생리 불순에 썼고, 1920년대에는 황소 고환 추출물에서 남성호르몬을 발견합니다.

에피네프린/아드레날린은 양의 부신에서 출발했다. ⓒ 박지욱
이렇게 브라운-세카르, 올리버, 아벨, 머레이 등이 관심을 가진 그 유효성분은 우리가 ‘호르몬(hormone; 움직이게 하는 것이란 뜻. 動因?)’으로 부르는 ‘내분비 물질’입니다. 내분비(內分泌)란 혈액으로 바로 분비되어 표적 기관에서 쓰이고 사라지는 것이지요. 우리가 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한결같이 아주 중요한 일을 하는 물질들입니다. 이 호르몬 중 1920년대에 알려져 현대 의학 최고의 발견으로 자타가 공인하는 물질이 바로 췌장에서 얻은 인슐린(insulin)입니다. 이제 그 이야기로 들어가볼까요?
기원전 3세기경에 그리스 해부학자는 췌장을 처음으로 발견합니다. 수백 년이 더 지나서야 ‘판크레아스(pancreas)’란 이름을 가졌지만 민둥하게 생긴 이것을 위장을 받쳐주는 방석 정도로 여깁니다. 1642년에 이탈리아에서 활동하던 독일 출신의 해부학자 비르숭(Johann Gregor Wirsung; 1589~1643)은 췌장의 내부에 있는 관(췌관)이 십이지장으로 연결된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관은 뭔가를 흘려 보내는 것이지요?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은둔의 장기인 췌장에서도 장족의 발전이 일어납니다. 티데만(Friedrich Tiedemann; 1781~1861)과 그멜린(Leopold Gmelin; 1788~1853)은 췌장액의 소화 기능을 확인했고, 모이즈(D. Moyse)는 소화액을 만드는 외분비선을 확인했고(1852년), 현대 생리학의 아버지인 베르나르(Claude Bernard; 1813~1878)가 췌장의 소화 기능을 확립합니다. 여기까지는 소화액을 만들고 분비하는 ‘외분비’ 기능의 이야기지요. 그 다음은 너무나도 중요한 ‘내분비’ 기능의 발견 이야기입니다.
1683년에는 스위스의 브루너(Johann Conrad Brunner;1653~1727)는 개의 췌장을 잘라내니, 지금 우리가 아는 당뇨병 증상이 나온다는 것을 확인합니다. 하지만 그 이유는 몰랐습니다.
1869년에 독일의 의대생 랑게르한스(Paul Langerhans; 1847~1888)는 췌장에서 소화효소를 분비하는 세포들 사이에 점점이 외로운 섬처럼 흩어져 있는 세포를 발견합니다. 그 기능은 몰랐지만 나중에 물질대사를 조절하는 물질을 분비하는 곳으로 알려지며 ‘랑게르한스의 섬(islet of Langerhans)’ 라 불립니다. 여기서 만드는 물질, 다들 잘 아시는 바로 ‘인슐린’입니다. 이것이 부족하면 당뇨병이 생기는 것이지요.

학생 때의 랑게르한스. 그가 발견한 세포들의 섬이 인슐린을 만드는 곳이다. 인슐린은 섬이란 뜻에서 왔다. ⓒ 위키백과
20년 지난 1889년, 스트라스부르의 폰 메링(Joseph von Mering; 1849~1908)과 오스카르 민코브스키(Oscar Minkovski; 1858~1931)는 개의 췌장을 잘라내면 당뇨병이 생긴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200년 전에 확인된 사실이긴 한데 알려지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이때부터는 ‘췌장→당뇨병’의 관련성에 대한 연구들이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1893년에는 장기요법의 일환으로 췌장즙(汁)을 환자에게 먹이거나 주사를 해보지만 효과는 없었습니다.
갑상선은 되고, 췌장은 안 되는 이유가 뭐지? 사실 지금 보면 이유가 간단합니다. 췌장을 즙으로 만들면 인슐린과 소화 효소들이 마구 뒤섞여 버립니다. 그러면 단백질 분해효소인 트립시노겐과 단백질 성분인 인슐린의 ‘잘못된 만남’이 성사됩니다. 결과는 인슐린 분해! 추출물 속에는 인슐린의 자리는 없지요. 그렇다면 이 잘못된 만남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면 될텐데, 이것이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1908년에 베를린의 췰처(Georg Ludwig Zuelzer; 1870~1949)는 췌관이 막히면 소화효소 분비선이 망가진다는 것을 알고 송아지의 췌관을 일부러 막아놓고 한참을 기다립니다. 소화액 분비선이 다 망가지길 기다려 췌장을 떼어내어 갈아낸 후 추출물을 얻습니다. 그리고 췌장을 떼어내어 당뇨병을 앓게 만든 개에게 주사합니다. 개의 당뇨 증상이 싸악 사라집니다!
용기를 얻은 췰처는 사람에게도 소의 췌장 추출물을 주사했는데, 역시 효과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추출물 속 불순물이 문제를 일으킵니다. 비슷한 사례들이 시카고와 루마니아에서도 있었지만 역시 불순물이 해결되지 않아 난관에 부딪힙니다. 하지만 토론토에서는 이 문제까지 마지막으로 해결해 인간에게도 안전하게 쓸 수 있는 ‘인슐린 주사제’를 개발합니다. 이 이야기는 다음에 한번 다루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부르는 이름 ‘췌장(膵臟)’은 근세기 일본인이 만든 이름입니다. 라틴어 이름인 pancreas는 pan 은 ‘전부’, creas 는 ‘살코기’란 의미의 합성어로 ‘순 살코기’정도의 뜻이지요. 하지만 일본인들은 단순한 고깃덩이가 아니라 ‘분비선’이 모여있다는 의미를 살려 ‘많이 모인 것’이란 뜻의 한자 췌(萃) 에 ‘살코기’를 의미하는 육(肉)의 한자부수 형태인 월(月)을 합하여 ‘췌장(膵臟)’이란 신조어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니 일본인들도 췌장이란 이름을 쓴다고 놀랄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일본인들의 사유 체계를 편하게 빌려 쓴 것에 놀라야 하겠네요. 필자가 확인한 바로는 췌장에 해당하는 순 우리말은 없습니다(아시는 분은 알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아직 우리는 췌장을 발견하지 못한 것이네요. 영화가 거의 끝날 무렵, 그래서 은근히 질투가 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