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저 수준으로 떨어진 출산율을 바라보는 정부는 답답하다. 그러나 "아이 많이 낳으라"고 외치는 정부를 보는 부모들의 마음은 더 답답하다. 어린이집 등 보육 시설의 수도 크게 늘어났고 2010년도 중앙정부 보육예산은 약 2조 원에 달한다. 하지만 이러한 지원 정책은 대다수 부모들에게 피부로 다가오지 않는다. 이들은 여전히 아이 키우기가 어렵다고 말하고 출산율은 높아지지 않는다. 비용만 높은 보육 현실과 헛바퀴 도는 보육 정책, 그 속을 들여다본다. <편집자>
# 1. 아이를 영어유치원에 보내는 김선미 씨
서울 목동에 사는 김선미(36) 씨는 6살 난 아들을 지난 봄부터
영어유치원에 보내고 있다.
원어민 강사가 오전 10시부터 오후 3시까지 수업을 진행하는 이 곳은
학원비로 월 100만 원 가량을 받고 교재비와 여타 활동비 등을 포함하면 120~130만 원 가량이 든다. 1년이면 1400만 원 가량의 목돈이 드는 것. 그러나 목동 일대에는 이미 십여 개의
영어유치원이 들어서 있고 일부는 예약도 꽉 차는 등 성황리에
운영되고 있다.
초등학교에 영어 수업 시간이 확대된 데다 장차 국제중학교 등을 보낼 생각을 하면 아이를
영어 유치원에 보내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라는 것이 김선미 씨의 주장이다.
#2. 학원, 학습지에 바쁜 박보민 씨의 아이
경기도 과천시에 사는 박보민(36) 씨는 아이들을 부지런히 학원에 보내고 있다. 초등학교 4학년인 아이는 수학과 원어민 영어학원을 다니고 6살 아이는 사립
유치원과 영어학원을 보내고 국어, 수학
학습지를 시키고 있다. 아이가 벅차하는 것 아닌가 생각하기도 하지만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최대한 알고 있는 편이 아무래도 유리할 것 같았다. 비용도 만만치 않다. 사립 유치원 원비는 한 달에 31만 5000원,
학원비는 14만 원에 교재비 1만 2000원 가량이 든다. 1년 기준으로 계산해보면
대학 등록금보다 많은 돈이다.
|
▲ 아이들이 강사의 지시에 따라 영어 글자판과 그림판을 들어 보이고 있다. ⓒ연합뉴스 |
'영어 유치원 열풍', 유치원을 밀어낸다
누군가는 '한국에서 아이가 태어나면 사교육 시장에 등록된다'고 표현한다. 아이가 태어나면 먼저 접하게 되는 것이 교육이 공교육이 아니라 사교육이기 때문이다. 의무·무상교육이 초등학교에서부터 시작되는 한국 교육에서는 당연하게 받아들여 진다. 부모들은 돈을 주고
유아 교육을 사고 아이들은 학교보다 학원을 먼저 접한다. 그런 사이에 '무주공산' 0~6세
유아교육을 두고 사교육 경쟁은 끝없이 달리고 있다.
당연히 각 부모와
가정의
경제 형편에 따라 유아가 받게 되는 교육의 수준도 큰 차이가 난다. 생애 첫 교육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교육의 양극화는 분명 우려할만한
문제다. 특히 유아 사교육의 과열은 바르게 앉기, 글자쓰기부터
배우는 초등학교 1학년 교육을 약화시키고 아이들 간의 교육 격차를 만들어낸다. 유아 교육 단계의 공교육 약화가 사회 양극화
현상의 출발이 되는 셈이다.
가장 대표적으로 꼽을만한 유아 사교육의 현장은 '영어유치원'이다. 이들의 특징은 단연 고액의 학원비다. 보통 오전 10시부터 3시까지 운영하는 학원의 경우 월 60~70만 원 대부터 월 100~120만 원 대로 구성되어 있다.
하루에 50분 가량 수업하는 일종의 '단과' 학원도 보통 10~15만 원 가량이 많지만 25~30만 원 가량의 '고급' 학원도 많다.
캐나다 수업 방식 그대로', '원어민 직접 교습' 등을 내세우는 영어 유치원들은
프랜차이즈 사업을 거듭하며 대형화 하고 있다.
영어유치원은
이름은 '유치원'으로 쓰고 있지만 이들은 '유아교육진흥법' 등에 따라
설립된 정식 유치원이 아니라 학원에 해당한다. 서울 강남구와 서초구에서는 이미 영어유치원의 숫자가
일반 유치원의 수를 넘어섰다. 영어 유치원의 인기에 밀려 문을 닫는 일반 유치원이 속출할 정도다. 법령에는 일반 학원과 구분해
영유아 학원을 별도로 규정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운영 방식이나 학원비는 학원 운영자가 임의로 정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른
지역에서도 어렵지 않게 영어 유치원 열풍을 확인할 수 있다. 정부 통계에 따르면 만 5세 유치원 취원율은 2007년 56.2%에서 2008년 51.6%로 떨어지는 등 지속적인 감소 추세를 보이고 있다. 지속된 저출산으로 인해 유아의 수 자체가 줄어든 것도
원인이지만 영어유치원 등 유아 학원의 난립으로 유치원이 경쟁에서 밀리고 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이에 대해 육아정책연구원은 "현행 학원법은 유아 교육의 특성과 현황을 반영하지 못하고 초중등학교와 동일하게 규정되어 있다"며 "유아를 대상으로 오전부터 운영하는 반일제
유아학원은 일반적인
시간제 학원과는 다른 지도, 감독 내지는 규제조항이 필요하다"고
제안하는
보고서를 내기도 했다
유아도 학원, 학습지에 바빠요
영어유치원을 보내지 않으면 박보민 씨처럼 별도의 영어 학원을 보내거나 학습지를 시키는 경우도 많다. 사립 유치원 비용과 이런저런 학원비를 합하면 차라리 영어유치원을 보내는 편이 아이도 덜 피곤하고 낫다는 반응이 나오기도 한다. 유아 사교육 역시 '국,영,수'가 많지만 좀더 어린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놀이학원과
미술학원도 성행한다. 놀이학원의 월 교습비는 50만 원 대,
미술학원은 20만 원 대다.
지난해 12월에는 유아 사교육을 시키는 가정 사이에서도 양극화가 나타난다는
조사결과가 나오기도 했다. 부모의 소득에 따라 선택하는 학원의 차이가 크다는
설문조사 결과가 발표되기도 했다. 육아정책연구원이 유아 사교육을 시키는 가정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소득 450만 원 이상
가구는 영어 학원을 선택하는 경향을 보이는 반면 소득 300만 원 미만의 경우는 미술학원, 놀이학원 등을 많이 선택하는 경향을 보인다는 것.
물론 '영어
조기교육', '유아에 대한 사교육'이 이후 청소년기 학습에 까지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느냐에는 이견이 있다. 6살 터울의 남매를 둔 이현미 씨는 "첫 애가 영어유치원 다닐 때 영어를 원어민처럼 잘하길래 크게 기대했더니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자 어느새 영어에 대한 흥미를 잃고 보통 수준이 됐다"면서 "둘째 애는 보통 유치원에 보낼 생각"이라고 말했다. 많은 유아교육
전문가들도 "전인 교육이 중요한 유아 시기에 영어에만 치중한 사교육은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고 조언하기도 한다.
문제는 이러한 사교육 열풍이 유아 공교육의 부재에 따른 결과물이라는 점이다. 이제까지 앞선 편에서 살펴 본 것처럼 한쪽 편에는
보육료 자체를 부담스러워 하거나
보육료 지원을 받더라도 특별 활동비, 교재비 등 부가적인 비용을 버거워하는 부모들이 있다. 반면 다른 한쪽 편에는 애초에 고가의 사교육에 의존하는 부모들과 비정상적인 조기, 특기 교육 열풍 속에 사교육 시장을 전전하는 유아들이 있다.
"유아 교육 투자는 약 7배의 효과 불러와"
이일주 공주대 사범대학 유아교육과
교수는 "만 0~6세를 위한 새로운 공교육 과정을 개발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일주 교수는 "3~5세까지 완전한 무상교육 체제로 유아 교육 과정이 공교육화 되지 않으면 사교육 열풍도 잠재울 수 없고 저출산 문제도 해결 할 수 없다"면서 "초중등 교육은 무상 교육을 넘어 무상
급식까지 이야기하는 마당인데 유아 교육만 사각지대에 빠져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유아 공교육이 이뤄지지 않는 핵심적인 원인 중 하나가 교육시설, 즉 유치원과
보육시설의 이원화라고 봤다. 현재 유치원은 교육과학기술부가 관리 감독하고 어린이집 등 보육 시설은 보건
복지부가
관장한다. 이 교수는 "유치원과 보육시설이 동일한 유아 교육
기능을 수행하면서 정부 부처를 달리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설립별, 소재 지역에 따라 불평등한
대우를 받는 것은 말이 안되는 일"이라고 짚었다.
이미 많은 유아 교육 선진국들은 만 0세부터 초등학교 취학 전까지를 하나의 유아교육 및 보육 체제로 통합해가고 있다.
영국,
스웨덴,
호주,
프랑스 등에서는 대표적인 유아교육 기관의 명칭을 'Preschool(
유아학교)'로 부르고 있다. 만 5세부터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영국에서는 1998년부터 모든 만 4세 유아들에게 무상교육을 제공하기 시작했고 2004년부터 3세 유아들에게까지 확대했다. 만3~4세 유아들은 일주일에 12.5시간, 38주 간 무상 교육을 받을 권리를 가지고 있다.
유아 교육에 대한 정부 지원, 혹은 유아 공교육의 필요성에 대한 흥미로운 연구도 있다. 영국 버크백 대학의
에드워드 멜피시 교수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1년에 한 유아에게 2500파운드를
투자하는 것은 부모에게 1만7000파운드를 직접 주는 효과가 난다. 이 결과에 영국정부는 만 3~4세 유아 무상교육을 실시했다.
미국에서도 유아 교육에 1달러를 투자한다면 후에 16.14달러의 교육 효과를 얻을 수 있다는 연구결과(Perry Preschool Project)가 발표됐다.
이일주 교수는 "유아기의 통합 전인교육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국가에서 공교육으로
시행하는 것은 전세계적인 추세인데 한국에서는 유아 교육은 학원이나 어린이집이나 아무나 해도 된다고 생각하니 국가적으로 큰 손실인 것"이라며 "이원화된 유아
교육 시스템을 통합해 영유아 공교육을 시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채은하 기자,허환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