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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금 교회력으로 대림절을 지나고 있습니다. 기다림의 절기인 대림절은 성탄절로 이어집니다. 우리는 곧 성탄절을 맞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기다리는 것은 단순히 성탄절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실 그날을 기다립니다.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은 이 땅에 다시 오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날은 반드시 올 것입니다. 그 날을 기다리며 우리는 오늘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기다리는가 하는 것은 무척이나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 기다림은 곧 오늘 우리의 삶을 결정해 주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은 모두가 이 땅에서의 마지막 날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누구도 예외는 없습니다. 그날이 오면 우리는 이 세상을 떠나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 날을 바라보며 오늘을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날을 바라보며 준비하는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이 없기를 바라며 더욱 믿음을 지키고 성실하게 주님을 섬기게 됩니다. 이 땅에 남아있는 사람들과의 관계 또한 오해나 갈등 같은 상처로 남지 않기를, 우리는 또한 이웃들과 더불어 사랑과 관용을 베풀며 살아갈 것입니다. 세상에 속한 것에 욕심부리지 않고, 이 땅에 보냄받은 소명을 생각하며 그 소명을 다하기에 힘쓸 것입니다. 그날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아무런 준비도 없이 마침내 그날을 맞이한다면, 그 때 하나님 앞에서 무척이나 당황하게 될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가 이 땅에 다시 오시는 그 날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날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앞에 서게 되고, 하나님은 우리를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날을 기다리며, 그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당황하거나 부끄러움 당하지 않기를, 힘써 믿음을 지키고, 저마다의 소명을 다하며, 하나님과 이웃 앞에 더욱 성실한 하루 하루를 힘써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지에서 돌아온 이후에 선포된 말씀입니다. 유다왕국이 바벨론 제국에 무너지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으로 끌려가 그곳에서 포로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그로부터 약 50년이 지난 후 바벨론 제국은 페르시아에 의하여 무너졌고, 페르시아 황제 고레스는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온 식민지 백성들은 모두 다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하는 칙령을 내렸습니다. 그 칙령에 따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나라 없는 식민지 백성으로 살아가는 그들이었습니다. 50여년 만에 돌아온 땅에서 무너진 집을 세우고 황폐해진 포도밭과 밀밭을 갈아 엎으며 농사를 짓고 열매를 얻는 것도 어려웠습니다. 무너진 성전을 다시 세웠지만, 그러나 이전 영광에 비한다면 성전은 너무나 초라하였습니다. 언제쯤 나라를 다시 세우고, 참된 여호와 신앙을 회복하고,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평안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을 것인지, 기대하기조차 힘든 고통스런 삶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을 붙들어준 것이 있습니다. 장차 위대한 한 왕이 나타나 민족을 구원하고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위대한 나라를 회복시켜 주실 것이라고 하는 믿음이었습니다. 오늘 분문은 바로 그 위대한 왕 메시아에 관한 예언의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 1절에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심이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셨다는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왕이나 제사장, 혹은 선지자와 같은 중요한 직책을 맡겨서 구별할 때 그 머리 위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기름을 부으셨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마솨흐’입니다. 바로 이 말에서 ‘메시아’란 단어가 나왔습니다. 메시아란 말은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다리던 그 위대한 왕, 기름 부음을 받은 왕, 메시아에 관한 말씀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어서 하나님이 기름을 부으신 메시아의 사명이 무엇인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입니다. 교우 여러분, 가난한 사람들에게 있어서 아름다운 소식은 무엇이겠습니까? 물질 중심적인 가치관에 젖어있는 현대인들에게 아름다운 소식은 쉽게 부자가 되는 법일 것입니다. 대박이 날 주식 종목이나, 유망한 사업에 대한 정보 같은 것들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아름다운 소식은 그런 의미는 전혀 아닐 것입니다. ‘가난한 자’는 누구입니까? 경제적으로 곤고한 사람, 물질적으로 곤핍한 자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가난한 자는 또 다른 의미로 쓰이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가난한 자는 경건한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결코 재물에 소망을 두지 않습니다. 부자가 되든, 가난하게 살든, 상관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섬기고 주의 계명만 지키며, 하나님만 의지합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붙들고 살아가기 때문에, 때로는 불이익이나 고난도 감수합니다. 세상에서는 소유가 곧 힘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세상적으로도 가진 것도 없고 힘도 없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나 재물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메시아가 오시기를 기다리며 하나님의 나라가 속히 임하기를 기다립니다. 이것이 가난한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사람을 일러 심령이 가난한 자라고 말씀하셨고, 천국은 바로 그런 사람의 것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물론 가난은 불편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부끄러운 것은 아닙니다. 물론, 부끄러운 가난도 있습니다. 땀 흘려 노동하지 않고 인생의 쾌락만 추구하며 게으름을 피우다가 가난하게 되었다거나, 물질에 지나친 욕심을 내고 한탕주의에 빠져서 가난해졌다면 그 또한 부끄러운 가난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삶의 가치가 물질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고 그래서 물질을 구하기 보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다 보니 상대적으로 가난하게 되었다면 그와 같은 자발적 가난은 결코 부끄럽지 않은 가난입니다.
그렇다면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너를 사랑하신다,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며, 믿음을 지키고 계명을 따라 순종하며 살아가는 그 삶을 하나님이 진정 기뻐하신다’는 소식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바로 너의 것’이라고 하는 선포가 아니겠습니까? 산 위에 오르셔서 예수님은 선포하셨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의 것이다”. 참으로 아름다운 소식입니다. 메시아의 시대에 가난한 자가 복을 받으며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의지하지 않고 세상 재물을 탐하면서, 주님의 뜻을 구하지도 않고 오늘을 살아간다면, 메시아가 오시는 그날,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할 수 없을 것입니다.
메시아의 사명은,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시는 것’입니다. 마음이 상했다는 것은 마음이 상처를 입고 부서졌다는 의미입니다. 실망하거나, 좌절하거나, 상처를 입어서, 내 힘으로 도저히 다시 회복하고 일어서기가 불가능한 상태입니다. 내 힘으로는 도저히 일어설 수가 없으니, 하나님 앞에 자기 자신이 너무나도 무력하고 초라한, 아무 것도 아닌 존재임을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 마음은 겸비한 마음입니다. 오직 하나님께 의지할 수밖에 없는 마음입니다. 시34:18에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라고 말씀하였습니다. 마음이 상한 자, the brokenhearted를 가까이 하신다는 것입니다.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신다고 우리 말 개역개정은 번역했는데, ‘충심으로 통회한다’는 말은 킹제임스 성경은 contrite spirit이라 했고, NIV 성경은 crushed in spirit으로 번역했습니다. 죄를 깊이 뉘우치는 뜻이고, 죄 책감으로 인하여 그 영혼이 산산히 부서진 사람입니다. 그렇게 마음이 성한 사람들을 하나님은 가까이 하시고 구원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사람으로서 우리를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를 절망시키는 문제는 무엇입니까? 각자 가지고 있는 상처도 있고, 문제도 있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 메시아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우리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죄’의 문제일 것입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바울은 그렇게 자신의 죄로 인하여 절망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그렇게 토로하였습니다. 그런데 시 51:17에서 다윗은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신다는 것입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라”고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말슴하셨습니다. 메시아가 오시면 그는 자신의 죄로 인해 애통하며 마음이 상한 자를 고쳐 주신다고 오늘 이사야는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메시아는 ‘포로된 자에게는 자유를, 갇힌 자에게는 놓임을 선포한다’고 말씀하였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자유인인 줄 착각하고 살아갑니다. 나 스스로 모든 것을 자유롭게 선택하고 판단하고 행동하며 주체적으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포로가 되어 있고 갇혀 있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의 가치관에 붙잡혀 길들여져 있고, 내가 아는 지식이나 경험에 갇혀 있습니다. 나 스스로 자유롭게 결정하며 살아가는 것 같지만, 그러나 어느 새 길 들여진 습관이나 약물에 중독되고 있고, 세상 문화와 가치관에 매여 있습니다. 더군다나 죄의 유혹 앞에 우리는 무력하기 짝이 없습니다. 바울도 고백했습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나는 원하는 선을 행할 자유가 없습니다. 내가 원하지 않는 일을 행하지 않을 자유가 없습니다. 내 안에 또 다른 내가 있습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는 죄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내 의지대로 선을 행할 자유를 잃어버렸습니다. 율법과 죄, 그리고 심판과 사망의 권세에 우리는 사로잡혀 있는 것입니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낼 수 있겠습니까? 메시아가 오시면 우리를 자유하게 하시고 우리를 해방시켜 주신다는 것입니다. 죄와 사망으로부터 우리를 자유하게 하시고, 심판의 두려움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또한 2절에서, 메시아는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자를 위로하신다”고 말씀하였습니다. ‘여호와의 은혜의 해’는 ‘희년’을 의미합니다. 율법에서, 7일째 되는 날은 안식일입니다. 마찬가지로 7년째 되는 해는 안식년입니다. 7년이 일곱 번 지나고 50년째 되는 해가 희년입니다. 레25:10-12에 보면 희년에 관한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는 오십 년이 시작되는 이 해를 거룩한 해로 정하고, 전국의 모든 거민에게 자유를 선포하여라. 이 해는 너희가 희년, 곧 기쁨의 해로 누릴 해이다”라고 말씀하였습니다. 희년이 되면 모든 백성들은 분배받은 본래의 땅으로 돌아갑니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조상들이 분배받아 물려준 토지를 팔았다 하더라도, 희년이 되면 그 소유권을 본래의 주인에게로 되돌리는 것입니다. 희면이면 모든 거민들은 저마다 가족에게로 돌아가게 됩니다. 사정상 다른 사람의 집에 종이 되었다 할지라도 희년이면 가족에게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희년은 회복의 해입니다. 모든 것을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선포되는 것은 여호와의 은혜의 해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보복의 날”도 선포합니다. 하나님이 모든 억울함을 풀어주고 심판하시는 날입니다. 심판과 구원은 동시에 일어납니다. 그러니까 누군가에게 그 날은 은혜의 날이 되지만, 또 어떤 이에게 그날은 하나님의 보복과 심판의 때가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은혜의 해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에게는 보복의 날이 된다는 것입니다. 메시아가 오시는 그날이 은혜와 기쁨의 날이 될 것인지, 아니면 무서운 심판의 날이 될 것인지, 우리에게 달려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만 기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도 함께 기억해야 합니다. 바로 그 날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오늘 우리의 신앙을 지켜나가야 합니다. 여호와의 날이 두려움의 날이 아닌 은혜의 날이요 치유와 회복의 날이 될 수 있도록, 우리는 늘 깨어서 그 날을 바라보며 오늘을 살아가야 합니다.
또한 3절에서 메시아는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 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신다”고 말씀하였습니다. 오래 전 청년시절에 우리가 즐겨 부르던 복음송가의 가사입니다. 이 찬송을 부를 때마다 마음이 밝아지고 새로운 생기가 솟았던 것을 기억합니다.
굵은 베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 쓴다는 것은 구약성경에서는 죄의 참회와 회개를 나타내는 전형적인 행위입니다. 이제 메시아가 오시고 여호와의 구원과 은혜의 때가 이르면 하나님의 거룩한 성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들에게, 뒤집어 썼던 재를 털어내고 그 대신 아름다운 화관을 쓰고 기쁨을 누리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슬퍼하는 자들에게 희락의 기름, 즐거움의 기름을 발라주신다고 말씀했습니다. 시23:5에서 다윗은,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은혜의 잔치에 초대해 주셨습니다. 잔치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나에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쁨의 기름으로 머리에 부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슬픔에 빠진 사람들은 베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 쓰고 하나님 앞에 나오지만, 메시아가 오시면 그 때는 굵은 베옷이 아니라 찬송의 옷을 입혀주신다는 것입니다. 찬송의 옷을 입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를 드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온에서 슬퍼하며 살아가는 벡성들로 하여금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 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신다”고 말씀하였습니다. 메시아의 시대에 하나님은 우리를 의의 나무로 심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의의 나무가 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치유와 회복의 은총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메시아의 시대, 하나님의 구원받은 백성들에게 주어지는 은혜입니다.
중요한 것은 슬퍼하는 마음입니다. 자신의 지은 죄로 인하여 슬퍼하는 마음, 하나님 앞에 불성실했던 자신의 삶으로 인하여 슬퍼하는 마음, 그 마음을 가지고 나오는 이들에게 메시아는 이렇게 놀라운 치유와 회복의 은총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시고 마귀의 시험을 이기시고 성령 충만하여 고향인 나사렛으로 돌아오셨는데, 처음 안식일을 맞아 회당에 들어가셔서 처음으로 선포한 말씀이 바로 오늘의 본문입니다. 눅4장 16절 이하에 보면, 예수님은 이 말씀을 펴서 읽으시고 책을 덮으신 후에 말씀하셨습니다.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나님이 은혜의 해가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을 통하여 이루어졌다는 것을 선포하신 것이다.
예수님에게 임하신 성령이 우리 안에 충만할 때, 우리는 더이상 나의 죄와 허물로 슬퍼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무거운 짐이나 받은 상처로 인하여 아파하지 않습니다. 죄사함을 받았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제는 의의 나무로 하나님이 나를 새롭게 심어주신 것을 감사하고 찬송하며 의의 열매를 거두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로 올라가신 후 제자들에게 성령을 보내어 주셨습니다. 교회 공동체 위에, 믿는 자들 위에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이들은 나가서 복음을 전파하였습니다.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고,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되고 갇힌 자들에게 자유와 해방을 선포하였습니다. 이것이 제자 공동체의 사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