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언자'라고 번역된 "나비"의 뜻은 "보는 자"라는 뜻이었다. 이 말은 아카디아어(the Akkadian) "나부"라는 말과 동일한 것으로 "선임하다" "소명을 받다"라는 뜻이 있다. 이 말의 명사형인 "나비움"은 "부름을 받은 자", "소명을 받은 사람", "선임", "사명"등을 의미한다. 이러한 아카디아어에서 나온 히브리어 "나비"는 "부름을 받은 자", "신의 특별한 사명을 받은 자"라는 뜻으로 확대되었다.
예언자의 뜻 그러므로, 예언자는 하나님의 특별한 부름을 받아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나 상징적 행동을 통하여 전달하는 자를 가리킨다. 예수는 하나님의 특별한 사명을 받아 이 땅에 오셨고, 이 땅에 오신 예수는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고, 그 자신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해석하는 랍비, 곧 교사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예언자의 사명을 감당했다. 누가복음 4장 18~19절의 말씀은 예수의 소명이 지닌 예언자적 면모를 보여주고 있으며 특별히 이것이 성령의 사역임을 강조하고 있다.
예언자로 오실 때의 상황 당시 유대인들의 삶은 예언자가 없는 혼돈과 무질서, 그리고 좌절의 삶이었다. 바벨론 포로에서 본국으로 돌아온 유대인들은 정치적 시련과 외세의 침략으로 절망적인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유대인들은 정신적이고 영적인 것보다는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문제에 더 많은 관심을 두게 되었다. 물리적 힘을 가지고 나라를 회복해야 한다는 일부 극단적인 행동파들이 있었는가 하면, 다윗 왕과 같은 메시야가 오셔서 제국들을 물리치고 나라를 회복시켜 줄 것이라고 대망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율법을 세분화하고, 그 율법을 지킬 것을 강요함으로써 종교적인 굴레를 씌워 당시의 정권에 순응하도록 하고, 그들은 그 권력의 수혜를 받고 있었다. 당시의 유대 사회는 정치적으로는 무력감에 사로잡혀 있었고, 영적으로는 심한 공황에 빠져 있었다. 어디를 보아도 희망이 보이지 않았고, 길이 보이지 않았다. 이러한 때에 예수는 예언자로 오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심으로 소망의 빛으로 나타나신 것이다. 말씀이 없어 혼돈 가운데 있었던 저들의 삶 속에 예언자 예수의 가르침은 모든 것을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오늘 우리의 현실 세계에 예언자가 필요한 때가 아닌가? 남북 분단의 쓰라린 아픔을 가지고 대립과 반목을 일삼았던 과거의 늪에서 벗어나 남북 정상들의 만남을 통해 화해와 협력의 새로운 장을 마련하였지만 남한 내부의 새로운 이념 논쟁이 일어나면서 국론이 분열되고 있다. 세계화의 거센 물결이 허약한 경제 구조를 가지고 있는 이 나라의 경제를 일거에 흔들어 놓고 있으며, 기업의 구조 조정으로 기업의 도산과 노사간의 대립 양상을 보이고 있다. 더욱이 국민들 속에 만연된 도덕적 해이는 가치관의 혼란과 영적인 혼돈을 증가키고 있다. 희망이 없고, 끝이 보이지 않는 추락을 거듭하고 있는 이 민족 가운데 예언자 예수가 오셔야 한다. 예언자로 오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심으로 모든 것을 제 자리로 돌려놓아야 한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예수는 예언자로서의 역할을 교회에게 맡겼다. 예수는 예언자로서 지금도 교회 안에서 성령으로 역사 하는 가운데 설교와 성만찬과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적으로 선포하고 계신다. 예언자로서의 예수의 몸인 교회는 교회 생활 전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의 움직임이다. 성령이 역사 하므로 교회는 머리로서의 예수와 지체로서의 신자와 하나의 종말론적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 자체로서 세상을 향한 예언자적 직무를 가지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교회가 예언자의 직무를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이 땅이 혼돈 가운데 있음을 깊이 인식해야 한다. 따라서 이 민족의 예언자로서 오늘의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외치고 증거 해야 하는 책임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특별히 민족과 국가간의 갈등과 대립과 모순을 심화시키며, 지구촌의 불균등 발전과 부익부 빈익빈을 구조화하고, 사회계층간의 경제적 불평등을 가속화하고 있는 시장경제와 신자유주의의 지구화에 대응하여 예언자적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예언자로 오신 예수는 결코 예언자들 가운데 한 예언자가 아니다. 그는 다른 예언자들처럼 "주께서 말씀하시니…",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라는 말씀을 하지 않고, "나는 너희에게 이렇게 말한다"고 하면서 자기의 권위를 모세의 권위보다 더 높이 세웠다. 그가 하는 말씀은 예언자들처럼 단지 하나님에게서 받아 대신 전하는 말씀이 아니라 그 말씀이 자신의 말씀인 것을 증명하셨다.
예수는 하나님의 성육신 된 말씀인 것이다. 따라서 지금까지 있어왔던 예언자들과는 달리 예수의 말씀과 그의 삶은 완전히 일치한다. 그의 말씀은 자신의 인격과 분리되어 있는 소리만으로 된 말씀이 아니라 그의 인격 속에 시작되어 있는 하나님 나라의 사건이다. 교회가 예수의 예언자의 사명을 가진 영적 공동체라면 교회는 말씀과 일치된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강단에서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이 단순히 교회를 통해서 전달되는 것만으로는 안되고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이 교회의 삶과 사역에서 그대로 나타나야 한다. 여기에 영적인 권위가 있고 모든 것을 제자리로 돌려놓을 수 있는 능력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선포되는 말씀과 분리된 교회의 모습은 이 민족과 역사 앞에 필요 없는 존재가 되고 말 것이다. 따라서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된 실천적 삶을 가져야 한다.
말씀과 일치된 삶 예언자로서 교회는 용서를 실천해야 한다.
예언자로 오신 예수의 말씀의 중심은 "하나님의 나라"(막1:15)에 있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예수의 선포는 하나님의 자비로우심과 용서를 통해 구원을 선포하고, 하나님과의 사귐을 열어줌으로서 새로운 미래와 희망을 제시하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사랑이 죄인을 용서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며, 하나님과 인간이 결합되어 사랑의 사귐을 나누는 현실이라는 것이다. 예수의 용서에는 조건이 없다. 예언자의 사명을 가졌다는 교회의 모습은 어떠한가? 모두가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 죄의 용서를 받지 않았던가? 따라서 누군가가 실수를 하거나 잘못을 저질렀다고 해도 먼저 용서해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그렇지 못하다. 오늘의 교회는 어느 누구의 실수도, 허물도 용인하지 않는다. 만일 이런 사람이 있다면 오히려 극단적으로 판단하고 정죄한다. 교회 안에서 분쟁이 생기면 좀처럼 봉합하기가 쉽지 않다.
사실 교회 안에서의 분쟁은 어떤 사건에 대해 서로 입장을 달리하는 하는데서 생기지만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를 위한다는 신념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언제든지 화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오늘 한국교회의 현실을 볼 때 교회의 분쟁은 시작하자마자 곧 바로 하나님이냐 마귀냐, 선이냐 악이냐로 극단적인 분리가 이루어진다. 도저히 화해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참으로 슬픈 일이다. 이것은 예언자로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해야 할 교회의 참 모습이 아니다. 교회는 예수가 선포했던 것처럼 허물과 죄가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무조건적으로 용서하고 받아주어야 한다. 교회가 먼저 이런 하나님의 나라의 모습을 보일 때 이 민족 앞에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민족을 하나님께로 인도해 낼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이 의지가 지배해야" 예언자로 오신 예수가 선포하신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의지가 지배하는 세계이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세계가 곧 하나님의 나라이다. 이 세계에서 사는 인간은 자신의 지식이나 경험, 그리고 능력으로 살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간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것이요 그것으로 하나님이 맡겨주신 사명을 감당하도록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능력이나 지혜를 자랑삼지 말고 주신 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들을 가지고 맡겨진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예언자로서의 사명을 가진 교회에는 하나님의 의지가 지배하야 한다. 거기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어떤 교회에서는 사람의 의지가, 사람의 뜻이 교회를 주도하고 있는 안타까운 모습을 본다.
하나님의 권위의 자리를 교권이 자리잡고, 하나님의 사랑의 자리를 인간의 독선이 자리잡고 있다. 사람의 의지나 지식이나 능력이 더 앞서고 하나님의 의지와 뜻은 저만치 뒤로 밀리고 있는 것이다. 교회는 철저히 하나님이 지배하시고,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럴 때 하나님의 나라로서의 자신의 모습을 회복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예언자로 오신 예수는 회개를 선포한다. "때가 되어 하나님의 나라가 다가왔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으라"(막1:15). 회개는 방향을 전환하는 것이다. 하나님 없는 자기 중심의 삶으로부터 하나님 중심의 삶으로 전환하는 것이고, 땅에 속한 것을 추구하는 삶으로부터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추구하는 삶으로의 방향 전환이 곧 회개이다. 이것은 인간의 전인적 변화이다. 예수는 단순히 선한 행위들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방향을 완전히 전환하기를 바란다. 하나님의 뜻에 절대 복종하기로 결단하는 것이 회개이다. 이렇게 회개한 자의 삶은 하나님의 계명에 복종해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대한 복종이다. 하나님에 대한 복종은 이웃 사랑으로 나타나야 한다.
교회는 이웃 사랑을 실천함으로서 회개한 공동체, 하나님의 세계에 속한 영적 공동체임을 보여 주어야 한다. 그 동안 교회는 지나치게 위만 바라보면서 성장 위주로 달려왔다. 그러다가 사회를 보지 못했고, 주변의 문제들을 보지 못했다. 사회를 외면한 결과 지금은 교회가 사회로부터 외면을 당하게 되었다. 그래서 성장이 둔화되고 있다.
교회가 성장하려면 성장 신드롬에서 벗어나 섬김을 통해 이웃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교회는 사회적 기관이다. 사회를 떠나서는 교회가 존재할 수 없다. 세상 위에 교회가 있어야 한다. 그러면서 교회가 세상의 문제들과 고통들을 보듬고 함께 고통하며 치유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세상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을 섬기어 주어야 한다. 제한된 사랑이 아니라 한계가 없는 이웃 사랑을 실천함으로서 교회가 하나님의 세계에 속해 있음을 선언해야 한다.
예언자로 오신 예수의 탄생이 다가오고 있다. 금년 겨울도 여느 해 못지 않게 추운 겨울이 될 것이다. 경제가 무너져 내리면서 올 겨울 추위 가운데 고통 당할 우리의 이웃이 더 많을 것으로 예상된다. 돌아보아야 할 이웃이 많고, 섬겨 주어야 할 이웃이 많으며, 이웃의 고통을 재생산하는 부조리한 구조가 있다. 따라서 오늘의 교회가 사회를 돌아보고 이웃 사랑을 실천하고 사회변혁의 과정에 적극 참여하므로 예언자적인 모습으로 굳게 서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