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도여행] 삼별초를 이끌고 대몽 항쟁의 주도적 역활을 했던 배중손장군
진도여행
진도를 한바퀴도는 18번 도로를 타고 남도진성을 향해 달려간다.
상만리의 비자나무(천연기념물 제111호)와 오층석탑을 보고 남도진성을 찾아가는 길
상만리에서 큰 길이 아닌 농로길을 따라 작은 산을 넘으니 작은 포구가 나타나고, 바닷가의 마을길을 따라간다.
저 멀리 커다란 소나무가 보이고 건물안에 동상이 보인다.
무엇일까?
궁금중이 발생하니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차를 세우고 안내판을 읽어보니
대몽항쟁의 주도적 역활을 했던 삼별초의 지도자 배중손 장군의 위패를 봉인한 사당이라고 한다.
고려가 몽고와의 기나긴 전쟁에서 굴욕적인 강화를 맺고 개경환도를 강행하자 삼별초군은 이에 불복하여 대몽항쟁의 결의를 다짐하며, 1,000여척의 배에 나누어 타고 진도로 남하하여 용장성(사적 제126호), 남도진성(사적 제127호) 등에서 여몽연합군과 항쟁을 하였다고 한다.
사당안으로 들어가니 마당에는 잡초가 무성하고 사당 건물의 문풍지는 구멍이 뚫려 있고 안을 들여다 볼 수 없게끔 자물쇠로 굳게 채워져 있다.
이곳 진도가 고려시대 대몽항쟁의 중심지였기에 삼별초를 이끈 배중손장군의 동상을 여기에 세우고 장군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것 같다.
배중손은 고려 원종 때의 장군으로 삼별초(三別抄)의 대몽항전을 이끌었다.
삼별초의 대몽항전 이전 경력에 대해서는 거의 기록을 찾아볼 수 없다. 다만 최씨 무인집권 이후 실력자로 등장한 임연(林衍) 부자 계열의 무신으로 대몽항전을 계속할 것을 강경히 주장했던 인물로 추정되고 있다.
몽골과의 강화가 성립된 뒤 개경환도(開京還都) 문제를 둘러싸고 원종을 중심으로 출륙(出陸)을 희망했던 문신 일파와, 이를 반대하고 강도(江都:강화도)를 근거지로 삼아 계속적인 대몽항전을 도모하려 했던 임연을 중심으로 한 무신 일파가 대립했다.
1270년 몽골을 방문하고 돌아온 원종이 환도를 포고하고 강도 안의 모든 기구를 개경으로 옮길 것을 명하자 배중손을 비롯한 삼별초 군인들은 환도에 불복하는 태도를 보였다. 이에 원종이 장군 김지저(金之氐)를 강도에 보내 삼별초를 폐지하고 병적(兵籍)을 몰수하자, 삼별초의 영수인 그는 야별초(夜別抄)의 지휘관 노영희(盧永禧)와 함께 원종을 폐하고 왕족인 승화후 온(承化侯溫)을 추대해 임금으로 앉히는 한편 관부(官府)를 설치, 관리를 임명하고 개경 정부와 대립하면서 몽골에 대한 항전을 시작했다.
육지와의 교통을 차단하고 강화도에 있던 몽골인을 베어 항전의 결의를 다진 그는 도내(島內)의 문무관 중에 동요가 일어나자 심입해도(深入海島)의 전통적인 대몽항쟁 전략에 따라 1,000여 척의 함선을 징발해 공사재물(公私財物)과 백성을 싣고 강화도를 떠나 서해안 요지를 공략하면서 남으로 내려가 진도에 근거를 정하고 섬 안에 성곽을 쌓고 궁전을 지어 장기항전의 태세를 갖추었다. 그뒤 삼별초군은 해상으로 수송되는 세공(稅貢)을 빼앗아 재정문제를 해결하면서, 전라도·경상도 주민들과 개경 관노(官奴) 등의 호응에 힘입어 남해연안과 나주·전주에까지 출병, 관군을 격파하는 등 위세를 떨쳤다.
그가 이끄는 삼별초군을 정벌하기 위해 개경에서는 참지정사 신사전(申思佺)을 전라도토적사(全羅道討賊使)에 임명해 군대를 보냈으나 패배를 거듭했다. 이에 개경정부는 몽골과 연합군을 구성, 삼별초 공격에 나섰다. 그는 몽골의 아해(阿海)와 고려의 상장군 김방경(金方慶)이 이끄는 여·몽연합군을 여러 차례 무찔렀다. 그러나 1271년 대군을 이끌고 연합군에 합세한 몽골의 홍다구(洪茶丘)의 총공세를 맞아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나 끝내 패배했다. 이로써 삼별초의 진도 근거지는 마침내 함락되었으며, 그 역시 이때 전사한 것으로 보인다. 진도 함락 뒤에도 김통정(金通精)을 중심으로 한 나머지 삼별초 군인들은 제주도로 들어가 최후의 항쟁을 계속했으나 결국 이들도 1273년에 이르러 평정되고 말았다.(다음 백과사전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