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라도 기도하면, 이제부터 역사하신다!(삼상2:30)
2024.4.7 김상수목사(안흥교회)
나이나 지역에 상관없이 사람은 누구나 ‘나를 귀하게 여겨주고, 존중해 주는 사람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이런 사람에게는 작은 것 하나라도 더 잘해주고 싶은 마음이 든다. 반대로 나를 쉽게 대하거나 공격적으로 나오는 사람은 대하기도 부담스럽고, 기분도 불쾌해 진다(예 : 무례하고 불친절한 언행, 짜증나는 표정 등)
하나님은 어떠실까? 물론 하나님은 하나님께 무례히 대해는 사람도 여전히 사랑하시고, 변화되기 원하시지만, 하나님도 역시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사람을 더 존중히 여기신다. 그러나 끝까지 하나님을 멸시하고 거역하며, 돌이키지 않는 사람에게는 의로운 성품이 발동하신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오늘 본문인 사무엘상 2장 30절에서 아주 강한 임팩트(충격)를 주는 말씀을 하셨다.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삼상 2:30)
1. 하나님을 멸시했던 사람들 : 엘리 집안
오늘 본문 말씀은 하나님께서 엘리(Eli) 집안(제사장 엘리와 그의 두 아들)에 주신 경고의 말씀인 동시에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이기도 하다. 엘리의 두 아들들은 사환들을 시켜서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들을 제사도 드리기 전에 억지로 빼앗아 가고(삼상2:13-17), 심지어 회막문에서 수종드는 여인들과 동침하기까지 했다(삼상2:22). 엘리는 아들들에 대해서 말하는 사람들의 소문은 걱정하면서도, 그들의 죄악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대처하지는 않았다(삼상2:23-26). 그래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람을 보내 엘리 집안의 죄악을 지적하시면서 경고와 심판의 말씀하셨다. 오늘 본문 말씀은 그 말씀들 중에 한 부분이다.
그런데 문제는 엘리와 그의 아들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을 듣고도 돌이키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런 태도가 바로 하나님을 멸시하는 행위였던 것이다. 그래서 결국 엘리의 두 아들은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한 날에 죽고, 법궤까지 빼앗겼다(삼상4:11). 그리고 이 소식을 들은 몸집이 비대했던 엘리는 충격을 받고, 의자에서 뒤로 넘어져서 목이 부러져 죽고 말았다(삼상4:18)
엘리 집안 사람들은 어쩌다가 이처럼 하나님을 멸시하는 지경에 까지 이르게 되었을까? 아마 이들도 처음부터 그러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랜 시간 동안 작은 돌부리 같은 죄들을 습관적으로 허용하다 보니까 결국은 그 습관이 그들의 삶을 지배하는 태도와 방식으로 굳어진 것이다(삼상2:13).
그런데 이러한 위험성은 오늘 우리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들이 작은 돌부리 같은 죄와 덕스럽지 못한 것들을 자주 허용하고 용인하면, 나중에는 그것들이 우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습관이 되어 버린다. 점점 이런 늪 속에 빠져들어 가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속에서 스멀스멀 올라오는 생각들이 있다.
“에~휴 이렇게 한다고 누가 알아주기나 하나?”, “재주는 누가 부리고, 생색은 누가 내고”,
“그 인간”, “그 여편네 때문에”
그래서 “은혜 은혜 한없는 은혜”라고 찬양하던 입에서, 나중에 “이제 그만 하려고요”라는 말이 나온다. 열심히 충성하던 사람이 왜 탈진(번 아웃)에 빠지는지 아는가? “첫 이유(내가 왜 이 일을 시작했는지)”를 잃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님이 첫 사랑을 회복하라고 말씀하셨다(계2:5).
2. 하나님을 존중히 여겼던 사람들 : 한나와 사무엘
그런데 이러한 엘리 집안과는 대조적으로 한나(Hannah) 집안(한나 그리고 그들의 아들 사무엘)은 하나님을 존중히 여겼다. 한나는 억울한 상황과 그로 인해 마음에 슬픔의 파도가 엄몰해 왔을 때, 하나님께 나와는 눈물로 간구했다. 얼마나 오랫동안 깊이 기도했는지 엘리가 포도주에 취한 줄로 착각할 정도였다 그녀는 엘리 제사장이 축복의 말을 할 때, 하나님이 세운 권위자의 말을 믿음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하나님이 사무엘을 주셨을 때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면서 찬양을 올려드렸다(삼상1-2장). 이것이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그래서 하나님도 한나 집안을 더욱 존귀하게 만들어 주셨다. 한나의 아들이었던 사무엘은 가장 위대한 최고의 사사가 되었다. 하나님께서 엘리 집안이나 한나 집안에 기대하셨던 것은 완벽한 행동이 아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지 아닌지, 그들의 중심과 태도를 보셨다. 이 점이 중요하다.
그런데 이것은 오늘 우리(나)를 보실 때도 마찬가지라고 확신한다. 우리들 자신이 얼마나 약하고 미련한 존재인지, 최소한 하나님은 내가 나를 아는 것보다, 나를 더 잘 알고 계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불러주셨고, 어떤 사람에게는 귀한 직분들(집사, 권사, 장로, 목사, 각종 직분들)까지 맡겨 주셨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처음부터 우리들에게 대단한 열매를 기대하지 않으신다. 다만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진실 된 예배자의 모습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충성하려는 태도를 보신다. 이러한 태도가 바로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모습이다. 하나님은 이 시간에 이 말씀을 통해서 이 모습을 회복할 것을 강조하신다.
아마 여러분들의 대부분은 방송인 차인표와 신애라 부부를 익히 아실 것이다. 이들 부부는 독실한 기독교인들이다(벧엘교회 출석). 얼마 전에 차인표씨가 교회에서 자신의 신앙경험을 고백하는 동영상을 본 적이 있다.
*** 차인표 간증 동영상 링크 : https://www.youtube.com/watch?v=6k-wqBhbzRs
차인표씨의 간증에 의하면, 그는 모태신앙이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신앙생활도 열심히 했고, 평생을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해 왔다. 그러나 중년이 되도록 주님의 음성을 듣는 체험은 없었다고 한다. 그는 주님의 음성을 듣는 체험을 사모했다. 그래서 별짓을 다했다고 한다. 심지어 어느 기독교 연극에 출연료도 받지 않고, 몇 년간 출연하기도 했다.
그러다 2006년 어느 날 아내인 신애라씨 대신 인도 콜카타(Kolkata)에 선교여행을 가게 되었다. 처음에는 가지 않으려고, 이런 저런 변명을 하다가 어쩔 수 없이 아내를 대신해서 갔다. 그는 강퍅한 마음으로 비행기에서도 남들은 일반석을 타는데, 혼자만 1등석에 타고 갔다. 목적지인 인도의 어느 시골동네에 도착했을 때, 인솔하시는 목사님의 이렇게 부탁했다고 한다.
“차인표씨가 만날 아이들은 가장 세상서 보잘 없는 아이들입니다. 이 아이들을 안아주세요. 그리고 너는 귀한 존재가 사랑받기 위해서 태어났다라고 말해주세요”
그가 시골동네의 교회 앞에 도착했을 때, 더러운 옷을 입은 아이들이 그 앞에 다가왔다. 그는 그들 중에서 한 아이의 손을 잡았다. 그런데 그 순간 그가 그토록 듣고 싶어 했던 주님의 음성이 들려왔다.
“인표야 잘 왔다. 내가 너를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어. 이 아이 옆에서 너를 기다리고 있었어……. 내가 너를 사랑한다. 너는 나의 사랑을 받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단다.”
차인표씨는 이 음성을 듣고 무척 놀랐다고 한다. 왜냐하면 자신이 아이들에게 해줘야할 말을 오히려 주님의 자기에게 해주셨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 차인표씨는 간증 말미에서 이렇게 고백했다.
“저는 예수님을 찾아서 1등석을 타고, 무대 위에서 헤매고 있는 동안에 예수님은 이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아이 옆에서 저를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가 천국을 볼 것이며……. 저는 그날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저의 인생이 달라졌습니다.”
차인표씨의 간증을 들으면서, ‘그날 하나님은 왜 그에게 음성을 들려주셨을까’를 생각해 보았다. 그가 완벽하고 대단한 사람이라서? 절대 그렇지 않을 것이다. 만약 차인표씨가 이런 말을 들으면 화들짝 놀랄 것이다. 하나님이 그날 그에게 친히 음성을 들려주셨던 것은, 그가 비록 살아가면서 실수들도 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만 바라보려고 노력했고,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사모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 시간 하나님이 우리(나)에게 바라시고, 앞으로도 더 겸손히 간직해야할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태도가 아닐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이 글을 읽는 지역 주민들이여, 그러므로 우리들도 온 마음으로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자. 서로를 향해 존중히 여기자. 어느 찬송의 가사처럼, 비록 ‘꽃처럼 향기 나는 생활이 아니’라 할지라도, 끊임없이 주님을 존중히 여기려는 태도와 마음을 갖자. 만약 지금까지 이렇게 살지 못했다면, 이 한 마디를 기억하자.
“이제라도 기도하면, 이제부터 역사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