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세영 선수가 7년 동안 고참들 빨래 시다바리 노릇을 했다고 합니다. 필자가 군 생활하던 50년 전이나 지금이나 어찌 이리 똑 같습니까? 우리 사회가 아직도 이런 후진성을 관행으로 여기고 있다는 자체에 분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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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놈의 진짜이름
그놈은 제대 말년이었다. 하루 세끼 식사도, 세숫물도 이등병들이 내무반 까지 가져다가 바쳤다. 양말이며 팬티며 모든 세탁물의 빨래도 이등병들이 대신했고 부대의 작업과 훈련은 늘 열외였다. 사제담배를 피우며 사제양말을 신고는 슬리퍼를 질질 끌며 내무반을 어슬렁거렸다. 신병들을 데리고 놀다가도 그들이 자기에게 편하게 대하면 “대통령이 비행기 탄다고 너도 비행기 타냐” 면서 군기가 빠졌다고 기합(얼차려)이나 주는 것이 놈의 일과였다. 그놈은 내무반의 황제였다. 아무도 간섭을 하지 않았고 선임하사나 인사계조차도 모른 채하고 있었다. 그건 3년을 전방에서 고생한 말년만이 갖는 특혜였고 아주 오래전부터 관행으로 세습되고 있었다.
나는 하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병장 계급장을 달고 놈이 어슬렁대는 12중대 1소대로 배치 받았다. 세칭 ‘물병장’이었다. 말년이 갖는 특혜를 누리지 못하는 계급만 병장이란 뜻이었다. 군용 백을 메고 중대에 도착하니 상병 계급장을 단 돼지처럼 생긴 행정병이 나를 맞았다.
“ 따블백(군용백) 거기 내려놓고 이리 와봐”
첫 인사가 반말이었다. 나는 오기가 발동했다. 녀석의 말을 귓전으로 흘려버리고는 중대장이 올 때까지 의자에 앉아 있었다. 무시당했다고 여긴 녀석이 허리춤에 두 손을 올리고 삐딱하게 서더니만 자기를 중대장으로 알고 전입신고를 한번 해보라고 하였다. 처음부터 내 기를 꺾어 놓으려는 심산이었다. 군대 전입신고는 차렷 자세로 서서 힘차게 경례를 붙이며
“충성! 신고합니다. 병장 홍길동은 00년 0월 0 일부로 사단 보충대에서 제 0년대 0대대 12중대로 전입을 명받았습니다. 이에 신고합니다. 충성!”
대충 이런 것이었다.
상급자가 하급자에게 전입신고를 하고나면 그 하급자가 제대할 때까지 “님”자를 붙이게 되는 언어의 함정에 빠지게 된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연습은 필요 없고 중대장이 오면 신고하겠다며 버텼다. 녀석이 다가오더니 건방지다며 주먹을 날렸다. 이미 예견했던 터라 몸을 피하며 연병장으로 뛰쳐나왔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는 그래도 계급이 위인 내게 발길질을 하지 못할 것이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제 분을 못이긴 녀석이 멧돼지처럼 씩씩댔지만 연병장까지 따라 나오지는 못했다. 1분대 사수로 배치를 받았다. 선임 분대장이 6개월 후면 전역 예정이라 내가 후임 분대장직을 맡아야했다.
그놈은 ‘막사감시’로 남아서는 빼치카 옆에서 일등병 하나를 붙들고 장기를 두고 있었다. 나를 보더니 심심풀이 장난감이 하나 왔다는 듯 이죽이죽 웃으면서 첫 마디가 “너, 이리 와서 신고 한번 해봐라”였다. 중대 본부에서 있었던 사건을 아는 듯했다. 아니꼽다는 눈초리를 보내고 있는 그와 더 있어봐야 싸울 게 뻔하여 연병장으로 나왔다. ‘물병장’ 신세의 내 군 생활은 텃세를 부리는 고참들과 그렇게 어렵게 시작되었다.
내게서 신고를 받지 못한 놈은 틈만 나면 시비를 걸었다. 자다가 한 밤중에 병사들을 불러내어 ‘줄빠따’를 치고는 “군대는 ‘짠밥’이지 계급이 아니다. 분대장 말을 고분고분 들으면 군 생활이 고달파진다”며 항명 교육을 시켰다. 이등병 일등병들은 분대장 눈치를 보랴 고참 눈치를 보랴 정신을 못 차렸다. 고참들이 그런 교육을 시키는 것은 졸병들이 분대장에게 대들어야 분대장과 병들 사이에서 자신들의 입지가 서는 때문이었다. 병들을 통솔해야 하는 분대장은 결국 고참들과 협상하게 되고 그들의 특권을 묵인해주었다. 세상의 모든 야합은 늘 그렇게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어느 날 한밤중에 불침번을 서던 김 일병이 나를 깨웠다. 탄(석탄)창고 뒤로 가보라고 하였다. 자다가 일어나 바지를 대충 걸치고 부대 뒤에 있는 탄 창고 쪽으로 갔다. 러닝셔츠 속으로 들어오는 한여름의 바람이 시원하다고 느끼는 순간 어둠 속에서 주먹이 날아왔다. 순식간에 나는 옥수수 밭으로 나동그라졌다. 그 짧은 순간에 시골초등학교로 전학 간 날이 떠올랐다. 도회에서 전학 온 내가 얼마나 힘이 센지 궁금했던 시골 아이들은 나를 자주 집적 거렸다. 그들과 맞서지 않으려고 조심하고 있었는데 내 짝 녀석이 책을 가져가서는 돌려주질 않았다. 책이 이 녀석 저 녀석 손으로 하늘을 날아다녔다. 간신히 책을 빼앗아 자리에 앉는데 내 팔꿈치가 삼팔선(책상위에 그은 금)을 넘어 왔다고 녀석이 나를 밀쳤다. 순간 나도 녀석을 밀치면서 둘은 교실 바닥에 나뒹굴었다. 녀석이 나를 깔고 올라타고 있었다. ‘일어나야 한다. 이 녀석을 밀치고 일어나야 한다. 그래야 아이들이 나를 얕보지 못한다.’ 코피가 흐르고 있는데 아무리 애를 써도 일어 날 수가 없었다. 폭력에 짓눌려버린 내 영혼이 방관자들의 조소에 둘러싸여 깊이를 모르는 늪으로 가라앉고 있는데 수업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려왔다.
강원도 산골의 밤하늘에는 수많은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고 옥수숫대들이 나를 빙 둘러 서서 아이들처럼 구경을 하고 있었다. 나는 용수철이 튕기듯 벌떡 일어났다. 둘이 엎칠락 뒤칠락 뒹굴었다. 말리는 사람 하나 없으니 애꿎은 옥수숫대만 부러져 나가고 있었다. 한참을 씩씩대고 나니 놈이 그만하자고 했다. 자신이 생각해도 제 꼴이 한심했던 모양이었다. 앉으라고 하면서 담배 한 개비를 주었다. 사제 담배였다. 전방에서 고생하는 병사들을 괴롭히지 말라고 충고를 하였다. 누가 누구를 괴롭혔는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나는 그에게 제안을 하였다. ‘당신이 제대하는 날까지는 무슨 짓을 하든지 간섭하지 않겠다. 그러니 당신도 내가 하는 일에 간섭을 하지마라. 당신은 곧 제대하지만 나와 병사들은 당신보다 더 많은 세월을 함께 군에서 보내야 한다. 병사들이 분대장을 우습게 여기면 통솔이 어렵다. 병사들은 말년을 두려워 하지만 나는 말년이 두렵지 않다. 곱게 제대하길 바란다.’ 싸움은 그렇게 마무리 되었고 나는 까칠한 모포 속으로 기어들어가서 웅크린 채 잠을 잤다.
그 뒤부터 우리 내무반에서는 한밤중에 고참들이 병사들을 탄 창고 뒤로 집합시켜 줄빠따를 치는 일이 없어졌다. 쉬는 날의 사역병도 순번제로 뽑았다. 심야시간의 보초나 불침번은 고참들이 썼다. 신임 분대장이 제대말년을 두들겨 패줬다는 부풀려진 이야기가 불침번 김 일병의 입을 통하여 소리 소문 없이 퍼졌기 때문이었다. 제대 후 삼십년이 넘었지만 나는 지금도 그놈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 내가 싸운 그놈의 진짜 이름은 관행이란 이름으로 세습되고 있는 “악습”이었다.( 2011.03.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