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인 시 137편은, 1978년에 세계적으로 많은 이들에게 사랑을 받았던 독일의 가수 “보니 엠”이 발표한 “바벨론의 강가에서”라는 팝송으로 많은 이들에게 알려져서 암송되고 또, 삶의 위로가 되는 시입니다. 이 시의 형태는, 자신의 아픔을 하나님께 탄원하는 “탄원시”입니다.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나뉘어졌을 때, 북 이스라엘의 왕들이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함으로, 결국 B.C. 722년에 앗시리아 제국에 의해서 멸망됩니다. 반면, 남 유다는 이러한 북 이스라엘의 사례를 교훈삼아 더욱 하나님 앞에 충실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북 이스라엘의 행위를 따라하는 등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함으로, 유다 또한 B.C. 586년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합니다. 유다가 바벨론에게 멸망당할 때, 유다의 왕이었던 시드기야는 눈을 뽑히고, 쇠사슬에 묶여서 많은 백성들과 함께 바벨론으로 끌려갔습니다. 이때, 예루살렘 성전 또한 초토화되어, 성전의 귀중한 물품들이 바벨론에게 약탈되었습니다. 본문은 이러한 아픔을 배경으로 하는 시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외적으로는 이렇게 비참하도록 바벨론의 포로가 되었지만, 그들의 중심에는 변치않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자신들의 고국인 이스라엘을 그리워하는 애국심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고국은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증표로서 약속의 땅이었고, 축복의 땅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신들의 고국을 잃었다는 것은,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축복을 잃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가장 마음 아픈 일은, 자신으로 인해 하나님이 모욕당하는 일입니다. 성도들의 잘못으로 인해, 불신자들이 성도들을 향해, “하나님이 어디에 있느냐?”라며, 빈정거리거나 혹은, “하나님을 믿더니 꼴 좋다”라고 빈정거릴 때, 참으로 견딜 수 없는 모욕감을 느낍니다. 이러한 모욕감은 고라자손도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시 42: 3을 보시면, “사람들이 종일 내게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오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라고 합니다. 그러기에, 본문에서의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조롱하고, 자신들을 조롱하는 바벨론을 향한 하나님의 징계를 간구합니다. 그들은, 바벨론이 자신들에게 행한 행위 그대로, 그들도 당하게 해 달라는 겁니다. 이러한 이들의 간구는 그대로 성취됩니다. 이러한 간구는 로마서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당시, 성도들이 로마로부터 또, 유대인들과 불신자들로부터 고초를 당할 때, 사도 바울은 롬 12: 19에서,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며, 위로합니다. 이러한 간구는 하나님을 우리의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당하는 아픔과 억울함에 대해, 하나님께서 친히 갚아달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간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하나님께서 성도들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확실하게 믿는 자들만이 할 수 있는 겁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다시 회복시켜 주실 것을 소망하는 겁니다. 바벨론은 현재 부귀와 번영을 누리는 강대국이지만, 그들의 번영은 오래 가지 못 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조롱하는 등,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비록 자신들의 죄로 인해 포로가 되어 비참한 삶을 사는 것처럼, 우리 또한 우리의 잘못으로 인해 이스라엘과 같이 힘들고 어려움에 처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성도인 우리는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함께 하심을 믿고, 감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순절을 보내는 기간동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와 사랑을 기억하며, 더욱더 하나님께 감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1 - 3절을 보시면,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그 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하게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의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라고 합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감사해야 합니다.
본문 1절을 보시면,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라고 합니다. 여기서, “바벨론의 여러 강변”이라 함은, 바벨론을 가로지르는 유브라데스, 티그리스, 그발 강을 말합니다. 바벨론은 이러한 강들을 개발하는 공사에 이스라엘을 비롯한 여러 나라의 포로들을 동원해서 강제 노역을 시켰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잠시의 휴식이 주어질 때면, 이스라엘은 지난 날 고국에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던 생활을 그리워하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본문에서, “울었도다”는 히브리어로, “바키누”라 하며, 그 의미는, “큰소리로 울다, 방성대곡하다”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그냥 훌쩍훌쩍 대는 것이 아니라, 바벨론 강가에서 대성통곡을 하며, 울었던 겁니다. 이어, 본문 3절을 보시면, 이스라엘이 이처럼 비통한 마음으로 대성통곡을 하며 우는 데, 바벨론은 그것을 더욱 조롱하듯, 그들이 사용하는 악기를 통해, 그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던 찬양을 부르라고 합니다. 이것은, 바벨론이 이스라엘과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자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이스라엘을 정복했다는 승리감을 앞세워 하나님과 이스라엘을 비참하게 조롱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랬기에, 이스라엘은 더욱 더 비참함을 느끼며, 대성통곡을 그칠 수 없었던 겁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좋아하던 악기를 버드나무에 걸어두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기쁨을 주시기 전까지는 악기를 더 이상 연주하지 않으며, 자신들에게는 더 이상의 기쁨이 없다는 결단이었습니다. 이러한 사실들을 볼 때, 본문의 상황은 매우 절망이었습니다. 여러분, 이스라엘이 왜 이렇게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졌습니까? 왕들의 죄악 때문만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전체의 죄악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했고, 하나님 앞에 범죄했습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을 보며, 우리 또한 이들과 같이 죄악의 길로 가지 않도록 항시 경계하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를 되새기며,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4 - 6절을 보시면, “우리가 이방 땅에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까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진대 내 오른손이 그의 재주를 잊을지로다 내가 예루살렘을 기억하지 아니하거나 내가 가장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즐거워하지 아니할진대 내 혀가 내 입천장에 붙을지로다”라고 합니다. 성도는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며, 순수한 신앙의 보존을 위해, 확고한 결단을 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바벨론에서의 아픔을 겪으며, 자신들의 입에서 기쁨을 노래하는 일이 없을 것임을 말합니다. 그것이, “내 혀가 입천장에 붙을지로다”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기쁨을 주시지 않는 한, 그들은 벙어리가 되겠다는 겁니다. 또, 그들이 악기를 연주하는 연주법도 더 이상 기억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이것은, 자신들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 앞에서의 석고대죄와도 같습니다. 사극을 보면, 왕에게 간절히 청원하는 것이 있거나 자신의 잘못을 크게 뉘우치며, 용서를 빌 때, 궁전 마당에 멍석을 깔고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식음을 전폐하여 석고대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이스라엘은 이제 하나님 앞에서 석고대죄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이들의 의지가 얼마나 강했는지가 본문 5절에 나옵니다. 보시면,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진대 내 오른손이 그의 재주를 잊을지로다”라고 합니다. 이것을, 공동번역으로 보시면,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는다면 내 오른손이 말라버릴 것이다”라고 합니다. 우리 개정번역보다 더 강한 번역입니다. 손이 재주를 잊는 다는 표현보다 손이 마비가 되어 움직이지 못하게 될 것이라는 표현은 정말 잔인할 정도로, 하나님 앞에서 지난 날 자신들의 죄에 대해 철저한 회개와 지금 자신들을 괴롭히고 조롱하는 바벨론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간청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러한 간청은 자신의 분노와 감정만을 앞세운 것이 아닙니다. 만약, 이스라엘이 이러했다면, 이것은, 하나님과 무관할 겁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자신들과 함께 하시며, 자신들을 인도하심을 알았습니다. 이러한 순수한 신앙과 확고한 결단이 있었기에, 그들은 하나님 앞에 강력하게 간구할 수 있었던 겁니다. 여러분, 이스라엘이 본문에서 이렇게 강한 신앙의 확신과 결단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강력하게 간구한 것은, 자신들이 비록 바벨론의 포로가 되었지만, 자신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신앙적 절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우리의 삶 속에서 발생하는 문제들로 아픔을 겪고, 어려움을 겪기도 합니다. 그때, 우리가 생각할 것은, 본문의 이스라엘처럼,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하나님을 향한 신앙의 순수성과 확고한 결단을 지켜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중심을 바라보고,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의 간구에 응답해 주실 겁니다. 본문의 이스라엘이 거하는 처지는, 바벨론의 포로였고, 고통 속에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토록, 비록 현실이 어렵고, 힘들더라도, “지금 그리고, 여기에”계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며, 간구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와 충만이 우리 모두에게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7 - 9절을 보시면, “여호와여 예루살렘이 멸망하던 날을 기억하시고 에돔 자손을 치소서 그들의 말이 헐어 버리라 헐어 버리라 그 기초까지 헐어 버리라 하였나이다 멸망할 딸 바벨론아 네가 우리에게 행한 대로 네게 갚는 자가 복이 있으리로다 네 어린 것들을 바위에 메어치는 자는 복이 있으리로다”라고 합니다. 성도인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희망을 생각해야 합니다.
바벨론은 잠시, 이스라엘의 죄악을 심판하는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었지만, 이로 인한 잔혹성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가 없었습니다. 본문 9절은 이러한 바벨론이 이스라엘에게 가한 잔혹한 행위에 대한 하나님의 보응과 함께 다시 재기할 수 없도록 완전히 멸망함을 기원하는 이스라엘의 간절함을 보여줍니다. 이와 함께, 이스라엘의 이러한 간절함은 자신들이 바벨론에서의 포로 생활을 마치고, 다시, 약속과 축복의 땅인 고국으로 돌아가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구원에 대한 기쁨과 감사의 표현으로 악기를 연주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그 날을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림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러한 이들에게 그 행한 대로 갚아달라는 기도가 무슨 기도이겠습니까? 본문 8절을 보시면, “네가 우리에게 행한 대로 네게 갚는 자가 복이 있으리로다”라고 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바벨론이 이스라엘을 정복할 때, 행했던 그 잔인함을 그대로 받으라는 마음에서, 바벨론의 패망과 멸절을 구하는 저주입니다. 본문의 이 기도는, 모든 인생을 판단하시며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공의, 행한대로 갚으시는 하나님의 심판 원리에 입각한 기도입니다. 즉, 행한 대로 판단하시고 보응하시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심판이며, 이렇게 볼 때 우리의 행동은 그대로 우리의 최종목적지를 결정하는 중요한 바로미터가 됩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기억하여, 항상 우리의 행동과 말과 생각을 올바르게 하고 매사에 조심스럽게 행해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픔과 상처를 갚아주실 것을 확신하고 믿음으로 행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재앙이 아니라, 평안과 미래와 희망이 되십니다. 이스라엘이 70년 동안이나 바벨론 포로 생활이라는 곤욕을 겪었지만, 결국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자유와 희망을 주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행하심을 믿고, 기억하심으로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돌려드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