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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 설리번과 헬렌 켈러
인류 교육사에서 누가 자녀 교육을 처음 실행하였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저 본능이었을지도 모른다. 부모가 아닌 타인에 의한 개인적인 교육은 언제부터였는지도 알 수 없다.
중세시대에 귀족들이 장애 자녀를 위해 개인적으로 가정교사(스페인의 베네딕도 수도사인 폴스 드 레옹이 말하기보다 쓰기 중심으로 처음 교육, 스페인 보네트가 1620년 지문자교육 시작)를 썼는데, 교육을 받은 장애인들이 능력을 발휘하면서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 경우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학살과 방임 시대에 이어 자선의 시대가 있었고, 자아실현의 시대가 온 것이다.
모세는 청각장애인을 악마가 붙은 자로 여겼고(레위기 19:14),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의 정신이 왜 배경이 좋은 귀족 장애인만 교육을 받아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으로 특수교육은 태동 되었다. 장애인에 대한 관심은 종교적 실천이었고, 계몽주의는 인간의 존엄성을 인정하게 된 것이다.
프랑스의 레뻬에 의해 귀족이 아닌 평민도 농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학교를 개설하였고, 수화를 통해 교육하였다. 독일의 구화법과 논쟁하면서 농교육은 발전하게 된다. 미국의 갈로뎃이 이웃 농소녀 콕스웰의 교육을 위해 영국으로 유학하였으나 구화교육법을 비밀로 하여 다시 파리로 가서 유학한 후 귀국하여 학교를 열게 되었다.
맹교육 역시 자아실현시대에 캠브리지대 수학교수 사운더슨, 토목기사 맥칼프, 소코틀랜드 시인이자 목사인 블랙룩, 오스트리아 피아니스트 파라디스 등이 등장한다. 레뻬의 농맹학교 교육에 감명을 받은 아우이가 길을 가다가 걸인 르소에르가 구걸함에 동전 떨어지는 소리로 액수를 구분하는 것을 보고 교육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맹교육에 헌신하기로 결심하고 파리맹학교를 설립하였다.
맹교육과 농교육이 합쳐진 시청각장애교육이 시작된 곳은 미국이었다. 시청각장애인 줄리아 브레이스는 17세였던 1825년에 코네티컷주 하트퍼드에 있는 미국농학교에 입학하여 졸업 후 그 학교의 교사가 되었다.
브레이스는 취학 전에 가족과 대화하기 위해 나름의 가정수화를 만들어 사용하였고, 학교에서 촉각수어를 배우고 바느질과 뜨개질을 잘하게 되자 유명해졌다. 호기심을 가진 방문객에게 보여지는 것에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은 것으로 알려진다. 그녀는 농학교에서 가르친 시청각장애 교육의 시초가 되었다. 졸업 후 후원금으로 조용한 여생을 보내었다.
사무엘 그리들리 하우는 의사로서 그리스 독립운동에 참전하였는데, 귀국 후 친구와 함께 맹아원(1831년)을 운영하다가 특수교육 조사차 유럽으로 건너가 폴란드 혁명에 말려들어 투옥되었다. 귀국 후 자신이 살던 집을 기부하여 1832년 퍼킨스 맹학교를 설립하였다.
미국 최초 맹학교인 퍼킨스 맹학교 교장이던 사무엘 그리들리 하우는 브레이스를 만나 보고 7살의 시청각장애인 로라(라우라) 브리드만을 가르치기 시작(1837년)했다. 1841년 브리드만과 함께 34세의 브레이스를 찾아가 수어가 아닌 문자교육을 해 보고 싶다고 설득하였고, 퍼킨스 맹학교에 입학시켰다.
1843년 하우는 결혼을 하였는데, 부인 줄리아 워드 하우는 남북전쟁(1861-65년)에서 노예해방을 위한 공화국 전투찬가를 작곡하고, 1870년 평화주의자 어머니 선언문을 발표하는 등의 개혁적 활동을 한 사람이다. 하우는 노예해방운동을 전개하던 중 남북전쟁이 일어나자 위생위원으로 참전하였고, 전쟁 후 해방된 노예들의 복지에 힘쓴 인물이다.
하우는 유럽 특수교육이 지나치게 예술과 기술교육에 치우쳐 있음을 비판하고 그는 학문과 지성교육에 힘썼다. 장애인의 특별한 능력으로 감동을 주는 것이 아닌 평등교육을 지향한 것이다. 하우는 사물에 양각문자(점자는 프랑스의 루이 브라이유가 맹학교에 봉사활동을 온 바르비에 대위에게서 군대에서 사용하는 야간암호문자에서 힌트를 얻어 1824년에 발명하였고, 사용이 금지되었다가 1854년에 공식 문자로 인정받았으며, 퍼킨스맹학교에는 1870년 이후에 전파)를 써서 언어교육을 하였다.
영국 소설가 찰스 디킨스가 라우라 브리드만의 명성을 듣고 찾아가 그녀의 이야기를 여행기 ‘메리칸 노느’에 기록해 브리드만은 더욱 유명세를 탔다. 브리드만 형제들은 성홀열에 걸려 언니 둘은 죽고 혼자 살아남아 시청각장애인이 되었다. 그녀는 맹학교 출신의 시청각장애 교육의 시초가 되었다.
로라 브리드만은 어머니로부터 지극한 사랑을 받았으나 그녀의 아버지로부터는 학대를 받았다고 한다. 부모의 고용주인 아사 테니는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 아베나키족의 수어를 할 줄 알았는데 시간이 날 때마다 그녀에게 수어를 가르쳤다. 수어를 사용하는 원주민이 있음이 놀랍다.
브리드만은 1950년 맹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에서 생활했으나 다시 학교로 돌아가고 싶어 신경성 식욕부진이 걸리자 퍼킨스 맹학교로 돌아가 시간제 교사가 되었다. 그는 점자와 바느질을 가르쳤는데, 제자 중 한 사람이 저시력 학생 앤 설리번이다.
설리번은 술꾼 아버지의 학대와 결핵환자 어머니 밑에서 살다가 부모가 사망하자 8세에 동생과 함께 고아원에 버려진다. 고아원의 열악한 환경으로 동생을 잃고 자신도 5세에 얻은 눈병(트라코마)으로 장애인이 되었다. 난폭해진 설리번에게 간호사의 ‘하느님을 너를 사랑한다’는 교화로 받아들여 온순해졌으며, 시력교정술로 시력을 회복한 후 헬렌켈러의 가정교사로 시작해 50년을 함께 하게 된다.
그녀는 결국 시력을 잃게 된다. 헬렌 켈러의 사회주의(공산주의자)를 반대하고 헬렌 켈러를 돈벌이에 이용했다는 비판도 받지만, 매우 훌륭한 교사였다. 그리고 부유한 헬렌 켈러의 집안이 살림이 궁핍해져 헨렌 켈러와 자신이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세계 여행 공연을 했던 것이다. 설리번은 명사를 느끼거나 읽게 하고 손바닥에 글을 쓰는 방식의 교육을 하였다.
헬렌 켈러는 생후 19개월 때 뇌척수막염으로 시청각장애인이 되었다. 대여섯 살이 될 때까지도 물건을 던지거나 사람을 할퀴거나 때리는 정도로밖에 의사 표현을 할 수 없었다. 6세에 눈 수술을 하여 볼 수 없을까 하여 찾아간 안과의사에게서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을 소개받게 된다. 벨은 농학교 교사이기도 했으며, 보청기를 개발하다가 전화기를 발명한 인물이다. 벨이 헬렌 켈러 부모에게 퍼킨스 맹학교를 소개하게 된다.
맹학교를 졸업한 후 농학교에 입학했는데, 이 학교의 선생인 사라 풀러가 목의 진동과 입의 모양을 만지고 느끼게 하는 방법으로 헬렌에게 말하는 법을 처음으로 가르치면서 이 방법을 통해 언어능력을 회복해 말을 할 수 있게 됐다. 이게 진동발성법이다.
이후 헬렌은 여동생인 밀드레드와 함께 케임브리지 여학교에 다닌 뒤 16세의 나이에 래드클리프 여대에 입학했고, 1904년 졸업할 무렵에는 5개 국어를 습득했다. 이후에는 활발한 봉사활동과 작가, 연설가, 공산주의 운동, 여성운동, 민주화운동, 장애인 인권 운동을 했다. 그녀가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것은 1차. 2차 세계대전에서의 반전운동과 암울한 사람들에게 희망과 위로를 주는 전도사로서의 명사 초청 공연이 한몫했다.
서양교육사를 보더라도 시설이 먼저 생기고 학교가 설립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1985년 초에 가톨릭 시각장애인 신자들이 만든 시청각장애 미인가 주거시설인 라파엘의 집이 설립되었고, 이듬해에 차낙중이 입소하였다. 차낙중은 시청각장애인으로 장항선 기차에서 부모가 떨어뜨려 피투성이가 되어 발견되었고, 차에서 떨어졌다고 하여 차낙중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이 단체는 사회복지법인 하상복지재단으로 발전하였고, 시설은 법인 산하 여주 라파엘의 집으로 발전하는 견인차 역할을 하게 된다.
대전맹학교를 졸업하고 나사렛대학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은 조영찬이 방송을 타고 ‘달팽이의 별’이라는 영화가 제작되면서 시청각장애인의 교육과 복지는 세간의 이목을 끌게 되었다. 서울시의 지원으로 2019년 밀알시청각장애인학습지원센터, 2020년 실로암시청각장애인학습지원센터가 문을 열었다. 특히 밀알복지재단 헬렌켈러센터는 보건복지부 시청각장애인지원전담기관으로 이달 19일 문을 연다.
시각장애 학교나 청각장애인 학교 학생들은 통합교육 등의 영향으로 중복장애 학생들이 늘어가는데, 그중 시청각장애인이 상당히 존재한다. 그러나 별도의 시청각장애 전문 특수학교는 전무하다. 현재 촉점자나 손바닥 수어 등의 언어의 통일된 규정도 없고, 학습지원센터에서 복지 서비스를 지원받는 정도의 실정이다.
의사소통 지원 인력의 양성, 교육방법과 진로의 문제, 일상생활의 지원, 보조기기의 보급 등 많은 문제가 100년 전 미국에서의 고민이었는데, 이제야 많은 시청각장애인의 삶의 방임에서 벗어나 그들의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직 특수교육에서의 시청각장애교육은 암흑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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