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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리콘밸리가 삼성의 반도체 진출을 모두 지원한 이유 / 2/22(수) / 다이아몬드 온라인
뉴욕타임스가 「영화 『차이나 신드롬』 『미션 임파서블』 수준의 논픽션 스릴러」라고 극찬! 이코노미스트가 "반도체 산업을 이해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이 책은 훌륭한 출발점이 될 것"이라고 극찬했다. 파이낸셜 타임즈 비즈니스 북 오브 더 이어 2022를 수상한 초화제작 칩 워(Chip War)가 드디어 일본에 상륙한다.
갑자기 부족함이 제기되듯 반도체는 더 이상 범용품이 아니다. 저자 크리스 밀러가 지적했듯이 반도체의 수는 한정돼 있고 그 제조 과정은 눈코 뜰 새 없이 복잡하고 무서울 정도로 비용이 많이 든다. 「생산은 몇 개의 결정적인 급소에 둥글게 걸려」 있으며, 예를 들어 iPhone에서 사용되는 한 프로세서는, 전 세계를 둘러봐도, 「단 하나의 기업의 단 하나의 건물」에서만 생산할 수 있다.
이제 석유를 뛰어넘는 세계 최대 자원인 반도체를 놓고 세계 각국은 어떤 속셈을 갖고 있을까? 이번에 상재될 번역서 반도체 전쟁-세계 최대 기술을 둘러싼 국가 간 공방에서 반도체를 둘러싼 지정학적 역학, 발전의 역사, 기술의 본질이 드러나고 있다. 발매를 기념해, 본서의 일부를 특별히 공개한다.● 종전의 혼란에서 살아남은 삼성 창업자
이병철은 어떤 것이든 팔아버리는 상혼이 건장한 남자였다. 잭 R. 심플롯[마이크론 테크놀로지 출자자] 불과 1년 뒤 1910년 태어난 그는 1938년 3월 모국인 한국에서 사업을 시작했다.
당시의 한국이라고 하면 중국과 교전 중에 곧 미국과도 교전하게 되는 대일본제국의 일부였다. 그의 첫 상품인 한국산 건어물과 채소는 중국 북부로 출하돼 일본군의 배를 채웠다. 당시 한국은 이렇다 할 산업도 기술도 없는 가난한 변방의 땅이었지만 그는 그때부터 강대하고 오래가는 기업을 만들고 싶다는 꿈을 꿨다[1].
그는 나중에 미국 반도체 산업과 한국 국가라는 두 개의 유력한 동료를 얻어 삼성을 반도체 제국으로 변모시키게 된다. 실리콘밸리의 일본 타도 전략의 열쇠를 쥐고 있던 것이 아시아에서 값싼 공급원을 찾는 것이었다. 그는 삼성이라면 그 역할을 쉽게 해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한국은 자국보다 강력한 경쟁국 사이를 누비는 데 익숙했다. 이병철이 삼성을 창단한 지 7년 만에 일본이 미국에 패전한 1945년에 삼성은 망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교묘하게 방향을 틀었고, 건어물을 팔고 다닐 때만큼 능숙하게 정치적인 패트론을 교체했다. 그는 전후 한반도의 남쪽 절반을 점령한 미국인들과 관계를 맺고 삼성과 같은 거대 기업 그룹을 해체하고 싶어하던 한국 정치인들을 물리쳤다.
북한 공산주의 정부가 남한을 침공해 왔을 때조차 그는 자산을 지켜냈다. 다만 북한이 일시적으로 서울을 점령했을 때에는 공산당 고위 관리가 그의 쉐보레를 압수해 점령하에 있는 수도를 누볐다고 한다[2].
이병철은 전시하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복잡한 정치를 능숙하게 헤쳐나가며 자신의 기업제국을 확장해 나갔다. 1961년 군사정권이 권력을 잡자[동년 5월 16일 박정희 등이 일으킨 군사 쿠데타를 말한다] 장군들은 그에게서 소유한 은행을 빼앗았지만 그의 다른 기업들은 상처 없이 남았다.
그는 삼성이 국가의 이익을 위해 영업하고 있고, 그 국가의 이익은 삼성이 세계 수준의 기업이 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실제로 이 가문의 가훈 첫머리에는 사업을 통해 국가에 봉사한다는 문구가 있다[3].
이렇게 건어물 채소에서 설탕 섬유 비료 건설 은행 보험 등 다양한 분야로 다각화를 추진한 그는 1960년대와 1970년대 한국의 고도 경제성장을 자신이 국가에 봉사하고 있다는 증거로 파악했다.
한편 그가 1960년까지 한국 최고의 부자로 올라선 점에 착안한 그의 비판자들은 그것을 국가(와 돈에 눈이 먼 정치인들)가 그에게 봉사하고 있다는 증거로 파악했다.
● 미·일간 치열한 D램 경쟁이 삼성의 반도체 진출 계기로
이병철은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 도시바 후지쯔 같은 기업들이 D램 시장 점유율을 빼앗는 것을 보고 반도체 산업에 뛰어들겠다고 오래전부터 꿈꿨다. 한국은 이미 미국제나 일본제 칩의 조립 및 패키징의 중요한 외부 위탁처가 되어 있었다.
1966년 미국 정부의 자금 지원으로 한국과학기술연구소가 설립되면서 미국 일류대학을 졸업하는 한국인과 미국에서 교육받은 교수진으로부터 한국에서 교육을 받는 한국인이 점점 많아졌다.
그러나 아무리 숙련된 근로자들이 있다고 해도 기업들이 기본 조립에서 최첨단 반도체 제조로 갑자기 방향을 틀기는 쉽지 않았다. 실제로 삼성은 이전에 단순한 반도체 사업에 손을 댄 적이 있었지만 이익을 내는 데도 선진 기술을 만들어내는 데도 어려움을 겪었다[4].
하지만 1980년대 초 이병철은 조류의 변화를 느꼈다. 1980년대 실리콘밸리와 일본의 혹독한 D램 경쟁이 돌파구를 마련한 것이다. 한편 한국 정부 역시 반도체를 우선순위 중 하나로 꼽았다.
삼성의 미래를 생각하던 그는 1982년 봄 캘리포니아로 날아가 휴렛팩커드(HP) 공장을 둘러본다. 동사의 기술력에는 경탄할 뿐이었다. HP가 팔로알토 차고에서 테크놀로지 업계의 거수로 성장할 수 있다면 틀림없이 건어물과 채소 장수 삼성에게도 같은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은 반도체 덕분이다」라고 한 HP의 종업원은 그에게 말했다.
그는 IBM 컴퓨터 공장도 둘러보다가 사진 촬영이 가능하다는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 "너희 공장은 기업 비밀 투성이일 거 아니야?" 라고 그는 공장을 안내해 준 IBM 직원에게 물었다. 그러자, 「보기만 하면 재현할 수 없으니까요」라고 그 종업원은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5]. 하지만 실리콘밸리의 성공을 재현하는 것이야말로 그가 지향하는 목표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수백만, 수천만, 몇 억 달러라는 설비투자가 필요했지만 성공할 보장은 없었다. 이병철에게도 그것은 큰 도박이었다. 그는 몇 달 동안 망설였다. 실패하면 그의 기업제국 전체가 기울어질 수 있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자금 지원 의지를 보이면서 반도체 산업 구축에 4억달러를 출자하기로 약속했었다. 그러면 한국 은행들도 정부의 방향에 따라 추가 대출을 해줄 것이다. 즉, 일본과 마찬가지로 한국의 기술 기업은 차고에서가 아니라 저금리 은행 대출이나 정부의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거대 복합기업에서 태어났다고 해도 된다.
● 인텔은 왜 삼성을 지원했을까?
그렇게 1983년 2월 긴장으로 잠 못 이루는 밤을 보낸 그는 끝내 뜻을 모아 삼성전자 부문 책임자에게 고했다. 삼성은 반도체 제조에 나선다. 그는 회사의 미래를 반도체에 맡긴 것이다. 그러기 위해 최소한 1억달러를 투자할 각오는 되어 있었다[6].
확실히 이병철은 빈틈없는 기업가였고 한국 정부의 강력한 뒷받침도 받았다. 그럼에도 반도체 사업에 대한 삼성의 일생일대 베팅은 실리콘밸리의 지원 없이는 도저히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반면 실리콘밸리는 완전히 일용품(상품화)화된 D램이 아니라 보다 부가가치가 높은 제품에 미국의 연구개발 활동을 집약시키면서 국내에서 보다 저렴한 공급원을 찾는 것이 메모리 칩 분야에서 일본과의 국제적 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최선책이라고 봤다.
즉, 미국의 반도체 메이커는, 한국의 신흥 기업을 잠재적인 파트너로 간주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국 업체들이 약진하면 비용을 도외시해서라도 무조건 싸게 팔겠다는 일본의 전략은 세계 D램 생산을 독점하는 데 효과적이지 않을 것이라고 로버트 노이스는 앤디 글로브에 말했다. 한국 업체에 가격에서 지기 때문이다. 그 결과는 일본 반도체 업체들의 목을 조를 것이라고 노이스는 예측했다[7].
따라서 인텔이 한국 D램 업체의 부상을 응원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이로써 인텔은 1980년대 삼성과 합작사업 계약을 맺은 실리콘밸리 기업 중 하나가 돼 삼성제 칩을 인텔 브랜드 아래 판매하게 됐다. 한국 반도체 산업을 지원하면 실리콘밸리에 대한 일본의 위협이 간접적으로 누그러질 것이라고 진행한 것이다.
게다가 한국의 비용과 임금은 일본보다 크게 낮았기 때문에 비록 한국 기업의 제조 공정이 초효율적인 일본 기업만큼 완벽하게 치밀하지 않더라도 삼성과 같은 한국 기업이 시장 점유율을 획득할 수 있는 기회는 있었다.
주
1 Geoffrey Cain, Samsung Rising
(Currency Press, 2020), p. 33.
2 Cain, Samsung Rising
, , pp. 33-41.
3 Dong-Sung Cho and John A. Mathews, Tiger Technology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7), pp. 105-106; Cain, Samsung Rising
, , pp. 40, 41, 46. 이의 재산については、“Half a Century of Rise and Fall of the Korean Chaebol in Terms of Income and Stock Price,” Yohap News Agency
, , November 7, 2006, https://www.yna.co.kr/view/AKR20110708154800008을 참조。
4 Si-on Park, Like Lee Byung-chul, p. 71; Cho and Mathews, Tiger Technology,
p. 112; Daniel Nenni and Don Dingee, Mobile Unleashed
(Semi Wiki, 2015); Kim Dong-Won and Stuart W. Leslie, “Winning Markets or Winning Nobel Prizes? KAIST and the Challenges of Late Industrialization,” Osiris
13(1998):167-170 ; Donald L. Benedict, KunMo Chung, Franklin A. Long, Thomas L. Martin, and Frederick E. Terman,"Survey Report on the Establishment of the Korea Advanced Institute of Science,"prepared for US Agency for International Development, December 1970, http://large.stanford.edu/history/kaist/docs/terman/summary/. 삼성의 초기의 고생에 대해서는 Hankook Semiconductor참조.
Samsung Newsroom, “Semiconductor Will Be My Last Business,” Samsung, March 30, 2010, https://news.samsung.com/kr/91.
5 Park Si-on, Like Lee Byung-chul, pp. 399, 436.
6 Myung Oh and James F. Larson, Digital Development in Korea: Building an Information Society
(Routledge, 2011), p. 54; Park Si-on, Like Lee Byung-chul, p. 386; Cho and Mathews, Tiger Technology
, , pp. 105, 119, 125; Lee Jae-goo, “Why Should We Do the Semiconductor Industry,” tr. Soyoung Oh, ZDNET Korea
, , Mar 15, 1983, https://zdnet.co.kr/view/?no=20110328005714.
7 Tedlow, Andy Grove, p. 218 [국역: 테드로 "앤디 글로브" 상권 332쪽] ; Robert W. Crandall and Kenneth Flamm, Changing the Rules (Brookings Institution Press, 1989), p. 315; Susan Chira, “Korea’s Chip Makers Race to Catch Up,” New York Times
, , July 15, 1985; “Company News: Intel Chip Pact,” New York Times,
June 26, 1987. (본 기사는 『반도체 전쟁--세계 최대 중요 기술을 둘러싼 국가 간의 공방』에서 일부를 전재하고 있습니다.)
크리스 밀러/치바 토시오
https://news.yahoo.co.jp/articles/5628551cdde71e65225a7ffdbde9a39472f723c1
サムスンの半導体進出をシリコンバレーがこぞって支援した理由
2/22(水) 6:02配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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ダイヤモンド・オンライン
Photo: Adobe Stock
NYタイムズが「映画『チャイナ・シンドローム』や『ミッション:インポッシブル』並のノンフィクション・スリラーだ」と絶賛! エコノミストが「半導体産業を理解したい人にとって本書は素晴らしい出発点になる」と激賞!! フィナンシャル・タイムズ ビジネス・ブック・オブ・ザ・イヤー2022を受賞した超話題作、Chip War
がついに日本に上陸する。
にわかに不足が叫ばれているように、半導体はもはや汎用品ではない。著者のクリス・ミラーが指摘しているように、「半導体の数は限られており、その製造過程は目が回るほど複雑で、恐ろしいほどコストがかかる」のだ。「生産はいくつかの決定的な急所にまるまるかかって」おり、たとえばiPhoneで使われているあるプロセッサは、世界中を見回しても、「たったひとつの企業のたったひとつの建物」でしか生産できない。
もはや石油を超える世界最重要資源である半導体をめぐって、世界各国はどのような思惑を持っているのか? 今回上梓される翻訳書、『半導体戦争――世界最重要テクノロジーをめぐる国家間の攻防』にて、半導体をめぐる地政学的力学、発展の歴史、技術の本質が明かされている。発売を記念し、本書の一部を特別に公開する。● 終戦の混乱を生き抜いたサムスン創業者
李秉喆(イビョンチョル)は、どんなものでも売り物にしてしまう商魂たくましい男だった。ジャック・R・シンプロット〔マイクロン・テクノロジー出資者〕のわずか1年後、1910年に生まれた彼は、1938年3月に母国の韓国で事業を始めた。
当時の韓国といえば、中国と交戦中ですぐにアメリカとも交戦することになる大日本帝国の一部であった。彼の最初の商品である韓国産の干物や野菜は、中国北部へと出荷され、日本軍の腹を満たした。当時の韓国はこれといった産業も技術もない貧しい辺境の地だったが、彼はそのころから「強大で末永く続く」企業をつくりたいと夢見ていた[1]。
彼はのちに、アメリカの半導体産業と韓国国家というふたつの有力な仲間を得て、サムスンを半導体帝国へと変貌させることになる。シリコンバレーの日本打倒戦略の鍵を握っていたのが、アジアで安価な供給源を見つけることだった。彼はサムスンならその役割を容易に果たせる、と考えた。
韓国は自国より強力なライバル国のあいだを渡り歩くのに慣れていた。李がサムスンを創設してから7年後、日本がアメリカに敗戦した1945年に、サムスンはつぶされていたとしてもおかしくはなかった。
しかし、彼は巧みに方向転換を行ない、干物を売り歩いていたときと同じくらい手際よく政治的なパトロンを取り替えた。彼は戦後、朝鮮半島の南半分を占領したアメリカ人たちと関係を築き、サムスンのような巨大企業グループを解体したがっていた韓国の政治家たちを払いのけた。
北朝鮮の共産主義政府が韓国に侵攻してきたときでさえ、彼は資産を守りきった。ただ、北朝鮮が一時的にソウルを占領した際には、共産党の高官が彼のシボレーを押収し、占領下にある首都を走り回ったそうだ[2]。
李は戦時下にもかかわらず、韓国の複雑な政治を巧みに乗りこなし、自身の企業帝国を拡大していった。1961年に軍事政権が権力を握ると〔同年5月16日に朴正煕(パクチョンヒ)らが起こした軍事クーデターのこと〕、将軍たちは彼から所有する銀行を奪い取ったが、彼のほかの企業は無傷で残った。
というのも、彼はサムスンが国家の利益のために営業していて、その国家の利益というのはサムスンが世界レベルの企業になれるかどうかにかかっている、と主張したのだ。実際、李家の家訓の冒頭には、「事業を通じて国家に奉仕する」との文言がある[3]。
こうして、干物や野菜から、砂糖、繊維、肥料、建設、銀行、保険などさまざまな分野に多角化を進めた彼は、1960年代から1970年代にかけての韓国の高度経済成長を、自身が国家に奉仕している証拠だととらえた。
一方、彼が1960年までに韓国一の富豪にのし上がった点に着目した彼の批判者たちは、それを国家(と金に目がくらんだ政治家たち)が彼に奉仕している証拠ととらえた。
● 日米間の苛烈なDRAM競争が サムスンの半導体進出のきっかけに
李は、1970年代終盤から1980年代初頭にかけて東芝や富士通といった企業がDRAM市場のシェアを奪うのを見て、半導体産業に割って入りたい、と前々から夢見ていた。韓国はすでに、アメリカ製や日本製のチップの組立やパッケージングの重要な外部委託先となっていた。
さらに、1966年にアメリカ政府の資金援助で韓国科学技術研究所が設立され、アメリカの一流大学を卒業する韓国人や、アメリカで教育を受けた教授陣から韓国で教育を受ける韓国人がどんどん増えていった。
しかし、いくら熟練の労働者たちがいるにせよ、企業が基本的な組立から最先端の半導体製造へといきなり舵を切るのは、そう簡単なことではなかった。実際、サムスンは以前、単純な半導体事業に手を出したことがあったが、利益を上げるのにも、先進技術を生み出すのにも苦労していた[4]。
しかし、1980年代初頭、李は潮目の変化を感じた。1980年代のシリコンバレーと日本の苛酷なDRAM競争が、突破口を切り開いたのだ。一方で、韓国政府もまた、半導体を優先事項のひとつとしてとらえていた。
サムスンの未来に考えを巡らせていた彼は、1982年春、カリフォルニア州へと飛び、ヒューレット・パッカード(HP)の工場を見学する。同社の技術力には驚嘆するばかりだった。HPがパロアルトのガレージからテクノロジー業界の巨獣へと成長できるなら、まちがいなく干物と野菜売りのサムスンにも同じことができるはずだ。「すべては半導体のおかげだ」とあるHPの従業員は彼に告げた。
李はIBMのコンピュータ工場も見学したが、写真撮影可と聞いて衝撃を受けた。「あなた方の工場は企業秘密だらけのはずでは?」と彼は工場を案内してくれたIBM従業員に訊いた。すると、「見ただけじゃ、再現できませんから」とその従業員は自信満々で答えた[5]。しかし、シリコンバレーの成功を再現することこそが、彼の目指す目標だった。
そのためには、何百万、何千万、何億ドルという設備投資が必要だったが、成功する保証はなかった。李にとってさえ、それは大きな賭けだった。彼は何ヵ月と迷った。失敗すれば、彼の企業帝国全体が傾きかねない。
しかし、韓国政府は資金援助の意欲を示し、半導体産業の構築に4億ドルを出資することを約束していた。となれば、韓国の銀行も政府の方向性に従い、追加の融資をしてくれるだろう。つまり、日本と同様、韓国のテクノロジー企業は、ガレージからではなく、低金利な銀行融資や政府の支援を受けられる巨大複合企業から生まれたといっていい。
● なぜインテルはサムスンを支援したのか
こうして、1983年2月、緊張で眠れない夜を過ごした彼は、とうとう意を決して電話を取り、サムスンのエレクトロニクス部門の責任者に告げた。「サムスンは半導体製造に乗り出す」。彼は会社の未来を半導体に託したのだ。そのために、最低でも1億ドルを投じる覚悟はできていた[6]。
確かに、李は抜け目のない起業家だったし、韓国政府の強烈な後ろ盾も得ていた。それでも、半導体事業へのサムスンの一世一代の賭けは、シリコンバレーの支援なしではとうてい成功しなかっただろう。
一方のシリコンバレーは、すっかり日用品(コモディティ)化したDRAMではなく、より付加価値の高い製品にアメリカの研究開発活動を集約させつつ、韓国国内でより安価な供給源を見つけることこそが、メモリ・チップ分野で日本との国際的な競争に勝つための最善策だと考えた。
つまり、アメリカの半導体メーカーは、韓国の新興企業を潜在的なパートナーとみなしていたのだ。「韓国メーカーが躍進」すれば、「コストを度外視してでもとにかく安く売ろう」とする日本の戦略は、世界のDRAM生産を独占するのに有効ではなくなるだろう、とロバート・ノイスはアンディ・グローブに語った。韓国メーカーに価格で負けるからだ。その結果は日本の半導体メーカーの「首を絞める」だろう、とノイスは予測した[7]。
したがって、インテルが韓国のDRAMメーカーの台頭を応援するのは自然な成り行きだった。こうして、インテルは1980年代にサムスンとの合弁事業契約を結んだシリコンバレー企業のひとつとなり、サムスン製のチップをインテル・ブランドのもとで販売することになった。韓国の半導体産業を支援すれば、シリコンバレーに対する日本の脅威が間接的に和らぐと踏んだのである。
さらに、韓国のコストや賃金は日本より大幅に低かったので、たとえ韓国企業の製造工程が超効率的な日本企業ほど完璧に緻密でなくても、サムスンのような韓国企業が市場シェアを獲得できるチャンスはあった。
注
1 Geoffrey Cain, Samsung Rising
(Currency Press, 2020), p. 33.
2 Cain, Samsung Rising
, pp. 33-41.
3 Dong-Sung Cho and John A. Mathews, Tiger Technology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7), pp. 105-106; Cain, Samsung Rising
, pp. 40, 41, 46. 李の財産については、“Half a Century of Rise and Fall of the Korean Chaebol in Terms of Income and Stock Price,” Yohap News Agency
, November 7, 2006, https://www.yna.co.kr/view/AKR20110708154800008を参照。
4 Si-on Park, Like Lee Byung-chul, p. 71; Cho and Mathews, Tiger Technology,
p. 112; Daniel Nenni and Don Dingee, Mobile Unleashed
(Semi Wiki, 2015); Kim Dong-Won and Stuart W. Leslie, “Winning Markets or Winning Nobel Prizes? KAIST and the Challenges of Late Industrialization,” Osiris
13(1998): 167-170; Donald L. Benedict, KunMo Chung, Franklin A. Long, Thomas L. Martin, and Frederick E. Terman, “Survey Report on the Establishment of the Korea Advanced Institute of Science,” prepared for US Agency for International Development, December 1970, http://large.stanford.edu/history/kaist/docs/terman/summary/. サムスンの初期の苦労については、Hankook Semiconductorを参照。Samsung Newsroom, “Semiconductor Will Be My Last Business,” Samsung, March 30, 2010, https://news.samsung.com/kr/91.
5 Park Si-on, Like Lee Byung-chul, pp. 399, 436.
6 Myung Oh and James F. Larson, Digital Development in Korea: Building an Information Society
(Routledge, 2011), p. 54; Park Si-on, Like Lee Byung-chul, p. 386; Cho and Mathews, Tiger Technology
, pp. 105, 119, 125; Lee Jae-goo, “Why Should We Do the Semiconductor Industry,” tr. Soyoung Oh, ZDNET Korea
, Mar 15, 1983, https://zdnet.co.kr/view/?no=20110328005714.
7 Tedlow, Andy Grove, p. 218[邦訳:テドロー『アンディ・グローブ』上巻332ページ]; Robert W. Crandall and Kenneth Flamm, Changing the Rules
(Brookings Institution Press, 1989), p. 315; Susan Chira, “Korea’s Chip Makers Race to Catch Up,” New York Times
, July 15, 1985; “Company News: Intel Chip Pact,” New York Times,
June 26, 1987. (本記事は、『半導体戦争――世界最重要テクノロジーをめぐる国家間の攻防』から一部を転載しています)
クリス・ミラー/ 千葉敏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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