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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구 수도회 영성을 찾아서] 파리외방전교회 (상)
아시아 선교 위해 파견된 세 주교가 시작
1600년대 프랑스 파리에는 사제와 평신도로 구성된 ‘성체회’라는 신심단체가 있었다. 이 단체는 성체 형태로 숨어계신 예수님처럼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고아원, 병원, 본당 등에서 가장 어려운 이들을 위해 사목했다.
이후 이들의 열망은 파리와 프랑스를 넘어 당시 수도회가 중심이 된 외방 선교, 특히 아시아 지역 선교에 적극 참여하려는 의지로 이어졌다.
성체회 회원들은 이를 위해 1646년부터 10년간 교황청 포교성성(현 인류복음화성)에 아시아 지역으로 주교들을 파견할 것을 요청했다. 마침 최초로 베트남에서 선교하며 아시아 선교의 중요성을 인식한 예수회 로드 신부(Alexandre de Rhodes, 1591~1660)도 교황청에 아시아 선교지를 직접 관할할 수 있도록 ‘대목구’ 제도를 도입할 것을 제안했다.
결국 1658년 알레산데르 7세(1655~1667) 교황은 이들의 청원을 받아들여 라오스에서 조선에 이르는 3개의 대목구 통킹(Tonking), 코친차이나(Co-chinchina), 남경(南京)을 설정하고, 파견할 주교로 랑베르 드 라 모트(Lambert de la Motte, 1624~1679), 이냐시오 코톨랭디(Ignace Cotolendi, 1630~1662), 프랑수아 팔뤼(Francois Pallu, 1626~1684)를 임명했다. 파리외방전교회의 시작이었다.
교황은 대목구에 주교들을 파견하기에 앞서 ▲ 현지인 성직자를 양성할 것 ▲ 파견되는 나라의 문화를 존중하고 풍습을 받아들일 것 ▲ 중요한 일이 생기면 교황청에 문의할 것 등을 지시했다. 이는 파리외방전교회의 기본 정신이 되었다.
파리외방전교회 창립자인 세 주교는 대목구로 떠나기 전, 앞으로 선교지에 파견될 후속 선교사의 양성을 위한 신학교 설립에 뜻을 모았다. 이어 파리에 설립된 이 신학교는 1663년 당시 프랑스 국왕 루이 14세(1643~1715)에 의해 승인됐고, 이듬해 교황청의 공인을 받았다. 이로써 파리외방전교회는 더욱 확고한 기반을 갖추게 됐다.
파리외방전교회는 ‘현지인 성직자 양성’이라는 주된 목표를 위해 선교지에 신학교를 설립하고자 노력했다. 결국 1807년 말레이 반도 페낭 섬에 아시아 최초의 신학교가 자리 잡았다. 이곳은 조선, 일본, 베트남 등 아시아 여러 나라 신학생들을 성직자로 양성하는 아시아 지역 전체의 신학교 역할을 했다.
이후 파리외방전교회에 위임된 선교지에 차례로 신학교가 세워졌다. 늘어나는 신학교만큼 현지인 성직자도 1850년 150명을 시작으로 점차 늘었다. 1940년에는 3800명에 달했고 20세기 후반에는 그 수가 더 증가했다.
늘어난 현지인 성직자에 따라 현지인에 이양된 교구도 많아졌다. 1922년 중국 두 곳의 지목구장을 필두로 시작된 현지인 교구 이양은 1990년 안동교구가 마지막이었다. [가톨릭신문 수원교구판, 2021년 12월 25일, 이재훈 기자]
[교구 수도회 영성을 찾아서] 파리외방전교회 (중)
한국교회 기틀 다지는데 큰 기여
파리외방전교회의 아시아 선교 열망에 조선도 예외가 아니었다. 1831년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이 조선대목구를 설정하고 초대 대목구장으로 당시 태국 시암대목구 보좌주교였던 브뤼기에르 주교를 임명했다. 그러나 브뤼기에르 주교는 입국을 준비하던 중 1835년 만주에서 병으로 선종했다.
그를 이어받아 모방 신부가 권한을 위임받은 부주교 자격으로 1835년 말 조선 입국에 성공했다. 그는 파리외방전교회의 첫 목표인 현지인 성직자 양성에 착수해 김대건과 최양업, 최방제 세 소년을 신학생으로 선발해 마카오 신학교에서 교육시켰다. 이를 통해 1845년 최초의 한국인 사제인 김대건 신부가 배출됐다. 1837년에는 제2대 조선대목구장 엥베르 주교, 샤스탕 신부가 차례로 조선에 입국했다.
현지 신학교 설립에도 노력을 기울였다. 1855년 제천에 배론 신학교를 시작으로 1885년에는 원주 부엉골 신학교를 세웠다. 이는 1887년 서울 용산 신학교로 자리 잡았다.
파리외방전교회의 활동은 1886년 조·불수호통상조약으로 조선 내 천주교 포교의 자유를 얻은 뒤 확대됐다. 파리외방전교회는 1890년 조선 내 22명의 회원이 활동했으나 이후 10년 만에 41명으로 회원이 크게 늘었다.
1911년에는 제8대 조선대목구장 뮈텔 주교가 교황청에 분할을 요청해 승인받아, 조선대목구를 서울대목구로 이름을 바꾸고 전라도와 경상도 지역을 떼어 대구대목구를 신설했다. 신자 수 7만6000여 명, 선교사 48명, 현지인 성직자 21명으로 교세가 크게 늘었기 때문이다. 초대 대구대목구장에는 드망즈 주교가 임명됐다. 1920년에는 함경도와 서북부 평안도 지역 사목을 위해 이 지역을 서울대목구에서 분리해 원산대목구를 새로 설립하고 베네딕도회에 위임했다.
이러한 대목구 및 지목구 제도는 일제 해방 후인 1962년 한국교회에 교계제도가 설정되며 그대로 이어졌다. 이렇듯 파리외방전교회는 한국교회가 설립된 이래 그 기틀을 다지는데 기여했다.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은 한국에 많은 성당을 건립하고 사목하는데도 큰 노력을 기울였다. 1890년 주교좌명동대성당을 설계한 코스트 신부, 1906년 하우현성당을 건립한 샤플랭 신부, 1900년 안성성당을 세운 하느님의 종 앙투완 공베르(Gombert Antoine, 1875~1950) 신부 등 많은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들이 한국에 성당을 세우고 현지 사목에 힘썼다. [가톨릭신문 수원교구판, 2022년 1월 2일, 이재훈 기자]
[교구 수도회 영성을 찾아서] 파리외방전교회 (하)
‘주는 교회’ 되도록 선교지 성장 이끌어
파리외방전교회는 창립 이후부터 계속 아시아 지역 ‘복음화’와 ‘선교’에 초점을 맞추고 활동을 이어왔다. 한국에서 교계 제도가 자리 잡고, 한국교회가 해외선교를 향하기까지 성장하는데 함께했다.
파리외방전교회 회원들은 이 과정에 이르기까지 복음화를 위한 현지 문화 존중과 적응에 노력했다. 조선에서 성 엥베르와 성 베르뇌 주교가 각각 ‘범세형’, ‘장경일’ 등 현지 이름을 지은 것도 그 일환이다. 또 회원들은 선교지에서 순교로 신앙을 증거했다. 전체 회원 중 순교자가 170명에 이를 정도다. 한국교회 103위 순교성인 중에도 성 엥베르 주교, 성 모방 신부, 성 샤스탕 신부 등 회원 10명이 포함돼 있다. 또 1950년 한국전쟁 당시 한국에서 활동하던 13명 중 셀레스텡 코요스 신부(한국이름 구인덕, 1993년 선종)를 제외한 12명이 공산군에 체포돼 순교하는 시련도 겪었다.
파리외방전교회의 노력은 선교 지역 발전에도 크게 기여했다. 하느님의 종 앙투완 공베르 신부(Antoine Gombert, 1875~1950)는 안성에서 지역민의 자립을 위해 교육기관인 안법학교(현 안법고등학교)를 세우고, 성당 주변 토지 50만평을 매입해 지역민들에게 포도농사법을 전수했다. 오늘날 안성 포도의 시초다. 에밀 타케 신부(Emile Joseph Taquet, 한국명 엄택기, 1873~1952)는 제주에서 홍로본당을 중심으로 사목하며 1911년 제주도민들의 자립을 위해 온주 밀감을 들여와 현 제주 감귤사업의 토대를 마련했다.
파리외방전교회 한국지부(지부장 임강명 신부(Emmanuel Kermoal))에서는 현재 두봉 주교와 허보록 신부(Philippe Blot), 하대건 신부(Bėrard Christophe) 등 10명의 회원이 활동하고 있다. 이 중 허보록 신부는 청소년들을 위한 그룹홈인 군포 성 요한의 집을, 하대건 신부는 서울대교구 노동사목위원회 불어공동체와 이주사목위원회 및 북한 결핵 퇴치를 위한 의료사업을 펼치는 유진벨재단 결핵사업 담당 사제로 활동하고 있다.
파리외방전교회는 이 외에도 총 150여 명의 회원(2021년 기준)들이 일본, 태국, 인도네시아 등 아시아 지역과 마다가스카르, 모리셔스제도를 비롯한 태평양 지역에서 활동 중이다.
파리외방전교회는 앞으로도 성령께서 이끄는 대로 모든 선교지가 ‘받는 교회’에서 ‘주는 교회’로 성장할 수 있도록 함께할 계획이다.
[교구 수도회 영성을 찾아서] 수원 성 빈센트 드 뽈 자비의 수녀회 (상)
가난한 이들 안에서 주님 섬기자
수원 성 빈센트 드 뽈 자비의 수녀회(총원장 문화연 마리아 가브리엘라 수녀)는 1965년 1월 8일 세 명의 선교사 수녀들이 입국하면서 한국에서의 역사가 시작됐다. 한국 진출 2년여 만인 1967년 6월 3일 현대식 의료시설과 자선진료소를 갖춘 성빈센트병원을 개원해 지역 의료환경 개선과 복음화에 기여하고 있다. 수녀회는 수녀원 건물보다 병원을 먼저 지었다.
수원 성 빈센트 드 뽈 자비의 수녀회는 명칭에서 알 수 있듯 빈센트 성인의 영성으로 설립된 수도 단체 가운데 하나다. 빈센트 성인은 ‘가난한 이들 안에서 주님을 섬긴다’는 정신으로 17세기 프랑스에서 ‘사랑의 딸회’를 설립해 활동 수도회라는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19세기 초 빈센트 영성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독일 파더본교구장 프리드리히 클레멘스 주교(재임 1825~1841)는 당시 파더본 국립병원 환자들을 돌볼 수녀들을 양성하고자 수도생활을 갈망하던 간호사들을 프랑스 스트라스부르에 있는 ‘자비의 수녀회’에 보냈다. 양성을 마친 파더본의 첫 수녀들이 스트라스부르의 두 수녀와 함께 독일에 돌아와 1841년 3월 25일, 파더본 국립병원을 모원으로 한 ‘파더본 성 빈센트 드 뽈 자비의 수녀회’를 시작하게 됐다.
창립자 프리드리히 클레멘스 주교는 수도회가 설립된 그해에 선종했지만, 창립자의 행적과 편지를 통해 드러나는 간절한 마음과 노력은 수녀회가 파더본교구에서 병자들과 가난한 이들을 돌보며 급속히 성장하는 밑거름이 됐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와 함께 선교정신에 고취돼 있던 수녀회는 6·25전쟁 이후 어려움을 겪고 있는 한국 실정에 관심을 갖게 됐고, 당시 수원교구장 윤공희(빅토리노) 주교의 초청으로 신설 교구이면서 의료 환경이 열악했던 수원교구로 수녀들을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1965년 한국에 진출한 수녀회는 1974년 성빈센트병원 뒤편에 수녀원 본원을 마련했다. 이후 점차 사도직 확장으로 분원 수가 늘어나는 등 수도회가 성장함에 따라 1990년 한국 공동체는 독일 파더본으로부터 독립돼 교구 설립 ‘수원 성 빈센트 드 뽈 자비의 수녀회’로 거듭났다.
독립 이후 수도회 뿌리인 파더본 공동체와 연계를 지속하고 있으며, 스트라스부르 자비의 수녀회에서 생겨나 유럽, 아프리카, 남미, 동남아 등으로 퍼져 나간 14개의 자비의 수녀회와 함께 ‘스트라스부르 빈센트 연합회’를 이루고 있다. 2005년에는 한국 진출 40주년을 맞아 미얀마와 방글라데시, 필리핀 등 해외선교를 시작해 평신도와의 협력을 통한 빈센트 영성실현의 장을 넓히고 있다. 또한 빈센트 영성 400주년을 기해 2017년 한국빈첸시안 가족위원회를 결성하고, 가난한 이들 안에 계신 주님을 섬기는 사명 완수에 힘쓰고 있다. [가톨릭신문 수원교구판, 2022년 1월 16일, 박지순 기자]
[교구 수도회 영성을 찾아서] 수원 성 빈센트 드 뽈 자비의 수녀회 (중)
겸손 · 소박 · 사랑을 기본으로 봉사
수원 성 빈센트 드 뽈 자비의 수녀회(총원장 문화연 마리아 가브리엘라 수녀, 이하 빈센트 수녀회)가 따르는 성 빈센트 영성의 핵심은 가난한 이들 안에서 주님을 섬기며 하느님 섭리를 신뢰하는 것으로 표현할수 있다. 이를 위해 연대와 협력, 냉철한 현실주의를 추구한다.
빈센트 수녀회 영성은 수녀회 생활규범 제204조 “여러분의 가장 중요한 본분이요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특별히 맡기신 것은, 바로 우리의 주님들인 불우한 사람들에게 세심한 관심을 기울여 섬기는 일입니다… 바로 이 일을 위하여 하느님께서 여러분의 공동체가 설립되도록 하셨습니다”에 집약돼 있다.
빈센트 성인은 17세기 당시 프랑스에서 발생했던 전쟁과 전염병, 기근에 시달리던 이들 안에서 자신의 사명을 깨닫고 그들의 영적, 물적 빈곤에 대한 효과적인 도움을 제공하며 ‘냉철한 현실 참여’의 영성을 실현했다. 아울러 가난한 이들을 위한 봉사에 여러 계층 사람들이 참여해 협력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 수도원 안에서 머무는 양식에서 벗어난 활동 수도회와 지역적으로 조직된 평신도 단체가 탄생하게 된 배경에는 빈센트 성인의 창의력과 조직력이 있었던 것이다.
빈센트 수녀회는 가난한 이들에게 봉사하는 기본적인 자세로 빈센트 성인이 가르친 겸손과 소박과 사랑을 제시한다. 이 세 가지 덕행이 기초가 될 때라야 자비의 봉사가 비로소 가치 있는 것이 된다고 여긴다.겸손은 모든 선이 하느님께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이것은 하느님께 신뢰를 두는 데 근본이 되는 태도를 뜻한다. 소박은 단순함, 진실함, 참됨, 투명함 등을 아우르는 말로 모든 인간관계의 바탕이 되고 신뢰의 기초가 된다. 반면 이중성과 거짓은 신뢰를 깨뜨린다. 소박한 사람이라야 주님과 하느님 나라에 오로지 한마음으로 헌신할 수 있다. 사랑은 가난한 사람들을 효과적으로 돌보기 위해 그들의 필요에 실질적으로 응답하는 데 필요한 힘이다. 민족, 인종, 종교, 사회적 지위를 가리지 않고 누구를 만나든지 존중하고 도울 수 있는 자세도 사랑에서 나온다.
빈센트 수녀회는 현 시대 자비의 봉사를 가장 필요로 하는 곳을 찾아 힘이 닿는 데까지 병원, 양로원, 본당, 청소년 시설, 미혼모 시설, 다문화가정센터 등에서 성 빈센트의 영성을 실현하고 있다. 또한 세상 모든 이들과 함께 봉사하고자 국내외 빈첸시안 수도자, 평신도들과 한국빈첸시안 가족위원회, 성 빈센트 자비의 협력자회, 성녀 루이제회 등의 모임을 통해 연대와 협력을 실천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수원교구판, 2022년 1월 23일, 박지순 기자]
[교구 수도회 영성을 찾아서] 수원 성 빈센트 드 뽈 자비의 수녀회 (하)
병들고 가난한 이들 곁에서…
수원 성 빈센트 드 뽈 자비의 수녀회(총원장 문화연 마리아 가브리엘라 수녀, 이하 빈센트 수녀회) 영성과 사도직 활동은 수녀회 생활규범 제204조에 압축적으로 표현돼 있다.
“우리는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봉사를 많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완수한다… 우리의 관심사는 우리의 협력자들이 교회와 세상에서 우리에게 위임된 임무를 이해하고 함께 수행하는 일이다.”
빈센트 수녀회는 병든 이들, 가난한 이들의 삶을 영육으로 돌보는 데에 열정을 쏟았던 빈센트 성인의 모범을 따라 의료와 복지, 교육에 사도직 활동의 중점을 두고 있다.
1965년 한국에 파견된 독일 선교사 수녀들은 6·25전쟁 후 현대적 의료 시설이 전무했던 경기 남부 지역에 성빈센트병원을 세웠다. 1967년 설립된 성빈센트병원은 빈센트 수녀회 역사뿐만 아니라 지역 주민들과 의료진들의 역사 안에서 함께 성장해 왔다.
성빈센트병원은 빈센트 수녀회의 다른 복지 사도직이나 해외선교지와 연계해 어려운 이웃들에게 의료혜택을 제공하고 있다. 병원 설립 당시 자선병동은 현재 형태를 바꿔 영세민들과 외국인 노동자들을 위한 무료병원인 안산 빈센트의원으로 자리 잡았다.
빈센트 수녀회 수녀들은 성빈센트병원에서 간호, 원목, 호스피스, 영성실현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것은 물론, 국군수도병원, 성루카병원 등 11개 병원에서 원목과 호스피스를 맡아 심신이 지친 환자들에게 영적 위안을 주고 있다.
빈센트 수녀회는 복지 분야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무료양로시설인 경기도 화성 ‘성녀 루이제의 집’과 미국 덴버 소재 ‘성녀 안나의 집’을 운영하며 어르신들이 신앙공동체 안에서 존중받으며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도록 돕는다. 또한 형편이 어려운 이들에게 생필품과 음식을 챙겨 주는 사랑의 나눔터 ‘한울마루’는 300명이 넘는 이웃들에게 사랑방이 되고 있다.
빈센트 수녀회가 30년간 운영해 온 미혼모 시설 ‘생명의 집’에서 태어난 아기만도 1000명이 넘고, 생명의 집과 연계해 ‘모성의 집’은 미혼모자가 취업과 주택마련 등 자립을 준비하는 동안 그들에게 다양한 교육기회와 돌봄을 제공하고 있다.
빈센트 성인이 어린이를 특히 사랑한 것처럼 빈센트 수녀회는 성빈센트청소년회(이하 빈청)를 통해 청소년 교육에도 헌신하고 있다. 빈청은 청소년들이 빈센트 성인의 영성을 따라 자비, 기도, 봉사의 태도를 갖춰 사회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도록 이끄는 단체다. 올해로 각각 22주년과 20주년을 맞는 수원 빈청과 서울 빈청에서 봉사와 친교, 나눔을 체험한 청소년들이 1000여 명에 달한다
[교구 수도회 영성을 찾아서] 한국외방선교회 (상)
‘받는 교회’에서 ‘나누는 교회’로
외국인 선교사의 도움으로 양적, 질적인 성장을 일군 한국교회는 그동안 받았던 도움을 나누기 위해 1970년대에 이르러 한국인 선교사 파견을 논의한다. 이에 주교회의는 1974년 외방선교회 설립준비위원회를 구성, 외방선교회 설립을 구체화했다. 1975년 2월 26일 주교회의는 한국외방선교회 설립을 정식으로 의결하고, 설립자에 최재선(요한) 주교, 초대 총재에 정진석(니콜라오) 주교를 임명했다.
한국외방선교회의 설립에는 ‘형제적 나눔’을 실천코자 한 최재선 주교의 뜻이 큰 영향을 미쳤다. 1973년 9월 부산교구장직을 사임하고 같은 해 11월 교황청 포교 연맹 한국지부장에 임명된 최 주교는 한국외방선교회를 태동시키기 위한 구체적인 계획들을 수립한다. 평소 성소의 빈곤을 호소하는 세계교회의 요청에 부응해 우리 교회가 그들과 형제적 나눔을 실천해 ‘받는 교회에서 나누는 교회’ 로 성숙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실천에 옮긴 것이다.
외국의 형제들로부터 많은 물직적·영성적 도움을 받아 오늘날의 교회로 성장한 한국교회가 이제는 과거에 받은 도움에 감사하고, 그 감사에 대한 보은으로 어려움 속에 있는 해외의 형제자매들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는 질적 성숙을 지향할 시기가 되었다는 최 주교의 생각은 한국외방선교회의 비전 수립에 반영됐다.
한국외방선교회의 목적은 복음화 활동이 필요한 곳이면 세계 어디에든지 그 지방 교구장의 선교와 사목협조요청에 따라 기쁜 마음으로 봉사할 한국 선교사를 양성ㆍ지도하는 데 있으며, 특히 궁극적인 선교지 목표를 북한과 중국 침묵의 교회로 삼았다. 또한 한국 순교선열들의 영성을 핵심 가치로 따르는 한국외방선교회는 창조적이고 적극적이며 개혁적인 선교활동을 지향한다.
또 여러 가지 어려움을 극복하며 한국외방선교회가 창립됨으로써 비로소 한국교회는 성소 빈곤을 호소하는 세계교회의 요청에 능동적으로 부응하게 됐고, ‘받는 교회’에서 ‘나누는 교회’로 전환하게 됐다는 점은 한국교회 역사 안에서 큰 의미를 가진다.
1976년 3월 1일에는 전국에서 선발된 대신학생 16명, 소신학생 33명으로 신학원이 정식으로 개원됐다. 신학원의 초대 지도신부로는 이홍근(바오로) 신부가, 1979년 2월에는 초대 원장으로 길홍균(이냐시오) 신부가 부임해 선교 사제 양성을 위해 힘을 쏟았다. 같은 해 4월에는 김남수(안젤로) 주교가 제2대 총재로 선임됐으며 7월에는 한국외방선교회 후원회가 창립돼 자립 단체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됐다. [가톨릭신문 수원교구판, 2022년 2월 13일, 민경화 기자]
[교구 수도회 영성을 찾아서] 한국외방선교회 (중)
감사 · 보은 실천하는 선교사들
한국외방선교회는 고(故) 최재선(요한) 주교가 받은 성령의 특별한 은총, 즉 카리스마를 바탕으로 설립됐다. 최 주교는 자신이 체험한 특별한 은사를 한국외방선교회의 공동체에 영적인 자산으로 남겼다. 그리고 한국외방선교회 회원들은 설립자의 영성을 세상을 위한 복음화에 중요한 자양분으로 삼고 실천에 힘쓰고 있다.
한국외방선교회 회헌 제7조에서는 설립자 영성에 대해 이렇게 확인할 수 있다.
“한국외방선교회 회원들은 설립자의 권고와 모범에 따라 기도와 단순한 생활 가운데에서 오로지 하느님의 영광과 하느님 나라의 건설을 위해서, 그리고 모든 이들의 구원을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하며 기쁘게 주님의 선교 사명에 투신한다.”
‘감사와 보은’은 최 주교가 한국외방선교회를 설립한 동기이기에, 이 선교회가 지향하는 모든 활동의 근본적인 원동력인 동시에 목적이다. 스스로 복음의 씨앗을 받아들인 한국교회는 무수한 순교 선열들의 신앙을 밑거름으로 하여 여러 이웃 교회들로부터 도움을 받으며 하느님의 은총 속에 성장했다.
따라서 최 주교는 ‘감사와 보은’을 실천하는 것이 신자들의 마땅한 도리라고 한결같이 생각했다. 최 주교는 ‘너희는 온 세상을 두루 다니며 모든 사람에게 이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고 명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응답해 한국 땅에서 복음의 가치를 심고 신앙을 증거한 이웃 교회와 여러 선교회 수도회의 형제적 사랑과 도움에 감사하며 그 은혜에 보은하는 길은, 어려운 이웃 교회들에 한국인 선교사를 파견하는 일이라고 여겼다.
한국외방선교회 회원들은 한국 순교자들을 주보성인으로 모시며, 순교를 불사한 그분들의 복음적 열성을 본받아 온 몸과 마음, 목숨을 다하여 선교 활동에 매진한다. 또한 창립자의 삶을 본받아 모든 선교사의 어머니이신 성모님께 의탁하며 교회를 통한 하느님 구원 사업의 도구가 돼 순교자적 자세로 최선을 다한다.
정결, 청빈 그리고 순명의 복음삼덕을 몸소 철저히 실천했던 최 주교는 생애를 마감하는 순간까지 자신의 심혈을 기울였던 해외선교의 풍성한 열매를 위하여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따라서 한국외방선교회 회원들은 창립자의 표양을 따라 기도와 봉사, 그리고 검박한 삶을 통해 ‘모든 이에게 모든 것’(1고린 9,22)이 된 선교사의 사표, 사도 바오로의 모범을 본받는다.
그리하여 세계 어느 곳에서나 육화하고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사랑과 일치의 세계를 구현함으로써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의 영광을 드러내기를 갈망한다. [가톨릭신문 수원교구판, 2022년 2월 20일, 민경화 기자]
[교구 수도회 영성을 찾아서] 한국외방선교회 (하)
62명 선교사제 8개국서 활동 중
1981년 11월 김동기(미카엘) 신부를 포함한 4명의 선교사를 파푸아뉴기니 마당대교구에 파견하며 한국외방선교회의 선교 여정이 시작됐다.
이후 선교 지역을 넓혀나가 현재는 파푸아뉴기니와 대만, 중국, 캄보디아, 모잠비크, 필리핀, 멕시코, 미국 등 8개 국가에서 62명의 선교사제가 활동하고 있다. 파푸아뉴기니에서 활동하고 있는 11명의 선교사제는 교통과 통신 수단, 사회적 제반 여건이 미비한 지역의 특성을 고려해 본당 사목뿐 아니라 대민 지원 활동에도 힘을 기울이고 있다.
1990년대에 들어서는 대만에 선교사를 파견하는데 주력했다. 대만 가톨릭 교세의 위축과 만성적인 성소자 부족, 그리고 사제의 고령화 현상으로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 줄 젊은 선교사제들이 필요했기 때문에 당시 대만의 신주교구장 리우시엔탕 주교는 한국외방선교회에 선교사제 파견을 요청했다. 이에 따라 1990년 3월 신주교구에 3명의 선교사제를 파견한 것을 시작으로 현재 9명의 선교사제가 본당 사목뿐 아니라 교정 사목과 원주민 사목에도 관여해 신자 공동체의 자립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2000년대에 들어서는 아프리카와 남아메리카 대륙까지 선교 활동 영역을 확장하며 ‘감사와 보은’을 보다 많은 나라에서 실천하게 됐다.
2001년 세운 캄보디아지부에서는 8개 나라 중 가장 많은 선교사제가 활동하고 있다. 이곳에서 활동하는 14명의 선교사제들은 최근 코로나19로 생활이 어려워진 이들을 위해 본당 사목뿐 아니라 긴급 식량 지원과 어린이와 청소년 교육에도 힘쓰고 있다. 아울러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을 위해 기술 교육을 제공하는 코미소(KOMISO) 직업학교, 무료로 의료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코미소 클리닉도 세웠다.
2011년 말 한국외방선교회는 미국 알래스카주 앵커리지대교구와의 사전 접촉을 통해 선교사 파견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하고, 2012년 11월 2명의 선교사제를 파견하게 됐다. 이후에도 많은 수는 아니지만 지속적으로 회원을 파견해 앵커리지대교구를 돕고 알래스카 선교를 구체화하는데 도움을 주려 노력해 왔다.
앵커리지와 그 외곽인 와실라를 중심으로 선교를 시작, 본당 사목은 물론이고 공소와 양로원 방문, 가톨릭 학교 교목, 교도소 사목 등을 통해 알래스카의 복음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외에도 각 지역의 다른 교파와도 연계해 빈곤, 청소년 가출, 알코올 중독, 가정폭력 등 지역 문제 해결을 위해 지역 공동체와 공조를 이끌어내는 한편 교회일치운동에도 기여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