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날개 그늘아래
57: 1-5
"하나님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시고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내 영혼이 주께로 피하되 주의 날개 그늘 아래서 이 재앙이 지나기까지 피하리이다 내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 부르짖음이여 곧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께로다 저가 하늘에서 보내사 나를 삼키려는 자의 비방에서 나를 구원하실찌라(셀라) 하나님이 그 인자와 진리를 보내시리로다 내 혼이 사자 중에 처하며 내가 불사르는 자 중에 누웠으니 곧 인생 중에라 저희 이는 창과 살이요 저희 혀는 날카로운 칼 같도다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은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시편 57:1-5)
요즘 일본은 겨울연가의 주인공 배용준 열풍에 휩싸여 있습니다. 일본사람들은 배용준을 욘사마라고 부릅니다. 음식점, 안경점, 슈퍼마켓 어디를 가도 배용준 사진을 내걸거나 붙혀놓고 있습니다. NHK TV는 특집 재방을 하겠다고 하는가하면 주인공 최지우는 일본 고이즈미 총리를 만나기도 했습니다. 특히 욘사마의 인기는 일본 여자들에겐 상상을 초월합니다.
어떤 여자는 자기 집 방 하나를 온통 배용준 사진으로 장식을 하는가 하면, 어떤 여자는 공항에서 배용준이 씨익 웃으며 자기를 바라보는 순간 기절을 했다고 합니다. 어떤 남자는 자기 아내가 배용준한테 미쳤다며 이혼을 했습니다. 남편이 가지 말라는데도 아내가 배용준 나라 한국을 갔기 때문이었습니다.
일본, 중국, 대만, 월남에서 부는 한류 열풍 특히, 인기 연예인을 에워싼 열풍 원인이 뭘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마음이 「허」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텅 비어 있기 때문입니다. 정신적으로 기댈 것이 없고, 채울 수 없고, 바랄 것이 없는 동공화 현상의 결과인 것입니다.
예수 바로 믿고, 새벽기도 잘나오고, 주일 낮·밤 예배에 나와 말씀 먹고 사는 사람은 욘사마 때문에 기절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첫째, 집도 있고, 돈도 있고, 이곳저곳 회원권도 있고, 동창도 있고, 좋은 차도 있는데 늘 마음이 허전하고 공허하고 텅빈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이런 사람들은 빈둥지증후군에 시달리는 사람들입니다. 있는데 없는 사람, 가졌는데 빈손인 사람들 그들이 바로 외롭고 쓸쓸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둘째, 사는 동네도 신통치 않고, 가진 것도 변변치 않고, 주변도 자랑할 것이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늘 미소짓고, 노래를 흥얼거리고, 인생이 행복하다며 감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가 더 행복한 사람입니까? 그리고 왜 이 사람은 가진 것도 없으면서 누릴 것도 없으면서 행복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눈에 보이지 않는 것, 손으로 잡히지 않는 것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것이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시편 57편은 다윗이 읊은 시 중에 하나입니다.
목동 다윗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것은 BC 1025년이었습니다. 15년 뒤인 1010년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971년까지 40년간 나라를 통치했습니다. 다윗도 사람이었던 탓으로 허물도 있었고 잘못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철저하게 지켰던 한가지는 "하나님 중심"의 신앙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신본주의자였고, 신본주의 정치가였습니다.
인본주의는 사람이 모든 일의 근본이 된다는 것이고 신본주의는 하나님이 모든 것의 근원이 된다는 주의입니다. 민주주의는 정치의 주체가 사람이기 때문에 사람의 철학과 사상과 이념을 따라 정치를 하는 것이고 신본주의는 정치의 주체가 하나님이라고 믿기 때문에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섬기며 그 뜻대로 정치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만든 정치 형태는 여러 가지입니다. 독재정치, 전제정치, 폭력정치, 억압정치, 통제정치, 공신정치 등 그러나 제일 좋은 것은 민주정치입니다.
민주정치는 개인의 인권과 자유를 보장하고 백성이 편히 일하며 살 수 있도록 해 주는 정치이기 때문에 사람이 만든 정치 형태 가운데 가장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민주정치를 이끌어 가는 주체들이 누구냐에 따라 시도 때도 없이 변하기 때문에 변질될 가능성이 많다는 약점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민주정치보다 더 좋은 정치는 없습니까?
어떤 사람은 공산주의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독재 정치여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지상의 정치 형태들 다시 말하면 사람이 주체가 되는 정치 형태는 다 불완전한 취약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가장 이상적인 정치는 없습니까? 바로 그것이 신본주의이며 신주정치입니다.
하나님이 나라의 주인이시며 권력의 수반이시며 왕이시라는 것을 믿는 사람들은 왕이 됐든, 총리가 됐든. 장관이든, 대신이든 못된 짓을 할 수도 없고 권력을 제멋대로 쓸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다윗은 그 진리를 아는 왕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을 "나의 왕, 나의 주"라고 노래한 것입니다. 다윗의 일생을 살펴보면 그리 순탄한 생애는 아니었습니다.
왕이 되기 전 10년 동안은 다윗이 왕 되는 것을 두려워한 사울왕이 다윗을 죽이기 위해 통치는 제쳐놓고 다윗을 추격했습니다.
왕이 된 이후에는 대내외의 정적들로부터 숱한 도전을 받았습니다. 그뿐입니까? 노년에는 친아들 압살롬이 부왕을 몰아내고 왕이 되겠다며 구데타를 일으키고 아버지를 죽이기 위해 뒤를 좇았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위기에서도 쫓기는 망명생활 중에도 오직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시편 57편은 다윗이 사울왕의 추격을 피해 아둘람에 있는 굴에 피신해 있을 때 지은 시입니다.
위기, 절망, 비통 가운데서 읊은 시임에도 감사와 찬양으로 얽혀 있습니다. 그래서 주경학자들은 시편 57편을 "다윗의 역동적 감사 찬양시"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고난과 고통 속에서도 감사하고 찬송했다는 것입니다.
시편 57편 속에 들어있는 다윗의 고난을 살펴보겠습니다.
1절을 보면 "이 재앙이 지나기까지"라고 했고, 3절을 보면 "나를 삼키려는 자의 비방"이라고 했고, 4절에서는 "내 혼이 사자 중에 처하며 불사르는 자 중에 누웠으니"라고 했고, 6절에서는 "내 걸음을 장애 하려고 그물을 예비하였으니 내 영혼이 억울하도다 저희가 내 앞에 웅덩이를 팠다"고 했습니다.
재앙, 비방, 불같은 시험, 장애 공작, 웅덩이... 이런 것들이 다윗을 위협하고 공격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노래하고 찬송하리라고 했고(7절), 주께 감사하며 찬송하리이다(9절)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는가? 그는 고통불감증 환자였는가? 그 이유를 찾아보겠습니다.
1. 주의 날개 그늘아래 피했기 때문입니다.
1절을 보면 "내 영혼이 주께로 피하되 주의 날개 그늘아래서 이 재앙이 지나기까지 피하리이다"라고 했습니다. 날개는 보호와 안전을 의미합니다. 날개 중 가장 강한 날개는 독수리 날개입니다. 독수리는 날개로 새끼를 지키고 보호합니다. 그 날개아래 있는 한 새끼는 안전하고 평안합니다.
다윗은 위기와 절망 속에서 하나님의 날개를 생각했습니다. 가장 안전한 곳, 가장 평안한 곳은 주님의 날개 그늘아래라는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리고 주목할 것은 "이 재앙이 지나가지까지"라는 고백입니다. 재앙은 느리던 빠르던, 크든 적든 지나간다는 것입니다. 영원히 계속되거나 반복되는 재앙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실패할 수 있고, 불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영원히 계속되는 것은 아닙니다.
위에서 살핀대로 억울하고, 고통스럽고, 한심스럽고, 답답한 일들이 철장같이 앞을 가로막고 있지만 그러나 그런 것들은 지나가는 것들에 불과하다는 것을 다윗은 발견한 것입니다.
그린도전서 10:13을 보면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고통을 겪고 시험을 당하더라도 예수님 안에 있으면 그 시험과 고통은 때가 되면 물러갑니다. 주께서 그렇게 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누구의 그늘아래 있느냐에 따라 행불행이 결정됩니다. 같은 섬이라도 미국에 속한 섬들, 하와이, 사이판, 괌은 잘삽니다. 그러나 인도네시아에 속한 섬들은 못삽니다.
바울의 권면대로 "주께 붙어 있으면" 살고, 떨어지면 주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2. 마음을 정했기 때문입니다.
7절을 보면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라고 했습니다.
확정되었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나콘"입니다. 그 뜻은 고정되었다. 확고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두 번씩이나 확정되었고, 확정되었사오니 라고 고백한 것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기로 한 그 마음이 고정되었고 확고부동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3:14을 보면 바울이 디모데에게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도 확정과 확신이 필요합니다. 긴가 민가, 될까 안될까, 믿을까 말까, 할까 말까... 이런 태도는 흔들리는 태도이며 바로 서기 어려운 태도입니다.
열왕기상 18:21을 보면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시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 지니라"고 했습니다.
여호수아 24:15을 보면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만 섬기겠노라"고 했습니다.
신앙은 결단입니다. 확정하고 확신하고 결정하고 결단해야 합니다. 어떤 암도 조기 발견만 하면 고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때가 늦으면 치료가 어렵다고 합니다. 지금 확정해야 합니다. 지금 결단해야 합니다.
3. 감사하고 찬송했기 때문입니다.
7절을 보면 "노래하고 찬송하리이다"라고 했고, 8절에서는 "내 영광아 깰찌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찌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라고 했고, 9절에서는 "주께 감사하며 열방 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라고 했습니다.
비파와 수금에 맞춰 새벽에 열방이 듣도록 감사하며 찬송하겠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처한 상황은 비파를 타고 수금을 타며 노래 부르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언제 잡힐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위기와 절망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곳에서 감사를 찾았습니다. 거기서 노래했고, 그 악기를 연주했습니다. 그때 거기서 두 가지가 가능합니다.
원망하고 탄식하고 포기하고 절망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길은 더 어두워지고 상황은 더 어려워집니다. 그러나 감사하고 찬송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길이 열립니다. 주님의 도우심이 임합니다.
주의 날개 그늘아래 보호를 요청합시다. 더 이상 머뭇거리지말고 확정합시다. 힘들고 어려워도 감사합시다. 찬송합시다.
감사와 기도와 찬송은 옥문을 엽니다. 주님의 날개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 그늘아래서 편히 쉼을 얻읍시다. 그 날래 아래서 행복을 찾읍시다.
출처: 여호와닛시 글쓴이: 주님의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