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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궁극이
64편 9절-65편 1절.
64편 9절-10절: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여 하나님의 일을 선포하며 그 행하심을 깊이 생각하리로다 의인은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그에게 피하리니 마음이 정직한 자는 다 자랑하리로다.
65편. 다윗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
1절: 하나님이여, 찬송이 시온에서 주를 기다리오며 사람이 서원을 주께 이행하리이다.
64편.
9절: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여 하나님의 일을 선포하며 그 행하심을 깊이 생각하리로다.’ 모든 사람이 두려워한 것은 모든 사람이 악한 자들의 결과를 보았기 때문이다. 악한 자들의 업적과 이력과 사업과 그들의 정신과 사상을 알았고, 악한 자들처럼 하면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두려워한 거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두려워한 것은 자신들도 악한 자들과 같은 마음을 가질 수도 있었다는 점에서 두려워한 거고, 이렇게 되면 악한 자들과 손잡기 쉽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니 두려워한 거다.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을 당한 자들의 원인을 밝혀서 또 다시 하나님이 심판을 받지 않게 하려고 하나님의 일을 선포한다는 거다.
하나님의 일을 선포하는 자들이 악한 자들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면 왜 선포를 하겠느냐? 그리고 선포를 하는 것도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을 사람으로 되는 면으로 선포가 되어야지 말로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맙시다. 우리 회개합시다’ 라고 하면서 여전히 예수이름을 가지고 세상소원 목적으로 나간다면 하나님의 심판을 그대로 받게 되는 거다.
오늘날 기독교 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들인데, 회개를 강조는 하지만 일반 도덕적, 사회 윤리적 개념으로 회개를 외치는 교회가 많다. 즉 윤리 도덕적인 면에서 행동적으로 잘못한 것을 회개하면서도 구하는 것은 여전히 세상 것을 구하고 있다. 즉 세상 물질적으로 편하게 살고, 이웃을 사랑하고 이런 걸 구한다. 이건 회개도 아니고, 이런 걸 구하는 것은 속화된 신앙이다.
구약성경에 보면 거짓 선지자들이 세상을 가지라고 가르치면서 ‘평안하다. 평안하다’ 라고 했는데, 하나님의 백성이 세상을 구하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겠느냐? 오히려 심판의 대상이 되는 것인데, 세상을 가지라고 하면서 심판이 안 오니 평안하다고 말을 하면 평안해지는 거냐? 오늘날 세상 속화된 기독교인들이 이런 것을 지나간 하나의 역사로만 알고 있을 뿐 여전히 그런 것을 구하고 있다.
계:의 일곱 교회 중에 마지막 교회인 라오디게아 교회가 물질의 풍부성을 자랑했는데, 예수님께서 이 라오디게아 교회를 보시고 ‘헐벗고 굶주렸다. 불쌍하고 처절하다’ 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 안에서 거짓되고 악한 목자들이 이것을 똑똑히 보면서도 교회를 여전히 그렇게 끌고 가고 있다.
구약 때에 이스라엘이 40년 동안의 광야교회 생활을 마치고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갈 때 힘도 세고 이름도 날리던 바산 왕 옥이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나왔다. 이들은 전문적으로 우상을 섬겼는데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앞세워서 당신의 만능의 능력으로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다 죽여 버렸다. 이로 인해 바산 왕 옥이 다스리던 60 성읍이 이스라엘에게 정복이 되어 므낫세 반 지파의 소유로 주어지게 되었다.
이것을 영적인 면으로 보면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 광야교회 생활을 하면서 영능이 실력을 닦아서 우상을 섬기는 사상을 다 죽이라는 말씀이다. 지금 주님을 안 믿고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이 천국을 구하느라고 우상을 섬기는 거냐, 세상 일이 잘 되게 하느라고 우상을 섬기는 거냐? 후자다. 그러니까 구약시대에 하나님께서 우상을 섬기는 족속들을 다 죽여 버리라고 했듯이 우상을 섬기는 사상을, 그 소원 목적성을 다 죽여 버리라는 거다.
예수를 믿으라고 하는 것은 우상을 섬기는 사상을 죽이고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을 집어넣으라는 거다. 이걸 살려둔 채로는 예수 바로 못 믿는다. 따라서 교회에서는 성도들 속에 우상을 섬기는 사상이 잘 되도록 바람을 집어넣거나 그 사상을 알아주면 안 된다. 종교계에서 아무리 유명한 사람일지라도 그가 가진 우상을 섬기는 사상은 죽여라. 이런 건 다 예수 믿는 너희들의 밥거리다. 교회에서 이런 사상을 죽일 수 있는 것은 복음사상 하나밖에 없다. 하나님의 온전을 닮아가는 이거 하나밖에 없다.
영원 전 그리스도 안에서 설정된 인간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대로 해 나가는 구원운동, 복음운동의 진행을 막는 자가 누구냐? 이 운동을 막는 자는 가차 없이 죽여라. 복음의 정신 사상이 바로 이런 거다. 그래서 우리는 정신을 바싹 차려야 한다. 일가친척 부모형제라도 복음운동을 방해한다면 만능의 능력의 하나님께서 어떻게 처단하시나를 봐라.
복음의 정신은 일반적인 사고방식이 아니다. 진리의 정신이 뚜렷해야 하나님의 역사가 있는 거다. 전쟁이 일어났을 때 전쟁터에 나가는 사람이 벌벌 떤다면 어떻게 전쟁에서 이기겠느냐? 자기 때문에 다른 사람도 죽게 된다. 성경에 보면 이스라엘이 전쟁에 나갈 때 순종으로 죽음을 각오하고 나가니 하나님께서 돕지 않더냐? 왜 이 하나님을 못 믿느냐? 벌벌 떨면서 밥 한 끼 먹는 게 오래 사는 거냐? 신앙의 정신이 뭔지 알아라.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일반사람들처럼 돈을 버는 데는 아주 정신이 강하다. 그런데 신앙정신은 아주 물러 터졌다. 지혜도 없고, 조그만 사건에도 벌벌 떨고 있다. 중동지역에서 is가 싸우는 걸 봐라. 비록 악한 자들이지만 자기 몸에 폭탄을 두르고 적진으로 들어가지 않더냐? 우리 믿는 사람들은 바로 나가는 데 정신이 강해야 하고, 말씀을 선포하는 면에서도 인간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을 수 있는 말씀을 전해야 한다. 복음에 적중성의 말씀이 심판을 받지 않는 거지 어설프게 나가면 심판이다. 용납이 안 된다.
우리는 항상 복음에 적중성을 찾아 들어가야 한다. 생명 길로 자꾸 찾아 들어가야 한다. 이렇게 나가다가 ‘아차, 밖으로 나와있구나’ 하면 다시 또 본질을 찾아 들어가야 한다. 이와 같이 본질로 찾아 들어가는 신앙은 없고 신앙사상에 구별력 분별력이 없이 그냥 ‘예배당에 와서 예배를 드렸다’ 하는 식의 하나의 습관적인 신앙생활은 안 된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본질로 들어가면서 지혜지식에 명철한 자가 되어서 심판을 받지 않아야 하고, 또한 가르칠 때는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는 길로 가르치면 안 된다. ‘예수 믿고 복 받고 세상에서 잘 살아보자’ 하는 것은 사람을 심판 속으로 더 집어넣는 거다. 이것은 배나 더 악한 지옥자식으로 만들어 놓는 격이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세상과 세상에 속한 것을 가르치면 안 된다.
10절: ‘의인은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그에게 피하리니 마음이 정직한 자는 다 자랑하리로다.’ 의인이 누구 때문에 기쁘고 즐겁다고 하느냐? 여호와 하나님 때문에. 왜 그럴까? 여호와 하나님이 어떻게 했다는 거냐? 첫째로 여호와로 인해서 하나님께서 보시는 선과 악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악한 자들의 교활성을 알기 때문이다. 악한 것을 악한 것으로 보이지 않고 선하게 보이게 해서 사람을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것은 아주 교활한 거다. 기독교 안에도 이런 교활성이 있는데, 거짓 종들이 성경을 가지고 예배를 통해서, 기독교 제도를 통해서 교활성을 쓴다. 그 방편은 성경구절을 쓰면서 교인들의 목적관을 천국이 아닌 세상 쪽으로 바꾼다.
세 번째는 의인은 재앙을 미리 알고 여호와 하나님께 피하지만 악한 자는 심판 날에 심판을 받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여호와께 피한다는 것은 말씀 안으로 들어가는 걸 말한다. 즉 말씀을 붙잡은 신앙생활을 말한다. 말씀을 붙잡지 않고 진리이치를 다 내버리고 기도를 하면서 주먹을 꽉 쥐고 ‘여호와 하나님!!’ 이러면 여호와를 붙든 거냐? 학생들이 공부를 잘 해서 상을 타려면 뭘 붙들면 되느냐? 책을 붙들면 된다.
의인은 여호와께 피하는 고로 재앙을 미리 안다. 그러나 악인은 불타질 세상 속으로 자꾸 기어 들어가기 때문에 자기에게 심판이 닥쳐도 그 사실조차 모른 채 당하게 된다. 교회의 거짓 종들은 사는 길이라고 하면서 교인들을 소원 목적적으로 자꾸 세상 쪽으로, 물질 쪽으로 끌고 간다. 이건 심판의 길이다.
모세는 이스라엘을 애굽으로부터 자꾸 멀리 떼어놓는다. 몸만 아니라 마음 정신 소원 목적적으로 애굽으로부터 자꾸 떼어놓는다. 그러나 거짓 종들은 애굽 속으로 자꾸 끌고 들어간다. 지금으로 말하면 애굽의 정신을 가지고 애굽 안에서 예수를 믿으라고 한다. 애굽의 정신을 가지고 예수를 믿으면 이 사람은 어떤 소원 목적을 가지겠으며, 이 사람 속에 뭐가 건설이 되겠느냐? 애굽의 소원 목적을 가지게 되고, 애굽을 건설하게 된다. 한 마디로 애굽성을 가진 교회가 된다. 역사적으로 볼 때 교회가 이런 일이 얼마나 많았으며, 지금도 이런 일이 얼마나 많으냐?
‘마음이 정직한 자는 다 자랑하리로다.’ 마음이 정직한 자가 여호와를 자랑을 하는데, 이 자가 의인이다. 의인은 하나님의 일에 대한 선포를 듣고 깊이 생각을 하면서 하나님의 의사와 뜻대로 정직하게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자랑하게 되는 거다. 그러니까 의인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을 하니 영능의 실력이 되고, 모든 유혹과 미혹과 환난 시험을 이기고, 모든 심판을 다 피하게 된 것이 여호와로 인하여 된 것으로 알고 영원히 여호와를 찬앙하게 되는 거다. ‘마음이 정직한 자는 다 자랑하리로다’ 라고 하는 것은 이 경험을 하고 승리를 했기 때문에 여호와를 자랑하게 된다는 거다.
65편. 다윗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
시라고 해서 다 같은 시가 아니다. 일반적인 시는 일반적으로 그 의미가 깊은 것들이 많다. 사람의 생각을 어떤 무생물을 의인화해서 표현하기도 하는데, 신앙의 시는 그런 개념이 아니다. 교회에서 청년들이 문학의 밤이니 예술의 밤이니 해서 시를 써서 낭송을 하는데, 이런 것은 다윗의 시와 같은 게 아니다. 착각하기 쉽다. 이런 시들은 사람의 마음을 뺏어서 육적인 쪽으로 끌고 가지만 다윗의 시를 읽으면 우리의 마음이 육 쪽으로 들어가느냐? 그렇지 않다.
선악과 따먹은 지식에서 나온 시가 있고, 생명과 따먹은 지식에서 나온 시가 있는데, 다윗의 시는 믿는 우리 전체에게 주는 특별계시가 들어있는 시다. 반면에 일반적인 시는 특별계시가 아니라 일반계시에 불과한 거다. 그것도 우리 입장에서 보니 그렇게 보는 거지 일반사람들은 일반계시를 아느냐? 모른다.
다윗의 시는 다윗이 평소에 성령님에게 크게 감화 감동을 받아서 그 신앙정신 사상에서 성령님의 지휘와 인도로 쓴 노래의 시로서, 이 안에는 우리의 이룰구원의 이치가 들어있다. 그리고 다윗의 시가 성경에 기록이 된 것도 성령의 기록영감의 감화로 된 거다. 그래서 다윗의 시는 안 믿는 사람들의 시나, 예수 믿는 사람들이 감정을 짜내서 지은 시와는 전혀 다른 거다.
내가 매 주마다 보내주는 성경공부 문제를 받아보는 뇌성마비 장애인을 언젠가 찾아갔는데, 이 사람이 문제에 대한 답을 아주 잘 적어서 나에게 보내주곤 했다. 그런데 가서 말을 들어보니까 가만히 있으면 하늘로부터 자기에게 시를 쓰라고 가르쳐 준다고 했다. 그래서 그런 짓 하지 말고 시를 쓰고 싶으면 성경을 많이 읽고 우리가 부르는 진리성가의 내용처럼 쓰라고 했다. 그런데도 아마 지금까지도 계속 그런 씨를 쓰고 있는 것으로 안다.
이 분만 아니라 오늘날 기독교 안에 시인들이나 복음성가를 부르는 사람이 많은데, 이들 중에는 다윗이 성령의 감동으로 시를 읆은 것처럼 자기도 그런 것으로 착각하는 자들이 많다. 옛사람이 주격이 된 자기의 주관적 이성을 가지고 여기에서 나오는 생각과 느낌과 감정으로 지은 노래와 시는 평소의 자기의 신앙사상도 아니고, 생명 길 좁은 길을 걸으면서 나온 시도 아닌 넓은 길 사망 길로 걸어가면서 나온 것인데도 이것이 다윗이 지은 시나 노래와 같은 것으로 알고 있다 그 말이다. 이런 것에는 구원의 이치도 없고 특별계시도 아니기 때문에 이런 것을 다윗의 시처럼 착각을 하면 안 된다.
OOO집사님이 온양에 있을 때, OOO집사님이 나가던 천안의 ‘OO선교회’ 라는 곳에 우리교회 집사님 몇 분과 함께 가서 설교를 한 적이 있는데, 그 모임은 회원들이 각자 살면서 교회도 각자 나가면서 주일날 한 번씩 모여서 장애인들과 예배를 드리고, 매 달마다 행사의 계획을 짜서 어디에 놀러도 가고 뭔가를 배우기도 한다는데, 이 일을 돕는 봉사자도 있고, 후원금을 내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나는 이 분들에게 진리신앙의 길을 걸으면서 살기를 바라고 간 건데, 이런 것에는 마음이 없고 자기들이 하는 것이 복음인 것으로 생각을 하면서 그런 일을 더 크게 하려는 생각뿐인 것으로 보였다.
1절: ‘하나님이여, 찬송이 시온에서 주를 기다리오며 사람이 서원을 주께 이행하리이다.’ 찬송이 어떻게 시온에서 주를 기다리며, 사람이 어떻게 주께 소원을 하게 되느냐? 시온은 지형적 역사적으로 보면 이스라엘 열두 지파가 가나안 땅을 차지하기 전에 여부스 족속의 마을로서 요새화된 성이었다. 그런데 이곳을 다윗이 점령을 해서 빼앗았다. 후에 이곳에 솔로몬이 성전을 세웠다. 이 시온성은 우리를 깨닫게 해 주는 상징적인 의미들이 많다.
성경에 보면 시온성은 하나님의 왕국이요, 영원한 도성이요, 이스라엘 자손의 기업이요, 영원한 축복의 장소요, 복음의 출처요, 온 세계가 즐거워하는 성이요, 영광의 시온산이요, 십사만 사천이 섰는 산이요, 이 외에도 많다. 그런데 여기에서 찬송이 주를 기다린다고 한다.
그러면 이 찬송은 누가 부르는 거냐? 사람이 부르는 거다. 어떤 사람이냐? 본문에서 찬송하는 사람을 그냥 믿는 사람이라고만 할 게 아니다. 찬송은 구원 얻은 성도들이 부르는 거다. 왜 부르는 거냐? 구원 얻은 증거가 있기 때문이고, 구원을 얻고 보니 즐거워서 기뻐서 부르는 거다. 이 찬송은 교회의 찬양대가 식순에 따라 부르는 것과 같은 게 아니다. 구원 얻은 감사와 감화 감동에서 자연스레 나오는 찬송이다. 주 하나님의 구원을 맛보고 아는 자가 부르는 찬송이다.
그러면 무엇이 구원이냐? 구원의 의미가 많다. 죄에서 구원이요, 불타질 세상에서 건지는 구원이요, 죽고 썩고 없어질 것에서 구원이요, 걱정 근심과 눈물과 고통과 한숨에서 구원이요, 나그네 세상에서 헛 살고 가지 않도록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으로 만들어지는 구원이요,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의 백성이 된 구원이요, 신령천국에 가는 것과 그곳을 누리는 구원이요, 심판과 멸망을 피할 수 있으니 이것도 구원이요, 기본구원을 얻고 성화구원을 입어 영능의 실력이 되는 것도 구원이다.
자기가 출생을 할 때 가지고 나온 일반적인 성격과 성질이 아무리 좋을지라도 이건 버리고 예수님의 것으로 바꿔라. 이룰구원 성화구원에서 자기 기존의 것을 바꿔야 한다. 자기 성격이 아무리 좋아도 바꿔야 한다. 왜 그러냐? 세상사람들이 자기의 성격을 다 좋다고 할지라도 그 성격은 세상환경이 바뀌면 거기에 따라 움직이고 바람을 타게 되어있다. 그래서 이런 일반사람들의 성격을 일반적으로 좋게 하려면 돈도 풍부하고, 먹을 것도 많고, 애먹이는 사람도 없고, 자기 마음대로 살도록 하면 되겠지만, 그러면 이런 성격 성질을 가지고 천국에 들어가느냐? 못 들어간다. 이런 성격 성질은 다 버리고 하나님의 아가페적 사랑의 성품을 집어넣어야 이걸 가지고 천국에 들어가는 거다. 그래서 인간의 기존적인 성격 성질을 버리고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으로 고치고 바꾸라고 성도가 세상에 살 동안에 여러 가지 사건 환경의 파도를 밀어 넣는 거다.
이런 말을 이론적으로 얼마든지 할 수 있다. 그러나 말로만 아니라 자기의 속을 하나님의 속성으로 고치고 바꿔야 한다. 이게 이룰구원 성화구원이다. 그래서 알고 보면 하나님께서 어련히 자기를 아시고 사건 환경을 주어서 고치게 하려는 것이니 사건 환경이 싫다고 원망불평하지 말고 감사함으로 받으면서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한다.
자기 마음에 좋은 사건 환경이 왔을 때 좋아하는 건 누구나 다 할 수 있다. 그러나 어려운 가운데서도 여호와 하나님께 마음을 두고 그 사건을 믿음으로 이겨나가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를 않다. 더 나아가서 사건 환경을 거치면서 그 가운데서 말씀을 따라가면서 자기가 하나님의 성품으로 만들어지는 것을 믿으며 ‘예수를 믿으니 이렇게 좋구나. 어려운 가운데서도 내가 여호와 하나님께 마음을 두고 기도를 할 수 있으니 참 좋구나’ 이런 사람은 더욱 더 드물다.
자기가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으로 실상화 되어간다면 믿는 사람으로서 어찌 감사의 노래가 안 나오겠느냐? 이런 구원을 찬송할 자들이 어디서 기다린다고 하느냐? 시온에서. 그러니까 고차원적인 구원을 얻어서 찬송을 할 자들만 시온성으로 들어가는 거다. ‘예수 믿으면 다 들어간다’ 이런 의미가 아니라, 물론 예수를 믿으면 다 천국에 들어가기는 하는데, 마치 고등학생이 공부를 잘 하면 제일 낫다고 하는 서울대학교에 들어가고, 그렇지 못하면 지방의 대학에 들어가듯이 이룰구원 면에서 영능의 실력자에게 더 차원 높은 대우를 해 주기 때문에 시온성에서 이에 대한 찬송을 부르는 자들을 기다린다는 거다.
고차원적인 성품적, 인격적, 영능의 실력적인 면에서 이룰구원을 잘 이룬 이 구원은 주로 말미암은 것인데, 이런 자들이 시온에서 주를 기다린다고 하는 것이니 이곳은 아무나 들어가는 게 아니요, 그곳에 들어간 자들은 찬송을 하기 위한 목적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라 속이 잘 익은 과일처럼 이룰구원 성화구원을 잘 이루고 이를 감사 찬송할 자들만 시온으로 들어간다는 거다.
그러면 어떤 자들이 이곳에 들어가느냐? 첫째는 영능의 실력은 나중으로 치더라도 주님으로부터 기본구원을 입어야 시온에 들어갈 자격이 주어진다. 이 기본구원을 얻은 것만 해도 우리가 주께 영원히 감사와 찬송을 드릴만 하다. 다음으로 성도의 성화구원 역시 주의 성령으로 된 것이니 이에 대해서도 감사 찬송을 드리게 된다. 그런데 본 절에서 찬송을 부를 자들이 시온에서 주를 기다린다고 하는 것은 성화구원을 얻은 자들을 말함인데, 이들은 시온에서 주를 만나면 찬송이 곧바로 튀어나올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졌다는 거다.
우리 궁극교회 교인들은 궁극적인 신앙을 아는 것만 해도 앉으나 서나 찬송이 나오느냐? 밥을 할 때나 일을 할 때나 입속으로 흥얼거려지느냐? 그런다면 이것도 기도다. 왜냐? 그만큼 주님과 인격적 결합이 진하게 된 데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찬송은 그냥 나오는 게 아니라 자기가 깨닫고 만들어진 것이 자기 속에서 증거가 되기 때문에 나오는 거다.
‘사람이 서원을 주께 이행하리이다.’ 여기서 서원을 이행한다는 것은 무슨 물질에 대한 약속이나, 무슨 시간이나, 무슨 일을 이뤄놓겠다는 약속을 이행하겠다는 서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구원의 은혜를 기본으로 주셨으니 이제는 하나님 앞에 성화구원을 이루면서 살겠다고 하는 신앙의 결심을 다짐하는 서원이다. 인간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아는 사람은 구원을 이뤄가는 신앙을 갖게 되는데,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하나님께서 인간 자기를 만드신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모르는 자들이 허다하다. 목사님들 세계에도 많다.
서원을 이행한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얼마를 바치겠습니다’ 라고 서원을 한 후에 이것을 지킨다는 의미가 아니라 시온의 백성이 된 자가 신령천국에서 자기에게 펼쳐질 꿈을 앉고 현실에서 영능의 실력을 닦는 것이 서원을 이행하는 거다. 다시 말하면 인간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의 사람으로 바로 만들어지는 것이 서원을 이행하는 거다.
믿는 사람이 세상에 살면서 어떤 핍박과 환난을 만나더라도, 유혹과 미혹이 있더라도 말씀대로 순종하며 사는 것이 자기의 서원을 이행하는 거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게 자기의 서원을 이행하는 거다. 믿는 사람이 하나님을 영영히 찬송하며 할 서원은 말씀을 깨달아 가면서 만들어지는 이 서원밖에 더 있느냐? 그런데 이게 아니라 자꾸 물질적인 면으로 약속을 하게 하고, 그것을 꼭 이행하라고 하는 것은 본 절의 말씀의 각도와는 다른 거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