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성, 백양사의 설경
눈은 소리 없이 산을 덮고 있었다.
백암산 자락으로 들어서는 길목에서부터 세상은 이미 말수가 적어졌다. 발밑에서 눈이 눌리는 소리만이 나를 이끌었다. 바람조차 숨을 고른 듯, 나뭇가지 위에 내려앉은 흰 숨결들이 그대로 멈춰 있었다. 겨울의 백양사는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충분한 풍경으로 나를 맞았다.
사찰로 향하는 길은 유난히 고요했다. 계곡 위로 놓인 작은 다리에는 사람의 발자국보다 눈의 시간이 먼저 쌓여 있었다. 흐르던 물도 잠시 말을 멈춘 듯 얼음 아래에서만 미세하게 숨을 쉬고 있었다. 겨울은 언제나 이렇게, 세상의 속도를 낮춘다. 급하던 마음도, 복잡하던 생각도 이곳에선 자연스럽게 걸음을 늦춘다.
눈 덮인 나무들이 길 양옆에 서 있었다. 가지마다 내려앉은 눈은 마치 오래된 서예의 획처럼 굵고 단정했다. 검은 가지 위에 얹힌 흰 여백은 수묵화 한 폭 같았다. 산은 아무 말 없이 붓을 들고, 눈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자연의 필치는 늘 단정하면서도 깊다.
백양사 경내에 들어서자 고요는 더 짙어졌다. 기와지붕 위에 쌓인 눈은 시간을 포개어 놓은 듯했다. 수백 년의 바람과 기도 위에 다시 한 겹의 겨울이 내려앉은 것이다. 눈은 오래된 것들을 덮어 숨기기보다, 오히려 더 선명하게 드러낸다. 군더더기를 지우고 본질만 남긴다.
대웅전 앞마당은 온통 흰빛이었다. 발자국 하나 남기기 조심스러울 만큼 고운 설경이었다. 그 앞에 서자 괜히 숨을 낮추게 된다. 이곳에서는 말보다 침묵이 더 어울리고, 질문보다 바라봄이 먼저다. 눈은 세상에 말을 걸지 않는다. 다만 오래 바라보게 할 뿐이다.
나무들은 잎을 모두 내려놓은 채 서 있었다. 비워낸 자리 위에 눈을 받아들인 모습이 오히려 단정했다.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내려놓은 것임을 나무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겨울의 나무는 초라하지 않다. 눈을 품은 가지들은 말없이도 충분히 단단해 보였다.
백양사의 겨울은 화려하지 않다. 대신 오래 머문다. 붉은 단풍으로 이름난 절이지만, 눈 내린 날의 백양사는 전혀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색을 내려놓은 자리에서야 비로소 절의 깊이가 드러난다. 사찰은 자연과 다투지 않고, 자연의 속도로 늙어간다.
돌계단을 오르며 잠시 발을 멈췄다. 눈 위에 찍힌 내 발자국이 금세 흐려진다. 사람의 흔적은 이렇게 쉽게 사라지는데, 산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순간, 나 자신도 이 풍경 속에 잠시 스쳤다 사라질 존재임을 깨닫는다. 그 사실이 이상하게도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눈은 모든 소리를 흡수한다. 그래서 이곳에서는 생각조차 낮은 음으로 흐른다. 그동안 마음속에 쌓아두었던 말들이 하나둘 정리된다. 꼭 필요하지 않은 말들은 눈처럼 녹아 사라지고, 남은 것들만 조용히 가슴에 머문다.
백양사의 설경은 위로하지 않는다. 다만 곁에 서 준다. 말없이 함께 있는 존재가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이곳에서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다. 자연은 늘 그렇게 곁을 내어준다. 인간이 알아차릴 때까지 묵묵히 기다릴 뿐이다.
사찰 뒤편 숲길에 서서 다시 한 번 산을 올려다보았다. 눈을 이고 선 나무들이 서로 기대며 서 있었다. 혼자 서 있는 나무는 없었다. 겨울을 견디는 방식은 늘 함께였다. 백양사의 산은 그렇게 서로를 지탱하며 겨울을 건너고 있었다.
돌아오는 길, 뒤돌아보지 않아도 풍경은 마음에 남아 있었다. 사진으로 담지 않아도 되는 풍경이 있다는 것을, 백양사의 겨울이 가르쳐 주었다. 오래 남는 것은 늘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었다.
눈은 다시 천천히 내리고 있었다. 오늘의 백양사는 내일의 백양사와 또 다를 것이다. 그러나 그 고요만은 변하지 않으리라. 세상의 소음에서 한 발 물러나고 싶을 때, 말없이 마음을 쉬고 싶을 때, 백양사의 설경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을 것이다.
나는 그저 잠시 다녀왔을 뿐이다.
산과 절과 눈은, 오늘도 그 자리에 남아 또 하나의 겨울을 쌓고 있다.